거인을 바라보다 - 우리가 모르는 고래의 삶
엘린 켈지 지음, 황근하 옮김 / 양철북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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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라고 하면 무엇을 떠올릴까?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서 에이허브 선장과 사투를 벌였던 고래를 떠올릴 사람도 있겠고 우리 영화나 노래 「고래 사냥」에서 젊은이들의 자유나 이상과 희망 같은 존재였던 고래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또 어쩌면 고래 고기나 포경 수술 같은 것을 떠올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고래는 상당히 독특한 생명체다. 고래는 바다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포유동물이다.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우고 숨을 쉬기 위해 물 위로 나와야 하는 물속에 사는 동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거대한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거인의 모습과는 달리 고래의 면면은 베일에 싸여 있다. 우리가 모르는 고래의 삶, 엘린 켈지는 『거인을 바라보다』에서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고래 연구가들의 인터뷰를 기반으로 우리가 알 수 없었던 고래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런 고래의 삶이 어떤 부분에서는 인간과 매우 닮아 있음을 알려준다.

고래를 이야기할 때 빼먹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가 바로 ‘모성’이다. 위험에 바로 노출된 바다에서 새끼를 낳아 키우는 어미 고래는 새끼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다. 쇠고래의 경우 2년에 한 번씩 긴 임신 기간을 거쳐 새끼를 낳고 지느러미로 새끼를 품어 안아 보살핀다. 이처럼 쇠고래 새끼는 어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배운다. 하지만 이런 쇠고래에게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식을 가르치고자 하는 또 다른 고래, 범고래다. 범고래는 자신의 새끼들이 쇠고래 새끼들을 사냥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또한 고래는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특히 돌고래가 더욱 뛰어난데 병코돌고래의 경우 자신만의 특정한 소리인 휘파람으로 자신의 이름을 만든다. 또한 혹등고래의 뇌에서 발견되는 방추신경세포는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게다가 친인척이 아닌 개체들과 사회적 유대를 갖고 함께 행동―이런 계약 관계는 번식기가 되면 깨어지고 서로 경쟁 관계에 돌입한다고 한다―을 한다고 하니 돌고래들이 인간처럼 또 다른 사회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래는 이런 삶을 살다 죽은 후에는 각종 해양 생물에게 오아시스의 사막처럼 양분 공급처가 된다. 상어들이 죽은 고래의 부드러운 부분을 먹고 연체동물이나 갑각류 같은 것들이 2년여에 걸쳐 나머지를 섭취하고 뼈만 남겨둔다. 그리고 송장벌레들이 마지막 남은 뼈마저 없앤다. 거대한 고래의 경우 이 시간이 70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거인에 어울리는 죽음이다.

현재 고래는 인간들의 무분별한 포획과 가혹한 환경 등으로 멸종 위기에 쳐했다고 한다. 뒤늦게 포경 금지를 하고 고래의 개체수를 늘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한다. 거대한 바다 속에서 사는 거인들, 고래의 삶은 그 몸집처럼 거대해 보이지만 인간처럼 때로는 기쁘고 힘들고 바쁜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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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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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과 ‘수학’은 나랑 별로 친한 단어가 아니다. ‘로지코믹스’의 ‘로직(logic)’과도 별다르지 않다. 러셀에 관해서라면 그의 이름자와 함께 전쟁과 핵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인 영국인 사상가 정도라는 것밖에 모르며, 나의 수학은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더라면 숫자의 세계도 언어의 세계만큼 아름다운 시라는 것을 알았을 테고 덜 지긋지긋했을 텐데 하는 뒤늦은 후회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언어로 이루어져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수많은 주관식 문제들에서 정답은 언제나 좀더 커다란 권력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말 한마디라는 것을 알게 될 만큼 나이가 든 후에는 빼도 박도 못하는 숫자, 계산, 객관 같은 것들이 애틋해졌다. 논리에 관해서도, 나는 언제나 객관적인 가치 판단에(‘가치’와 ‘객관’의 조합이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의거하여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하지만, 언제든지 감정적으로 돌변하여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는 코믹스(comix)와는 아주 친하다. 『로지코믹스』를 읽게 된 것은 나랑 친한 코믹스를 통해 러셀과는 안면을 트고 그동안 격조했던 수학이나 논리와는 더 친해지고 싶어서다.

『로지코믹스』는 20세기 최고의 지성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수학, 논리학, 철학, 사회학, 문학 등 다방면에서 폭넓게 활동한 버트런드 러셀을 가리키는 그 빛나는 명함들 가운데 논리적으로 완전무결한 수학의 토대를 찾아 나선 수학자이자 논리학자로서의 생애를 부각하고 있다.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의 의도대로 ‘학습 만화’가 아니라 ‘이야기 만화’인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이야기가 교차되어 진행되면서 서로를 보완해 준다. 먼저 이 만화책의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로지코믹스』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들의 『로지코믹스』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것을 반대하는 미국 고립주의자들에게 ‘인간사에서 논리의 역할’을 전하는 러셀의 강연을 액자 형식으로 품는다. 그 강연에서 러셀은 수학을 완벽하게 지탱하는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당대에 그와 함께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논쟁을 벌인 수학자들과 논리학자들의 이야기까지 더불어 들려준다.

러셀이 수학에 매혹됐던 것은 그가 성장한 펨브로크로지 저택의 미스터리, 완고한 할머니의 이해할 수 없는 규칙들, 비극적인 가족사, 부모의 비밀, 집안의 정신병 같은 비합리적인 온갖 의문투성이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은신처였기 때문이다. 광기(그를 평생 지배한 트라우마)가 스며들 여지조차 없을 것 같은 이성과 합리성의 굳건한 성채 안에서 러셀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사를 모두 수학으로 모순 없이 명확하고 진실되게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는 절대적인 앎의 세계를 꿈꾸지만, 그곳에서 ‘공리’에 부딪치고 만다. 증명할 수 없는 진리, 그리하여 증명되지 않은 진리를 토대로 삼은 증명은 얼마나 무의미한가.

견고하다고 믿었던 수학의 토대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러셀은 논리적으로 완전무결한 수학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논리학을 선택한다.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의 추론계산법, 고틀로프 프레게의 개념표기법, 게오르크 칸토어의 무한과 집합론 등을 거쳐 러셀은 ‘러셀의 역설’에 이른다. 하지만 이 역설은 수학의 토대를 마련하기는커녕 논리학과 집합론을 동시에 붕괴시킨다. 이 붕괴를 막기 위해 앨프리드 화이트헤드와 끊임없이 전제를 의심하면서 공동 집필한 것이 미완성 『수학 원리』다. 하지만 러셀은 “역설 없는 논리학을 구성해서 수학을 지탱하려고 애썼는데, 결국 그들이 성취한 것은 아래로 한없이 이어지는 거북들(우주를 떠받치는 신화 속 거북)의 탑이었다”고 고백한다.

사실 이 책에도 적혀 있듯이 논리는 “아는 것들을 결합해서 모르는 것에 도달하는 기술”에 불과하다. 아는 것들을 결합해 모르는 것에 도달하는 순간, 그 모르는 것은 아는 것들에 포함된다. 이런 반복은 무한히 이어질 것이고, 어쨌든 진리는 그만큼 인간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저만치 멀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은 언어의 공허한 형식일 뿐 실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을 전부 다 알아도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세계를 의미를 이해하려면 세계 밖으로 한 걸음 나가야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말했고, 쿠르트 괴델은 “답이 없는 질문이 항상 존재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러셀의 강연 결론처럼 “논리학과 수학에서도 이성적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면 복잡하고 어지러운 인간사에서는 더 말할 것이 있을까.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막론하고 인간사에서 완벽한 이성적 확실성에 이르기는 정녕 불가능하다”.

여기까지가 낯선 이름, 낯선 생각, 낯선 개념 들 사이를 흥미롭게 헤매며 겨우겨우 잡아낸 이야기의 얼개다. 여기에 빠진 것이 있다면 바로 그들을 ‘광기’에 가둔 ‘열정’이다.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는 ‘사람’과 ‘열정’이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고 거듭 강조한다. 낯설고 어려운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완전무결한 진리의 세계를 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맹진하는 사람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모험소설과 다르지 않다.

아이스킬로스의 고대 비극 「오레스테이아」가 모순 덩어리인 삶을 독자와 논리학자 들 앞에 던져놓는다. 아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살해한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죽여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오레스테스의 누이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아가멤논에게 딸을 대신해 죽음의 복수를 했는데? 아가멤논 살해에 가담한 아이기스토스는 자신의 형제들을 죽인 아트레우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들인 아가멤논을 대신 죽였는데? 아트레우스는 자신의 아내와 간통한 티에스테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 자식들을 대신 죽였는데? 여신 아테나는 오레스테스 집안에 깊이 뿌리박힌 비합리적인 복수와 살인의 비극적인 딜레마를 종식시키기 위해, 결국 어머니를 죽여 아버지의 복수를 한 오레스테스의 유죄와 무죄를 아테네 배심원들의 민주적 투표에 맡긴다. 전혀 신답지 않은 행동이지만 아테나는 비합리적인 비극에 대해 합리적인 이성으로 맞선 것이다.

러셀의 말처럼 모든 인간사에서 이성적 확실성과 절대적인 합리성에 완벽하게 이르기는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일마저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모순투성이 삶에서 정답은 없다. 선택은 언제나 자신의 삶을 무한한 색깔로 살아가는 각 개인의 몫일 뿐이다. 그 선택에서 합리적인 이성, 혹은 비합리적인 감성 어느 쪽에 무게를 둬야 할지는 “책임, 정의, 선악을 느끼는 감각”에 기대어 현명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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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예술을 꿈꾸다 - 상자유와 방황의 야누스 예술과 생활 4
쉬레이 지음, 이영주 옮김 / 시그마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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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랗게 탁 트인 하늘을 마음껏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올려다보며 부러운 마음이 한 번도 들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어디, 사람뿐일까. 대지에 맞닿아 살아가는 모든 동물들에게는 지구의 중력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게 되는 순간이 수시로 찾아올 것이다. 원숭이가 어쩌다 나무에서 떨어질 때, 닭 쫓던 개가 지붕만 쳐다봐야 할 때, 생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고 싶을 때, 하룻강아지가 호랑이에게 반격하고 싶을 때, 새우가 고래 싸움에 잘못 끼어들었을 때, 개구리가 깊은 우물 안에 갇혔을 때…… ‘날개만 있었더라면’이라는 바람은 더욱 간절해진다. 날개만 있다면 땅에 들붙어서는 불가능했던 꿈도 너무나 편리하게 가능해진다.

비행의 꿈은 날개가 없는 이 땅의 모든 것들이 영원히 꿈꾸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그 꿈의 프리즘을 통해 단 한 번도 나의 자연스러운 공간으로 온전히 가져보지 못한 하늘과 허공을 자유롭게 누빈다. 쉬레이가 엮은 『비행, 예술을 꿈꾸다』에는 비행과 날개를 향한 꿈의 모든 파편들이 혼재되어 있다. 생텍쥐페리부터 천사와 악마, 도교의 우인(羽人),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카로스, 하늘을 나는 양탄자,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의 하늘을 나는 천공의 섬 라퓨타, 이탈로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 자크 앙리 라르티그의 사진, 『서유기』의 손오공, 연날리기까지 비행과 날개라는 프리즘이 굴절시키는 꿈들의 환상적인 이미지는 이토록 다채롭게 변주된다.

불멸의 어린 왕자를 탄생시킨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지구별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한 사람이지만 비행 자체를 사랑한 비행사이기도 했다. 전쟁(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우편 비행사로, 전쟁 중에는 전투기 조종사로 하늘을 누볐다. 그 비행에 대한 열정적인 경험이 『인간의 대지』, 『야간 비행』, 『남방 우편기』에 아름답게, 강렬하게, 치열하게, 고결하게, 사랑스럽게 녹아 있다. 비행으로 인간의 마음을 생텍쥐페리만큼 뒤흔든 사람은 없었다.

그의 실종사로 이어진 마지막 비행조차 신비스럽기 그지없는데, 그는 1944년 7월 31일 전쟁 중 마지막 정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비행에 나섰다가 하늘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프랑스 남부 상공에서 항공 촬영 임무 수행 중. 아직 귀대하지 않음.”이라는 짤막한 비행 기록과 “나는 죽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정말로 죽는 것은 아니야.”라는 동화만 남긴 채 말이다. 생텍쥐페리가 사라진 그날 아침에 독일군이 그가 비행했던 지역에서 단 한 대의 비행기도 격추하지 않았다는 공식 기록에 의하면 그의 실종은 더욱 불가사의하다. 게다가 비행기의 추락에 따른 잔해도 줄곧 발견되지 않아 생텍쥐페리의 죽음을 둘러싼 전설만 무성해졌다. 이 책에는 장 폴 마리의 「생텍쥐페리의 마지막 비행」이라는 인상적인 글이 실려 있는데, 1998년에 생텍쥐페리의 팔찌가 발견됐고 2003년에 그가 마지막으로 탔던 비행기의 잔해 일부가 인양됐다고 한다.

결국 어린 왕자처럼 자신의 별로 돌아간 줄 알았던 생텍쥐페리는 추락을 했던 것이다. 쉬레이는 비행의 이중성에 대해 말한다. “무거움과 가벼움, 생과 사, 자유와 속박, 이승과 저승, 쾌락과 우울……” 하늘로 날아올라도 언젠가는 다시 땅으로 내려앉아야 한다. 영원히 하늘에 머물 수는 없다. 비행기가 아무리 높이 비상해도 연료가 바닥나기 전에 땅에 착륙하지 않으면 추락이 예정되어 있다. 두 날개를 가진 새조차도 그 날개를 쉬어 가기 위해 발 딛을 땅을 찾아야 한다. 생텍쥐페리도 날아올랐으니 내려앉았을 뿐이다. 하지만 대지로 내려앉은 것은 무거운 육신일 뿐, 그의 영혼은 새털같이 가볍게 더욱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고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끈질기게 비행을 꿈꾼 인물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지만 조각가, 건축가, 음악가, 해부학자, 수학자, 식물학자, 과학자, 천문학자, 무기 기술자 등 다재다능한 그의 천재성을 수식하는 말은 수없이 많다. 무엇보다도 그는 탁월한 발명가였는데, 그가 평생 매달린 발명품은 바로 날개였다. 「비행은 영혼의 일이다」에서 타오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날개에 대해 이야기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비행의 꿈을 이루기 위해 새의 날개에 집중한다. 그는 진정한 비행은, 비행기 같은 비행기구를 이용한 기계 비행이 아니라 새처럼 두 날개를 펄럭여 공기를 유연하게 가르며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타오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인공 날개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지만, 만약 비행기 제작에 힘썼더라면 라이트 형제 이전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실패 요인을 본능과 모방의 차이에서 찾는다. 원래 날개가 있으니 날아야 하는 본능을 가진 새와는 달리, 날개 없이 태어난 인간에게는 새의 날갯짓을 모방하는 능력이 있을 뿐이다. 인간이 아무리 모방을 해도 궁극적으로 새의 비행 본능과 완벽하게 동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가 아니니까.

프랑스 사진작가 자크 앙리 라르티그의 흑백사진들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공중에 잠시 떠 있는 찰나를 포착한 사진을 즐겨 찍었다. 공중에 높이 떠 있는 공은 곧 땅으로 떨어질 테고, 계단에서 뜀박질을 하느라 잠시 두 발이 전부 허공에 뜬 사촌 여동생도 곧 안전하게 착지할 테고, 높은 다리에서 우산을 펼친 채 뛰어내리느라 잠시 허공에 머문 형도 곧 강물로 첨벙 떨어질 것이다. 그들이 모두 곧바로 추락할지라도 라르티그의 사진 속에서는 비상의 순간에 영원히 멈춰 있다.

인간은 기계의 힘으로 중력을 극복하기 전에도, 극복한 후에도 여전히 비행을 꿈꾼다. 비행기를 타면 하늘을 날며 자그마한 창으로 구름밭을 내다볼 수 있고 우주선을 타면 하늘 밖 달나라까지 여행할 수 있지만, 그런 물리적인 비행이 언제나 불가능을 꿈꾸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날개가 완성되어 인간이 새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다면 비행을 향한 꿈은 잦아들까. 어쩌면 비행의 불가능한 꿈은 영혼의 날개만이 이루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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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텐의 엘레오노르 - 중세 유럽을 지배한 매혹적인 여인
앨리슨 위어 지음, 곽재은 옮김 / 루비박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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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세계를 지배하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다’라는 말은 남성중심사회가 된 역사에서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여성들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항상 밝은 쪽이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현재도 물론 어느 정도는 통용될 수 있는 것 같지만―의 역사에서 여성이 도드라지게 활약한 것은 주로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정치의 희생양이 되거나 왕의 배후를 조종한 악명 높은 것이었을 경우가 많다. 중국의 미녀들과 전면에 등장한 여왕들을 보고 있노라면 여성들의 권력에 대한 욕망이나 야망 등이 남자와 전혀 다를 것 없으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치열하고 더 극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앨리슨 위어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중세를 지배한 에레오노르의 삶을 재조명한 이야기다.

12세기 유럽, 중세의 봉건 유럽에서 여성의 위치는 말 그대로 남성의 피지배자이자 정숙함의 표본이 되어야 했다. 귀족 가문이라 할지라도 여성이 교육을 받는 것은 드물었고 기껏해야 수도원에서의 신부수업이 전부였다. 이런 시대에서도 엘레오노르는 아버지 기욤 공작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똑똑하고 아름답게 성장했다. 그뿐만 아니라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왕실령보다 더 큰 영지를 물려받을 상속녀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와 결혼했지만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면서 구설수에 휘말린 그녀는 자의로 이혼한 후 루이 가의 라이벌이었던 앙주 가의 앙리와 재혼하게 된다. 이후 앙리는 전쟁을 통해 잉글랜드의 왕 헨리 2세가 되며 그녀의 영토 때문에 이후 백년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후 엘레오노르는 왕자들 간의 세력 다툼에도 개입하여 자신의 아들에게 남편을 공격하게 하여 결국 리처드 1세와 이후 존을 왕좌에 앉힌다. 이 리처드 1세가 바로 사자심왕 리처드였다.

과거의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정확하거나 자세한 사료들이 없기 때문에 현재의 평가는 사람에 따라 엇갈리게 마련이다. 악명 높았던 인물들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다. 엘레오노르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잔혹했던 인물이나 낭만적인 여주인공 정도의 평가를 받던 엘레오노르를 앨리슨 위어는 놀라운 능력과 수완―물론 자신의 매력을 무기화하는 성적인 부분까지도 포함해―을 지닌 유능한 통치자로 보고 있다. 당연하게도 이런 평가가 백 퍼센트 정확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앨리슨 위어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수많은 사료나 가문의 문장이나 벽화 등을 통해 시대를 고찰한 가장 공들인 엘레오노르의 이야기다. 이는 또한 엘레오노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현명한 조력자, 철의 모습을 지닌 어머니와 같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훌륭한 전기인 동시에 잘 쓰인 중세 유럽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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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예술을 넘기다 - 아름다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예술과 생활 6
쉬레이 지음, 조용숙 옮김 / 시그마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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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생활’이라는 빨간 시리즈를 기획해서 엮은 중국 사람 쉬레이에 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치밀하고 섬세한 철학과 우아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환상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으며 현대 예술계에 새로운 인문주의적 가치를 선보인 예술가이자 인문학자”라는 소개글에 먼저 마음이 이끌렸다. 인문적인 깊이를 더한 예술서라면 한번 믿고 읽어봐도 속된 말로 밑지는 장사는 아니니까. 게다가 ‘책, 예술을 넘기다’라는 멋진 제목으로 ‘책’과 ‘예술’이라는 먹음직스러운 밑밥을 두 개나 한꺼번에 던져두었으니 어찌 기웃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여자가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을 때 생기는 위험에 관해서’라는 제목이 달린 엘케 하이덴라이히의 짧은 글이 반짝이는 외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에 비해 아쉽기 그지없었던 슈테판 볼만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 대한 보상 심리도 있었다. 책 읽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담은 그림 이야기에서는 아름다운 도판들로 사로잡았지만, 책과 여자가 얽힌 위험한 독서사 내지는 책 때문에 위험에 처하고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불굴의 여자나 여자가 책을 읽어 위험에 빠진 가련한 남자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여자의 독서사와 미술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기를 바랐던 책에서 그림만 남은 것은 작가의 인문적인 깊이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쉬레이가 엮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도 제공되지 않은) 여러 중국 전문가들이 참여한 『책, 예술을 넘기다』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책’을 주제로 한 예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책 자체를 예술로 바라보고 책의 모든 것을 조명하면서 책이 예술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것들을 이야기한다. 이쯤에서 ‘책은 예술이다’라는 명제에 나는 과연 동의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책 안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예술이 될 수도 있고 쥐뿔도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책 안에 예술이 담겨 있으면 그 책은 예술이지만, 책 안에 똥 덩어리가 담겨 있으면 그 책은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까 정작 예술은 책의 내용이고 책은 그 예술을 담는 최고의 그릇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책, 예술을 넘기다』는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을 담는 책의 외형도 예술이어야 책은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책의 외형까지 예술을 위한 예술로 거듭나는 순간, 책의 내용도 마음 놓고 즐기지 못하도록 그 책이 얼마나 불편해지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콕 집어내기는 그렇지만,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특별판의 경우 여러 디자인 분야의 최고 디자이너들에게 책의 장정을 의뢰하여 그들이 영감을 받은 대로 어떤 제한도 없이 마음껏 자신의 예술을 구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뒹굴뒹굴 마음 내키는 대로 읽기에는 더없이 불편하지만 한 권씩 따로 떼어놓아 보기에는 좋은 책이 탄생했다. 온갖 실험 정신을 제약 없이 발휘한 만큼 제작 비용은 높아졌을 테고, 그 비용은 그대로 책의 가격에 반영되어 독자의 부담으로 남았다. 그 터무니없이 비싸진 책에 밑줄을 긋고 책장의 모서리도 접으며 메모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 책을 읽다가 얼룩이라도 남으면 큰일이다. 책의 크기도 제각각이라 책장에 꽂아 넣기도 곤란하다. 신줏단지 모시듯 해야 하니 출판사에서 이번에는 예술성을 전혀 발휘하지 않고 제작한 어설픈 박스 그대로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한다.

책은 읽어야 그 존재 가치가 가장 빛난다. 책의 내용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의 외형을 감상하는 데 그칠 요량이라면 서점에서 책을 살 게 아니라 갤러리에서 책을 주제로 새롭게 창조한 작품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책의 외형은 책의 내용이 가장 돋보일 수 있도록 도와주어 독자의 마음이 책의 내용에까지 가닿을 수 있다면 그로써 충분하다. 책은 예술을 가장 적절하게 담을 수 있는 실용적인 그릇일 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닐까?

중국은 종이와 인쇄의 역사가 유구한 만큼 『책, 예술을 넘기다』에는 중국의 책 이야기가 많아서 다소 낯설었지만 흥미로운 꼭지들도 있었다. 「청나라 무영전 판각본」을 읽으면서는 판본을 가리키는 이름들이 워낙 다양하고 복잡하여 끊임없이 헷갈렸는데, 황제가 오늘날 출판사의 편집장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떤 책을 발행할지에 대한 최종 결정부터 책의 중요도에 따라 황제가 직접 제목을 정하고 서문이나 발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발행이 결정된 책의 초본을 만들어 황제의 심사를 받아야 했고, 그 후 황제의 명령대로 수정해야 했다. 게다가 황제는 인쇄 부수뿐만 아니라 본문에 쓰일 종이, 표지와 덮개, 면지로 쓰일 비단의 색깔, 책을 묶을 실의 종류, 활자체 등 책을 만드는 데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관여했다. 지금처럼 책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는 시대였으니 책을 한 권 만드는 공력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고작 책 한 권으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만큼 책이 귀하게 대접받은 것이다.

「빛을 발하는 화전」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화전(花箋)은 옛 선비와 묵객 들이 시나 편지를 썼던 아름다운 종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종이에 꽃이나 나비 같은 그림을 그려서 비망록이나 편지지처럼 팔았던 것이다. 다양한 그림들이 다채롭게 그려진 종이들 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종이를 골라 사랑하는 연인에게 연서를 보냈다고 상상하니까, 어두운 밤 어슴푸레한 촛불 아래 남몰래 그 종이를 마주했을 이의 설렘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현재 화전은 실용적인 기능을 거의 잃고 순수한 심미의 대상인 화첩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 외에 동서양의 장서표와 일본 북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에 관한 이야기,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책의 장정과 디자인에 까다로웠던 루쉰의 안목 부분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책의 만듦새에 대한 고민은 중국도 똑같구나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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