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서
이병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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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기억이 있다. ‘반드시 읽어야 할 몇 권의 책’ 같은 권장도서 또는 필독도서 목록이다. 책 제목과 저자가 빽빽하게 적힌 이 목록에는 반드시 들어가는 이름이 하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우리는 그를 대문호라 알고 있으며 누구나 들어 봤을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작가로 알고 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익숙함만큼이나 낯선 작가이다. 많은 집 책장 속에 문학전집이나 오래된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꽂혀 있을 법한 익숙함과 그 익숙함만큼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낯섦이다. 이병훈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와 예술, 작품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서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가로 시작해 무덤에서 끝을 맺는 이 책은 그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그 속에 피었던 작품세계를 들려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했던 가난한 작가였다. 소년 시절에 그의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후 그의 아버지마저 농노들에게 살해당했다. 1849년 지식인들의 모임에서 금서인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는다. 사형을 언도했다가 극적인 순간에 징역으로 바꾼다는 황제의 연출 덕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4년간의 징역을 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그에게 치명적인 트라우마를 남겼다. 『백치』에서 미쉬낀 공작이 사형대에 끌려가기 전의 묘사는 당시의 기억이다.

‘내가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다시 살 수 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그림자는 간질이 함께했다. 징역 생활 중 악화된 간질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이 간질을 앓는 인물이 유독 많은 것도 그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말년에는 유전병으로 막내아들을 간질로 잃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아이를 잃은 아낙네가 등장하는데 이는 자신의 분신이다.


또한 그는 가난한 작가였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풍족하게 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작가가 된 후에도 작품을 싸게 팔아 연명했다. 게다가 도박에 열중했으며 그 때문에 돈을 위해 글을 쓰게 되었고 평생을 돈에 얽매여 살았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이며 『노름꾼』은 도박에 대해 쓴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문호라는 막연한 호칭으로만 알고 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좇다 보니 그 역시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니, 평범하다는 말보다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러시아의 평범한 소시민인 그의 고통스러운 삶이 그의 작품이 되었고 작품이 곧 삶이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고달픈 삶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미쉬낀 공작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그의 삶에서 바랐던 선한 세상의 의미였고 그의 예술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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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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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행위를 개인적인 차원 너머로 확장하여 생각한 적이 없다.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개인적인 읽기일지라도, 비록 그 읽기의 주체가 자각하지 못할지라도 어쩌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그것은 막연한 희망 같은 것도 감히 품게 한다. 물론 ‘A는 B이고 B는 C이고 C는 D이므로 A는 D이다’로 이르는 귀결이 드러내기 마련인 오류, 아니 전적으로 수긍하기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낯선 논리의 생경함이 느껴지긴 한다. 하지만 다섯 밤 동안 사사키 아타루가 열렬하게, 읽기가 어떻게 혁명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논증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시간은 행복하고 급기야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해 문학의 힘을 아직도 믿고자 하는 젊은 철학자의 순수한 열정에 중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문학’은 소설과 시 같은, 우리가 보통 문학이라고 부르는 장르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그는 책을 읽고 쓰는 것이라면 그 대상인 텍스트부터 기법까지 모두 ‘문학’으로 아우른다(이 책의 마지막에 이르면 문학의 범주는 더욱 확장되어 예술 전반을 아우른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소설가든 철학자든 과학자든 성직자든 누구든 읽거나 쓴다면 전부 ‘문학가’인 셈이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도, 이슬람교 선지자 마호메트도, 중세 교회의 수도사들도 모두 문학가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그들 문학가에 대해, 그들이 문학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혁명했는지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일인가?’라고 먼저 자문한다. 그리고 그 자답으로 ‘읽으면 미친다’라는 자기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읽기’와 ‘광기’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책 전체에 걸쳐 줄곧 이야기한다. 우리가 읽었음에도 미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읽기 전에 받아들인 ‘정보’ 때문이다. 텍스트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보다 그 정보에 의거하여 지레 판단하고 차단한다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순수하고 완전한 읽기’라는 행위를 훼방하는 정보의 부작용을 이야기하기 위해 비평가와 전문가를 예로 든다. 그 구분이 꽤 설득력 있고 재미있다. 그가 말하길, 비평가는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인 반면 전문가는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그 둘은 수평과 수직처럼 분명하게 다른 사람이지만 똑같이 ‘모든 것’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그 환상이 우습고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비웃는다.


사실 인문학적, 혹은 사회과학적으로(적절한 표현인지 잘 모르겠다!) 어렵게 접근하지 않아도, 이런 환상은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눈에 띈다. 가령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모든 화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아는 척 끼지 않으면 혼자 바보처럼 외로워진다. 정치, 연예, 드라마, 영화, 아이돌, 스마트폰, 야구, 올림픽, 기타 등등. 관심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아주 미묘한 취향과 기호에 따라 한정되기 마련이고 어떤 사람은 더더욱 그렇지만, 소위 원만한 사회생활에 동조하려면 내 관심사가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부지런히 정보를 모아야 한다. 심지어 연예인 X파일이나 다른 동료의 뒷담화까지도.


사사키 아타루가 말하는 정보의 경계를 명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한 권의 책을 읽는 데 미리 판단하고 경계할 여지가 있는 모든 사전 지식을 의미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날 때도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들으면 색안경을 통해 마음대로 재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무의식적인 ‘검열’ 없이 책과 ‘접속’하려면 완전한 “무지와 어리석음”의 상태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곧 미쳐버리는 일이나 다름없다. 접신(接神)과 마찬가지랄까. 검열은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와 같아서, 다른 사람의 무의식이 투영된 생각을 완전하게 읽는다면 내가 온전히 그 사람이 되어버리는 일이므로, 그렇게 한순간이라도 다른 사람의 꿈을 꾸는 일이 일어난다면 도저히 미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읽을 수 없는 책을 끊임없이 읽고 있는 셈이다.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언급하고 있는 ‘문학가’들은 모두 읽을 수 없는 책을 읽고서 다시 써낸 사람들이다. 그들은 읽어‘버렸으니’ 목숨 걸고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의 씨앗은 그렇게 싹튼다. 그들은 목숨이 붙어 있다면 읽고, 쓰고, 다시 읽고, 고쳐 쓰고……를 언제까지든 되풀이할 것이다. ‘문학을 읽는 것은 혁명이다’라는 행복하고 황홀한 등식은 이렇게 세워진다(이 등식을 세우기까지 사사키 아타루의 사유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재주는 없으므로, 사실 완전하게 읽어내지도 못했으므로 그의 책을 직접 읽어보길. 아, 그의 말대로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읽을 수 없겠지만. 만약 읽는다면 미치겠지만).


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보통의 독자’ 수준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그저 흔해빠진 독자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이 책이 특히 고마웠던 것은, 그동안 무용지물의 향락과 허영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왔던 나의 책 읽기도 380만 년이라는 영원과 같은 시간 안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주기 때문이다. 혁명처럼 거창한 말은 아스라하게 느껴지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세상에서 그 희망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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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상페
장 자크 상뻬 지음, 허지은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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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고시니와 함께 작업한 꼬마 니콜라가 아니었다면 장 자크 상페가 처음부터 그리 친근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페의 검은 펜 끝에서는 니콜라도, 니콜라의 친구도, 니콜라의 엄마와 아빠도, 니콜라의 선생님도 모두 익살맞고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종이 밖으로 튀어나온다. 상페가 그 모습을 부여한 캐릭터들이 부담스럽지 않게, 오히려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은 몇 번의 슥삭슥삭과 사각사각을 거치기만 하면 누구의 연필 끝일지라도 금세 나타날 것 같기 때문이다. 상페의 그림들은 심심함을 달래려고 공책이나 수첩 한 귀퉁이에 장난삼아 낙서했을 법한 그림이기에 차라리 독자에게 공감과 웃음과 위안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만약 상페가 이상적인 육체의 황금비에 따라 극사실적으로 정교하게 데생하고 섬세하게 채색하여 누구도 감히 논평할 수 없는 명화를 그린다면 우리는 단지 멀찍이 떨어져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만 했을 것이다.

사실 삽화로만 상페를 만나왔을 뿐 『뉴욕의 상페』처럼 일종의 정식 작품집으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뉴욕의 상페』에는 1978년부터 2009년까지 『뉴요커』 표지화로 실린 상페의 그림들 150여 점을 모아놓았다. 상페는 마르크 르카르팡티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뉴요커』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상페는 “아주 오래전부터 동경한 잡지”라고 말하면서 지인을 통해 『뉴요커』의 표지에 자기 그림을 싣게 된 일을 추억한다. “『뉴요커』가 채택하는 그림이 『뉴요커』 표지화의 요건”이라고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대답하는 『뉴요커』에 아직 존재감이 미약한 프랑스 청년이 표지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흥분되고 격앙하여 불안하기까지 한 일인지, 상페는 아직도 그때의 “미칠 것 같은 기분”을 생생하게 떠올린다. 그렇다면 『뉴요커』는 어떤 잡지일까? 1925년 로스 부부에 의해 창간된 이래로 당대 최고의 지성인과 일러스트레이터가 참여하여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통해 미국과 뉴욕의 문화에 대한 풍자적, 해학적, 독창적인 담화를 주도하고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존 업다이크,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필립 로스, 트루먼 카포티, 앨리스 먼로, 무라카미 하루키 등이 필자로 참여했다니 두 눈이 다 휘둥그레질 정도이다.

그런데 그 자부심 강한 이름은 여기저기 많이 얻어들었지만 잡지의 실물을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뉴요커』와 상페가 어떻게 어울릴지 상상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창간 이래로 그 디자인이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뉴요커』 표지도 나란히 실려 독자의 무지와 빈약한 상상력을 보완해 준다. 상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뉴요커』에 관해 더 많이 떠들어대긴 했지만 상페의 그림은 여전하다. 간결한 선, 투명한 색채, 화폭을 차지하는 풍경과 인간의 반비례, 숨 쉬는 여백, 때론 뜨끔하지만 따뜻한 미소로 마무리되는 유머, 숨은 이야기가 상페 특유의 그림들 속에서 서정적인 정취와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평범하고 소박하고 고단한 일상이 ‘상페’라는 필터를 거쳐 화폭에 투영되면 연민과 위안과 공감으로 반짝거린다. 그림의 감동을 글로 재현한다는 것은 평범한 필력을 지닌 나에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상페의 그림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는 포기한다. 특히 좋아하는 몇몇 그림에 대한 인상기 정도는 남겨두려 했지만, 이제 와서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니 그런 그림들이 너무 많아서 마음의 선택조차 갈팡질팡 쉽지 않았다.

대신 『뉴요커』 표지화 작업 중 에피소드 가운데 폭소를 멈출 길 없었던 일화를 하나 기록해 둘까 한다. 『뉴요커』는 ‘『뉴요커』 표지화의 요건’ 혹은 ‘미국적인 그림’ 같은 것은 밀쳐두고 상페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화가가 어떤 구애도 없이 자유롭게 그림의 주제나 소재를 선택하고 마음껏 자기 재능과 상상력과 창의력을 펼치도록 배려한 것이다. 아무리 ‘상페다운’ 그림도 ‘역, 창문, 가로등’ 같은 사소한 부분들은 『뉴요커』의 발행 장소에 맞도록 무수히 수정해야 했다. 상페는 그림을 고쳐달라는 『뉴요커』의 모든 요구를 아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이 몇 번이나 되풀이되든 수정에 최선을 다한다. 화가 자신의 전시회에 걸릴 그림이 아닌 이상 책이나 잡지에 들어갈 그림을 의뢰받았다면 그 그림을 직접 그린 사람이 화가일지라도 그것은 ‘공동 작업’의 결과물이다. 상페의 겸손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림의 수정을 애꿎은 ‘자존심’과 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뉴요커』 사장이었던 윌리엄 숀과의 일화는 더 재미있다. 숀은 그림 속 남자의 팔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상페에게 열 번이나 수정하도록 요구한다. 상페는 묵묵히 고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종이가 너무 얇아져 더 이상의 수정이 불가능해졌을 때 남자의 팔을 원래대로 되돌려놓는다. 숀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워했다! 사실 이런 일은 얼마나 비일비재한지! 그럴 때마다 나는 소모적인 토끼 훈련의 부당함과 변덕스러운 안목의 뻔뻔함에 울분을 토했는데, 상페는 여전히 숀을 신뢰하며 최고의 잡지를 만들기 위한 착각을 너그럽게 이해한다. 숀이 자신보다 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으니까. 그렇다, 책임의 크기가 원천적으로 다른 것이다! 물론 자기가 최종적으로 결정하고도 그 책임은 모두 떠넘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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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 가드닝 - 우리는 총 대신 꽃을 들고 싸운다
리처드 레이놀즈 지음, 여상훈 옮김 / 들녘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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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함께 놓았을 때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 있다. ‘전쟁’과 ‘평화’, ‘사랑’과 ‘무관심’처럼 의미가 상반되는 경우가 많은데 ‘게릴라’와 ‘가드닝’도 마찬가지이다. 게릴라는 정규군에 속해 있지 않으며 전투를 치르는 사람이나 단체를 의미하며, 가드닝은 말 그대로 정원이나 꽃밭을 가꾸는 것을 의미한다. 도대체 작가는 이처럼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함께 사용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리처드 레이놀즈의 『게릴라 가드닝』은 총 대신 꽃씨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도대체 꽃씨를 들고 어떻게 싸운다는 것인지 궁금해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자기 집에 꽃을 심는 것은 당연한 권리일 터이니 싸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게릴라들이 벌이는 싸움은 무엇인가? 자기 땅이 아닌 남의 땅―특히 공공 소유의 땅―에 불법―정부는 자신의 땅에 꽃을 심는 것조차 법을 어긴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으로 꽃밭을 가꾸는 싸움이다. 그야말로 ‘작은 혁명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다. 소규모로 몰래 게릴라전을 수행하듯 꽃밭을 가꾼다. 다만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혁명이 아닌 꽃을 가꾸기 위한 게릴라전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전쟁(게릴라)’과 ‘꽃밭(가드닝)’이 어울리는 말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둘은 묘하게 닮은 구석도 많다. 통제하기 힘든 적과 싸우며 주변을 변화시키고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것처럼 둘을 연결시키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전쟁의 결과가 승리의 기쁨은 잠시이고 남은 것은 파괴와 허무함뿐이라면 가드닝의 결과는 승리의 기쁨은 물론 아름다운 생명체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싸움이 어렵고 힘들수록 승리의 기쁨은 더하다. 현대사회는 싸우기 어려운 거대한 적이다. 시멘트밖에 없는 공간, 무수히 많은 각종 법률들은 이들의 투쟁을 힘겹게 만든다. 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싸우고 있다. 흙이 있는 작은 공간―쓰레기통 주위나 가로등의 홈 안이나 아무도 가꾸지 않는 아파트의 화단도 좋다―이라도 있으면 꽃씨를 뿌리고 물을 준다. 땅뿐만이 아니라 시멘트 건물을 담쟁이로 덮거나 버스 정류장에 화분을 매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투쟁들이 항상 성공하는 것만은 아니다. 척박한 곳에서는 꽃이 자라나기 힘들 뿐 아니라 땅의 소유권과 관련된 문제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흔히 전쟁의 승자는 없다고 한다. 이긴 쪽이나 진 쪽이나 피를 흘리고 막대한 손실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는 것은 정치가들이나 부자들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승자만 있는 전쟁이 있다. 게릴라 가드닝, 설혹 진 쪽이라 하더라도 예쁘게 자라난 꽃을 보며 억울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세력이 위협적으로 성장하는 것 또한 바라지 않는다. 이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메마른 곳을 찾아 불법적으로 꽃밭을 가꾸고 향기를 만들며 도시 속의 작은 혁명을 꿈꾸고 있다. 이들은 게릴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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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삽질하는 대학생, 게릴라 가드닝
    from SK텔레콤 대학생 자원봉사단 써니 블로그 2012-11-24 10:49 
    눈 뜨자마자 5.3인치 HD슈퍼아몰레드 디스플레이를 시야에 비춘다. 이어폰으로 귓구멍을 틀어막으면 외출준비 완료.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어두운 지하 소굴로 입장한다. 반찬통같은 지옥철에서 영역다툼을 하다가 물 밀리듯 밖으로 튕겨져나오면 획일적인 네모세상이 늘 보던대로 우중충하게 서있다. 회색 빛 네모세상 속 초록빛 한줌을 찾아 늘 지나치는 주변을 새삼스레 다시 둘러보자. 콘크리트 건물, 쭉 뻗은 도로, 온통 규격화되고 디지털화된 콘텐트들...획일적으..
 
 
 
런던통신 1931-1935 - 젊은 지성을 깨우는 짧은 지혜의 편지들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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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이라면 ‘이름은 아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적당한 교육 덕분에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를 때를 일컫는다. 실제 버트런드 러셀은 나에게도 생소하며 딱 집어 말하기는 수많은 영역과 업적을 이룬 사람이기도 하다. 수학자, 철학자이자 수리논리학자, 역사가, 사회비평가로 활약한 러셀은 관련 분야에서 40권 이상의 책을 쉬지 않고 출간할 정도로 왕성한 지식욕을 가진 인물이었다.

러셀의 『런던통신 1931~1935』는 1931년부터 1935년에 걸쳐 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책이다. 1930년대는 대공황으로 세계가 몸살을 앓던 시기였고 인간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러셀은 이 칼럼에서 인플레이션, 불경기의 지출, 정치가들의 위선 같은 사회적으로 무거운 주제부터 아이들의 용돈과 가구 수집벽, 관광객들의 무례함, 노인들의 고집과 같은 사소한 주제들까지 다양하게 다룬다. 80여 년 전의 칼럼이라고는 하기에는 대부분의 경우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가감 없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하루만 자고 일어나도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모든 곳에서 혁신을 부르짖고 세상은 쉴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은 결국 변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을 수도 있지만 차례를 살펴보고 마음에 드는 부분을 골라서 읽는 것도 재미있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재미있는 제목을 가진 칼럼만 먼저 읽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당연히 「명상이 사라진 시대」 같은 칼럼보다 「채식주의자도 사납다」 같은 칼럼이 눈에 들어오지 않겠는가? 하지만 재미없는 제목의 칼럼이라고 해도 그냥 넘겨버리지는 않게 될 정도로 유쾌하고 짧은 글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80여 년 전의 칼럼이라는 이유로 우습게 생각하면 말 그대로 뒤통수를 얻어맞게 될 것이다. 물론 당시의 시대 상황에 따른 변화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여성이나 아이들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당시의 보수적인 정서를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의 삶에 대한 본질적인 태도가 현재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여전히 흥미롭다. 80년이 흘러 2100년을 눈앞에 두게 되어도 어쩌면 이 이야기들이 통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80년 전의 노인들이 경험을 내세우는 것처럼 80년 후의 노인들도 경험에 의지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의 라디오가 대화의 기술을 줄였다면 스마트폰이 대화의 기술을 줄인 정도의 차이다. 미래에는 뇌의 연결이 대화를 줄일 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은 변하지만 정작 우리는 변화 없는 삶에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곧 있을 선거 때문에 요란하다. 「우리가 투표를 하는 진짜 이유」에서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에서 우리의 정치가를 비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비판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기억하자. 우리의 수준이 곧 정치가의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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