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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츄얼 그림동화 1
강경옥 지음 / 컨텐츠와이드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동화는 끊임없이 리바이벌된다. 동화는 모티프가 되기도 하고 패러디에 차용되기도 한다. 서양 동화의 잔혹함을 부각시키는 책들이 한때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유키 카오리의 《루드비히 혁명》에서도 동화 〈백설공주〉, 〈빨간 모자〉, 〈잠자는 숲속의 공주〉, 〈푸른 수염〉은 잔혹하고 선정적인 내용으로 한껏 비틀린다.

하지만 강경옥은 《버츄얼 그림동화》에서 동화 그대로를 가감 없이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동화의 어떤 부분도 특별히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경옥이 보여주는 그림동화 속 세계는 조금 특별하다.

동화는 그 내용이 아무리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민망할 정도로 잔인하고 야하다고 해도, ‘권성징악이라는 확고한 주제로 견고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강경옥은 그 견고한 세계에 세상사, 즉 인간사를 슬며시 밀어 넣어 강경옥표 그림동화로 직조했다.

강경옥이 들려주는 모든 그림동화의 시작은 동화 가상 체험 공간을 기점으로 한다. 그곳을 점집으로 알았든, 최면술을 하는 곳으로 알았든, 시간을 때우려고 들어왔든, 그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동화를 한 편씩 보게 된다. 그들은 그 동화 속에서 착한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마녀가 되기도 하고, 악독한 계모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이 맡은 동화 속 역할은 현실 세계에서 그들이 처한 상황과 미묘하게 맞물리기 시작한다. 이제 그들에게 동화는 더 이상 심심풀이나 시간 때우기용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의 의식은 동화 속 세계와 현실 세계를 넘나들며 동떨어진 두 세계를 유기적으로 모자이크한다.

동화 속 세계는 더 이상 피터팬 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의 마지막 도피처가 아니다. 동화 속에도 사람살이가 있는 것이다. 현실 세계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제 삶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선인은 선인으로, 악인은 악인으로 제 역할을 다하여 동화 한 편을 만들어내고 있다. 늘 권선징악의 해피엔딩만 아니라면, 그들처럼 나도 동화 속 세계가 현실인지 현실 세계가 동화인지 구별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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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소묘 -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만화애니메이션총서 31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만화애니메이션총서 31
김인 지음 / 새만화책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콘테는 연필이나 목탄보다 진하고 윤기가 있고 무른 결점이 있지만 빛과 음영의 변화나 양감과 공간 관계를 표현하는 데 더없이 적합한 미술 도구라고 한다. 《그림자 소묘》는 보통 펜과 스크린 톤으로 그려지는 다른 만화들과는 달리, 바로 콘테와 붓으로 그려졌다. 그만큼 책 속에는 음영도 많지만 빛 또한 풍성하다. 그늘이 드리워져야 할 곳들에 제대로 짙은 음영이 묘사되어 있어, 빛이 그토록 눈부신가 보다.

《그림자 소묘》는 〈내 마음의 지도〉와 〈그림자 소묘〉 두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빛처럼 밝고 부드럽고 질박한 시골 소녀 ‘주희’와 그림자를 잃어버리고 투명해진 서울깍쟁이 소녀 ‘정원’의 따뜻한 우정과 자기 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내 마음의 지도〉에서 늘 길을 잃고 헤매던 주희는 ‘내 마음의 지도’를 완성함으로써, 〈그림자 소묘〉에서 정원은 더 이상 길을 헤매지 않게 된 주희와 ‘주파수’를 맞춰가면서 잃어버린 그림자를 되찾고, ‘서울’이라는 현실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든든히 새겨 넣는다.

여기에서 콘테와 붓이 아주 효과적으로 쓰인다. 명암과 질감이 뚜렷하게 그려지는 콘테는 정체성의 회복을, 투명하게 그려지는 붓은 정체성의 상실을 표현한다. 〈내 마음의 지도〉에서 주희는 콘테로, 주희에게 낯선 서울은 붓으로 그려졌으며, 〈그림자 소묘〉에서 정원은 붓으로 그려지다가 주희를 만나는 순간부터 콘테로 그려졌다. 콘테의 명암과 질감은 주희와 정원, 그리고 서울에 존재감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두 단편 중에서 〈내 마음의 지도〉는 만화가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내 깊은 그리움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내 마음의 지도〉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주희가 막내이모를 따라 그림 공부를 하러 서울로 상경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짙푸른 숲과 들판이 있는 곳에서 시시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한가롭고 평화롭게 자란 주희는 ‘길바닥이 숫제 사람 머리통으로 새까만’ 서울에서 걸핏하면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이다. 주희는 그 많은 ‘번듯한 미술 학원’ 다 두고, ‘구들짝에서 귀신 나게 생긴’ 허름한 화실이 마음에 쏙 든다. 화실 앞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올라온 강아지풀에까지 물을 주는 화실 선생님의 모습에 홀딱 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희에게는 화실 가는 길을 익히는 일도 만만치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주희의 눈길을 끄는 것들이 있었으니, 황량한 서울 바닥에서 양옥집 대문 위에 자라는 상추, 전깃줄을 따라 덩굴을 뻗은 호박, 어느 집 앞 화분에 심어져 있는 토란, 주차장에 서 있는 오동나무 등등이었다. 주희는 그것들을 따라 이정표를 세우며 화실까지 가는 ‘내 마음의 지도’를 만든다.

그 지도 안에서는 주희의 눈에 띈 상추며 호박, 토란, 오동나무 등등이 실제보다 비정상적으로 크게 그려지지만, 그 대담한 구도가 〈내 마음의 지도〉에서 가장 압권인 장면이다.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근원적인 ‘고향’의 자연이 그리워진다. 각박한 시간 속에서 마법처럼 진한 향수(鄕愁)에 젖어들게 된다. 시골 우리 집에 있는 석류 나무, 자두 나무, 배 나무, 단감 나무, 복숭아 나무, 포도 나무, 그리고 오래된 팽나무 한 그루, 또 우리 집에까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옆집 모과 나무가 그립다. 어디 그리운 게 한둘인가. 우리 엄마 젖가슴도 무지 그립다. 또 내가 우리 집에 갈 때마다 바뀌어 있는 누렁이들도 너무나 그립다. 주희의 ‘내 마음의 지도’는 내 영혼이 진정으로 머물고 싶어하는 곳까지 무수한 그리움의 발자국을 찍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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펫 숍 오브 호러즈 10 - 완결
아키노 마츠리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미국 차이나타운의 뒷골목 깊숙이 자리잡은 수상한 펫숍 Count D. 그곳에 더 수상한 D백작이 나타났다. 이 음울한 이니셜 D는 D백작의 존재성을 압축해 주는 알파벳이다. 또한 D는 『Petshop of Horrors』 전체를 지배하는 알파벳이기도 하다. D로 시작되는 제목의 이야기 40편은 D로 시작되는 단어 Death(죽음), Dark(어둠), Danger(위험), Devil(악마), Destiny(운명) 등등, 그리고 Desire(소망)의 지배를 받는다. 이 단어들이 모두 모이면 D백작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D는 처음 ‘백작’의 작위를 받은 조부 D백작으로부터 3대째에 이르는 ‘신관’의 후예이다. D의 일족은 먼 옛날 중국에서 살았던 종족으로 동식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수의 신탁을 전하기도 한 신관들이었다. 중국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일족이 멸종될 위기에 간신히 살아남은 단 한 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D백작이었다. 그때부터 3대 D에 이르기까지, Count D를 거점으로 인간에 의해 고통당하고 멸종한 동물들과 함께 결탁한 복수를 해왔다.

인간에 대한 D 일족의 복수는 냉정하고 준엄했다. D는 Count D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희귀한 애완동물을 권해 주는데, 의문의 살인 사건이 꼭 일어난다. D는 인간에게 애완동물을 팔 때면 반드시 지켜야 할 세 가지 금기를 먼저 알려준다. 그 금기를 지키지 않아서 일어나는 어떤 불미스러운 일도 Count D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면서.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쪽은 언제나 인간.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심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D가 늘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호기심을 부채질하는 금기를 제시하니까. 뭔가 하나씩은 결여된 인간들은 D가 던지는 미끼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D가 파는 애완동물은 모두 하나같이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므로. D는 그들의 등 뒤에 서늘한 한 마디를 던진다. “아무쪼록 오랫동안 귀여워해 주십시오.”

2권까지 『Petshop of Horrors』는 공포 만화답게 잔인하고 끔찍하며 괴기스럽기 그지없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주로 인간에 대한 복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인 형사 레옹 오르콧이 등장하면서 복수로 인한 공포 분위기는 많이 누그러진다. D와 레옹의 사이가 달콤한 케이크와 차 한 잔으로 살가워지면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조화와 공존에 치중하며 다소 부드러워진다. 철저히 동물의 입장을 대변하는 D와 인간의 입장을 대변하는 레옹의 갈등도 시종일관 첨예하게 대립되지는 않는다. D를 감시한다는 명목하에 제집 드나들듯 Count D를 들락거리며 D의 만찬과 티타임을 함께 즐기면서 D와 레옹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화해의 몸짓을 코믹스럽게 연출하기도 한다. 따뜻한 웃음이 지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아기자기한 분위기는 어느 날 레옹이 D에게 자기 동생 크리스를 덜컥 맡기면서 한층 고조된다.

개인적으로는 말을 잃은 크리스와 Count D에 살고 있는 동물들(크리스의 눈에는 전부 인간들로 비친다)의 이야기가 훨씬 감동적이었다. 언젠가 말을 되찾게 되는 날이면 필연적으로 떠날 인간 크리스를 Count D의 일원으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준다. 여기에서도 배신의 역할은 크리스의 몫이다. 잃어버린 말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일깨워준 Count D의 식구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뭔가를 잃어야 자신 이외의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줄 아는 이기적인 인간과, 인간에 의해 멸종되고 급기야 그 존재마저 철저히 부정되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성을 상기시키는 상상 속 동물들, 그리고 공공연히 그들의 편이라고 천명하는 D백작. ‘그러나 인간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면, 역시 너무나 인간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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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븐? Heaven 6 - 완결
사사키 노리코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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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헤븐》은 이가 칸이 여사장 쿠로스 카나코가 경영하는 로윈 디시의 개업과 폐업을 회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쿠로스의 도발적인 콧김과 이가 칸의 달관 혹은 체념 섞인 미소가 특히 더 인상적인 만화이다.

 

로윈 디시(Loin d’lci)는 ‘이 세상의 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공동묘지 저편에 있는 레스토랑이다. 목단꽃이 아름다워서, 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집과 가까운 곳에 들러서 언제든지 맛있는 요리를 먹기 위해서 공동묘지 한쪽에 프랑스 요리점 로윈 디시를 개업하기로 한 쿠로스. 추리소설 작가이지만, 작가로서의 면모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로윈 디시의 실질적인 축은 쿠로스와 또 한 사람, 바로 이가 칸이다. 이가 칸은 대학 입학 시험을 봐야 했지만, 못말리는 엄마와의 해프닝을 시작으로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엉겁결에 프랑스 요리점의 웨이터가 된다. 그리고 또 우연히 로윈 디시의 개점을 준비하던 쿠로스의 눈에 띄었다. 자신이 주방장으로 일하던 음식점마다 망한 징크스를 가지고 있는 수석요리사 오자와, 자격증 취득에서 삶의 희열을 찾는 전직 은행원 소멀리에 야마가타 시게오미, 어떤 실수를 해도 주눅 들지 않고 희희낙락하는 천둥벌거숭이 카와이 타이치, 중화요리점과 돈가스점의 점장으로 일한 경력밖에 없는 지배인 츠즈미 케이타로. 이들도 모두 우연히 쿠로스에게 발탁되었다.

 

그냥 발탁되었다. 쿠로스에게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인 이가 칸의 무표정도 일명 레스토랑에서 가장 중요한 ‘거리감’이자 ‘손님과 종업원 사이의 적당한 긴장감과 친근감’이자 ‘개성’이 된다. 그러나 쿠로스는 오자와, 야마가타 시게오미, 카와이 타이치, 츠즈미 케이타로 모두에게 즉흥적으로 레스토랑에 가장 중요한 것을 각각 다르게 말했다. 레스토랑에 가장 중요한 그 무엇은 상황에 따라 쿠로스의 마음대로 늘 달라지지만, 술을 많이 마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로윈 디시의 절대 조건이다. 이러한 로윈 디시에서 너무나 제멋대로인 쿠로스와 지극히 상식적인 이가 칸이라는 극단적인 두 인물이 교묘하게 균형을 이루어간다.

로윈 디시는 철저히 우연의 산물이다. 로윈 디시가 문을 닫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우연히 내리친 벼락이다. 로윈 디시는 완전히 불타버렸다. 그러나 플롯상으로는 치명적인 ‘우연’도 ‘이 세상의 끝’이라는 로윈 디시에 어울리는 설정이다. 로윈 디시는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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