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구판절판


"열두 살 하고 반년정도 나이를 먹었을 때였지요. 그땐 조부모님 댁에서 살고 있었어요. 그 집엔 고양이가 세 마리 살고 있었는데, 걔네들 먹이를 주는 게 내 일이었습니다. 생선통조림을 따서 내용물을 밥과 함께 버무리는 일이었죠. 그 일은 내 속에서 심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어요. 생선 냄새와 모습이 토할 것 같은 느낌을 유발하곤 했습니다. 게다가 생선살을 그저 포크로 잘게 부수는 것만으론 안되었어요. 생선살이 밥과 완전히 혼합되지 않으면 고양이가 시큰둥하기 일쑤였으니까요. 그러니 직접 손을 담가 반줄을 만들 수밖에요. 눈을 감아도 소용없었지요. 푹익은 밥과 생선부스러기 속에 손가락을 담그고, 그 한없이 역겨운 물질을 주무를 때마다 나는 기절 직전까지 가고는 했습니다." (중략) "그렇게 수년간 그 일에 매달리던 어느 날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때가 내 나이 열둘 하고 반 정도였는데, 문득 주무르고 있던 고양이 사료에 눈길을 주게 되었지요. 당장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간신히 토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어짐)-28,29쪽

바로 그때였어요. 왠지 모르게 나는 그 반죽을 한 웅큼 펴서 입으로 가져가 먹었답니다." (중략) "아니에요! 그게 아닙니다! 그때는 그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구요. 비쩍 마르고 영양상태가 말이 아닌 데가, 뭐든 먹으려면 갖은 애를 써야 했던 내가, 짐승이나 먹을 끈끈한 죽을 입가에까지 혀로 싹싹 핥아 먹었다니까요. 스스로 하는 짓에 기가 막혀 하면서도 나는 그 비린내나는 반죽을 한 웅큼 한 웅큼 게걸스레 먹기 시작했답니다. 고양이 세 마리가 자기들 먹을거리로 뱃속을 채우는 나를 기겁을 한 표정으로 쳐다보더군요. 하지만 오히려 그들보다는 내가 더 경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나 사이에 전혀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으니까요. 또한, 바로 그 순간 먹으려고 덤비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강제로 먹는 행위에 옭아매는 어떤 압도적인 힘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엔 생선 찌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바닥까지 싹싹 핥아 먹어버렸지요. 덕분에 그 날 저녁 고양이 녀석들은 식사를 굶어야만 했습니다. 내 몰락한 꼴의 유일한 목격자가 된 대가라고나 할까요."-29,30쪽

"나는 적을 믿습니다. 신의 존재에 관한 증거라 해봐야 허약하고 부질없기 일쑤이며, 그 권능에 대한 증거 역시 못지 않게 빈약하지요. 하지만 내부의 적의 존재를 뒷받침할 증거는 어마어마하고, 그 힘의 증거는 가히 압도적이지요. 내가 적의 존재를 믿는 것은, 밤낮 할 것 없이, 내 삶의 길목마다 그것과 마주치기 때문입니다. 적이란 내부로부터 파괴할 가치가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 파괴해버리지요. 그는 각각의 현실 속에 내재하는 조락凋落의 기운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는 또 당신 자신과 당신 친구들의 천박스러움을 적나라하게 공개하지요. 그는 고통받을 훌륭한 이유가 당신한테 있다는 사실을 백일하에 폭로합니다. 그는 당신 자신을 스스로 혐오하게 만듭니다. 그는 처음 보는 여자의 천사 같은 얼굴을 당신이 언뜻 보았을 때조차도 그 미모 속에 내재하는 죽음을 꿰뚫어보고야 말게 만들지요."-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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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
닐 게이먼.케이틀린 R. 키어넌 지음, 김양희 옮김 / 아고라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베오울프>는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의 고대서사시를 각색한 작품이다. 필연적으로 이야기 전반에 장엄하고 고풍스런 분위기가 풍기는데, 현대적 감각이 어울려져 작품의 품격을 한차원 높혀준다. 장면마다 영상을 떠올려가며 읽었다. (헐리우드에서 영화화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특히 그렌델의 습격으로 아수라장이 되는 헤오로트 궁 장면(p.35이하), 그렌델과 베오울프의 격전(p.132이하), 그렌델의 어미 '물의 여인' 찿아 호수를 누비는 베오울프의 모습(p.211이하)의 묘사는 이 작품의 백미다. '소설속에 몰입케 하는 블랙홀' 같은 부분이었다.

<베오울프>를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었다. 첫째, 그렌델의 습격과 공포, 베오울프의 등장(처음~p.154). 둘째, '물의 여인'의 분노와 왕좌에 등극한 베오울프(p.155~p.244). 셋째, 베오울프 왕과 숨겨진 비밀(p.255~끝). 첫부분과 둘째부분은 '그렌델의 죽음'이 구별의 축이며, 둘째와 셋째는 '30년이란 시간의 흐름'이 구별의 축이다.

바다가 닿지 않는 곳에 높은 궁전을 세워 백성들에게 선물하겠다던 왕이 있다. 발 덴마크의 흐로드가르 왕. 그는 헤오로트 궁전을 지어 약속을 지키고, 경축하는 향연엔 감미로운 술, 웃음, 즐거운 노랫소리가 넘쳐난다. 왕국의 번영과 영화는 영원할 듯 보였다. 하지만 이것이 저주의 근원이었다니...

시끄러운 소음, 특히 음악소리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존재가 있다. 거인족 '트롤'의 피가 흐르지만 순수한 트롤족은 아니며, 인간을 즐겨 먹는 존재, 그의 이름은 바로 '그렌델'이다. 그는 다짐한다. 소란스럽게 자신의 평온과 고요를 방해한 저들을 응징하기로. 그렌델의 공격으로 헤오로트 궁전은 아수라장이 되고(p.35이하), 계속되는 그렌델의 공격때문에 왕국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소문까지 퍼진다.

그러던 중, '벌들의 늑대'라 불리는 베오울프가 왕국에 찿아오는데...

<베오울프>는 서구의 전형적인 영웅주의 공식을 답습하지 않는다. 단순한 '영웅만들기' 차원이 아닌, 인간적 고뇌와 철학적 사유까지 포괄한다. 이것이 <베오울프>의 진정한 가치다. 자세히 살펴보자. '베오울프'의 행동이나, 언행은 일반적인 '영웅'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등장이후 반복되는 오만한 자신감, 웨알테오우 여왕과 이상한 관계등, 그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없었다. (도리어, 그렌델이 가엾다.)

흐로드가르 왕과 베오울프의 '끝'과 왕위등극과정의 유사성, 아니 동일함. 젊은 시절 용맹함을 떨쳤다는 공통점. 그리고 물의 여인과의 숨겨진 진실등을 고려한다면, <베오울프>는 '베오울프'란 영웅의 이야기가 아닌, 결국 인간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과 비극의 이야기다.

'베오울프'의 왕위등극과정을 살펴보자. 그렌델 어미의 복수로 왕국은 벌컥 뒤집히고,(p.188) 베오울프는 부하 위글라프와 함께 그렌델 어미의 근거지인 숲속 호수로 향한다. 갖은 고초끝에 삶마저 체념하던 그 앞에, 그렌델의 어미 에글리카는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간엔 과연 무슨일이 벌어질까? 이 부분은 이야기 후반을 이끄는 미스테리의 열쇠다. (이 정도만 언급하겠다. 스포일러가 두렵군)

p.245이하는 30년의 시간의 흐른 후 이야기다. 왕위에 오른 베오울프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버렸다. 과거 흐로드가르 왕을 보는 듯한 베오울프. 하지만 용맹만은 여전하다.(p255참조) 30년의 시간을 이어주는 매개체는 '뿔잔'이다. 그렌델 퇴치 포상으로 흐로드가르 왕이 베오울프에게 준 신비의 뿔잔. 그렌델 어미를 찿아간 후 사라졌던 뿔잔이 다시 발견된 것이다. 이에 이상하게 반응하는 베오울프. 비밀의 빗장은 이미 풀렸다.

'흥미롭다'처럼 쉽게 소비되는 말도 없다. 하지만 <베오울프>를 읽으며 '흥미롭다'란 말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 깊이 느꼈다. 지금까지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근래 읽은 책중 최고다. 고대 유럽의 환상적 분위기 속에서 펼쳐지는 장엄하고 흥미로운 대서사시, 꼭 한번 느껴 보시길.


* <베오울프>의 표지는 정말 근사하다. 이미지파일에 속지 말고 서점가서 실물로 보시길. 소장욕구가 막 솓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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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6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구판절판


"사실 사람들은 메타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오. 그런데도 이 단어는 아주 잘 팔려나가고 있지. 도도해 보이거든. '메타포'. 일자무식쟁이라도 이게 그리스어에서 온 단어라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을 거요. 어원이 기똥차게 고상해 보이지. 허세야……순 허세라고. '메타'라는 접두사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과 '포'의 어원인 '페로'가 별 뜻도 없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쓰이는 동사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라도 '메타포'란 두루두루 아무 뜻으로나 쓰일 수 있는 말이라고 결론짓게 될 거요. 통상적인 용법을 살펴보더라도 똑같은 결론에 이르게 될 테고."-25쪽

"천만에! 그건 최고의 독자에 한해서만 가능한 일이오. 그 외에는 다들 계속해서 타고난 진부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게다가 독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독자란 것 자체가 희귀한 부류에 속한다오. 대다수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으니까. 그 문제에 대해 누군가 명언을 남겼지. 웬 지식인인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구먼. '사실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읽는다 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한다 해도 잊어버린다.' 이토록 실상을 명쾌하게 요약하는 말이 어디 있겠소. 안 그러오?"-78쪽

"인간을 미워할 이유는 무수히 많다오. 내 생각에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허위요. 결코 떨쳐낼 수 없는 특성이지. 요즘만큼 허위가 승승장구하는 시대는 없었소. 아시다시피 난 여러 시대를 살았다고. 하지만 단언할 수 있소. 이 시대만큼 가증스러운 시대는 없었다오. 한마디로 허위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시대요. 허위적인 건 불성실하거나 이중적이거나 사악한 것보다 더 나쁘지. 허위적이라는 건 우선 자기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오. 뭔가 양심에 걸리는 게 있어서가 아니마 '체면'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말로 장식되는 졸렬한 자기만족을 맛보기 위해서 말이오. 또 남들에게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오. 하지만 정직하고 사악한 거짓말, 남을 궁지에 빠뜨리기 위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지. 암, 아니고말고. 사이비 거짓말, '라이트'한 거짓말을 하는 거요. 그러니까 미소를 띤 채로 욕을 해댄다고. 호의를 베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오."-81쪽

"입술은 두 가지 역할을 하오. 첫째, 말을 관능적인 행위로 만들어준다오. 입술 없는 말이란 게 어떤 것일지 상상해본 적 있소? 멍청하게 차가운 그 무엇, 뉘앙스 없이 서걱거리는 그 무엇일 거요. 꼭 법원 사무관의 말처럼 말이오. 한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 그게 바로 입술의 두번째 역할이라오.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지 못하도록 입을 다물게 해준다는 거지. 손 또한 입술을 갖고 있소. 써서는 안 되는 것을 쓰지 못하게 방해하는 입술 말이오. 이건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역할이오. 글재주와 불알과 자지를 제대로 갖춘 작가들이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한 탓에 작품을 망치곤 했지."-93쪽

"기분이란, 인간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허위로 꽉 찬 깜찍한 이야기요. 인간의 존엄성을 획득했다고 느끼기 위해서, 응가를 하는 순간에도 정신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기 위해서 말이오. 특히 여자들이 기분을 잘 꾸며대지. 그네들이 하는 일이란 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일이오. 그런데, 우리네 인간이라는 족속한테는 별난 성질이 하나 있거든. 두뇌가 한시도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는다는 거요. 별반 쓸모 없을 때조차도 말이지. 이 한심스런 기술적 결함이 우리네 인간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오. 주부의 두뇌란 게, 양지바른 곳에 곤히 잠든 뱀처럼 고귀한 무위나 우아한 휴식에 자신을 내맡기는 게 나을 텐데, 그러기는커녕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분개해 가지고는 오만하고도 멍청한 각본을 분비해댄단 말이오……집안일을 천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니 오만하달 밖에. 또 어리석고. 청소기를 돌리는 일이나 변소를 광내는 일은 사실 하나도 천할 게 없거든. 응당 해야 하는 일이지. 그뿐이라고. 그런데도 여자들은 자기네들이 무슨 고결한 사명이라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걸로 생각한다오. 대다수 남자들도 마찬가지요.(이어짐)-101쪽

그딴 생각에 좀 덜 집착해서 그렇지. 왠고 하니, 남자들의 두뇌는 회계니 승진이니 납세니 탈세니 하는 것들로 복잡해서 망상 같은 것에 내줄 자리가 더 적거든."-102쪽

"지금으로부터 이십사 년 전, <살인자의 건강법>에 대해 신문에 어떤 서평이 올랐는지 아시오? '상징으로 가득한 동화적인 소설, 원죄, 즉 인간 조건에 대한 몽환적인 은유'운운. 그러니 읽기는 하지만 읽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밖에! 밝히기 위험천만한 사실을 난 얼마든지 글로 써도 되오. 다들 은유로만 볼 테니까. 별반 놀라운 일도 아니오. 사이비 독자는 잠수복을 갖춰 입고, 유혈이 낭자한 내 문장들 사이를 피 한방울 안 묻히고 유유히 지나가게 마련이거든. 가끔씩 탄성을 지르기도 할 거요. '멋진 상징인걸!' 이런 게 이른바 깔끔한 독서란 거요. 기막힌 독서법이지. 잠자기 전 침대에 기대앉아 책을 읽을 때 쓰기 딱 좋은 방법이오.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데다 이불호청을 더럽히지도 않으니까."-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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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파괴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구판절판


사람에게 마약 같은 영향을 미치는 나라들이 있는 법이다. 중국이 바로 그런 경우로, 중국은 그곳에 갔던 사람들로 하여금 한결같이 잘난 체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단순히 그곳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들에게도. 사람들이 책을 쓰는 것은 그렇게 잘난 체하고 싶어서가 아니겠는가? 중국에 대한 책이 많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9쪽

중국만큼 사람을 장님으로 만드는 나라도 없다. 일단 중국을 떠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 것들 중에서 멋진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공정을 기하려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도처에서 목격한 더러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마는 경향이 있다. 정말이지 기이한 현상이 아닌가? 감추려는 노력조차 없이 자신의 수많은 신체적 결점들을 상대로 하여금 잊어버리게 만드는, 모든 애인들을 사로잡는 노련한 창녀, 중국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11쪽

전쟁은 1972년 시작되었다. 1972년은 내가 어마어마한 사실을 깨달은 해였다. 이 세상에서 없어서 안 될 것은 바로 적이라는 사실을. 적을 갖지 못한 인간은 보잘것 없는 존재다. 적이 없는 삶은 허무와 권태의 구렁텅이, 가혹한 시련이 아니겠는가? 적이야말로 구세주다. 적의 존재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역동적으로 살 수 있다. 적이 있음으로써 삶이라는 이 음울한 사건은 웅장한 서사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지당했다.-18쪽

눈은 톱니 모양의 물, 얼어 있는 모레, 지상이 아닌 하늘의 소금, 맛은 짜지 않은 부싯돌, 구조는 접혀 있는 싹, 냄새는 추위, 색깔은 구름으로부터 떨어지는 유일한 빛깔인 흰색. 눈은 모든 것-소리, 낙하, 시간-을 누그러뜨림으로써 피나 빛이나 환상 같은 영원하고 불변한 것들에 더욱더 큰 가치를 부여했다. 눈은, 그 위로 수많은 발자국과 수많은 흔적들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역사의 첫 페이지, 눈은 최초의 문학장르, 추적의 흔적과 적이 이동한 길만을 다룬 대지에 맞먹는 거대한 책, 아주 작은 흔적이 알 수 없는 의미를 띄는-자기 형제의 발자국과 형제를 죽인 자의 발자국을 구별할 수 없는-지리의 서사시가 아닐까?-141쪽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갈망하는 것이 전쟁인 줄 알지만, 실제로 그들이 꿈꾸는 것은 결투이다. <일리야드>를 읽다 보면 때때로 몇 가지 선택된 적대 관계가 병치되어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영웅들은 상대 진영에서 자신에게 지정된 신화상의 적수를 찿아낸다. 그를 죽일 때까지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고 상대 역시 마찬가지인 그런 인물을. 하지만 그런 것을 전쟁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은 개인주의 자존심을 전제로 하는 애정의 산물일 뿐이다. 영원한 적수, 자기만의 적수와 멋진 결투를 꿈꾸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에게 걸맞은 상대와 한판 붙기 위해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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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세계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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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에 혈안이 된 '방송조직위'는 '집단 수용소'란 리얼리티쇼를 기획하고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한다. 대중의 비뚤어진 관심속에서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황산>을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것은, 식물원을 산책하다 체포당한 미모의 소설가 파노니크와 감시자 카포인 즈데나의 동성애적 분위기(사실은 즈데나의 일방적 짝사랑이지만), 대중에 대한 파노니크의 분노이다. 특히 후자는 확대해석이 가능하다. 파노니크가 소설가인 점과 관련, 실질적으로 아멜리 노통브가 '독자들'에게 보내는 일갈인 것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p.72,73참조)

사실, 무차별 체포, 집단수용소, 폭력, 살해등 설정이 크게 공감가지 않았다. 무차별 체포가 자행되는 동안 경찰은 도대체 뭘 했단 말인가?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몸서리 처진다. '삼청교육대, 긴급조치등' 실제 경험했던 일이다. <황산>의 설정이 다소 모호하나 방송조직위, 경찰을 비롯한 권력층이 전부 한통속이라는 인식을 깔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우매한 대중까지 포함시켜야지.

제목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멜리 노통브 소설의 제목은 엉뚱한 듯 하지만, 읽어보면 공감이 되는 제목이다. '두려움과 떨림' '머큐리'등. 하지만 '황산'이라는 제목은 별로다. 제목과 관련된 내용은 p.187이하에 언급되는데, 차라리 '몰로토프 칵테일'나 주인공의 이름을 따 '파노니크'가 낫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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