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지의 표본
오가와 요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수첩 / 2007년 4월
절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가락에서 솟구친 피가 탱크속에 흘러들어 사이다를 복숭앗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맑디맑은 색깔이 거품과 함께 톡톡 터지고 있었다.-13쪽

"집에 불이나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남동생은 죽고 나만 살아났어요. 그 다음날, 다 타 버린 집터의 땅바닥에서 이 버섯을 발견했습니다. 세 개가 서로 나란히 붙어 있어서 나도 모르게 따 버렸어요. 이래저래 생각해봤는데, 여기 가져와 표본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는게 가장 좋을 거 같았어요. 불에 타서 없어져 버린 것들을 모두 이 버섯과 함께 봉인하고 싶어요."-26쪽

고스란히 드러난 내 발은 그의 손 안에 있었다. 그가 너무도 종아리를 세게 잡았기 때문에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타일 이음새에 발가락 끝을 건 채 그저 가만히 바닥에 떨어진 헌 구두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한 짝은 거꾸로 뒤집히고 다른 한 짝은 옆으로 쓰러져서, 날개를 쥐어뜯긴 두 마리 작은 새의 시체처럼 보였다.-41쪽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페이스를 무너뜨리지 않고, 타인에게 폐가 된다는 것에 둔감하기만 한 이런 타입의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입으로는 미안해요, 미안해요를 거듭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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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더스트 판타 빌리지
닐 게이먼 지음, 나중길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어린시절 방학만 되면 책을 쌓아놓고 밤새 읽었다. 난 이야기속 주인공이 되어 책 속 세상을 누볐다.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그 환상적인 체험…여전히 설렌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고, 사회란 곳에 한발짝 한발짝 다가가면서 저건 추억 속 이야기로 남았다. 아련한 어린시절 추억과 함께 봉인된 것일까?

이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 놓는 것은, 오랜만에 책 속 세상을 누비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스타더스트>를 읽는 내내 난 '월 마을'을 누비며, 트리스트란과 별 아가씨의 여정을 지켜보았다. 이토록 환상적이고 짜임새 있는 소설은 오랜만에 본다. 한 가지만 확실히 하겠다. <스타더스트>는 절대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을 최고의 소설이다. 만약 이 작품을 끝까지 읽고 '이거 뭐야. 재미없어' 하실 분이 계신다면, 그 분은 우울증 환자거나 책 자체를 혐오하는 분일거다. 장담한다.

일단, 줄거리를 살펴보자. 뒤에 이야기 하겠지만, 저자의 치밀한 구성은 대단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윌 마을'. 여긴 9년에 한번 오월제 맞이 장이 열린다. 1년내내 '윌 마을' 성문을 지키는 보초 역시 장이 열릴 때만은 보초를 서지 않는다. 던스턴 쏜. 그는 장에서 한 이국적인 여성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데, 그녀는 마녀에게 붙잡혀 있는 신세. 시간은 흘러 성문 밖에서 아기가 담긴 바구니가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거기엔 '트리스트란 쏜'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그렇다. 바로 던스턴과 요정여인 사이에서의 사랑의 결실.

이 당시 던스턴은 마을처녀인 데이지와 결혼한 상태였다. 이 부분을 읽으며 과연 데이지가 이 아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점이 궁금했다. 한마디로 남편이 외도해서 낳아온 아이인데, 받아 들이기 쉽지 않을 것 아닌가? 데이지의 반응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서술은 많지 않다. 한번 살펴보자. '그녀(데이지)는 평소에도 트리스트란과 별로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이따금 트리스트란이 자기를 쳐다볼 때에도 그녀는 어떤 비밀이라도 캐내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p.52) 여기서 '어떤 비밀'이 뭘 말하는 것일까? 그건 바로 그의 생모에 관련된 비밀을 말하는 것이리라. 데이지는 자기 자식이 아닌, 그를 껄끄럽게 생각했지만, 노골적으로 차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트리스트란은 윌 마을 최고 미녀인 빅토리아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녀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그녀는 냉담하기만 하고...끈질긴 그의 구애에, 반 장난식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별을 가져온다면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준다는 약속을 한다. 이에 별을 찿아 나서는 트리스트란. 이로서 그의 힘겨운 여정은 시작된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치밀한 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난 <스타더스트>를 두번 읽었다. 두번째 읽으며, 처음 읽을땐 미쳐 간파하지 못했던 수많은 복선과 치밀한 구성을 이해했고, 저자의 치밀한 구성에 감탄해 버렸다. 한번 살펴보자.

p.61에서 물건을 주문하러 온 빅토리아에게 트리스트란은 용기를 내어 말을 붙이는데, 그 전후 이런 서술이 있다. '아주 강한 바람이 한 차례 불어왔다. 바람이 얼마나 센지 마을의 모든 창문들이 덜컥거렸고 닭 모양의 풍향계가 아무렇게나 뱅글뱅글 돌아가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었다. (중략) 동쪽 요정 나라에서 불어온 바람이었다.' 난 처음 이 부분을 읽으며 '왜 갑자기 바람이 불었고, 바람이 분 후에 왜 트리스트란이 용기를 가졌을까'하고 의아했다. 뭐 소설 전체적으로 보면, 큰 비중은 없는 부분이지만...

두번째 읽으며 난 이렇게 생각했다. 트리스트란에서 용기를 불어 넣어준 동쪽에서 분 바람은, 트리스트란의 생모인 요정이 불게 해준 것이라고. 사실 모든 힘겨운 여정의 시작은 바로 이 장면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기에, 늙은 마녀의 마법에서 벗어나려는 어머니가 바람을 불게 한 것이라고. 또한 초반 트리스트란의 아버지 던스턴은 '검은모자 사내'에게 숙박료의 일부로 사랑의 묘약을 받게 되는데, 이 묘약은 자손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이 묘약의 효력이 트리스트란에게 미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뭐 이에 대한 확실한 서술은 뒤에가도 찿을 수 없으니 독자나름대로 판단할 수 밖에.

그리고 이야기 초반 트리스트란의 아버지 던스턴에게, 하룻밤 신세를 지게된 '털이 많은 남자'(참드)가 등장한다. 잠깐 스쳐지나간 그는 나중에 트리스트란의 여정을 함께 하게 되는 인연으로 엮여지고, 또한 왕위계승 다툼으로 얼룩진 스톰홀드 왕가는 나중에 트리스트란의 생모와의 인연이 밝혀지는 치밀한 구성이 계속된다.

자, 이제 별을 찿아 나선 우리의 트리스트란. 그가 찿는 별은 의외로 모습을 빨리 드러내는데, 그건 놀랍게도 귀여운 여인이었다.(p.135) '별 아가씨'(나중에 '이베인'으로 불림)는 떨어지다 다리를 다쳐 걸을 수 없는 상태. 트리스트란은 '참드'에게 받은 은사슬로 별 아가씨를 묶고 그녀를 끌고 간다. 이에 반발하는 별 아가씨. 여기서 유니콘이 등장한다. 유니콘은 사자에게 쫒기다 상처를 입지만, 별 아가씨의 정성어린 치료에 회복되고 그녀를 태우고 다닌다. (잠깐, 표지에 유니콘과 위에 타고 있는 아가씨,남자 이제 누군지 알겠죠?^^)

하지만, 별 아가씨를 찿는건 트리스트란뿐이 아니었다. 젊어지는데 특효약이 별 아가씨의 심장을 얻기 위해 마녀가, 왕위계승을 위한 토파즈를 얻기 위해 스톰홀드 왕자들이...그녀를 쫒고 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별 아가씨. 그 와중에 유니콘은 마녀에게 눈을 찔려 살해되는데...(p.212) 난 이 부분에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트리스트란과 별 아가씨를 돕던 유니콘이 이토록 허망하게 죽다니...아무튼 이런 험란한 여정속에서 별 아가씨와 트리스트란의 사랑을 싹트고, 결국 이들은 무사히 윌 마을로 향한다.

그 이후 트리스트란과 빅토리아의 재회,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트리스트란, 드디어 계승자를 찿은 스톰홀드왕가등 흥미진진한 부분이 많지만, 아직 안 읽으신 분을 위해 남겨두겠다. <스타더스트>는 정말 환상적이다. 이 작품이 수상한 '올해 최고의 책' '베스트셀러 1위' '신화환상문학상'등등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성인에서 청소년까지 반드시 읽어야 할 최고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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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pix 2007-08-10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갑니다. 멋진 리뷰군요. 책을 꼭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드네요. 조만간 읽어보겠습니다^^/

쥬베이 2007-08-12 21:27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꼭 읽어보세요. 참 재밌답니다.

책향기 2007-08-16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어제 영화보고 왔답니다. 쥬베이님 리뷰 보고 나니 책도 막 읽고 싶어져서 방금 주문했답니다. 추천 꾹~*^^*

쥬베이 2007-08-16 23:51   좋아요 0 | URL
와~영화보고 오셨군요^^ 저도 보고 싶어요~ㅋㅋ
책 읽으시면 정말 후회하지 않으실겁니다. 완전 최고!!^^

2007-08-16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2 - 두 번째 방문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0
이종호 외 8인 지음 / 황금가지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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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세니 영역이니 하는 얘기들이 꼭 동물의 세계에만 적용되는게 아냐. 어차피 인간 세상도 다 동물의 왕국이야. 내 먹이 , 내 영역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 줄 알아? 그걸 넘보는 것들한테 본때를 보여 주는 거야."-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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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pix 2007-08-09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출간되었군요. 'ㅁ'/ 구입해봐야겠네요.^^

쥬베이 2007-08-12 21:28   좋아요 0 | URL
네. 그런데, 작품마다 편차가 조금 있어요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2 - 두 번째 방문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0
이종호 외 8인 지음 / 황금가지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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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노 쇼코, 사타케 노부히로...이젠 일본이름의 주인공이 낮설지 않다. 아니 아주 친숙하다. 폭풍처럼 밀려든 일본소설의 열풍. 특히 미스테리,공포쪽은 더욱 강하다. 상대적으로 너무나 취약한 우리나라의 미스테리,공포소설. 이는 근본적으로 이 분야를 2류취급하고, 이단시하는 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솔직히 나 역시 그랬다. 정체모를 편견. 읽기도 전에 손사래치던...뒤늦게나마 이 작품을 접하게 되어 기쁘다. 편향된 관심을 바로잡는 방향추가 되어준 작품이다.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두번째 방문>엔 총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작품마다 약간 편차가 있었다. 기억에 남는 건 '벽' '드림머신' '레드 크리스마스', 이 세 작품. 

[벽] 인상적인 것은, '층간소음'이라는 일상 문제를 공포문학으로 형상화해 냈다는 점이다. 읽다가, 저자가 묘사해내는 층간소음의 공포가 어찌나 절절하게 다가오던지 나도 모르게 우리집 천장을 쳐다보았다. '층간소음'은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는 동윤과 인하. 남편의 승진, 새집마련, 자기 소설의 영화화, 그리고 임신까지, 행복은 절정에 달하지만, 이는 동시에 불행의 전조곡이었다. '쿵쿵쿵' 울려대는 천장. '쿵쿵쿵' '쿵쿵쿵'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천장을 울려대는 기세가 어찌나 우악살 스러운지 금방이라도 발바닥이 천장을 뚫고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p.19) 또한, 동윤과 인하의 물건이 완벽하게 사라져 버리는 일이 반복되고, 불행과 공포는 서서히 다가온다.

[드림머신] 탁월한 묘사에 감탄했다. 특히 초반부 유진의 꿈 묘사(p.143-145)는 압권이다. 일단 내용을 보자. 귀여운 아미. 자상한 유진. 둘은 이상적인 커플이다. 그들은 특별한 데이트를 꿈꾸며, 두 사람이 함께 잠들면 먼저 잠드는 쪽의 꿈을 함께 꿀 수 있다는 '드림머신'을 체험하기로 한다.

드림머신이란 설정은 꽤 익숙하다. 어찌보면 다소 진부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저자는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와 날카로운 묘사로 이를 돌파한다. 아미는 상당히 귀여운 이미지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요즘여자'를 정확히 재현했다. 또한 드림머신을 운용하는 '홍'의 악마적 이미지도 인상적이었다.

[레드 크리스마스] 강렬했고, 통쾌했다.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으로 꼽겠다. '레드 크리스마스'엔 악마, 유령같은 비현실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이들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공포소설이라기 보다, '사회적 잔학극,복수극'(이런 용어가 적절한지는 몰라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었는지 몰라도.

폐지를 수거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노인. 그런 그 앞에 괴롭힘 당하는 늙은 개가 있다. 왕자처럼 자란 우리의 꿈나무들에게 늙은 개는 또다른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개 주둥이에 철사를 걸어 개를 고문했다.(p.219참조) 노인은 개를 구해, 같이 지내고 이내 깊은 애정을 공유한다. 늙은 개와 노인의 우정, 사랑…그건 그 어떤 것보다 못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악마였다. 단순히 철없음으로 변명하고 넘기기엔 그들의 행동은 너무나 잔악하다. 결국, 개는 죽고 노인은 눈물을 흘린다. 당신은 노인의 분노를 이해 할 수 있는가? 가슴이 울렁거린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난 분노했다.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노인이 결국 아무런 보상도 없이, 추락해야만 하는 우리 사회...그리고 생명의 가치를 모른채, 제 멋대로 자라나는 아이들...저자의 비판은 강렬하다. 그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우리 사회의 추악함이다. 유령도 악마도, 끔찍한 묘사도 없는 이 작품이 공포스러웠다면, 그건 바로 저런 이유 때문이리라.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저자에 특별한 고마움을 전한다.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두번째 방문> 마지막 장을 넘겼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는 말'이다. 척박한 현실속에서 묵묵히 이 분야개척을 위해 노력해 온 작가분들과 출판사에…우리 공포문학의 밑알을 뿌리고 있는 그들은 칭찬받아야 한다. 이 작품이 편향된 관심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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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피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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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TV피플>,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함께 해준 책이다. 책도 마음대로 못 읽던 군대에서, 그것도 GOP에서 잠잘 시간을 쪼개 읽던 <TV피플>. 참 많이 읽었다. 읽고 또 읽고…또 읽고…과연 그 때 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뭘 느꼈던 것인지, 어쩌면 마냥 글이 그리웠던 것일 수도…

갑자기 생각나 찾아보니 '판'도 '출판사'도 바뀌어 있다. 그리고 펼쳐보니 단편의 '수록 순서'도 바뀌어 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책은 'TV피플'이 제일 앞에 있었는데, 여기엔 젤 뒤로 가 있다. 새로 읽으며, 생각해 보니 새로운 수록순서가 더 나은거 같다. 가장 맛있는건 역시 나중에 먹어야 하는 법. <TV피플>은 단편 6편이 수록된 단편집이다. 표제작 'TV피플'과 '잠'은 분량이 조금 긴 편이다. 수록 순서대로 살펴보자.

[가노 크레타] 가노 크레타, 가노 마루타 두 자매의 이야기이다. 언니 마루타는 '물의 소리를 듣는 일-인간의 몸을 채우고 있는 물의 소리를 듣는(p.11)'을 하고, 동생은 언니를 돕는다. 동생은 이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건 남자들이 그녀를 보면 반드시 범하려고 한다는 것(p.14)이다. 그걸 그녀의 문제라고 해도 될런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크레타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다.

한가지 사건이 있었다. 크레타를 범하려 했던 경찰을 언니가 살해한 것. 경찰은 유령이 되어 떠돌지만, 유령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한편, 건축설계재능을 살려 행복한 삶을 시작하려던 크레타를 찿아온 한 남자. 크레타는 인간의 몸을 채우고 있는 물의 소리를 분명히 듣는다. '자기' 몸을 채우고 그 소리를. 굉장히 짧은 분량이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극히 비현실적인 설정, 마지막 '래롯프'의 의미등 안개숲을 걷는 기분.

[좀비] 결혼을 앞두고 있는 다정한 커플. 그들은 묘지옆으로 난 길을 걷고 있다. "오른쪽 귀 바로 안에 사마귀가 세 개 있어. 아주 방정맞은 사마귀야"(p.29) 이 말이 비극의 시작임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악담후 정체를 드러내는…좀비. 그건 과연 꿈일까? 다른 작품에 비해 이야기가 명료하다.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도대체 어떤 것이 꿈이고 어떤 것이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 그 속에서 온 몸을 죄어오는 공포.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계절하고 잘 매치된다.

[우리들 시대의 포크로어] <상실의 시대> 분위기와 조금 비슷하다. 고등학교 내내 함께 공부하고, 옷을 입은 채 페팅을 하던 커플. 남자는 그 이상의 관계를 원하지만, 여자는 거부한다. "만약 약속을 하라고 하면 하겠어. 난 너랑 잘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내가 누군가와 결혼한 다음에 너랑 잘 거야. 거짓말이 아니야. 약속해."(p.66) 남자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이렇게 엉성한 관계는, 조용히 역시 엉성하게 끝나 버린다.

시간은 흘러 두사람 모두 가정을 이루고, 남자는 수입가구 사업으로 나름대로 성공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걸려온 그 여자의 전화. 그녀는 말한다. "난 옛날에 너랑 한 약속을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그들은 만난다. 과연 그들의 만남은 그들 삶에 어떤 의미일까?

[TV피플] 가장 난해했고, 깊게 고민했던 작품이다. 일요일 저녁무렵 방문한 TV피플. 그들은 인간의 몸을 축소한 작은 체형이며, 짙은 파란색 윗도리를 입고 있다. 이들은 아무말 없이 묵묵히 TV를 옮기고, 전선을 연결한다. 이들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사라진 아내와 방안을 휘젓고 다니는 TV피플. 저자는 TV속에 매몰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한마디로 결론 내리기는 불가능하다. 저자가 어떤 의도로 썼든 받아들이는건 독자의 몫이니…

요즘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있다. <상실의 시대>, <어둠의 저편>등 읽을때마다 느끼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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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2007-08-21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맛있는 건 역시 나중에 먹는 법".. TV 피플이 얼마나 재미있을지 이 대목에서 확 기대가 되는걸요.

쥬베이 2007-08-22 10:22   좋아요 0 | URL
아^^ 반가워요 고도님.
조금 난해한 작품이 있답니다. 어떠실지 조금 걱정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