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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학기 ㅣ 밀리언셀러 클럽 63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 스포일러 있을지도
유명소설가 '우부카타 게이코'의 남편이 출판사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저의 처, 옛 성으로 '기타무라 게이코'는 열살때 어느 남자에게 납치되어 1년여간 남자의 방에서 감금되어 지냈습니다. 남자는 체포되고 아내는 무사히 돌아왔으며 사건도 종결됐습니다. (중략) 그러나 아내의 침묵은 한통의 편지에 의해 깨졌습니다. 22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걸쳐 죄를 보상하고 출소한 범인으로부터 처 앞으로 편지가 온 것입니다."(p.10-11) 가타무라 게이코는 범인의 편지를 받은 후 갑자기 사라진다. '잔학기'란 소설의 원고와 범인 겐지의 편지만을 남기고…
이후 이야기는, 여류소설가 '가타무라 게이코'가 10살 때 겪은 충격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잔학기'란 소설이다. 게이코는 '성장한 여류소설가 가타무라 게이코'로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잔학기속 납치됐던 소녀로만 등장하는데,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녀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는다.
현실감각 없는 어머니의 욕심 때문에 옆 동네 발레교실에 다니던 게이코는 발레교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겐지'라는 사내에게 납치당한다.(p.34-36 ) 자기를 '밋치'라고 부르는 이상한 사내, 가끔씩 가해지는 폭력, 게이코는 발버둥친다. "나는 맞는 것이 두려워 겐지의 옆에서 울기를 그치고 오로지 겐지의 페이스를 따라가고자 노력했다."(p.38) 겐지는 폭력만 휘두르는 게 아니라 밤에는 동급생처럼 다정하게 굴고, 낮에는 게이코를 발가벗겨 놓고 자위를 하는 등 음란한 짓을 자행한다. 이러한 낮과 밤에 이중적 태도에 대해 게이코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겐지는 의도적으로 두 역할을 구분해 쓰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중략) 속죄라기보다 낮의 겐지를 정당화하고 낮의 겐지의 욕망을 여는 안내역으로서 밤의 겐지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p.57)
이러한 감금상태는 아무도 없는 방에 전기미터기가 돌아가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사장부인에 의해 게이코가 발견됨으로써 끝이 난다. 예상 밖으로 너무 빨리(제1장이 끝나기도 전인 76페이지에서) 발견돼 조금 당황했다. 이야기의 중심이 '감금된 소녀의 내면, 심리상태'라면 겐지에 의한 감금이 소설 속에서 상당히 오래 지속될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알았다. 기리노 나쓰오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는 것을.
"나는 주어진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선의와 동정조차도 상처를 더욱 깊이 후빈다는 것을 배웠다."(p.109) 낮선 남자에게 납치되었다 풀려난 게이코.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는 건 "게이코, 겐지에게 야한 짓 당하지 않았니?" "너 혹시 겐지하고 사이가 좋았던 것 아니니?"라는 사람들의 이상한 관심, 수사기관의 집요한 추궁. 그리고 친구들의 부담스러운 동정과 이상한 호기심. 게이코는 이야기한다. "나는 겐지와의 단순한 생활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나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나도 험난하고 적대적인 것처럼 느껴져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p.119) 게이코는 오히려 납치범 겐지와의 생활을 그리워 할 정도로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힘겹기만 하다.
여기서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바로 '야타베'이다. 야타베는 납치범 겐지의 옆방에 사는 사람으로, 귀가 멀고, 손가락 한마디가 잘린 겐지의 공장 동료이다. 게이코는 야타베의 존재에 안심을 하고, 나중에 자기를 구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야타베일거라 생각한다. 게이코의 말을 들어보자. "그러나 단 한 가지, 공포를 이겨낼 희망이 싹텄다. 야타베씨라는 남자의 존재였다. 나는 야타베씨가 언젠가 나를 구출해줄 것이라는 희망에 부지런히, 꾸준하게 비료를 줬다. 희망은 점점 커졌다. 1년에 이르는 감금 생활 중에서 야타베씨는 반드시 올 구세주이자 나의 동경, 아니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변해갔다."(p.51)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야타베는 게이코를 구해줄만한 사람일까? 나중에 밝혀지는 야타베의 추악함을 떠올리면 게이코의 소망은 안스러울 뿐이다.
게이코 남편의 편지로 이야기가 시작된 것처럼 이야기의 끝 역시 게이코 남편의 편지를 통해 서술된다. 이 부분은 지금까지 이야기를 정리하는 부분으로 잔학기란 소설에 대한 남편의 평과 사건의 진실에 대한 견해가 중심이다. 게이코 남편은 바로 납치사건을 담당하고 겐지를 조사했던 검사임이 밝혀지는데, 읽다 약간의 충격을 느꼈다. (여기선 비중 있게 언급하지 못했으나, 게이코와 담당검사와의 관계역시 상당히 흥미로웠음) 게이코의 남편은 사건의 진실을 오랫동안 추적한 사람답게, 충격적인 여러 견해를 제시한다. '겐지,야타베,사장부부 공범설'이나 '겐지,야타베공범설'등
하지만 정말 충격적인 것은 바로 게이코의 고백이다.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자. "겐지와의 생활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나는 이 원고의 앞부분에 적었다. (중략) 겐지는 낮에는 나를 욕보이면서도 밤에는 사이좋게 지내자며 다정한 얼굴로 다가오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 기술에는 거짓이 없다.(중략) 거기에 내 기분의 변화는 자세히 적지 않았다. 확실히 적겠다. 나는 겐지를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겐지가 일을 하러 가 있는 동안엔 그가 빨리 돌아왔으면 하고 애를 태웠고 겐지와 함께 지내는 것을 즐겁게 생각했다. 겐지의 자위를 도운 일도 있었다. (중략) 나는 밀실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겐지를 사랑했다. (중략) 겐지를 좋아하게 된 순간, 그 방은 나와 겐지 두 사람만의 왕국으로 변했다.(p.198)
그랬다. 게이코와 겐지사이에는 납치범과 피해자라는 관계를 뛰어넘는 교감이 존재했다.
난 읽는 내내 의문이었던 제목 '잔학기'의 잔학이 무었을 의미하는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게이코에게는 겐지와 함께한 1년여의 감금보다도, 감금에서 풀러난 이후 자기에서 쏟아진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과 관심, 지나친 동정, 부모의 갈등등이 오히려 잔학했던 것이 아닐까?
"나는 겐지와의 단순한 생활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겐지를 좋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