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보다 어린 일본작가의 소설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다행히 국내엔 나보다 나이 어린 작가가 없어, 안도했었는데^^ 이제 저런 정체불명의 안도감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달의 바다>의 정한아님은 나하고 동갑이다. 조금 놀라우면서도 아주 반갑다. 내 또래도 이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구나, 나도 나이를 먹어가는 구나, 하는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달의 바다>는 미국에 사는 고모가 할머니(즉, 고모에게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내용과 은미, 민이 그려내는 이야기가 번갈아 서술된다. 고모는 편지속에서 자기가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하는 우주비행사를 자처하고 할머니는 이를 철석같이 믿는다. 할머니는, 거처를 옮기게 되어 영영 편지를 못할거 같다는 고모의 말에, 손녀 은미를 고모에게 보내 안부를 확인하게 하고, 은미는 절친한 친구 민과 미국으로 향한다.

간략하게 이야기한 것이 <달의 바다>스토리의 전부다. 심사위원들로부터 군더더기없다는 평을 받은 간결한 구성. 또한 소설은 부담없이 진행되며, 가독성도 좋다. 그리고 예상은 했지만 막판에 약간의 반전도 있다. 작가의 첫 장편에, 데뷔작임을 고려한다면 꽤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듯하다.

아쉬운 부분도 있다. 저자는 할머니,고모등으로 대표되는 여성성을 은연중 부각하고,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남성성을 비판, 조소한다. 다음 서술을 보자. '할머니가 환상과 꿈, 아름다움, 비극, 무지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할아버지는 적금과 등산, 단골손님, 소갈비, 독감예방주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남편과 삶을 공유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일 때마다 모욕과 비웃음을 당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마음을 감추게 되었다.'(p.52)

여기서 저자는 천진한 감상을 가진 할머니를 '고결하게' 부각하며, 일상적인 것에만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할아버지를 조소하고, 할머니의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점을 비난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비난은 이유가 있는가? 왜 할아버지는 단골손님과 소갈비에만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 할아버지를 비난하려면 먼저 저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부인,아들,딸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다. 과연 그에게 환상과 꿈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이 없을까? 아닐 것이다. 한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현실의 무거운 짐이 그를 일상적 믿음으로 내몰아 버린 것이다. 만약 할아버지가 아름다움, 무지개에만 믿음을 가졌다면, 비현실 몽상가의 가족은 거리로 내 몰릴것이 분명하다. 생각해 보자. 할아버지가 없고, 할머니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과연 할머니는 저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할머니의 믿음은 할아버지의 믿음이 있기에 존재 가능한 소녀적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부분은 또 있다. 저자는 미혼모가 된 고모와 그녀를 다그치는 할아버지를 대조하고 역시 할아버지를 은연중 비난한다. '할아버지는 모든 가혹행위로 고모를 심문했다. 하지만 끝내 아기 아버지가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중략) 할아버지는 이틀이 멀다 하고 물건을 부수며 고함을 질렀고 할머니는 고모와 할아버지 사이를 가로막고  버티다가 내동댕이쳐쳤다. (중략) 고모의 차분하고 담담한 표정을 바라보면 잘못된 쪽은 할아버지인 것 같았다. (중략) 모녀는 자연스럽게 출산을 준비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였기 때문에 문제를 다시 들춰내려는 사람은 어딘가 촌스럽고 야비하게 느껴졌다.'(p.55-56)

과연 미혼모가 된 딸을 다그치는 할아버지에게 잘못이 있는가? 이 문제가 촌스러움,야비함을 언급할 문제란 말인가? 조금 황당하다. 자기가 미혼모가 되기로 결정했는데, 애비인들 뭔 상관이냐고 할 사람도 있을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험한 세상에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 문제는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뱃속에 있는 아이의 삶까지 고려해 결정해야 할 문제다. 과연 고모는 모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미혼모가 되기로 한 것일까?

뒤이어 서술되는, 자기 자식을 할아머지, 할머니(위에도 언급했지만 자기한테는 부모)에게 맡겨 버리고 나 몰라라 하는 부분에선, 위에서 보이는 그녀의 자신만만함이 오버랩 되며 심한 분노를 느꼈다. 내가 보기엔 고모는 현실감각없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더 이야기하자. 고모는 우주비행사일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며, (이는 핑계임을 잘 아시지 않는가? 끝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자기 자식을 부모에게 맡기고 15년간이나 소식을 끊는다. 이게 과연 그처럼 당당하게 미혼모가 되겠다고 지랄하던 그녀의 모습이란 말인가? 생명은 장난이 아니다. (이 문제는 상대 남성이 근본 문제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비난은 없이, 괜한 할아버지만 비꼬는 점을 지적한 것)

음, 이건 약간 사소한 문제인데, 할머니의 부탁을 받은 은미는 친구인 민과 미국으로 향한다. 하지만 과연 민이 그렇게 쉽게 은미와 동행을 결정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왜?? 이 직전에 은미는 민의 성정체성과 자존감에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은미는 자기에게 성정체성 혼란과 수술에 대한 의견을 묻는 민에게 "장담하건대 너한테는 끼라는 게 없어.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트랜스젠더들은 기본적으로 자태라는 걸 갖고 있는데, 봐, 너는 누가 봐도 뻣뻣하잖아. 어느 모로 봐도 너무나 건장한 남자라고."(p.28)라며 차갑게 일축한다. 이에 민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절망적으로, 본노에 가득 차서, 마치 화염을 내뱉듯이 소리를 질렀다. 다시는 나를 보지 않겠다면서 머리띠를 집어던지고,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마구 때리면서, 시뻘게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나쁜 년이라고 고함을 질렀다.'(p.28)

보았는가? 민은 자기가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정체성 문제를 정면에서 비아냥거린 은미에게 극한 분노를 느끼고 '다시는 은미를 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그 다음 아무런 극적화해 장치가 언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이들은 아주 친한 모습으로 미국으로 고모를 만나러 떠난다. 거 참, 묘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구성.

그리고 초반부에 가장 의심스러웠던 것은, '미혼모인 고모가 정체도 불분명한 미국인을 따라 미국으로 가서, 우주비행사가 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건 아무리 그녀가 국립과학연구소에 취직한 적이 있다는 점(p.66)을 고려해도 거의 불가능 한 일이다. 난 이 점을 집중 비판하려고 했는데, 뭐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이라면 알지 않는가?^^ 저 비판은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은미와 고모의 만남 이후, 고모의 밑바닥 삶을 보고 난 저자가 내릴 결말을 이해했다.

주제 넘게 너무 많은 말을 한거 같다. 모든 걸 떠나 <달의 바다>는 느낌이 좋은 소설이다. 그 점 하나만으로도 가치를 가진다. 일본소설이 놀랄만한 속도를 잠식해 들어오는 현실에서 정한아라는 참신한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다. 앞으로 더 멋진 소설을 독자들에게 선보여 주시길.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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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04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을 것 같다고 나름 혼자서 기대하던 책인데 별점이 생각보다 적어서 재미없나보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일어볼만한 소설이란 확신이 생기는 군요.^^

쥬베이 2007-08-04 11:33   좋아요 0 | URL
아...아니에요^^ 제가 요즘 별점에 아주 인색해지기로 정했거든요ㅋㅋㅋ
웬만한 일본소설보다 괜찮아요~ 일단 느낌이 좋거든요^^

유스케 2007-08-04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을 읽어보니... 느낌이 좋은 책일것 같습니다. 한국소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이 요즘은 왠지 버겁게 느껴져서 막연히 멀리했는데요.. 이젠 이유없는 반항은 그만 끝내야겠습니다. 웬만한 일본소설을 너무 읽어서일까요? 집이 너무 그리워졌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첫걸음으로.. 이 책을 읽어보는것도 괜찮을것 같네요 ^^*

쥬베이 2007-08-04 18:23   좋아요 0 | URL
네네 집으로 얼른 돌아오세요~ 저도 요즘 집이 너무 그립습니다.
반성중이죠 ㅋㅋ

2007-08-09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쥬베이 2007-08-12 21:27   좋아요 0 | URL
한번 읽어보세요^^ 느낌이 괜찮아요

2007-08-16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쥬베이 2007-08-22 15:41   좋아요 0 | URL
디드님 댓글을 이제야 봤네요^^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도 부러웠어요. 벌써 등단해 작가활동을 하다니... 디드님 저하고 동갑.ㅋㅋ 반가워요
 
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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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뒤틀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절한 고통을 받은 우리의 형제자매들. 일제의 악랄한 식민통치, 끔찍한 소비에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등, 우리는 강대국의 노예였다. 이런 우리 부모형제들의 고통과 비극은, 안타깝게도 개인차원에서 조명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냥 '민족의 비극'인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 개인 한 사람의 삶? 그건 사치였다.

조정래님은 역사적 소용돌이속에서 고통받은 개인을 주목한다. 복도훈님의 해설을 잠시 살펴보자.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을 뿐이며, 역사와 그를 기록하는 사가는 알렉산더가 인도를 정복할 때 그 혼자서 해냈는지 묻지 않고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완성한 날 밤에 벽돌공들과 인부들이 어디로 갔는지 더이상 궁금해하지 않는다. 조정래는 소설 또는 문학의 임무는 만리장성을 쌓았던 벽돌공들과 인부들의 한 많은 이야기와 신산스러운 삶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충실히 전달하는 것이 일차적 소임임을 분명히 한다."(p.224)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베니스의 개성상인처럼 조금은 의아한 사진이다. 한 동양인이 독일군복을 입고 적개심(?) 가득한 시선으로 처다보고 있는 사진. '오 하느님'은 사진에서 부터 시작된다해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소설속에서는 등장인물이 직접 사진을 찍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점은 복도훈님도 뒤 해설에서 약간 의아하다는 뉘앙스로 언급하고 있다) 그럼 소설속으로 들어가 보자.

일본은 지원병임을 가장하고, 만주로 쫓아낸다고 협박해, 젊은 청년들을 전선으로 내몬다.  신길만. 그 역시 부모의 말을 뒤로 하고 전지로 떠난다. "총알 피해 댕겨라"(p.20) 아버지의 무뚝뚝한 한마디. 귀한 자식을 전지로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는 옥쇄를 강요하는 일본군에서 벗어나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다. 힘겨운 포로생활. 어느 날 갑자기, 소련군 장교는 신길만을 포함 한국인 포로들에게, 소련군이 되는건 어떠냐고 제의(?)하고 그들은 받아들인다.(p.83) 갑자기 달라진 대우. 그들은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는 독일군과 맞서 싸우다 독일군의 포로로 잡히고, 또 독일군이 될 것을 강요당한다. 독일항복 후 이번엔 미국의 포로가 된 그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조국이 아니었다. 마지막 장면은 조금 갑작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가슴의 다가온 울림은 심했다.

200페이지 가량의 짧은 장편이라,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우리민족의 슬프고 가련한 역사와 그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우리 형제자매들. 많은 생각을 했다. 자칫 잃혀질 수 있었던 한 인물을 저자는 훌륭하게 그려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삶, 갈등이 크게 부각되지 않아 등장인물이 조금 밋밋하다. 그리고 위에서 잠깐 언급한 급작스러운 결말과 실존하는 사진이 찍혀진 내역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역시 아쉬웠다. 내용의 깊이나, 소재만을 봤을때, 거의 대하소설급인데 너무 짧은 소설로 그려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조정래 작가님께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거 같지만^^) 

 

* 200페이지 정도인데, 책이 상대적으로 두꺼워 보인다. 종이질이 다른걸까? 조금 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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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구판절판


산이 없어 가려질 데가 없는 초원의 하늘은 초원보다 더 아스라하게 넓었다. 그 하늘에서 크고 작은 새떼들이 휘돌고 맴돌면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새떼들은 맘껏 날갯짓하며 무성한 풀숲으로 급강하하고는 했다. 시체를 뜯어 먹으려는 독수리떼와 까마귀떼였다. 그것들은 날마다 포식을 했다. 새떼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맘대로 뜯어 먹고 있으니 산 사람도 먹이로 보이는 것인지 몰랐다. 새떼들은 대포가 폭음을 터트릴 때나 겨우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들은 비웃기라도 하는 듯 소총 소리나 기관총 소리에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8쪽

독수리떼와 까마귀떼는 포식한 것을 소화라도 시키려는 듯 가끔씩 그 푸른 하늘로 날아올라 빠르게 휘돌고, 느리게 맴돌고, 어지럽게 감돌면서 검은 군무를 추고는 했다. 그 검은 춤은 검은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검은 날갯짓들은 소련군의 살기를 실어와 이쪽에 뿌려대는 것처럼 불길했다. 새떼는 더 많이 포식하기 위해서 죽음을 부르는 저승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고, 제멋대로 까욱까욱 울어대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들은 영락없는 장송곡이었다.-34쪽

사람끼리 말이 통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중대한 것인지 신실만은 이번에 절실히 깨달았다. 사람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건 사람과 사람 사이가 아니었다. 서로의 마음이 통하지 않으니 사람과 짐승 사이나 같았고, 서로 아무 감정도 통하지 않는 바윗덩어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사람끼리 말이 통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하루 세끼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중대한 일이었다.-56쪽

시체 위에 시체가 포개졌고, 부상자들이 눈보라 속에 그대로 버려져 죽어갔다. 하얗게 눈 덮인 대지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 위에 다시 눈이 내려 덮었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눈은 또 붉게 물들었다. 마치 하늘과 인간이 거대한 화폭의 추상화를 그리고 지우는 다툼을 벌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105쪽

추위 속에서 이천여 명은 삽시간에 발가숭이가 되었다. 알몸으로 우글거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상스럽게 생긴 짐승들이었다. 그들은 알몸이 되자마자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하나같이 몸을 웅크리며 두 손을 모아 아래를 가렸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니 그 모습은 옷을 입고 움직이는 독일군들과는 너무나 다르게 보였다. 인간은 옷을 입어야만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을 갖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117쪽

신길만은 고기를 잘라 입에 넣었다. 구수한 고기 냄새가 입안에 퍼졌다. 군침이 지르르 흘렀다. 고기의 감촉에 혀가 요동쳤다. 고기를 꿀떡 삼켜버리고 싶도록 목구멍이 크게 열리고, 어서 넘겨달라고 뱃속에서는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대로 삼키고 싶은 욕구를 누르며 고기를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졸깃졸깃한 육질의 탄력에 이들이 일제히 환호한다. 향기로운 고기 냄새가 씹을수록 진하게 퍼진다. 그리고 달치근하면서도 고소한 고깃물이 입 안 곳곳으로 스며든다. 막으려고 했지만 고깃물이 저절로 목구멍으로 넘어가 뱃속으로 흘러들어간다.-169,170쪽

흰 종이 위에 새빨간 피글씨들이 한 자씩 그려져나갔다. 몸속에 감추어져 몸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피들이 이제 주인의 몸을 구하려고 몸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는 붉었지만 단순히 붉은색이 아니었고, 액체였지만 단순히 액체가 아니었다. 피의 붉은색은 피만의 독특한 붉은색이었고, 액체이되 농도와 온기가 다른 액체였다. 그건 목숨이 담긴 붉은색이었고. 영혼이 스며 있는 액체였다. 주인의 생명을 구하려고 그려지고 있는 떨리는 피글씨들은 숙연하고 처연했다.-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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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다음에서 '거실을 서재로' (샘터사 후원) 이벤트도 당첨 시켜주더니, 이번에 또 당첨시켜 줬네요ㅋㅋ 고마워 다음^^

'마지막 선물'이라...제목이 같은 책이 많아 어디 출판사인지 모르겠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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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dgghhhcff 2007-08-04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베이님 다음과 인연이 있으신가 봐요 ㅎㅎ 다음에서 자꾸 당첨되시네요.^_^
마지막선물이란 책 당첨되셨군요~! 축하드려요~

쥬베이 2007-08-04 11:49   좋아요 0 | URL
ㅋㅋ그런가봐요~ 자꾸 당첨되네요ㅋㅋㅋ

비로그인 2007-08-04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거실을 서재로에 당첨되셨다니 너무 대단하네요. 다음에서 쥬베이님을 사랑하나봐요.ㅋ
저에게도 그런 사랑을 보여주면 얼마나 좋을까요.ㅋ

쥬베이 2007-08-04 11:49   좋아요 0 | URL
짱돌이님에게도 행운이~!!
다음에 리뷰 자주 올렸더니, 자주 뽑아주는거 같아요 ㅋㅋㅋ
 
나를 훔쳐라
박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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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가 박성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소설집 <우리는 달려간다>를 통해서였다. 몽롱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가 마음에 들어 마음속에 새겨두었는데, 갑자기 그의 다른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이상 이상 이상>, <나를 훔쳐라>, 이렇게 두편의 소설 전부 구입했다. 다행히 출간된지 10년이 넘은 <이상 이상 이상>이 절판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정말 감탄했다. 이런 멋진 작가를 왜 이제까지 알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와 더불어, 일본소설만 탐닉해 오던 내 자신을 돌아봤다. 우리 주변엔 이렇게 멋진 작가가 있었던 것이다. 가장 놀라운 점은 '하리망당' ' 아치랑거리다' '흥감스레' '훙뚱항뚱' '새근발딱' 같은 멋드러진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껏 젊은작가들 중, 박성원 작가처럼 우리말을 아름답고 멋지게 구사하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저자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댈러웨이의 창] 세든 청년의 여자친구에게서 느끼는 묘한 감정과 댈러웨이를 통해 서술되는 철학적 사유가 인상적이었다. 이층에 세든 청년, 그리고 그를 찿아온 여인. 화자는 이층으로 사라진 그들의 행방을 쫓으며, 외로움을 느끼는데 그 심정이 공감이 갔다.(p.13-14참조)

댈러웨이. 댈러웨이는 사진을 직접찍기 보다, 피사체에 반사된 모습을 표현해 냈던 작가라 한다. 그의 사진은 평범해 보이지만 고도의 기술과 주제 의식이 들어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화자는 청년을 통해 댈러웨이를 알게 되고, 댈러웨이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지만, 곧 그를 잊기로 한다. 댈러웨이와 위에서 언급한 여인은 오버랩된다고 이해했는데, 다음 서술을 보자. "애정이 증오로 치닫고, 또 그리움이 혐오로 쉽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댈러웨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상하게 구토가 속을 우비고 올라왔고, 댈러웨이 사진을 응용한 광고를 보면 가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p.27)

댈러웨이란 인물은 과연 실제할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정말 사실인가? 사실이란게 존재하긴 하는 것인가? 나중에 밝혀진 진실은 그만큼 충격적이다.

[중심성맥락망막염] 구더기사내, 화자, 그리고 친구의 술자리 대화(상담)가 핵심내용인데, 그들 대화의 깊이는 만만치 않다. 구더기사내? 무릎의 상처가 썩어가지만, 항생제 거부반응때문에 항성제를 사용할 수 없는 사내는 썩은 살만을 먹어치우는 구더기를 무릎에 넣은 것이다. 자기 몸속에 구더기라니...끔찍하지 않을까? 부끄럽지 않을까? 아니다. 사내는 당당하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회충이나 십이지장충 같은 것들에 비하면 이 구더기는 얼마나 이로운 생물입니까? 회충은 생살을 뚫고 기생하면서 온갖 질병을 일으키지만 제 몸 안에 있는 구더기는 생살을 먹지 않습니다. 오직 썩은 부위만 먹을 뿐이라 이 말입니다. 회충이 얼마나 독한 놈들인지 모두들 잘 아시죠? 수컷은 온몸이 생식기로 이루어져 있고 또 암컷은 한 번에 20여만 개의 알을 낳을 수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 중에 이처럼 섹스만 밝히는 더러운 것들은 또 없을 겁니다."(p.38-39)

구더기사내는 중심성맥락망막염이란, 병에 대해 상담을 하고자 한다. 저 병은 망막이상으로 사물의 일부가 보이지 않는 병이다. 볼펜을 들고 있는 손을 바라보면, 손만 보이고 볼펜은 보이지 않는거 같은…. 이야기전개와 무관하게, 난 처음 '이 병이 그렇게까지 고민할 병인가'란 생각을 했다. '걸리면 죽는 불치병이 널렸고, 죽음보다 심각한 고통을 주는 병도 있는데 말야' 하고.

하지만 다음 서술을 보자. "제가 이 병을 겁내고 또한 지독하다고 느끼는 것으 제가 보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사물을 보거나 혹은 책을 읽더라도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확인하지 않으면, 제가 본 것이 과연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점 말입니다."(p.44) 그렇다. 자신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는 삶은, 진실 저 편에 있는 삶일 것이다. 왜 그가 힘들어 하는지 알았다.

저자는 이런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과연 자기가 본 것을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중심성맥락망막염'을 앓고 있지 않다면, 사물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저자는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저런 질문을 재기발랄하고 멋지게 부각시킨다. 짧은 단편이지만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가히 충격적이다. 저런게 능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리뷰에는 단 두편만 소개했지만, 수록되어 있는 단편 모두가 하나하나 음미해야할 가치를 가진다. 아름다운 우리말과 함께, 저자가 던지는 깊이있는 메시지를 가슴으로 느껴보길 바란다. 정말 훌륭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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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pix 2007-08-0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댈러웨이의 창을 읽고 정말 충격을 받았지요. 지금도 종종 생각나는 단편이에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쥬베이 2007-08-02 19:53   좋아요 0 | URL
정말 충격받을만한 작품이에요. 감사합니다^^

turnleft 2007-08-0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이 책도 보관함으로~

쥬베이 2007-08-03 18:34   좋아요 0 | URL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아무래도 소장해야 할거 같아,
주문했습니다. 두고두고 읽게요 ㅋㅋㅋ

프레이야 2007-08-03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베이님, 박성원이라는 작가를 소개받고 갑니다. 꾸욱^^
순우리말의 재발견도 의미있구요. 담아갑니다.

쥬베이 2007-08-03 18:35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우리말이 제대로 쓰였습니다.
해설을 읽어보니, 저자는 우리도 생소한 우리말을 통해 '낮설기하기'의 효과까지 노린거 같다고 하더군요.

네꼬 2007-08-03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렇게 쓰시면 안 읽을 수가 없잖아요. =_=

쥬베이 2007-08-03 18:35   좋아요 0 | URL
꼭 읽어보세요^^ 괜찮으실 거에요~~

302moon 2007-08-0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소설집. 여기서 보니, 반갑습니다. 저도 그때, 우리말 활용에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

쥬베이 2007-08-04 10:0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