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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전설 세피아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읽기 전, 표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뚫어지게. 묘한 분위기의 그림이었다. 언뜻 보기엔 괴기스럽지만, '괴기스럽다' 이 한마디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느낌이다. 통통한 볼살과 둥글둥글한 얼굴, 생뚱맞아 보이는 선글라스, 조금 귀엽기도 하다. 이처럼, 어느 한 가지 느낌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그림. 이런 미묘한 느낌을 슈가와 미나토의 글을 읽으며 또 한 번 느꼈다.
<도시전설 세피아>는 5편의 단편이 실린 단편집으로, 슈가와 미나토의 데뷔작이다. 인상적인 단편 두세 편만 소개하려고 했는데, 읽고 난 지금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어느 하나 부족하다고 느낀 단편이 없기 때문이다. 전부 마음에 들었다. 이런 경우는 정말 드물다, 거기다 이 작품은 저자의 데뷔작이지 않은가??
[올빼미 사내] 사고로 중증 정신지체아가 된 '이사오'. 그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지만, 늘 혼자였다. 놀이터에서 호-오 호-오 호-오 라는 올빼미 우는 소리를 내, 아이들에게 같이 놀자고 호소하던 이사오. 하지만, 그 목소리에 응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p.18) 이야기 속 화자인 '나'는 이사오를 부러워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사오가 괴롭힘 당하는 아이를 구해준 사건을 통해 아이들 사이에서 전설의 주인공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 요컨대, 이사오는 '올빼미 사내'의 원형인 것이다.
이야기속 '나'는 꿈꿔왔던 전설속 주인공이 되기 위해, 인터넷을 통해 올빼미 사내란 도시전설을 퍼트리고, 인터넷 속에서 올빼미 사내는 점점 구체적으로, 공포스럽게 성장한다. 인터넷을 통해 올빼미 사내 이야기가 확대되는 과정-외양묘사에 지나지 않던 올빼미 사내가 사람들에 의해 점점 더 구체적인 특징까지 갖게 되는-은 부화뇌동하는 대중의 어리석음과 인터넷매체의 부정적인 면을 보여준다.
올빼미 사내 전설을 좀 들어보자. '올빼미 사내 이야기, 아세요? 요즘 나도는 도시전설 가운데 하나인데, 갈색 코트에 흰 장갑을 끼고 미러 선글라스를 쓴 남자라고 합니다. 밤거리에 나타나 호-오 호-오 호-오 하는 올빼미 소리로 말을 건답니다. 인간세계에 숨어들어 있는 동료를 찾는 거래요. 즉시 호-오 호-오 호-오 하고 대답하지 않으면 눈동자를 후벼 판답니다. 만약 깜빡하고 찍찍, 찍찍하고 쥐 소리로 대꾸하기라도 하면 당장 잡아먹힌대요. 사실인지 꾸며낸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무섭네요.'(p.26)
이야기속 '나'는 올빼미 사내를 현실세계로 끌어내기 위해, 직접 올빼미 사내로 변장하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어제의 공원] '어제의 공원'은 현재-과거-현재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부자지간인 엔도와 쇼이치는 공원에서 베트민턴을 치며 놀고, 아들 쇼이치가 베드민턴 공을 사러 간 사이, 아버지 엔도는 공원에서 뛰어 놀던 어린시절을 추억한다. '과거' '비버'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엔도, '마치'라 불리던 절친한 친구 '마치다 다케오'. 공원에서 함께 놀다 헤어진 엔도는 마치의 사고사 소식을 듣게 되고, 충격에 빠진다.(p.81참조)
그런 상황에서, 공원을 지나던 엔도는 마치와 함께 가지고 놀던 고무공이 튀어나오는 것을 발견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시간 여행처럼, 죽었던 마치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에 엔도는 마치의 죽음을 막으려 하지만, 그때마다 더 잔혹한 방법으로 마치는 죽음을 당한다. 계속 반복되는 시간의 돌이킴. 되돌아 왔다 더, 더 잔혹하게 죽는 마치. 어떻게 해도 마치의 운명을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이다.
회상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온 엔도, 하지만 쇼이치는 왠지 슬퍼하는 듯 한 모습.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인간의 힘으로 절대 바꿀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가 섬뜩하게 그려졌다. 마지막 반전도 좋았고, 아주 마음에 드는 단편이다.
[아이스맨] 사촌 친척집에서 지내고 있는 가즈키. 그는 사촌형 고이치와 마쓰리 구경을 갔다 한 소녀를 만난다. 그 소녀는 가즈키에게 곰살맞게 스스럼없게 대하고, '갓파'를 보러 가자고 한다. (일종의 소녀 삐끼 입니다ㅋㅋ) 소녀가 가즈키를 데려간 곳은 '세계 최초! 갓파 통얼음 백 퍼센트 진품'이라고 적힌 버스.(p.131참조) 가즈키는 그 버스에서 신기한 사진들과 '갓파 통얼음'을 보게 되는데, 그는 갓파를 가짜라고 여기고 약간의 실망을 하는데.
여기서 언급해야 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갓파가 전시되어 있는 버스의 주인 뚱보남자다. 그는 그로테스크하고 미스테리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그와 소녀의 관계는 과연 무엇일까? 과연 소녀 말대로 그들은 부녀관계인가? 그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정확한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다.
소녀(논코)와 가즈키의 관계는 황순원 '소나기'의 소년소녀의 관계하고도 약간 유사한 분위기이다. 소년이 어수룩하고, 소녀가 영악하다는 측면 때문일까. 뭐 아무튼. 뚱보는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사내를 살해하고, 이 때문에 뚱보는 논코와 가즈키에게 '냉동 갓파'를 처리하라고 한다. 이어지는 논코의 고백, 마지막의 충격적 사실.
[사자연] 굉장한 작품이다. 한 인간의 비뚤어진 집념과 소유욕의 오싹함을 제대로 그려낸 작품이다. 일단 줄거리를 살펴보자. 노지마 구미코가 이단 예술가 '가나에 린코'를 취재하고 있고, 취재에 응하는 린코의 독백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처음 린코가 그림에 몰두하게 된 것은 '사쿠타 기미히코'라는 화가 지망생이 쓴 책을 접하면서 였다. 기미히코는 죽음을 통해 예술성을 찾으려 20세란 젊은 나이에 자살한 인물.
여기서 '미카자키'란 인물이 등장하는데, 미카자키 역시 기미히코에 완전히 빠져버린 여성. 그녀와 린코는 기미히코란 공통 관심사로 친해지지만, 결국 기미히코에 대한 독점욕 때문에 갈등하고 분노하는 사이가 된다. 이들의 모습은 욘사마에 홀릭하는 일본 아줌마들을 떠올리게 하고, 특히 미카자키의 이어지는 그 상상을 초월하는 행각은 스티븐 킹의 '미저리'를 능가한다. 자세한 것은 언급하지 않겠다. 기미히코의 죽음에 비밀이 있다는 것. 또한 미카자키의 경악할 행각에 초점을 맞추고 읽어보시길.
<도시전설 세피아> 수록된 다섯편의 단편 모두 고른 작품성과 흥미를 보장한다. 다섯편의 오싹한 도시전설은 한 여름 무더위를 시원하게 날려 줄 것이다. 일단 읽어보시라. 하지만 이거 하나는 조심하시길. 읽는 도중, 어디선가 호-오 호-오 호-오 하는 올빼미 사내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목청을 가다듬고 낭낭한 목소리로 호-오 호-오 호-오 하셔야 한다는 것을. 안 그러면 올빼미 사내가 눈을 파내려 달려들 수 있으니...하하^^ 강력추천!!!
* 마지막 단편 '월석'은 리뷰쓰다 지쳐서 언급을 못했습니다-_- 가슴 찡한 호러물이고, '이시다 이라'는 뒤에 실린 해설에서 이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