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래리 주변을 한참 맴돌다 보면, 그가 대부분의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도시를 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도시 곳곳에 겹겹이 쌓인 층을 본다. 그는 공원과 거리를 보고, 지하철과 하수구 그리고 하수구 아래에 있는 그 옛날의 터널들에 주목한다. 그는 오늘날의 지도 위에 있는 도시를 바라보고, 언젠가의 지도 위에 '있었던' 도시를 바라본다. 도시의 과거, 과거의 밀주점과 고릿적의 터널, 옛 개천과 언덕의 어렴풋한 자취가 숨어 있는 도시를 보는 것이다.


2.
그는 문제의 원인이, 전염병 관리를 논하면서 인간의 도리를 찾으며 우아하게만 나아가려 하는 것, 그것이 거의 유행처럼 된 데도 있다고 지적했다. 생쥐를 산 채로 잡을 수 없느냐고, 가끔은 쥐도 산 채로 잡을 수 없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종종 된다고 한다. "해마다 죽이지 않고 쥐를 덫으로 잡는 방법은 없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그럼 제가 반문합니다. '흠, 좋습니다. 그러면 잡은 쥐들은 어디에 풀어놓는 게 좋겠습니까?'...(생략)..."


3.
시간이 흐르면서는 내가 아는 소탕전문가들과 도시 전체에 걸쳐있는 소규모 회사를 소유한 업주들에게서도 소식을 들었는데, 그중에는 9.11 참사 때문에 사업에 차질을 빚고 있는 업자들도 있었다.
...(중략)...
그해 늦가을, 겨울로 들어가는 초입에 배리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 주변의 소규모 사업장과 식당 같은 곳에서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일했다. 그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 근처에 있는 어떤 큰 회사는 기사들을 24시간 상주시켜야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나는 배리 벡이 계속 일한다는 데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신문들은 여전히 다국적 거대 복합기업이나 금융회사들이 뉴욕에 머무를 것인가, 철수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배리 벡이 쥐와의 싸움을 끈질기게 벌이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도시에 긍정적인 서광이 비친다는 느낌이었다.


4.
전쟁이 끝나고 731부대의 인간 생체실험이 세간에 알려졌다. 부대원들은 생체 해부실험까지 자행했다. 하지만 이시이가 전쟁범죄범으로 기소되는 일은 끝내 없었다. 그는 기소되기는커녕 자신의 기록을 미국정부에 기증하는 대가로 전범재판소에 회부되지 않고 면책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기록에는 1만 5,000점의 슬라이드 견본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사진은 500명의 인간을 대상으로 페스트와 탄저균이 포함된 생화학무기를 실험한 장면을 담고 있다. 그는 존경받는 의학자로서 경력을 마감했다.
소련은 이시이의 '작품'을 견본으로 해서 생화학무기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미국도 1950년대에 처음 생화학무기를 실험하기 시작하면서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 미국은 군사적 적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로서뿐 아니라, 미국을 상대로 생화학무기가 쓰일 수 있다는 점에서 시험을 거듭했다. 탄저균이 많은 인구를 감염시켰을 때의 상황을 예상하려는 모의실험에서, 미국 정부는 병원균인 세라티아 마르세스센스(Serratia marcescens)와 바실루스 글로비기(Bacillus globigii)를 썼다. 탄저균과 비슷하지만, 해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균들이었다.
1950년 4월, 해군함정 두 대가 버지니아의 해안지방인 노포크와 햄튼, 뉴포트 뉴스에 바실루스 글로비기를 살포했다. 주민들도, 국회도 그 일에 애해 알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 만에서도 비슷한 실험이 있었다. 주민들은 병원균들이 만들어낸 구름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미국 내 최대 200곳에서 같은 실험이 이루어졌다. 군대는 뉴욕 지하철에다 바실루스 글로비기를 풀기도 햇다. 1966년 여름, 사복을 입은 군인들이 철로에 있는 전구에 바실루스 글로비기를 묻혀 놓았다. 그들은 철로와 철로 사이에 균을 떨어뜨려 놓기도 했는데, 그래야 전차들이 지나갈 때 일으키는 바람에 균이 골고루 날아가 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다른 군인들이 와서 지하철이 바실루스 글로비기를 얼마나 멀리까지 퍼뜨릴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공기 표본을 채취해 옷가방에 담아갔다. 결과는 기밀에 붙여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여기서 주목할 것은 '법 앞에'라는 문구다. 모든 국민은 무조건 평등한 게 아니라 법 앞에 평등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법적 · 정치적 평등권을 가진다. 대통령이나 노숙자나 남의 물건을 훔치면 똑같이 절도죄가 적용된다는 게 법적 평등이고, 대통령도 노숙자도 선거에서 똑같이 1표만 행사한다는 게 정치적 평등이다. 그러나 법과 정치의 범위를 벗어나면 평등을 보장해주는 제도적 장치는 없다.




2.
…(중략)…그리스도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세계관이다.



3.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은 지나치게 분업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 노동의 본래적인 총체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공장에서 노동자는 하나의 부품처럼 주어진 단순 작업을 반복한다. 노동자는 자신이 투여한 노동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며, 노동 생산물에 관해서도 전혀 소유권을 가지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현대 사회의 커다란 문제들 가운데 하나인 노동 소외를 낳는다.



4.
신은 세계의 창조자이므로 세계의 원인이며, 동시에 세계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적이기도 하다. 결국 신은 모든 걸 설명하는 듯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며, 모든 것의 원인이자 목적인 듯하지만 아무것의 원인도 목적도 아니다.



5.
사관과 역사의 평가는 구분해야 한다. 사관은 반드시 필요하고 또 없앨 수도 없지만 역사의 평가는 대체로 특정한 시대의 관점이 반영되므로 오히려 역사를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 걸핏하면 되살아나 민족 감정을 건드리곤 하는 한일 고대사의 해묵은 문제도 마찬가지다. 고대에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에 한반도와 일본의 교역을 중재하던 무역기지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현대적 관점에서 무리하게 평가하려 하면 현재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개재되게 마련이다. 그 결과 고대에는 한국이나 일본이라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그 기지를 통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강변하는 우스꽝스러운 대립이 생겨난다.

과거에 무인도였던 독도가 지금 누구 땅이냐는 문제에 역사를 끌어들이는 것도 역사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근대적 개념의 영토국가가 성립하기 이전 무인도였던 곳에 대해 역사적인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다.



6.
관리官吏는 국민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다만 정부를 관리管理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의민주주의의 개념이다.



7.
1905년에 발표한 특수상대성이론은 광속이 불변이라는 간단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진리는 단순한 것”이라고 믿었고 수학을 싫어했던 아인슈타인은 ‘사고의 실험’으로 상대성의 개념을 설명한다.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가 있다고 하자. 이 열차의 객실 바닥에 전구를 놓고 그 바로 위 천장에는 거울을 붙여놓는다. 전구를 켜면 그 빛은 천장까지 수직으로 올라갔다가 거울에 반사되어 바닥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빛이 움직인 거리는 바닥에서 천장을 왕복한 거리다. 적어도 열차 안에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열차 밖에서 보면 다르다. 열차가 달리고 있기 때문에 전구의 빛은 수직이 아니라 살짝 삐딱하게 올라갔다가 삐딱하게 내려온다. 이 경우에는 빛이 이동한 거리가 열차 안에서 측정할 때보다 조금이라도 길어진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빛이 이동한 거리가 서로 달라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속도는 특정한 시간 동안 물체가 이동한 거리로 계산되며, 빛의 속도는 불변이다. 또한 동일한 사건이므로 빛이 이동한 거리는 서로 같다. 그렇다면 이 사고실험이 말해주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시간이 달라야 한다.



8.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의 의사소통이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적 영역은 경제제도에 의해 침해당하고 공적 영역은 행정제도에 의해 침해당한다”(<소통행위 이론>). 사적 의사소통은 자본 축적의 논리에 의해, 공적 의사소통은 관료제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그 결과 생활세계가 식민지화된다.



9.
알튀세르는 개인적 이데올로기보다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자본주의적 사회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계급관계가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노동자가 자신을 노동자로서 의식하고 그에 따르는 질서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국민들에게 일종의 ‘의식화 교육’을 시켜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수단이 바로 미디어와 학교다.



10.
번역이 원래 그렇지만 히브리어→그리스어→라틴어→각 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성서의 원문이 원래의 뜻을 유지하기란 어렵다(그리스도가 실제로 썼던 언어는 아람어로 추정되므로 히브리어도 ‘원본’은 아닌 셈이다). 더구나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기 때문에 인명이나 지명은 번역자가 알아서 적당히 읽어주어야 한다. 오류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심지어 서기들이 문장을 필사하다가 순전히 실수로 내용이 달라진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난해한 용어에 임의로 주석을 단 것이 실수로 성서의 본문으로 들어간 경우도 있다.

오늘날처럼 학자들의 소통이 자유롭지 못했으니 각종 오류를 정밀하게 찾아내기도 어려웠을 테고, 인쇄술이 없었으니 사본이 원본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보장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오류는 충분히 있을 수 있고, 또 그렇지 않은 옛 문헌은 거의 없다. 다만 문제는 오류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인간적인’ 과정을 통해 작성된 문헌이 마치 신의 말씀을 토씨 하나 안 틀리게 전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절대화되는 순간 부패하기 시작한다.



11.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봉건적 신분질서는 인간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는 부도덕한 체제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중략)…

누구나 나면서부터 신분과 사회적 역할이 정해진 과거 사회에는 오히려 소외가 없었다. 소외는 근대의 산물이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질서정연하고 명백한 사회 체제 안에서 정해진 위치를 가졌던 중세의 봉건 체제와는 대조적으로, 자본주의는 개인을 전적으로 자기의 발로 서도록 했다. 이러한 원리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따라서 한 개인을 다른 개인들로부터 고립시키고 분리시켰다”(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12.
따라서 인류 사회가 진보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려면 에로스만 조장해서는 안 되고 타나토스를 통제하고 조절해야 한다. 오히려 사회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에로스보다 타나토스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에로스가 좌절될 경우에는 번영이 지체될 뿐이지만 타나토스가 활개를 친다면 사회 전체에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하지만 개인의 무의식에 적용되는 에로스/타나토스의 개념을 곧바로 사회적 차원에 접목시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프로이트가 주장하듯이 인간 개인에게 타나토스의 본능이 있다 해도 그것이 집단적 충동으로 전화되려면 단순히 본능의 메커니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프로이트의 설명은 전쟁의 비극을 소수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몰아붙여 결과적으로 더 근본적인 원인을 은폐하고 있다.



13.
외국인이 본 한국의 첫 인상은 물론 중요하지만 굳이 칭찬을 유도해서 만족하려는 심리는 대체 뭘까? 미국 대학생들이 ‘Zen' 또는 ‘禪’이라고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든가, 비틀스의 한 멤버가 인도의 사상에 심취했다든가, 프랑스의 유명한 도예가가 고려청자에 감탄사를 연발했다든가 하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게 뭘까? 서양인들도 동양의 깊은 정신과 예술 세계를 아는구나 하고 만족을 얻을까?

…(중략)…

미국의 대학생들, 비틀스의 조지 해리슨, 프랑스의 도예가는 실상 동양을 잘 모른다. 동양에 사는 우리도 동양을 잘 아는 건 아니다.

…(중략)…

그러나 동양에 대한 지적 관심, 즉 오리엔탈리즘은 결코 순수한 학문적 목적을 지닌 것도, 단순한 유행도 아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이렇게 정의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소재로 하는 유럽의 공상 만화가 아니라 이론과 실천을 위한 하나의 체계로 창조된 것이다. 그 창조를 위하여 서양은 수세대 동안 엄청난 물질적 투자를 했다. 이러한 투자 덕분에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관한 지식 체계로 자리 잡았으며, 서양인의 의식 속에 동양을 여과하려 주입하기 위한 필터가 되었다. 그 결과 오리엔탈리즘을 바탕으로 한 사상과 문화 전반적인 서술들은 크게 증대했다. 그 투자는 대단히 생산성이 높은 투자였다”(<오리엔탈리즘>). 오리엔탈리즘은 학문적 관심도, 지적 호기심도 아닌 ‘투자’였다는 이야기다.



14.
인간의 의식은 늘 욕망으로서 존재한다. 목이 마를 때는 갈증으로서, 연인이 그리울 때는 그리움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것으로도 자신의 존재 근거를 대신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의식의 기도는 결국 실패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욕망해야 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숙명이다.



15.
유물론은 흔히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을 물질로 환원시키는 부도덕한 사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유물론을 주장한다고 해서 정신적 측면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을 앞세운 참된 의도는 사회의 발전 단계에도 자연과학적 법칙성이 관철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데 있었다.



16.
우선 이데올로기를 이론 체계로 보는 입장이 있다. 가장 가까운 우리말로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정한 개별 이론보다는 철학자나 정치가, 경제학자 개인의 포괄적 이론 체계를 가리켜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애덤 스미스의 분업 이론은 이데올로기가 아니지만 자유경쟁 자본주의에 관한 그의 경제 사상 전반은 이데올로기에 해당한다.

가치중립적인 이론 체계에 비해 약간 가치가 개입된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흔히 ‘이념’이라고 번역한다. 대표적인 예는 정치 이데올로기다. 이것도 이론 체계처럼 복합적인 이념의 덩어리를 가리키며, 대중을 정치적 행동으로 이끌고자 할 때 주요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해방 직후 우리 사회를 얼룩지게 했던 좌익 세력과 우익 세력의 이데올로기 투쟁이 그런 경우다.

그보다 부정적인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지식사회학에서는 특정한 계급과 계층이 자신들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배후에 숨기고 마치 보편적인 것처럼 내세우는 이념이나 관념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사회를 사실상 지배하는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경제성장 정책을 마치 사회의 각계각층에 골로루 이익이 돌아가는 것처럼 선전할 때 그 이데올로기는 진실을 은폐하는 허위의식으로 기능한다. 이런 의미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자 하는 마르크스주의가 별도의 이데올로기로 규정된다는 아이러니는 이데올로기가 포괄하는 의미망이 얼마나 넓은지 말해준다.

더 포괄적인 용도로 , 이데올로기를 추상적인 담론 체계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리오타르는 전통적 형이상학에 바탕을 둔 거대 담론을 비판하는데,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사실상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리오타르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는 과거와 같은 통합적인 사회 체계가 아니다. 과거에는 사회의 각 부분이 단일한 목적 아래 결집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게 전혀 불가능하다. 부분은 이제 전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독자적인 존재와 운동의 방식을 가진다. 그래서 리오타르는 거대 담론으로 세계의 기원과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이데올로기적 기획은 파산했다고 본다.

심지어 인간 해방을 지향하는 혁명적 이념-예컨대 마르크스주의-조차 거대 담론의 일반적인 결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것은 모두 무의미하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시도는 어떤 것이든 역사적으로 실패했으며, 탈현대에는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다. 거대 담론은 항상 ‘통합’이라는 목적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국 그릇된 목적론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리오타르는 마르크스주의란 낡은 계몽주의의 기치를 현대에 되살리려는 환상이라고 단정한다. 계몽, 자유, 해방 같은 근대의 거창한 이념들은 중세의 신을 대체한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알튀세르처럼 이데올로기를 특수한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이 아니며 심지어 ‘의식’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이다. 노란 색안경을 쓰면 세상이 노랗게 보이듯이 이데올로기는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늘 쓰고 있어야 하고 쓸 수밖에 없는 색안경과 같다. 주체가 이데올로기를 가지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주체이도록 만들어준다.



17.
그렇다면 자본주의도 인터넷처럼 일종의 매체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이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실체를 담기 위한 공간이듯이 자본주의도 구체적인 경제제도라기보다는 다른 실체적 경제제도를 구현하기 위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가 마치 고정불변의 제도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인터넷이 매체의 범위를 넘어 허구적인 권력을 실체화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가 아닐까?



18.
무엇이든 익숙해지면 자연스럽다. 자본주의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면 자본주의를 거의 본능처럼 여긴다. 사류재산은? 부모 형제 사이에도 내 것 네 것이 있으므로 자연스럽다. 이윤추구는?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장 기능은? 물건을 모두 다 직접 만들 수는 없으니까 시장에서 필요한 물건을 팔고 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이렇게 보면 자본주의는 마치 몸에 꼭 맞는 옷처럼 자연스럽다.

그러나 같은 현상을 두고 정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이 사유화된다면 사회는 성립할 수 없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이익만을 탐한다면 인간 사회가 아니라 야생의 정글이나 다름없다. 모든 물건이 시장에서만 거래된다면 누구나 힘을 앞세워 시장을 장악하려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본주의는 역사 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인위적인 제도가 된다.

자본주의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양면을 가진다. 사유재산의 관념은 보편성이 가장 강하고, 시장 메커니즘은 자본주의의 고유한 측면이며, 이윤 추구는 그 중간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사유재산은 인류 역사의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이윤추구와 시장은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속한다.



19.
이성의 시대에 인간의 의식은 인식의 확고한 출발점이었고 단단한 실체처럼 여겨졌으나 실은 텅 빈 그릇처럼 껍데기일 따름이었다. 자체의 존재 근거를 가지지 못한 의식은 끊임없이 바깥을 지향하면서 외부에서 근거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이며(무엇을 선택할지는 자유지만 뭔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부담이다), 무無와 같이 공허한 존재방식 때문에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인간이 선택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이기에 자유는 곧 비극이다.



20.
그러나 토플러는 ‘물결’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쓰는데,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연속성을 뜻한다. 물결이라는 말의 원래 뜻이 그렇듯이 지금의 변화는 과거에 있었던 변화(제2물결)의 연속선상에 있다. 즉 제3의 물결은 제2의 물결을 대체하는 동시에 그것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중략)…

물결의 둘째 의미는 총체성이다. 제3의 물결이 가져온 변화는 사회의 특정한 분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전면적으로 파고든다. 한 예로 토플러는 기업에서 출퇴근 제도가 흔들리면서 직원 개인이 자신의 근무 시간을 정한다든가 아예 집에서 일하는 근무 방식으로 바뀌고 있음을 말한다(요즘 흔히 말하는 재택근무나 '소호Small Office Home Office'방식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토플러다). 생활환경이 바뀌면 당연히 가족제도도 바뀐다. 제2의 물결이 가져온 핵가족화는 산업화 시대가 끝나갈 즈음부터 심하게 흔들린다. 이혼 가정이 늘고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많아진다.



21.
이러한 종말론으로 신도들에게 잔뜩 겁을 주는 의도는 명백하다.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인간이 지은 죄를 대속하고 죽었으므로 교리상으로 인간은 그때부터 무죄가 된다. 죄가 없으면 두려움을 모르고 두려움을 모르면 신을 섬기지 않는다.



22.
냉전 이데올로기가 생겨나면서 분단을 맞았던 한반도가 아제 그 이데올로기가 수명을 다했는데도 아직 분단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지금 북한은 세계적으로 가장 폐쇄적이고 철저한 공산주의 이념의 수호자가 되어 있고, 남한은 상대적으로 가장 철저한 반공 이념의 수호자가 되어 있다. 세계를 갈라놓았던 이념의 구분이 약해졌는데도 한반도는 여전히 좌익/우익이 대립하는 특수한 지역이다.



23.
정신의 특정한 상태가 신체의 질병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신체에 원인을 둔 정신의 질환도 있다. 전자의 예가 스트레스라면 후자의 예는 트라우마다.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신체와 정신이 확연히 분리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좋은 증거다.



24.
문화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문화적 본능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물리적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외적인 강제력이 가해지면 획일화되기 쉽다.



25.
그러므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서와 마찬가지로 혁명세력의 헤게모니에서도 중요한 것은 역시 대중 교육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우리는 대화할 때 상대의 말을 지나치면서, 그너라 고개는 끄덕이면서 자기 이야기만 열심히 구상한다
대화란 서로가 귀를 틀어막은 채 서로의 등뒤에 있는 벽에 대고 고함치는 행위임

...(중략)...
말이 안 통해서 술을 먹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기 싫고 술을 먹으면 집에 안 들어간다
말이 안 통해서 병 대신 병적인 것, 아픔 대신 아픔적인 것, 애인 대신 애인적인 것에서 우리는 위안받는다
말이 안 통해서 우리는 상처 없는 아픔과 절망 없는 고통을 하고 싶어한다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중에서




2.

食보다는 識을 끊어야겠도다
그렇다 事物의
어쩌면 空腹 같은 중심에 대해
이미 자빠진 회전축에 대해 미련을 갖는 것이야말로 病일 터!
...(중략)...
니네들은 못 해본 단식을 나는 해보았다는 허영
나도 내가 징그러워졌다.


-'송충이도 못된 사내' 중에서



 
3.

속아주는 것이야말로 믿음일 줄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녹야원 근처'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현문명의 철학적 개념과 도덕적 규범을 재고할 수밖에 없는 현기증 나는 어지러운 세계가 열리게 된다.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건강한 정신과 광기, 비도덕과 도덕성, 불합리와 합리성, 법과 윤리규범을 구분할 수 없다. 가상공간의 법은 현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가상 세계의 존재 이유는 바로 현실 세계에서 금지된 것을 허락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가상현실)

 

2.

개인주의는 시민의 손에서 권력을 앗아가 순간적인 욕망의 이기적인 만족만을 권리로 내세우는 소비자 손에 쥐어줄 것이다. 소비자는 자신의 경제, 정치, 감정적인 선택을 언제든지 번복할 수 있는 권리도 요구할 것이다. 다시 말해 변덕스러운 독재 혹은 무책임한 민주주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주의)

 

3.

정보는 본질상 희소성이 없는 자산이다. 자신도 갖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얼마든지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위적으로 희귀하게 만들지 않는 이상 정보가 시장에서 유통되기는 힘들다.…(중략)…시장원리의 지배력을 지속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정보의 희소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 결과 상표와 암호화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것이다. 이들이 없으면 물건에 가격을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

 

4.

앞으로는 ‘광고’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오락, 교육과 한데 뒤섞이고자 할 것이다. 광고가 없는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광고는 모든 매체를 이용하여 자신을 내보이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자기 존재를 각인시키려고 할 것이다.

광고의 역할은 우선 사람들로 하여금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구입하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 (광고)

 

5.

사람들은 위험의 심각성을 깨달아야만 이러한 기구를 창설하거나 기존의 기구를 강화할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해서 유럽도 탄생했다. 외계로부터 화성인의 위협이 없는 이상 순진하게 강자의 지혜를 믿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실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강자가 실패했을 경우 일부 사람의 패닉과 또 다른 자들의 반란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국제기구)

 

6.

아직까지 효율적인 면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갈수록 정당성을 잃어 가는 기관이다. 미래에는 세계정부의 모태가 될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는 일부 분쟁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고 있지만 미래에는 나서지는 않으면서 이익만 챙기고자 하는 강대국의 방패막이로 전락할 것이다. 현재 유엔의 대표성에 의구심을 표명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다. 사실 안전보장이사회는 인류의 절반(머지않아 3분의 2)을 제외하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서방이 현재 상임이사 5석 가운데 3 내지 4석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제연합)

 

7.

미래에는 시장이 꿈을 조작하거나 새로운 여행, 몽환적 유목, 불면의 방황, 마약 같은 알약 형태의 꿈을 제공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어느 무엇도 이러한 자유가 정신착란으로 귀결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정신의 또렷함이 광기로 이어지는 바로 전단계였던 셰익스피어처럼. (꿈)

 

8.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기 위해 조직은 우선 계층 체계를 줄이고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늘려야 한다. 어떤 기관은 다른 기관보다 준비가 덜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시장이 본질적으로 하나의 네트워크라고 한다면 민주주의는 계층 체계에 더 가깝다.

민주주의가 더 이상 권한의 위임이 아닐 때, 다른 모든 네트워크에서처럼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서지 않고 또 군중의 중심에 서지 않을 때에만 민주주의도 네트워크 체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네트워크)

 

9.

그렇기 때문에 이들 두 생활방식, 미래의 두 계층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년층은 더 이상 자기만의 복지를 위해 소수의 젊은 층에 당장 큰 부담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이러한 부담은 한 국가의 생산적 경제를 파괴할 것이다. 부유한 국가에서는 노년층의 특권을 줄이고자 소수의 젊은이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중략)…세대간 갈등이 지역적이지 않은 곳에서 젊은이는 지나치다고 생각되는 사회 보장비를 부담하느니 차라리 그 나라를 떠나는 쪽을 택할 것이다.

나이가 사회적인 무용성과 더 이상 동일시되지 않는 때가 오면 진정한 변혁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이 든 사람들이 아이들의 교육, 지식과 지혜의 전수에 기여하는 바를 귀중한 자산 또는 젊은이를 위한 혜택으로 간주하게 될 때가 바로 그때다. (노화)

 

10.

새로운 것을 반가운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불안한 것을 하나의 가치로 받아들이며 불안정한 것을 안락함으로 받아들이는 것, 혼합을 풍요로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독특한 연대감을 지닌 새로운 유목민 부족의 창조자인 레고 문명을 끊임없이 쇄신시킬 것이다. (레고 문명)

 

11.

앞으로는 모성의 권리에 애정, 교육, 보살핌, 전수의 의무를 결합해야 할 것이다. 이토록 원해서 가진 아이에 대한 모성은 한결 더 깊고 정성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아이를 낳는 것이 쉬워지고 막연해진다면 아이를 단순한 소비 대상 혹은 금방 싫증을 느끼고 바캉스를 떠나기 전에 동물보호소나 길거리에 버리고 가는 애완동물쯤으로 간주하기 쉬울 것이다. (모성母性)

 

12.

지문도 개인의 신분을 나타내는 고유의 미로다. 뇌는 뉴런으로 이루어진 미로다. (미로)

 

13.

시장은 경제주체 사이에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많은 이의 정치권 행사를 방해할 것이다. 시장은 이타적인 시민을 변덕이 심하고 이기적인 소비자로 탈바꿈시킬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수가 내린 결정에 더 이상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 결정이 소수 부유층의 세금을 통해 중산층 다수의 복지를 도모하자는 것일 때 더 그러하다. 가장 부유한 계층은 떠나가고 가장 빈곤한 계층은 인내하며 나머지는 오락에서 도피처를 찾으려 할 것이다.

…(중략)…

정당은 민주주의에 끼어들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전체주의는 민주적으로 권력을 잡고 놓지 않으려 할 것이다. (민주주의)

 

14.

인간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영원성 추구에 대한 해답을 더 이상 내놓지 못하는 시점에서 복제 연구가 활성화될 것이다.

…(중략)…

따라서 부모 없는 아기의 출생이 그다지 심각한 충격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한 인간과 그의 복제 이간이 두 쌍둥이보다도 서로 더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복제 인간은 원형 인간과 같은 세포질 환경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을 유전적인 차원으로만 축소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 복제를 금지시킬 수 없을 것이다. 많은 나라가 이를 지키지 않을 것이고 시장과 과학의 압력이 너무 강력해 이에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생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랫동안 복제를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다. (복제)

 

15.

꿈을 꾸기 위해서는 우선 멈춰야 한다. (부동不動)

 

16.

자연이 어머니를 만든다면 사회는 아버지를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모순적으로 사회는 갈수록 아버지를 없애고 있다. (부성父性)

 

17.

문맥 혹은 출전을 알 수 없는 상태로 쏟아지는 비슷비슷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소비자는 선과 악의 차이나 가치의 순위를 아직 배우지 못한 갓난아기와 같다. 그 결과 타협이나 작은 차이라는 것을 모른 채 아무것도 아닌 일로 폭력만을 휘두르게 될 것이다. (분류)

 

18.

인간은 어떤 가치를 놓고 분배할 때마다 그 가치를 둘러싸고 다투게 될 것이다. (분쟁)

 

19.

불평등은 미래에 개인의 기회주의를 심화시킬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혼자만 진보하기를 꿈꾼다. 개인주의는 더욱 정당화되고 불평등은 한층 악화된다.

…(중략)…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불평등의 한계가 존재하는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작은 불평등은 반란보다는 단순히 부러움만을 유발하고, 거대한 불평등은 일반인들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평등)

 

20.

가장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대화의 주제이자 가장 나중에 소비하는 대상. 인간의 으뜸가는 정열이자 인간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 (사랑)

 

21.

지불 능력이 있는 소비자에게 세계는 변덕스런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슈퍼마켓이 될 것이다. (소비자)

 

22.

소유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죽음을 피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우리가 책이나 음반을 사고 여러 작품을 수집하는 이유는 이것을 다 훑어보지 않고 죽을 수는 없다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걸작품보다 먼저 사라질 수는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위해서다. (소유)

 

23.

21세기 초까지는 이 불멸의 신에게 승리가 보장될 것이다.

…(중략)…

오늘날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분야까지 시장이 확대될 것이다. 예를 들어 교육, 보건, 사법, 경찰, 시민권, 신분, 공기, 물, 피, 이식 가능한 장기에 가격이 매겨지게 될 것이다. 시민, 환자, 어머니, 아버지는 소비자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금전적인 능력만 있다면 함께 나눌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의식해 자기 욕구를 포기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시장은 모든 것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재판관의 판결은 바로 가격이다. 가격은 추상적인 정보로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이를 고대 그리스 시대에 존재하던 여성 예언자의 횡설수설쯤으로 간주할 것이다.

시장은 사람들에게 그가 필요한 것이나 그가 받을 만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서비스에 해당하는 알 수 없는 등가의 것을 줄 것이다. 시장은 즉각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수익성이 바뀌는 즉시 결정을 번복할 것이다. 이로 인해 상황은 폭력적인 패닉 상태를 일으키기 직전까지 치닫게 될 것이다. 자신이 팔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완전무결할 것 같은 모습에다 시장 신봉자들의 무수한 약속되는 달리 시장은 정의나 평등, 존엄성을 보장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교육이나 식량은 물론이고 만인의 편안함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완전고용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시장은 사람들을 소비자로서만 필요로 할 뿐 그들의 과거나 미래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이나 생각에도 관심이 없다. 물론 이러한 것을 팔아야 할 때만은 예외다. (시장)

 

24.

네트워크에서 어떻게 항해하는지 터득하는 최상의 방법. (실패)

 

25.

나와 의견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도,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 야만성은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야만성)

 

26.

미래의 어머니에게 읽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여러 세대를 가르치는 것과도 같다. (어머니)

 

27.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가장 큰 승리자는 태연하게 양측에 무기를 제공하는 국가다. 사실 살상무기 상인에게 적은 없다. 오로지 경쟁자만 있을 뿐이다. (전쟁)

 

28.

법적 측면에서 책임감은 갈수록 집단적인 성격이 약해진다. 행정부, 병원, 기업의 책임으로 돌려진 실수에 대해 해당 조직에서는 그 실수를 범한 사람을 찾아내고자 할 것이다. (책임감)

 

29.

패닉은 자기 혼자만 소외될까 두려워 옆 사람이 누구든 그 행동을 따라 하는 군중의 맹목적인 모방 행위다. 이는 서구 문명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서구 문명의 본질 그 자체다. 그리고 패닉은 갈수록 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바로 패닉 때문에 소외될까 두려워 근로자가 저임금의 노동도 감내한다.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모방과 전체 합의의 강력한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소비자는 유행하는 물건을 사고자 달려드는 것이다. 또 ‘좋은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 예금주는 자신에게 추천하는 금융상품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 (패닉)

 

30.

잘못된 예측의 위험 부담 없이 미래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두 단어의 합성어. (포스트모더니즘)

 

31.

영원히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 (현대성)

 

32.

범죄에 대한 형벌체계는 아마도 바뀌게 될 것이다. 적어도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금융 범죄와 부패사건에 대해서는 무거운 형벌을 내리고 극빈자가 일으킨 범죄에 대해서는 처벌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조정할 것이다. 세기말에 전세계적으로 사형이 철폐된다면 이는 부인할 수 없는 문명 발전의 증거가 될 것이다. (형벌)

 

33.

경고성 내용에는 객관적 수치 데이터가 제시되어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낙관주의적인 글은 더 주관적인데?

- 비관주의에는 단정이, 낙관주의에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공상과학을 최대한 멋지게 이끌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면서 하나의 악몽이 될 수 있는 시나리오도 배제하지 않는다. 각종 수치를 보고 있자면 그 연속선상의 미래는 끔찍한 것이다. 인류의 자살밖에 남는 것이 없다. 공기는 숨 쉴 수조차 없게 될 것이고 매년 수백만 명이 굶어죽을 것이다.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대응을 위한 조치가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상상력과 정치가 나서야 한다.

 

34.

미래에 정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 정치가 정치인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머무른다면 미래의 정치는 희망이 없다.…(중략)…미래 정치의 위대함이란 새로운 꿈을 만든다는 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그와의 만남에서 뜻한 바를 얻지 못한 길가메시는 우여곡절 끝에 불로초를 얻지만 신들은 그것마저 앗아가 버린다. 참으로 덧없는 여행이었던 것이다.
고통스러운 세상, 쓸쓸한 인생. 유행가 가사 같은 정조는 이렇게 오랜 옛날부터 인류 곁에 있었다.
후대에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는 이렇게 말한다.




길가메시여, 그대가 찾는 것은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 신들이 인간을 창조할 때 죽음을 인간의 숙명으로 안겨주고 영생의 삶을 거두었기 때문이오. 그대가 살아 있는 시간을 즐겁고 충만하게 보내오. 그대의 손을 잡는 어린아이를 사랑하오. 그대의 아내를 품에 안고 즐겁게 해주오. 기껏해야 이런 것들만이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오.


인간은 이렇게 읊으면서도 끊임없이 신의 자리를 탐냈다. 만족되지 않는 욕구의 좌절. 사랑만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2.
야훼는 잔인하고 가차 없다. 자식을 죽여서 자신에게 바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는 고대의 인신제사 풍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점차 동물로 대체되어갔지만 이 풍습은 전세계에 걸쳐 있었다. 야훼는 히브리 민족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고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한다. 이 약속은 히브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 얼마나 척박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사막과 같은 황량한 땅에서 덧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하여 ‘젖과 꿀’이라는 알량해 보이는 약속 하나에 모든 것을 내버리고 야훼만을 숭배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훼는 이것을 거저 주지 않는다. 그것을 주겠다고 해놓고는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성읍의 주민을 칼로 쳐죽일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를 따르기만 한다면 외부 집단을 폭력적으로 살상해도 괜찮다는 정당화를 제공함과 동시에. 자비롭게 보이는 약속 뒤에 숨어있는 피에 굶주린 야훼의 잔인함을 어김없이 드러낸다.
야훼는 마술과 형상을 혐오하는 신이다. 야훼가 모세에게 돌에 쓴 증거판 두 개를 줌으로써 모세의 정당화 작업에 착수했을 때, 야훼의 백성들은 기다리다 지쳐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러자 야훼는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한다. 이렇게 진노하는 신이 사랑의 신일 수는 없다. 어쩌면 야훼는 불가능한 것을 히브리 민족에게 요구한 건 아닐까? 인류는 머나먼 옛날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에 뭔가를 그려 넣을 때부터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구석기 시대부터 내려온 이미지 만들기는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탐욕이다. 공포는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고통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요, 탐욕은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즐거움에 의해 생겨난다. 모세 5경의 야훼는 인간이 공포로 움직이는 존재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모세 5경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들에게는 공포가 내재화되어, 그렇지 않은 상황이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전도된 심리 상태에 처해 있다.




3.
인간이 폭력적인 것은 폭력적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4.
로마의 건국신화에는 로마적 세계의 근본 성격이 함축적으로 들어 있다. 로마의 건국자는 군신의 아들이다. 그는 그 태생에서부터 이미 전쟁이 몸에 배 있었으며, 그가 도시를 건설한 뒤에 한 일은 여인을 강탈한 것이다. 이는 트로이와 미케네 제국의 영웅들의 행위가 그대로 전수되었음을 의미한다. 로마의 전설에는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겠다는 따위의 가치론적 의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군신이 등장하기는 하나, 전설의 핵심은 로물루스라는 인간과 레무스라는 인간 사이의 모두스에 있다. 신의 법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들은 ‘신의 법을 따를 것이냐, 인간의 법을 준수할 것이냐’를 가지고 고민하지 않는다. 단호하게 인간 사이에 모두스를 정하고-이것이 이른바 ‘사회계약’이다-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는 형제라 해도 죽이는 것이다. 인간의 법을 지키지 않은 자라면 형제라 해도 죽인다는 것, 신의 법을 따른다면 형제는 죽일 수 없는데도 인간의 법에 따라 죽인다는 것, 이것이 로마적 실용성의 사회적 단면인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다. 로마를 보는 우리는 안티고네와 그레온의, 옳음과 옳음의 대립과 같은 상황 때문에 마음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5.
역설적이게도 또는 방정맞게도 철학은 어렵고 힘든 시대에만 발언한다. 정말 느닷없다 싶게 나타나 엉뚱한 소리를 해대면서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사람들의 속을 복잡하게 만들어놓는다. 세상에 정말 쓸데없는 학문이요, 작태가 아닐 수 없다. 거듭 말하지만 철학이 없는 시대는 행복한 시대이다.
…(중략)…
이러한 지식인에게 고난은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닥치는 것이 아니라, 권력 투쟁의 와중에서 부딪히는 것이었다. 행복한 시대의 인간들은 고생도 이런 식으로 한다. 그들에게 닥쳐오는 절대 절명의 상황이란 것의 근본이 애초부터 다른 것이다.




6.
로마인들은 행복했다. 자신의 몸을 바쳐 지켜내기만 하면 자신의 불멸성을 보장해주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제국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이게 아닌데’라는 의심은 헌신의 감소를 낳고, 헌신의 감소는 또다시 체제의 허약함으로 귀결되고, 그러다가 로마는 무너져 내린 것이다.




7.
그의 잣대는 이것-현실에서 작동하는 냉혹한 이성-뿐이었다. 이것에 근거하면 선의는 무의미한 감정낭비일 뿐이며, 도덕은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군주론>은 바로 이러한 원리 위에서 쓰여진 현실 정치 지침서인 것이다.
…(중략)…
몇몇 도덕주의자들은 이 텍스트를 사악한 것이라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혼란한 현실은 사악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당면해서 극복해야 할 현실일 뿐이었다. 이런 현실 앞에서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위선이다. 차라리 컨텍스트가 철저히 반영된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것이 정직한 지식인이며, 마키아벨리가 걸어간 길도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8.
그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고독하고 빈곤하며, 야비하고 잔인하며, 짧다. 인간은 본성상 탐욕적이고, 권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반드시 서로 싸움을 벌이게 되고, 그런 까닭에 삶이 비참해지는 것이다.






한 개인의 힘은 다른 사람의 힘의 결과와 대립되고 충돌된다. 힘은 단순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한 개인의 능력의 초과분이다. 그리고 똑같은 힘은 대립되고 서로를 파괴한다. 그리고 그러한 대립은 경쟁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연 상태에서의 개인의 힘과 경쟁에 대해 서술한 글이다. 그런데 이를 곰곰이 살펴보면 이는 자연 상태의 것이라기보다는 전쟁 상태에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 해야 타당하다.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경쟁 상태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9.
영국에서 세워진 이러한 이론체계는 자본주의체제의 발전과 함께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그 결과 오늘날의 세계는 홉스가 말한 전쟁 상태가 되었고, 세계 어디서나 무제한의 탐욕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간주되는 태도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실의 탐욕의 논리가 그대로 도덕적 가치가 되는 오늘날의 냉혹한 세계는 제법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10.
스미스의 출발점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이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인간성’은 종래의 전통적인 인간을 상징한다. 그것은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차원의 도덕적 실천까지 고려하는 인간의 종합적인 성품이다. 그런데 스미스는 그러한 가치 기준을 점잖게 없애버린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이익을 따질 줄만 알면 ‘인간’인 것이다.
…(중략)…
여기서 개인의 이익 추구와 보편적인 사회의 이익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말 그대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작동하여 사회의 이익을 더 효과적으로 증진시키는지 어쩌는지도 알 수 없다. 이것은 어쩌면 예로부터 전해지던 ‘신’을 다른 이름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스미스의 이 주장은 검증되지 않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과 억지가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스미스라고 하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려는 사람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더러는 전혀 상반되는 주장들이 스미스를 근거로 삼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는 ‘국부’가 아닌 개인의 ‘치부’를 목적으로 삼은 행위를 정당화할 때에도 스미스가 활용된다. 이는 이기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삶을 살았던 스미스 자신에게는 언짢은 일이겠으나, 그의 위세를 빌려 자신의 이기심만을 충족시키며 행복한 나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겠다.




11.
다윈은 이러한 설명을 통하여 우선 세계 안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을 수 있음을 드러내 보였고, 인간 역시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진화해왔음을 천명하였다. 자연계와 사회세계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인간은 세계에 우뚝 선 존재가 아니라, 그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목적이 진보라 해도 과정은 끊임없는 투쟁일 수밖에 없다. 자원을 서로 먼저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끼리 피 흘리며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로 간주된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인간 본성과 자연환경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로 설명된다. 이로써 무한 경쟁에 근거를 둔 근대의 자본주의세계는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등장한 사회주의에서도 ‘투쟁’이라고 하는 방법론을 받아들였다. 인간은 더 이상 도덕의 겉옷을 걸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가 자본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맨몸으로 살갗을 찢어가며 쓰라린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이 기반 위에서는 어떠한 처방도 한낱 도덕주의적 대증요법밖에 되지 못한다.
먼 옛날의 서사시들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 없이도 세계가 쓸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또다시 같은 것을 알아차리는 건 너무 허망하다. 쓰라린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