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에는 문과형 인간과 이과형 인간이 있고 문과적 주제와 이과적 주제가 있으며 이과생들은 교양을 쌓기 위해 역사나 철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지만 문과생들은 요약정리 이상으로 자세하게 과학이나 기술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학생들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에도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우리의 불행한 현실이다.


2.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그 직선과 만나지 않는 직선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즉, 평행선은 아무리 연장하여도 만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있는데,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 가정을 부정해도 유클리드 기하학의 다른 정리와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3.

자연을 수학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단순히 경험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한다는 도구적 유용성의 차원을 넘어서서 존재 그 자체를 그려낸다는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심지어 아인슈타인조차도 신의 완전함, 그 신이 창조한 우주의 결정론적 속성, 그리고 수학을 통해 이 우주를 완전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뉴턴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4.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튜링 검사에서 기계의 지능은 인간의 지능을 얼마나 잘 흉내 내는지에 따라 주어진다. 이는 튜링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실제로 기계에게 공평하지 않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외국인에게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질문을 던진 후 잘 대답하지 못하면 지능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만약 외계인이 튜링 검사를 받는다면, 결코 지능을 가진다고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주어진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대상이 지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답변이 하나 이상이기에 특정 기계가 튜링 검사를 통과했는지의 여부는 여러 번의 검사를 시행하여 ‘평균적으로’ 기계가 인간보다 성적이 좋을 때로 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특별히 ‘기계적인’ 답변을 하는 인간과 짝지어진 기계는 우연히 한 번에 튜링 검사를 통과할 수도 있다.


5.

게놈 계획 초기에는 유전자 결정론의 철학이 득세했다. 게놈 계획의 추진자들은 인간 게놈만 해독이 되면 유전, 진화, 발생에 대한 모든 신비가 풀릴 것처럼 생각했으며, 게놈 계획을 비판했던 사람들은 게놈 지도가 가져올 차별과 유전자 치료를 통한 사회 불평등의 확대를 걱정했다. 그렇지만 게놈 계획이 끝난 지금, 인간의 유전자는 원래 생각했던 10만~15만 개보다 훨씬 적은 3만개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졌고, 유전자의 기능은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복잡하며, 유전자가 세포나 유기체에 일방적인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세초나 유기체, 그리고 환경과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유전자가 생명의 본질의 전부가 아니며 환경의 영향을 받는 생명체는 유전자로만은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은 1990년대 이후에 생물학자들에게 아주 조금씩 서서히 받아들여졌다.



6.

한편 포퍼는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심리학에 심취하여 한때는 아들러 밑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한 사회사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 이론의 모호함에 실망하게 된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로 설명하고, 같은 상황에서 물에 뛰어들기를 주저한 사람은 열등감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이 아들러 이론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중략)…

결국 포퍼는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이론을 과학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과학이 아닌 유사 과학적 이론의 대표적인 보기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각각의 경우 포퍼가 유사 과학의 판정에 이르게 된 이유는 달랐다. 포퍼는 마르크스주의가 보다 평등한 사회에 대한 숭고한 목표에서 출발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명백한 경험적 반대 증거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이론을 유지하려고 하였기에 ‘과학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7.

포퍼는 자만심이 무척 강했고 그를 알던 대부분의 사라에게 인간적으로 호감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여기에는 포퍼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견해에 대해 매우 직설적으로 폭언을 퍼부었고, 그 반면 자신에 대한 비판은 차아내질 못했다는 사실도 한몫을 했다. 나이가 들면서 포퍼는 대중 강연에서 자신의 견해를 비판하는 질문이 나오면 귀가 먹어서 못들은 척하기도 했다. 자유로운 토론과 합리적 비판을 강조했던 철학자로서는 다소 역설적인 모습이다.



8.

일단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주제나 그것의 응용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 자주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한 의사는 특정 수술을 권고하는데 다른 의사는 그 수술에 반대하고 또 다른 의사는 아예 전혀 다른 치료를 제안하는 상황을 가족의 건강과 관련해서 적어도 한번쯤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핵발전소의 안정성이나 경제 상황, 살충제나 헤어스프레이의 영향, 현재 교육 방식의 효율성, 지능에 인종적 요인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벌어지고 있는 논쟁에 대해 접해 보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둘, 셋, 다섯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의견들이 그러한 논쟁 과정에서 제시되며, 그들 각각의 의견에 대해 과학적인 근거에 입각하여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씩은 과학자 수만큼 많은 다른 의견들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물론 과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영역도 있다. 하지만 그 점이 과학자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높여주진 못한다. 과학자들 사이의 의견 일치는 종종 정치적 결단의 결과이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억압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믿을 만하고 거의 오류 불가능한 지식이라는 과학의 명성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입을 다문다. 다른 경우에 의견 일치는 과학자들이 함께 가지고 있는 편견의 소산이다. 특정 입장이 관련된 사항에 대한 자세한 검증도 없이 수용되고는, 자세한 검증을 거쳤을 때만 얻어질 수 있는 지적 권위를 누리기도 한다.

-파울 파이어아벤트, <자유사회에서의 과학>중에서 재인용



9.

포퍼와 쿤을 조화시키는 이 과정에서 라카토슈는 포퍼를 따라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한편, 쿤보다 더 급진적인 상대주의 과학관을 제창한 파이어아벤트와 죽을 때까지 좋은 맞수이자 친구로 지냈다. 라카토슈는 파이어아벤트가 자신이 교수로 있던 런던 정경 대학에 잠시 머물며 강의할 때 강의실 바로 앞에 위치한 자신의 연구실에서 나와 파아어아벤트에게 난처한 질문을 던져대곤 했다. 맨 뒷줄에서 수업을 방해하는 라카토슈의 도전을 파이어아벤트는 성가셔 하기는커녕 무척 즐거워했고, 두 숙적의 눈부신 토론을 지켜보는 것으로 수업을 대신할 수 있었던 당시 학생들도 역시 행복해 했다고 한다.

파이어아벤트에 따르면 어느 날 라카토슈가 자신은 과학적 방법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쓰고 파이어아벤트는 왜 쓸모없는지에 대해 써서 함께 묶어 책을 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기획이라 생각한 파이어아벤트는 적극적으로 호응했고 결국 두 사람은 <과학 방법론을 위하여 그리고 반대하며(for and against scientific method)>라는 책을 함께 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라카토슈가 1974년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파이어아벤트는 결국 자신의 맡은 부분만 따로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고 이 책이 파이어아벤트를 일약 유명하게 만든 <방법에 반대하며>이다. 결국 두 사람이 모두 살아있을 때는 결실을 보지 못한 원래의 책은 1999년 라카토슈의 과학 방법론에 대한 강의 노트와 라카토슈와 파이어아벤트의 논쟁을 담은 형태로 출간되었다.



10.

인간은 목구멍을 통해 음식물도 넘기고 공기도 흡입한다. 그래서 종종 음식물을 먹다가 숨이 막혀 죽을 위험이 있다. 이는 생명체 진화의 어느 단계에선가 두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기관이 출현했고 이러한 우연적 사건에 기초하여 이후의 자연선택 과정이 진행되었기에 생겨난 현상이다. 르원틴과 굴드는 이처럼 분명하게 비적응적인 속성도 진화의 역사에서 자주 생겨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진화는 텅 빈 도면을 앞에 두고 주어진 환경에 최적의 설계를 찾는 방식이 아니라 미래에 벌어질 상황에 대한 대비 없이 그때그때 임시방편적인 방식으로 기존의 구조에 덧붙이는 방식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킨스도 진화 과정이 이러한 특징을 갖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적 유전자의 무한한 잠재력에 신뢰를 갖고 있는 도킨스는 르원틴과 굴드와는 달리 우연적 요인이나 구조적 제한에서 비롯된 불완전한 적응은 시간이 흐르면 유전자에 의해 극복되리라고 주장한다.



11.

이 저작들에 등장하는 핵심 용어인 후성규칙은 인지 발달의 편향된 신경 회로를 뜻한다. 다시 말해 후성규칙은 유전자에서 개별 마음 그리고 사회, 문화로 이르는 길에 있는 규칙인 셈이다. 유전자는 이 후성 규칙을 만들어 내고 개별 마음은 그 규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조직한다. 뱀에 대한 공포와 범문화적인 뱀의 상징들, 그리고 색 지각과 범문화적인 색 어휘의 상호작용은 후성규칙에 의해 문화가 창조되는 사례들이다.



12.

그의 반골 기질은 1970년대를 풍미하던 윌슨류의 적응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모습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79년에 그는 ‘성 마르코 성당의 스팬드럴과 빵글로스적 패러다임’이라는 기이한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적응을 손쉽게 양산하는 당시 진화 생물학의 풍조를 호되게 비판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논문에서 그는 ‘적응주의’를 ‘스팬드럴(spandrel)’이라는 건축 양식에 빗댄다. 스팬드럴은 대체로 역삼각형 모양인데 돔을 지탱하는 둥근 아치들 사이에 형성된 구부러진 표면이다.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의 돔 밑에 있는 스팬드럴은 기독교 신학의 네 명의 사도를 그린 타일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굴드는 적응주의자들이 그런 스팬드럴을 보고 그것이 마치 기독교 상징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설계된 부분인 양 오인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스팬드럴은 아치 위에 있는 돔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긴 부산물일 뿐인데 말이다. 이런 비판은 ‘코가 안경을 받치기 위해 진화했다.’는 식의 생뚱맞은 주장을 더는 하지 말라는 경고이며 ‘단지 그럴듯한 얘기’는 집어치우고 시험 가능한 가설들을 제시하라는 주문이었다.



13.

쿤에 의하면 패러다임 전환은 점진적이고 논리적인 선택이 아니며 오히려 종교적 ‘개종’과 유사하다. 따라서 과학 혁명 시기에는 철학적, 제도적, 사상적 요소들이 이론의 선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14.

해킹이 쿤과 푸코를 만나게 한 방식은 다음과 같다. 쿤이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다룬 예는 대부분 물리학, 천문학, 화학과 같은 과학들이다. 즉 패러다임이 분명하게 확립되고 이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하는 ‘성숙한’ 과학 분야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은 주어진 패러다임 아래서 자연 현상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노력하며, 이 과정에서 과학 이론은 달라질 수 있지만 과학의 대상인 자연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실재한다. 곧 성숙한 과학은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그런데 푸코가 관심을 둔 의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인간과학’ 분야는 ‘덜 성숙한’ 분야들이다. 덜 성숙한 인간과학 분야에서는 과학 이론의 변화가 이에 해당되는 대상을 만들어 낸다. 해킹의 관점으로, 바로 이 점이 푸코의 저술에서 과학철학이 배울 수 있는 가장 심원한 교훈이었다.

해킹은 두 가지 역사적 사례의 연구를 통해서 인간과학이 어떻게 대상을 만들어 내는가를 보였다. 그가 연구한 사례는 모두 논쟁적이었는데, 첫 번째 예는 ‘아동 학대’였고 두 번째 예는 ‘다중인격’이었다. 해킹은 해당 과학의 발전이 ‘아동 학대자’와 ‘학대받은 아이들’을 만들어냈고, ‘다중인격자’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다.



15.

지금의 과학과는 다른 새로운 과학의 가능성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과학이 사회적, 역사적 요인에 의해서 우연히 결정된다는 사회구성주의를 받아들여야하며, 왜곡된 남성적 과학이 아닌 진정한 과학이 존재한다고 얘기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주의와는 정반대인 경험적 실재론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해러웨이는 사회구성주의와 경험주의를 모두 극복하는 방안으로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이라는 개념을 제안하는데, 간단히 말해서 이 개념은 모든 사람(그룹)의 비전이 그 사람(그룹)의 시시각각 변하는 아이덴티티에 의해서 구성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모든 지식은 부분적이며 상황적이기 때문에, 여성의 눈으로 과학을 한다고 페미니스트 과학이 만들어지는 것도, 현대 과학에서 남성성을 걷어 냄으로써 진정한 페미니스트 과학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인식의 객관성이라는 것은 자신의 지식의 부분성과 상황성을 성찰적으로 비판하는 데서 연원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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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개의 아이들은 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읽어도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되고, 현실과 크게 동떨어진 등장인물이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닮은꼴을 찾아낸다.




2.

이야기 그림책과 정보 그림책이 어린이의 정신 활동에 미치는 영향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읽는 책은 논리적 사고력을 활용하지만, 즐기기 위해서 이야기 그림책을 읽을 때는 상상력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논리적 사고력은 아직 미약하다.

…(중략)…

바로 이것이 정보-이야기 그림책이라는 혼합 형태가 실패하기 쉬운 한 가지 원인이다. 어린이가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을 때는 당연히 정보를 기대하며, 재미를 위해서 읽을 때는 흥분과 만족감을 기대하는 것이다.




3.

픽션의 기법으로 정보를 제시하는 경우에, ‘스토리’가 우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중략)…

어린이는 예민해서, 뜻밖의 일로 놀라는 것을 몹시 좋아하면서도 속임수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발한다.




4. 

이야기 그림책은 어린이의 소설이고, 개념 그림책은 어린이의 철학책이며, 정보 그림책은 어린이의 역사책 또는 과학책이다. 어린이는 시나 우스운 이야기, 수수께끼 같은 것도 환영하지만, 어린이가 가장 희망하는 것은 ‘이야기’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이다.




5.

뛰어난 그림책의 문장은 매우 간결하기 때문에 한 시간이면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6.

인상적인 등장인물은 좋은 서두를 약속하며 잘 짜인 플롯은 멋있는 끝맺음을 보장한다. 그러나 서두와 끝맺음을 연결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직 문장력에 달려 있다.




7.

규칙이라는 것은 일단 익히기만 하며 언제든지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조각가나 화가나 음악가와 마찬가지로 언제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규칙을 배워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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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아들도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일이 있습니다. ‘뚱보 질투’나 ‘뚱보 배신’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어린이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를 것입니다. 어른의 경우 ‘뚱보 ○○’는 더욱 사회화되어 법률이나 습관, 그리고 체면 같은 심리적인 구속이 되어 무겁게 짓누릅니다.




2.

자신의 관점에서만 상대방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멋대로 생각한 것이 보기 좋게 역습을 당합니다. 일상의 인간관계-부모와 자녀, 부부 등-에서도 흔히 있는 착각입니다.




3.

다시 말하면 요즘의 발달관은 젖먹이에서 유아기, 그리고 아동기, 청년기처럼 어떤 단계에서 다음 단계라는 식의 수직 상승으로 나타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능지수에서 보이는 어떤 발달상을 중심으로 발달이 빠르다, 아니면 늦다고 여깁니다. 그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발달은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겉으로 ‘측정할 수 있는 능력’만을 중요하게 다루는 경우가 많으며, 과거에도 있었고 또한 지금도 내재되어 있는 여러 가지 능력에는 거의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4.

모처럼 아이의 기분을 맞추고 싶어하는 유치원 선생님이나 엄마의 말도 때로는 어린이를 난처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듯합니다. 어린이 쪽이 이상하게 엉거주춤하게 되어 난처해하는 모습이 엿보여 재미있습니다. 어른이 상상세계에 있는 어린이들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합니다. 나는 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이와 마주할 때는 언제나 어린이가 뭔가 역할을 분배해줄 때까지 나무나 돌처럼 가만히 있습니다.




5.

어째서 어린이는 상상놀이를 하면서 메타표상이 가능한가? 이 행위는 상당히 수준이 높은 것 같다. 생각에 빠지는 게 아니라 가상과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현실세계에 있으면서 가상세계에 빠지며, 가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생물은 아이뿐이다. 더구나 자신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아이들끼리 그 세계를 공유할 수 있고 메타표상조차도 공유한다.




6.

저는 제4장과 제5장에서 상상놀이 그림책을 제시해 학생들에게 자기 안에서 발달을 읽는 것을 촉구한 결과 나타난 것들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 안에서 발달을 읽는 것을 촉구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내용을 가르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발달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어떤 체험이 필요한지를 자각적으로 선택하는 능력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교과서에 있는 발달 과정을 모방하는 것도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가치관에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발달하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칠 수 없는 한, 적어도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풍부한 환경을 마련해서, 그곳에서 그들이 어떤 것을 필요한 환경으로 선택하는지 곰곰이 지켜보았으면 합니다.




7.

앞에서 말했듯이 지금까지의 행동주의 흐름 속에서 나온 유아․아동심리학 연구는 대부분이 보편성과 객관성의 모델을 자연과학적인 인과관계에 말미암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어린이 마음을 보기 힘들다는 것에 커다란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유아․아동심리학은 ‘평생발달 심리학’이 생겨나면서 또 하나의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서서히 보입니다. 피더맨(David Lee Featherman)은 심리학이 평생에 걸쳐 발달한다는 관점에서, 그 연구가 도무지 나아가지 못한 이유 두 가지를 들었습니다. 하나는 어린이를 중시한 발달심리학이 학문상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발달이란 개념이 이른바 생물학적인 모델에 의존한 나머지, 발달의 개념은 ‘①최종상태(곧 성숙)에 이른다는 점 ②발달적인 변화는 순차적이고 바뀌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③발달 패턴에는 개인차가 적고 보편적인 점’이라고 가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중략)…

저는 이런 연구가 중요함을 인정하지만, 이처럼 생물학적 성장 모델로는 채울 수 없는 중요한 연구 주제가 결국 거의 손도 대지 못 하고 남아있는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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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눈으로 읽는 것보다 귀로 듣는 것이 말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2.
여기서 특히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죽어가는 두 살배기 사애나이의 침대 옆에서, 그 아이의 어린 누나와 어린 형을 자기 옆에 앉히고, 어떤 목소리로 읽어 줄 것인지, 어떤 식으로 페이지를 넘길 것인지까지 고려하면서 의사가 그림책을 읽어주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그 시간과 공간 전체가 너무나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만약 의사가 ‘이 그림책을 한번 읽어 보세요’ 하고 책만 건네주고 가 버렸다면 중요한 것을 전달하지 못했을 것이고, 어린이들도 그 책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3.
이것은 인공적인 도시에서 살면서 이것저것 자료를 뒤지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머리를 쥐어짠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작품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지극히 비일상적인 상황 속에 던져 놓았을 때 비로소 창조적인 표현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4.
현대를 흔히 IT혁명 시대라고 합니다. 컴퓨터나 휴대전화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고, 자신이 관심이 없거나 재미없는 화면은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흘려보내 버리죠. 이처럼 숨가쁘게 돌아가는 정보화 시대 속에서, 진정 영혼을 울리는 시간과 공간을 얻을 수 있는 매체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가장 좋은 것이 그림책일지 모릅니다.
 
5.
그렇다면 과학 책은 왜 만드냐는 질문을 곧잘 받는데, 과학 책도 마찬가지예요. 어린이가 그 책을 읽고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가 깜짝 놀라거나 감탄하거나 새로운 발견을 한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그림책은 아무 의미가 없지요.
하지만 현재 학교는 주입식 교육이 중심이고, 그런 교육을 받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성인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간혹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는데, 뭐랄까, 마음이 통하지 않는달까요? 표정도 없고 말씨도 너무 단조롭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대체 어떤 말들이 들어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지요.
 
6.
어린이는 이야기에 쓰여 있는 말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어른들은 설명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이런 말이 하고 싶은거겠지 하고 이해해 주지만, 어린이들은 안 그래요.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이미지가 생기지 않으면 이야기 밖으로 나가 버리거든요. 릴리언 스미스가 <아동문학론>에서 “어린이의 마음은 객관적이다.”라고 했는데, 정말로 어린이는 객관적으로 읽어요. 예를 들어 어떤 책에서 이야기하는 문장이 쭉 이어지다가 갑자기 설명하는 문장으로 바뀌어 버리면, 그 순간 어린이의 긴장감은 붕괴되어 버리죠.
 
7.
그림을 감상할 때, 한동안 그 그림 앞에 가만히 서 있다 보면 한 장의 그림 속에 표현된 드라마랄까, 인간의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갖가지 감정 속에 깊이 들어갈 수 있죠. 그림책의 경우에는 약간의 말을 덧붙임으로써 그림의 힘이 훨씬 강한 형태로 표현되고,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의 마음속에도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8.
작디작은 임금님의 나라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어른이고, 많은 지식과 경험과 사회적 의무를 갖고 있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해야 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몸집이 점점 작아지고, 갖가지 사회적 책임이나 의무도 줄어들어, 인생 후반기가 되면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놀 수 있어요. 이를테면 풀밭에서 구름을 바라보며 상상에 잠기거나 체스 말이 되어 체스판 위에서 노는 거죠. 그러다 마침내 겨자씨처럼 조그마해져서, 어느 날 먼지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요. 옆에 있던 사람이 ‘어, 이 사람이 어디갔지?’하고 둘러보는 식이랄까? 아무튼 그런 식으로 인생을 끝맺는 거죠.
작디작은 임금님은 인간 세상을 이상하게 여겨요. 어릴 때는 판타지를 풍부히 갖고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공상의 세계에서 마음껏 즐거움을 누리다가, 나이가 들면 왜 그런 것들을 버리냐고, 왜 점점 편협해지고, 의리나 인정에 얽매이고, 결국에는 비참한 죽음을 맞느냐고 말이에요. 임금님이 보기에 인간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9.
저는 아이들이 글을 일찍 깨우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아요. 글이라는 것은 매우 한정된 것이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한정된 말 속에 혼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죠. 반면에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글을 읽어 주는 사람과 공간을 함께 나누는 체험을 뜻해요
…(중략)…
2000년 10월 현재 통계에 따르면, 한 달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고등학생이 60%, 중학생은 57% 정도라고 해요. 즉 글은 읽을 줄 알지만 말의 세계에 들어가지는 못한다는 거예요.
 
10.
저도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 편이지만, 이따금 손자와 같이 보다 보면 우울해져요. 매일 이런 것만 보고 있나 싶어서요. 툭하면 때리고 부수는 것들뿐이에요.
 
공포를 상품화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무섭지 않죠.
 
진짜 공포는 이를테면 <잘자라, 프란시스>(러셀 호번 글, 가스 월리엄스 그림)처럼 나방이 창문에 탁탁 부딪힐 때 느끼는 공포나 괴물에 대한 공포, 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이마에 요시토모 씨의 <낡은 집의 숲>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접했을 때 느끼는 공포죠. 중요한 것은 현실 속의 살인사건을 목격하는 그런 공포가 아니라, 어린이의 감정생활 또는 정서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공포예요. 요즘 어린이들에게는 그런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파괴적인 행동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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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위에 대한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는 후세에 더욱 정교해져서 동아시아 전역에 확대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 한양의 서쪽에는 감옥과 처형장 등 형벌 및 죽음과 관련된 기관을 배치하였다. 가령 한양의 서쪽에 있던 ‘고태골’이라는 곳은 처형장이었다. 그래서 “고태골로 간다”라는 말은 죽음을 의미하였고, 줄여서 “골로 간다”, “골로 보낸다”라는 등의 속어가 이 지역으로부터 유래했다.







2.

이때 주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잔혹한 폭군의 모습을 인상 깊게 보여준다. 주는 인질로 도성에 와 있던 주문왕의 아들 백읍고를 끓는 물에 넣어 삶아 죽인 뒤 그 고기로 장조림을 만들어 주문왕에게 보냈다. 주문왕이 정녕 성인이라면 그것이 자식의 살인 것을 알고 안 먹을 것이니 죽여버리고, 만일 모른 채 먹는다면 평범한 인간이니까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주문왕에게 자식의 고기를 먹임으로써 그의 성인됨이 거짓임을 폭로하는 술책이기도 했다. 아들의 고기를 먹지 않으면 목숨을 빼앗고 먹는다면 그 명성에 먹칠을 하게 만드는 교묘한 시험이었던 것이다.

…(중략)…

마침내 주문왕이 고기를 먹자, 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제 아들을 잡아먹는 성인도 있다더냐. 도대체 어떤 놈이 희창을 성인이라고 했더란 말이냐, 하하.”

주는 통쾌해하며 주문왕의 명성을 무너뜨린 데 만족해서 그를 풀어주었다. 성인으로서의 정당성을 잃은 주문왕은 더 이상 결계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사실 주문왕은 고기가 자식의 살인 것을 알면서도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눈물을 삼키며 먹은 것이었다. 이러한 주문왕의 행동은 훗날 오히려 그의 비범함과 명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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