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님이 이 책을 읽었더라면
필리파 페리 지음, 이준경 옮김 / 김영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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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생각해볼 점이 많은 책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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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출세작 - 운명을 뒤바꾼 결정적 그림 이야기
이유리 지음 / 서해문집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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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어디선가 보았던 독자들과 미술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흐릿한 창을 닦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저자의 말이 인상적이었는데, 저자가 풀어놓는 화가들이 남긴 걸작 그 이면의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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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모조 사회 1~2 - 전2권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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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우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그의 등단작 <스파링>을 통해서였다. 고아원 출신의 문제아가 복싱 챔피언이 되는 다소 진부하다고 할 수 있는 성장 스토리에 흥미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안정된 호흡 속에 매력적인 캐릭터와 세심한 심리묘사가 돋보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성공에 이르는 과정보다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과 이로 인해 무너져 내리는 과정, 또 이를 극복하며 성숙해가는 과정에 더 중점을 둔 구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낡고 닳은 소재를 2016년에 읽게 되다니,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다니라는 심사평에 공감하며 한동안 소설이 주는 여운 속에 머물러 있었던 기억이 있다. 후속작 <저스티스맨>도 시대의 사회상을 반추할 수 있는 소설이었다. 익명성과 정의를 가장한 폭력이 사회악으로 표면화되는 과정을 추리소설 형식으로 표현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하지만 전작에서 느낀 만족감과 신작에 대한 기대감 속에서 <모조사회>를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에 머물러 있던 작가의 시선은 미래를 향하고 있었고, 작가는 이를 SF라는 예상치 못한 장르와 스타일로 구현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며 어쩌면 SF야말로 작가의 몸에 맞는 옷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모조사회>라는 이름처럼 어쩌면 먼 훗날 인류가 도달할지모를 미래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다루고 있다. 또한, 사회 부조리에 대한 문제 제기는 전작들과 맥을 같이하면서도 그 대안에 대한 고민까지 담고 있다. 특정 세계관과 시스템 속에서의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SF의 장르적 속성을 생각해볼 때 데뷔작부터 이어져 온 작가의 고민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그릇은 SF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의 세계를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가 진짜라고 믿느냐는 거예요. - 1P. 125 -

 

어느 날 도시 한복판에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는 갑작스럽게 재난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리게 된다. 낯설고 신비한 공간에서 눈을 뜬 에게 사람들은 당신이 있는 곳은 지구상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단 두 개의 대지 중 한 곳인 복지 자본 공동체라고 말한다. 인류의 헛된 망상이 한순간에 인류를 절멸케 한 바이러스를 출현시켰고, 살아남은 인류는 유일한청정구역으로 남은 좁은 반도에 새로운 도시 문명을 일구어냈지만 사회 시스템과 분배 방식에 대한 갈등으로 반도의 도시는 다시 모조사회복지 자본 공동체라는 두 개의 사회로 나뉘어 각각 독자적으로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당신이 살아온 세계는 인공지능 중앙 통제시스템이 필요에 의해 구축한 시스템 아키텍처이며, 초확장 현실로 구현된 가상의 세계라고 말한다.

 

소설에서 모조사회는 반도라는 한정된 물리적 공간으로 인해 수직형으로 발전한 도시사회로 그려진다. 하늘을 찌를 듯한 지상의 빌딩과 동력 마련을 위해 지하 깊은 곳까지 개발된 모조사회는 한정된 자원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권력구조도 수직화된 사회다. 메인 컴퓨터인 퀸과 중앙 통제 시스템이 위치한 원형 구조물의 이름이 콘클라베(Conclave)라는 사실에서 도시사회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단의 선거시스템이 인공지능에 의해 통제되는 시스템의 이름이 되었다는 건 과학이 신이고 종교인, 실용적 가치가 극대화된 도시사회를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도시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한 분배구조로부터 출발한 복지 자본 공동체는 태생적으로 수평사회를 지향하며 발전했다. 공동체는 자연 속에서 생태계와 공존하면서 공유와 조화와 균형을 최선의 미덕으로 여긴다.

 

 

 

 

소설 속 은 서로 상반된 두 사회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공동체의 일원이었지만, 이상향에 대한 타협할 수 없는 차이로 각자의 길을 걷는다. 과학기술 기반의 실용성을 중시한 는 공동체를 떠나 모조가 되었고, 과학기술의 잠재력을 인정하면서도 기술이 지향하는 방향과 가치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았던 은 공동체에 남았다. 이러한 인물간의 대립은 소설 속에서 주요하게 언급되는 예술가 바스키아의 SAMO 크루를 연상시킨다. 바스키아는 친구 알 디아스와 SAMO (Same Old Shit) 라는 크루를 결성하며 뉴욕 소호거리를 캔버스 삼아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바스키아는 더 유명해지길 원했고, 반면에 디아스는 익명의 화가로 남길 원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한 그들은 SAMO is Dead라는 낙서를 마지막으로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모조가 된 SAMO룸으로 칭한 자신의 공간에 을 억류한다. 영원히 27세의 젊은 화가로 남아 있는 바스키아는 소설에서 영원불멸의 삶과 이상향을 향한 인류간의 갈등을 상징하고 있다.

 

 

 

 

어차피 저기서 자기가 뭘 하고 사는지도 모르니까. 진실이 뭐가 중요하겠어. 자기만 행복하면 됐지. 안 그래? - 1P. 259 -

 

무지로부터 비롯되는 행복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는 소설을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이다. 인구통제와 자원개발이란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시사회는 신경회로 컨트롤러를 개발해낸다. 이는 양자나노기술을 이용하여 신경망을 장악하는 시스템으로 인간의 감각을 왜곡시키고 공간을 조작하여 가상화된 허구의 삶을 현실의 삶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하지만 진실이 왜곡된 삶이 진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공정과 부조리에 관한 진실을 감추고, 문제 자체를 해결해야할 대상에서 배제시키는 시각이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왜곡하고 축소시키는 것 아닐까? 마치 모조사회가 거짓의 모조 (模造)된 삶이 내포하고 있는 마력 (Mojo)으로 개인을 현혹시키며 착취하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 속 의 생각처럼 거짓이란 한번 만들어지면 반드시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고, 결국 그것이 진실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 아닐까?

 

 

여러분의 정의가 정말 정의일까요? 만약 그게 정의라면 그것만이 유일한 정의일까요? - 2P. 38 -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사회는 먼 미래에 인류가 도달할지도 모를 서로 다른 유토피아를 대변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토피아를 꿈꿀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현재의 삶을 딛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서 바람직한 사회나 미래에 달성해야 할 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토피아니즘은 기본적으로 희망의 철학이다. 하지만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는 절망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이 주장하는 유토피아를 사회가 추구해야할 유일한 대안으로 강조할 때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변질될 수 있다. 누군가 바람직한 미래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것을 거부하는 타인에게 강요할 때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를 강요하는 행위와 양립할 수 있을까?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와 관련된 화두를 보면서 고리끼의 희곡 '밑바닥에서'가 떠올랐다. 싸구려 여인숙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는 밑바닥 삶들 앞에 어느 날 찾아온 노인은 희망이 된다. 사람들은 점차 그의 희망 섞인 말에 기대를 걸고 꿈꿔왔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노인이 사라진 후 희망에 가득 차 있던 이들은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서 꿈꾸던 삶과 현실의 간극만큼의 충격을 안고 이전보다 더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밑바닥에서는 희망은 누구에게나 절실한 것이지만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장밋빛 희망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로는 희망도 어떤 이들에겐 독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절망은 '헛된 희망'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토피아는 단순한 공상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꿈을 간직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희망하고, 실패하는 반복되는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희망을 꿈꿀 수 있다. 현실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대안으로 유토피아가 제시되고 디스토피아로 변질된 유토피아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유토피아를 추구하면서 인류는 발전해왔다. 앞으로도 거듭되는 실패를 감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인류는 진보해나갈 것이다. 이상향은 혼자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타인에게 강요하면서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동의 삶을 위해 희생하면서 또, 자발적으로 희생할 용의가 있는 이들이 모여 거대한 결속을 이루면서 이들이 함께 꾸는 꿈은 유토피아가 된다. 소설 속에서 는 자신의 기억을 되찾는 것을 포기하고, 인류의 새로운 희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택한다. 어쩌면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기억 보다 망각과 용서가 필요한 것 아닐까? 결말의 충격적인 반전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새로운 존재방식과 이상향에 대한 가능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함께 하는 삶을 위한 자발적 희생과 기억을 이겨낸 용서는 유토피아를 향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의 말처럼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면 나머지는 감수할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허허벌판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끝과 누군가와 함께 보는 풍경은 분명히 다릅니다. - 2P. 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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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에 대해 기록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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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의 메시지는 내 눈에는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변해 가는 듯했다. ‘네트워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계속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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