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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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연못 / 개구리 뛰어드는 / 물소리 '퐁당'”


하이쿠(俳句)를 이야기할 때 흔히 언급되는 대표적인 시다. 지은이는 마츠오 바쇼 (1644∼1694)로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하이쿠 시인이며, 하이쿠를 문학의 한 장르로 완성시킨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하이쿠는 일본의 문학 장르로 3행 17음절로 이루어진 짧은 시를 가리킨다. 서술을 극도로 아낀 채 최소한의 상징어와 여백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하이쿠의 특징이다. 막상스 페르민의 『 눈 』에서 유코 아키타는 오직 두 가지 주제에 대한 열정을 보유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바로 삶의 아포리즘이 응축되어 있는 '하이쿠'와 삶의 희노애락과 삶의 근본적 속성을 대변하는 듯한 '눈(雪)'이다.


'하이쿠'와 '눈(雪)'은 투명하며 즉각적이고 친숙한 느낌과 때로는 섬세함을 때로는 산문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또한, '눈(雪)'이 천사들의 흰빛으로 이어지는 통로라면, '하이쿠'는 시적 영혼에게 신성한 빛으로 이어지는 통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유코 아키타의 말에 그의 아버지는 한편의 시는 한편의 흘러가는 물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시는 직업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대해 유코 아키타는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하이쿠'와 '눈(雪)'에 대한 열정이 있다는 것은 삶에 대한 진지한 탐구 자세를 가졌다는 말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외줄타기 곡예사처럼 삶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삶은 질서와 혼돈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정된 상태라고 느끼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미지의 것이 느닷없이 닥친다. 이렇게 질서가 무너진 혼돈 속에서 우리 삶은 현실부정과 절망,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되어 간다. 삶은 질서와 혼돈으로 점철되어 있다. 안정된 질서 속에 갑자기 혼돈이 찾아오기도 하는 반면, 모든 것을 상실한 듯한 절망적 순간에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도 한다. 삶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질서와 혼돈의 경계 위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삶에서 인생의 의미가 빛을 잃어가고, 절망과 두려움이 고개를 드는 순간과 마주칠 때 우리는 무엇에 의지하며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모범답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삶이 던지는 시험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각자가 서로 다른 시험에 응하고 있다는 것을 종종 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답을 모방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모범답안을 찾는 것으로는 세상이 던지는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다. 각자가 보유한 인생 법칙들은 모두 ‘질서’와 ‘혼돈’, ‘의미’와 ‘책임’이라는 키워드로 대변될 수 있고, 이러한 큰 흐름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 맞게 법칙들을 적용하고 변주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눈(雪)'은 아이들의 소중한 친구였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아빠, 엄마, 친구들과 눈사람을 만든 기억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또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의 순간이 지나면 피할수 없는 이별이 다가온다는 것을 우리는 '눈(雪)'을 통해 배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어른이 된 우리는 이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눈은 그저 눈일 뿐이고,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건 어른의 시각이다. 상식에 매몰되어 있는 나에게 『 눈 』 은 잊고 지냈던 어린 날의 기억, 아름다운 추억과 동심을 상기시켜주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눈에 대한 또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눈은 솜사탕처럼 깨끗하고 찰나의 아름다움을 내포한 ‘하얀’ 눈이 아닌 아닌 슬픔과 고독,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배어 있는 ‘흰’ 눈으로 보였다. 저 내리는 눈이 세상을 정화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공중에서 제각각으로 흩날리는 눈송이들은 지면에서 서로의 냉기를 견디며 하나가 되고 공기 입자들을 덜어내며 단단해진다.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연약하고 쉽게 증발해버리는 것이지만... 결국 피할 수 없는 이별을 담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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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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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의 <하얼빈>을 읽으며 나는 인간이 걸어 온 ‘, 또 새롭게 만들고 걸어갈 에 대해 생각했다. 소설에서 힘이 길을 만들고, 길은 힘을 만드는 것이라는 이토의 말에 순종은 세상의 땅과 물을 건너가는 길도 있지만, 조선에는 고래(古來)로 내려오는 충절과 법도와 인륜의 길이 있다.’고 답한다. 이에 대해 이토는 그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이며, 고래의 길이 현재에 닿아서 미래의 길로 나아가고 있고, 쇠로 만들어진 이 철길이 그에 대한 방증(傍證)이라 말한다. 이토는 조선이 존망의 위기를 벗어나 평화와 독립을 추구하는 길은 제국의 틀 안으로 순입하는 길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동양평화문명개화라는 허울로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약육강식의 폭력야만을 애써 감추려는 모순과 부조리를 담은 말이었다. 이토의 주장에서 나는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프리드리히 하이예크의 말을 떠올렸다.

 

 

추구하는 길은 다르지만 종국적으로 만인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정의로운 세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종교와 정치는 그 결을 같이 한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의 근본적 속성 그리고 상실과 결핍으로 얼룩져 있는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는 종교에 귀의하거나 국가 등의 정치체제에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 어떤 종교나 정치도 완전하지 못했고, 어느 시대나 세상이 공정하고 정의롭게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는 세력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안타까운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이용하여 현실적인 이득을 보는 집단은 계속 양산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허상을 제시하거나 공포감을 조성함으로서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절대권력에 복종하는 길만이 정의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지옥으로 가는 길은 늘 선의로 포장되어 있었다. 소설 속에서 안중근은 천주교의 교리와 제국주의가 잠식한 현실 사이에서 커져가는 절망감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우월한 물리력을 기반으로 일본은 대륙으로 영토확장의 야욕을 드러냈고, 철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다. 이토는 제국주의 팽창의 길을 따라 한반도를 가로질러 하얼빈으로 향했다. 제국주의는 당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었고, 조선의 지배층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폭력 앞에서 현실의 부조리에 침묵하며 저마다 살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조선의 독립과 평화를 위한 길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시대가 내포한 모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범세계적으로 넘실대는 폭력의 물결을 몸으로 부딪치고 막아서며 새로운 길을 열어간 사람이 있었다. 총구의 흔들림은 멈추지 못했지만, 격발로 인한 반동은 몸안으로 받아들여 오롯이 홀로 삭여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총알에 실어 이토의 목숨에 박아넣은 그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세상을 향해 말을 건 안중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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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2-31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훈 문장 참 좋다 생각하는데 김훈의 책을 풀어낸 잭와일드님 문장도 참 좋아요 *^^* 편한 밤 보내시고 새해 복도 마니마니 받으세요 *^^*

잭와일드 2022-12-31 20:42   좋아요 1 | URL
mini74님 2022년 한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가오는 2023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 생각하는 숲 12
T. S. 엘리엇 지음, 악셀 셰플러 그림, 이주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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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는 T. S. 엘리엇이 어린이들을 위해 쓴 유일한 동시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동시집에는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며 때로는 인간과 비슷하기도 하고, 또 비밀스럽기도 한 고양이의 특징들을 살필 수 있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담겨져 있다. 시공사에서 출판된 본 도서는 책이 처음 출간된 지 7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해 새롭게 만든 것으로, 영국 최고의 어린이책 상인 스마티즈 상 수상 화가 악셀 셰플러가 그림을 그린 것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본서 <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는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인 <캣츠>의 모티브가 되었다. 1972년 영국의 뮤지컬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이 시집을 읽고 뮤지컬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동시집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고양이들을 연결시켜줄 수 있는 스토리라인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뮤지컬 <캣츠>다.



뮤지컬 <캣츠>는 일년에 단 하룻밤만 열리는 젤리클 무도회에서 최고의 고양이로 뽑히기 위해, 수많은 고양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뮤지컬에서 하나의 스토리라인으로 엮어내끼 위해서 원작 동시집과 차이가 있는 내용도 있다. 예를들어, 마카비티는 책에서나 뮤지컬에서나 악당이지만, 가장 오래 산 신명기 영감님은 가장 멋진 고양이를 선택해 천국으로 보내는 현명한 지도자로, 못 말리는 말썽쟁이 ‘럼 텀 터커’는 인기 많은 바람둥이로 등장한다.



또한, 동시집에서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고양이들이 뮤지컬에는 등장한다. 뮤지컬의 히로인이나 다름없는 ‘그리자벨라’가 대표적인 사례다. 뮤지컬 <캣츠>에서 가장 사랑 받는 뮤지컬 넘버인 <메모리>를 부리는 ‘그리자벨라’는 동시집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뮤지컬에서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뮤지컬 <캣츠>는 <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탄생했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위한 동시에서 이렇게 화려하고 풍성한 스토리 구성이 가능하다니 놀랍기만 하다.



생각해보면 간결하지만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시’가 내포하고 있는 핵심적인 특징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뮤지컬 <캣츠>가 탄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본서를 보면서, 또 뮤지컬을 감상하면서 나와 인연을 맺었던 고양이를 추억해본다. 애묘인이든 아니든간에 누구나 이런 추억들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동시집의 시들을 감상하면서 고양이들과의 추억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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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다를 닮아서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반수연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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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찰리 채플린은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을 남겼다이는 일견 행복으로 충만해 보이는 삶도 면밀히 들여다보면 두려움과 고통삶에 대한 ‘비의(悲意)’가 내포되어 있다는 삶의 내밀한 속성을 잘 포착해낸 체험적 진리라고 생각한다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제임스 설터도 "나뭇잎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보면 잎맥이 보이는데다른 건 다 버리고 그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이는 저마다의 방향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잎맥처럼 삶은 다면적이고 정답을 찾기 힘든 것이지만삶에 대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멀리서 숲을 조망하기 보다는 숲 안으로 깊숙히 침잠하여 나뭇잎의 형태와 주위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그 미세한 변화들에 주목해야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다는 것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리는 빗속에서도 춤추는 일이다." (p. 117)

 


반수연 작가의 <나는 바다를 닮아서>를 읽으며, 삶의 내밀한 영역까지 뜯어보면 인생이란 희극과 비극, 강자와 약자, 피해자와 피의자가 뒤섞인 영화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작가가 남편과 함께 영화 '조커 (Joker)'를 보고 쓴 산문 '결혼기념일'에 등장하는 말처럼 말이다. 딸아이가 큰 수술을 마치고 병실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적은 "산다는 것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리는 빗속에서도 춤추는 일"이라는 문구를 보고, 작가는 삶이란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것이고, 사소하고 다정한 것들이 모여 바위를 들 수 있는 힘이 된다는 체험적 진실을 털어놓는다. '당신의 강화반닫이'에서 언급한 할머니의 강화반닫이처럼 이토록 지리멸렬한 생을 흘러가게 하는 것은 어쩌면 무용하고 불가해한 것들일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 하지만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삶이란 저마다 쌓아둔 사연들로 섬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 서로가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누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간은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불완전함이야말로 각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채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매듭이 되는 것 아닐까? 신뢰와 사랑, 자발적 책임이 동반된 관계를 구축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은 불완전한 현실을 일정 부분 해소시켜주는 심연의 해독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만들어주고, 삶을 살아가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는 것은 일견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인 행위처럼 보이는 사랑, 우정, 신뢰와 같은 가치들이다. 서로를 향해 뻗는 온기 어린 손짓이 결국 메마른 삶에 활기가 되어 내일을 밝히는 희망이 된다.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

"He can do! She can do! I don't care!" (p. 109)

 


작가가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딸과의 에피소드는 이 같은 삶 속에서 온기가 배어있는 반짝이는 순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그도 할 수 있고, 그녀도 할 수 있는데, 나라고 못 할까!"라는 구호가 등장하자, 레고를 가지고 놀고 있던 아들은 힘차게 구호를 따라 하는 반면, 딸아이는 "그도 할 수 있고, 그녀도 할 수 있지만, 나는 신경 안써!"라고 힘차게 바꿔 말했다는 미소를 짓게 만드는 에피소드이다. 작가도 딸아이로 인해 온 가족이 행복하게 웃었던 귀여운 에피소드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두 번의 큰 수술을 오롯이 혼자 감내해야만 했던 딸을 생각하며, 작가는 딸의 삶을 대하는 긍정적인 시선은 천성 탓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아이가 겪어온 아픈 시간들 때문일 수도 있다는 가슴에 담고 있던 생각을 조용히 털어놓는다. 그때는 모르고 지나쳤지만, 이제 어렴풋이 알것 같은 것, 또 영화제목처럼 지금은 맞지만 그때는 틀릴 수 있는 것이 삶이 내포하고 있는 기본적 속성인 듯하다.

 


코로나19는 그동안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연하게 펼쳐지는 것인 줄만 알았던 평범한 일상이 정말 이토록 소중한 것이었음을 우리가 절절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많은 이들이 정신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힘든 나날들을 보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견디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일상이 회복되지 못하면서 대면 모임이 최소화되고, 비대면 만남과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증가한 것은 코로나가 만든 새로운 풍경이다. 코로나는 우리 삶의 많은 부분들을 바꾸어 놓았지만 삶의 근본적 속성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하지만 즐거움과 기쁨이 되고, 살아가는 동력이 되는 생의 순간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최근 내게도 코로나가 빚어 낸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도쿄 올림픽 중계방송을 보던 여름날의 추억이다. 체조경기 중계를 보던 중 딸아이가 카메라를 향해 인사하는 여서정 선수를 보며 아빠, 저 언니가 나한테 안녕하면서 인사해라고 말해 온 가족이 웃었던 기억이다. 살아가면서 딸아이도 안녕에는 반가움의 표현도 있지만, 애틋한 작별의 인사, 차마 건네지 못한, 또 건네고 싶어도 건넬 수 없는 그리움도 있다는 걸 조금씩 알아갈 것이다. 재택근무로 사라진 출퇴근 시간을 활용하여 딸의 손을 잡고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며 유치원 등원을 함께 한 것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딸아이가 재채기를 하는 나에게 아빠, 고개 돌리고 입을 가리고 해야지.“라며 유치원에서 배운 코로나 예방수칙을 애교 섞인 말투로 늘어놓았던 것도 떠올릴 때마다 미소를 머금게 하는 기억이다.

 


"이제 내게 너무 익숙해진 이국의 시간과 손님처럼 어색한 고향의 시간이 서걱거리며 부딪혔다.“

 


반수연 작가는 통영에서 태어났지만 20여 년 전에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나는 바다를 닮아서>에도 고국의 기억을 가지고 오랜시간을 타국에서 살아가는 것에서 비롯되는 경험들이 등장한다. 태어나서 배우고 익힌 고국의 언어와 문화를 두고서 다소 이질감이 느껴지는 타국에서 살아 온 시간들은 결코 쉽지 않은 세월이었을 것이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속한 문화를 거슬러 자기 내부의 역사를 발견하고현재를 살아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작가도 고백하고 있듯이 이주자로, 소수자로, 주변인으로 늘 자신을 낮추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덜 쉬고 눈에 띄지 않게 존재하면서도 필요할 땐 늘 거기 있어야 겨우 인정받는 사람, 그것이 이방인이 살아남은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세월이 흘러 익숙해진 이국의 시간 속에서 다소 어색하지만 추억이 담긴 고향의 시간을 작가는 그리워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을 같이 공유하고 만들어 온 가족이라는 존재를 생각한다. 머나 먼 타국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작가의 남편은 두려움을 내색하지 못한채 언어의 장벽을 덮고 이주자에 대한 경계를 허물려는 노력을 해왔다. 유난히 마음이 여린, 서른이 조금 넘은 젊은 남자가 어린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이국으로 와 그 막막함과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고, 마음을 졸였을지 이제 와서 아내는 다시 떠올린다. 그 시절 무거운 짐을 진 어린 남자의 마음을 아내는 세월의 풍파를 헤쳐 온 지금 더 애잔하게 기억해낸다. 청력검사가 타국어에 대한 이해를 테스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했던 이방인의 시간들, 그 시간들은 지나고 나면 가족을 한층 더 단단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동시대를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 또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넘어 미래를 응시한다. 동시대를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 또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넘어 미래를 향하는 것은 인간은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Kronos)' 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 (Kairos)'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것인 동시에 미래를 꿈꾸고 호흡하게 하는 두 번째 심장이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편견과 집착에 사로잡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거나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로에 대한 관심과 공감, 진심이 담긴 위로가 진실을 가능하게 하고, 아주 미약한 부분이나마 세상을 진보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 아닐까? 유난히 춥게 느껴지는 2022년의 겨울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산문집을 만난 것 같아 너무나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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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2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길 2022-12-24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읽고갑니다.
 
독립운동 열전 2 - 잊힌 인물을 찾아서 독립운동 열전 2
임경석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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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는 투쟁과 부역의 역사다. <독립운동 열전>의 저자 임경석은 아직 청산되지 못한 이 어두운 시절을 조망하고 있다. 주목해야할 것은 '잊힌 사건과 인물을 찾아서'라는 책의 부제처럼 독립운동에 헌신했음에도 이념 등의 이유로 주목 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과 사건들을 재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말처럼 독립운동의 진정한 주역은 민족과 국가를 위한 진심을 보이고 이름 없이 사라져간 민중들이었다. 이들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힘은 민중에게 있으며, 이는 핍박과 분열, 갈등이 빚어낸 시대의 소음 속에서 일순간에 타오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독립운동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바로 윌리엄 터너의 명화 <전함 테메레르>.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빅토리호를 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그림 속에서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트라팔가 해전 승리후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이 조성되었고, 광장 중앙에 승장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다. 넬슨이 승선했던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반면 테메레르호는 운수업자에게 넘겨져 해체되는 운명을 맞는다. 템즈 강가로 산책을 나간 터너는 이 위대한 선박의 마지막 항해를 그림으로 남겼다. 윌리엄 터너는 시대를 빛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영웅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기억하는 넬슨 제독, 빅토리호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테메레르도 있었다고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이들을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름 없는 민중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역사의 페이지에 그들의 몫도 있을까? 우리는 윌리엄 터너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그들을 기억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정신과 투쟁, 숭고한 희생은 <전함 테메레르>가 되기 충분하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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