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공부가 재미있어지는 순간 (50만 부 기념 우리들 에디션) - 공부에 지친 청소년들을 위한 힐링 에세이
박성혁 지음 / 다산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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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의 신 오시리스도 조각조각 부서질 수 있다사랑이 끝날 때경력이 단절될 때소중한 꿈이 날아갈 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익숙했던 질서가 사라진 자리에는 체념불안불확실절망이 들어찬다허무주의와 심연이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등장해 안정적이고 바람직한 삶의 가치들을 파괴한다결국 혼돈이 출현한다. “ - <질서와 혼돈> 에서 -

 

 

삶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안정된 상태라고 느끼는 순간기다렸다는 듯 미지의 것이 느닷없이 닥친다이렇게 질서가 무너진 혼돈 속에서 우리 삶은 현실부정과 절망,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되어 간다삶은 질서와 혼돈으로 점철되어 있다안정된 질서 속에 갑자기 혼돈이 찾아오기도 하는 반면, 모든 것을 상실한 듯한 절망적 순간에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도 한다삶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질서와 혼돈의 경계 위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삶에서 인생의 의미가 빛을 잃어가고절망과 두려움이 고개를 드는 순간과 마주칠 때 우리는 무엇에 의지하며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학부시절 오랜 기간 꿈꾸었고 치열하게 준비하였던 행정고시에서 최종적으로 탈락했을 때, 나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인생에서 처음 경험해보는 실패는 그동안 내가 투자했던 시간과 노력의 무게만큼이나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수험생활을 하면서도 정해지지 않는 혼돈의 시간 동안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삶의 무작위성이 너무나 무섭게 느껴졌지만, 이제 눈앞의 현실이 되어 목을 죄어오는 삶의 조건들 앞에서 나는 숨이 막히고 두려워 남몰래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세상은 내 편이 아닌 것만 같았고, 조각나고 깨어진 꿈을 추스리고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 시절의 나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정처 없이 거리를 배회하듯 그냥 되는 대로 아무런 목표 없이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그러던 중 남들에 비해 뒤쳐진 채 불과 얼마 전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취업시장에 급하게 눈을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그 중 한 기업에 취업을 하게 되었고 나는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나긴 혼돈 끝에 찾아온 질서였다. 하지만 취업을 한 뒤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애초에 목표로 했던 곳에 취업했던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꿈을 쫓다가 실패한 후 인생의 선로에서 이탈하여 가까스로 도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받아준 회사에는 감사했지만, 회사는 나에게 새로운 꿈이라기보다는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직장인으로서의 조직생활은 힘들었고, 또 다른 절망과 혼돈, 안정과 질서가 반복해서 찾아왔다. 질서가 무너질 때면 원망과 현실부정 그리고 두려움이 찾아왔다. ‘왜 하필 나에게지금 이 순간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하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가장 두려웠던 건 눈앞의 현실이 되어 다가올지도 모를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였다불안과 두려움은 자가 증식하며 다른 모든 감정을 잠재우며 무한정으로 퍼져 나갔다삶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내 마음 깊은 곳 심연에 머물고 있는 괴물은 점점 더 포악해져갔다삶의 의미는 빛을 잃어갔고절망과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수험생으로서 일정한 루틴을 오랜 기간 유지했던 성실함은 회사생활에 적응하고 새로운 질서와 안정을 만들어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고, 회사가 성장하면서 직장인으로서 나도 성장하면서 결혼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이 책 <이토록 공부가 재밌어지는 순간>을 만났다. 업무상 필요에 의해서 물류 관련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당시 나는 IT회사의 기획팀에 근무하고 있었고 운송, 보관, 포장 등 물류의 전 단계에 걸쳐 센서, 제어기술 등의 IT기술을 접목해 물류운영의 효율화와 비용 절감을 이뤄내는 스마트물류가 각광 받고 있었다. 신규 사업 진출을 검토하기 위해서 물류업 전반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고, 회사 차원에서도 사업운영을 위해 물류관리 자격을 갖춘 인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회사에서는 하루하루 바쁘게 돌아가는 기획팀 업무를 수행하고 집에 돌아오면 이제 막 결혼한 신혼으로서 행복하지만 새롭게 경험하고 적응해야할 게 너무나 많은 좌충우돌의 삶을 살고 있었다. 내가 가진 삶의 조건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작고 사소한 판단이 모여 내 하루를 이루고, 그 하루가 결국 내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지금의 나를 좀 더 강하고, 좀 더 지혜롭고, 좀 더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p. 57)

 

 

수험생활을 하면서도 한계에 부딪치거나 매너리즘에 빠질 때면 합격수기를 읽으며 마음을 다잡곤 했었다. 이번에도 주어진 시간과 조건하에 성공적인 시험 준비를 위해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있던 중에 지인의 추천으로 <이토록 공부가 재밌어지는 순간>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에세이라는 생각에 가볍게 생각하고 훑어봤지만,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특히, "내 인생은 단 한 번뿐이고, 나는 세상에서 내 인생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사람이다. p. 56)“는 아주 단순하지만 쉽게 잊고 지낸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오늘 하루를 어떻게 채울지에 대한 작은 결정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는 내 수험생활을 지탱했던 기본 원칙이자 신조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인생'이라는 건 현실의 나로부터 까마득하게 멀리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오늘 하루쯤 마구 낭비해도 내 삶의 전체, 즉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 삶을 구성하는 하루하루가 이미 '내 인생'을 이루는 작은 조각들이기 때문에 오늘 하루는 내 인생을 만드는 귀한 재료 p.198)" 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 따로, 내 인생 따로는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채울지 내가 내린 결정들이 모여서 내 인생을 이루고, 나를 만드는 것이다. 이 단순하고 당연한 체험적 진리는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날들이 있는 젊은 시절에는 참 깨닫기 어려운 것 같다. 내가 이를 처음 체감했건 소설 <대망>을 읽고서였다.

 

 

"인생...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순간 순간의 누적에 지나지 않는다. 한 순간의 만남을 소중히 한다....아니, 순간의 만남에 정성을 다해 대하려는 다도(茶道)의 마음이야 말로 인생 그 자체를 충실하게 하는 진실을 말해준다." - <대망> 에서 -

 

 

"인생은 순간의 누적이다. 순간의 만남을 소중히 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진실이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룬 소설을 읽으며 난세를 수놓은 수많은 명장과 영웅들 속에서 유독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인생에 대해 읊조리듯 말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에 관한 아포리즘이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이 넋두리를 늘어놓듯 한 이 말은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정말 그렇지 않을까?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삶 앞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진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순간을 충실히 보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함으로서 삶의 순간, 순간이 켜켜이 쌓여 종국에는 일생이라는 기적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 <이토록 공부가 재밌어지는 순간>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인간과 동물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는 인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산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은 인간의 정신 안에서 주관적이고상대적이며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가 된다반면 동물은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의 적용을 받는다동물에게는 시간의 흐름을 걸러내는 장치가 부재하기 때문이다따라서 동물들은 단지 이곳에서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며 항상 현재를 살 뿐이다. 반대로 인간은 생애 전반에 걸쳐 자신을 개념화하는 존재 즉시간을 인식하는 동물이다우리는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모두 책임져야 하는 존재다현재의 우리는 미래에 매여 있는 동시에 우리의 미래도 현재를 기반으로 설계될 수밖에 없다결국 현재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채울 것인가가 누군가의 삶이되고 인생이 된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렇게 순간에 충실하게, 의미 있는 시간들로 하루하루를 보내도 삶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한 영역에 자리해 있고, 질서와 혼돈이 뒤섞여 있다. 이때, 공부는 인생에 보탬이 될 지식과 지혜를 얻는 '멋진 탐험'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조만간 막이 오를 본격적인 인생을 위한 '마음 단련' p. 63)"이라는 저자의 말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정말 그렇지 않을까공부는 학생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인생 전반에 걸쳐 삶을 탐구하는 수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공부란 내 인생을 보다 다채롭게 만들어줄 '지식'을 얻는 탐험이자, 풍성하게 만들어줄 '지혜'를 얻는 탐험 (p. 59)"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절망과 혼돈의 시기를 극복한 원동력은 영원한 삶에 대한 지향이 아닌 당장의 삶, 내일에 대한 믿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일이 반드시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는 활기가 희망의 불씨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믿음으로 쌓아올린 매일 매일의 삶이 도피처를 만들고, 메마른 삶에 활기가 되어 내일을 이루고 희망이 된다고 믿는다.

 

 

한계는 절실히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걸러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얼마나 강렬하게 원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기회죠. 한계라는 건 다른 사람들을 멈추게 하려고 거기 있는 겁니다. 뜨겁게 원하는 나 말고요.“ p. 135)

 

 

삶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혼돈과 절망의 시간에 심연에 들어앉아 있는 괴물은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며 삶을 집어삼킨다. 하지만 진정한 삶은 혼돈 너머에 자리해 있다. 괴물 앞에서 존재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견디며 힘없는 먹잇감처럼 숨죽이고 움츠리지 않고 맞서 싸울때 우리는 진정한 삶을 되찾을 수 있다. 삶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낄 때, 절망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맞설 때, 새로운 길이 열리고 고통의 해독제가 되어줄 새로운 삶의 목적을 갖게 된다는 걸 나는 살면서 절실히 체험했다. 심연의 어둠이 비록 두려울지라도 회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눈을 맞출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어려움과 그에 딸린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짊어질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수용한다는 것은 자발적이고 실천적인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그 책임이란 다름 아닌 강인한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주어진 삶의 조건을 받아들이며 그 삶을 살아내는 것일 것이다하지만 우리는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기꺼이 짊어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현실의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연약하고 불완전한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용기를 가지고 상황에 대응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시간들로 하루하루를 충실히 채워나가며, 희망 찬 내일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지워나갈 때 혼돈 속에서도 질서는 세워질 수 있고, 우리가 꿈꾸는 삶 또한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토록 공부가 재밌어지는 순간>은 청소년을 위한 에세이지만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모범답안은 존재하지 않는다많은 사람들이 삶이 던지는 시험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각자가 서로 다른 시험에 응하고 있다는 것을 종종 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타인의 답을 모방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모범답안을 찾는 것으로는 세상이 던지는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다. 공부란 어떤 것이고, 우리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청소년부터 더 나은 삶을 꿈꾸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성인들에게 <이토록 공부가 재밌어지는 순간>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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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
최은광 지음 / 길벗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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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종이책 및 이북을 구매한 후 주관적으로 남기는 리뷰입니다. (내돈내산)

"작가의, 작가에 의한, 작가를 위한", "작가를 위한 단 하나의 프로그램"



이는 본 서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를 집필한 저자 최은광 작가가 '스크리브너(Scrivener)'를 소개하는 문구이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크리브너'라는 프로그램에 대해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스크리브너는 작가를 위해 디자인된 글쓰기에 최적화된 전문 프로그램이다. 스크리브너는 MS워드나 한글 등의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워드프로세싱 기능뿐만 아니라 작가가 글의 전체적인 체계를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아웃라이닝 기능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점때문에 스크리브너는 단순한 텍스트 편집기를 넘어선 '글 만들기 프로그램'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가고 있다. 또한, 스크리브너는 텍스트화된 문서와 메모 뿐만 아니라 그림, 소리, 동영상, 웹페이지 등 다양한 형태의 메타데이터를 관리할 수 있는 툴(Tool)도 제공하고 있다. 요약하면 스크리브너는 작가들이 글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관련자료를 수집하고 소주제별 글을 작성하고 대주제에 맞춘 완결된 글을 완성시키기까지 작업과정과 흐름에 맞춘 모든 기능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빈 화면이 한 권의 책이 되기까지 글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합니다.'라는 책의 표지에 표기되어 있는 문구가 스크리브너가 어떤 프로그램인지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스크리브너는 궁극의 집필 프로그램, 글쓰기에 최적화된 프로그램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고 스크리브너를 사용하고자 하는 작가들도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스크리브너를 사용하기 위한 진입장벽은 대단히 높은 편에 속한다. 스크리브너 자체가 워낙 많은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만큼 유저들이 처음에 적응하면서 사용 방법을 익히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스크리너에 대한 매뉴얼은 방대한 분량의 영어 버젼만 존재하고 있고, 한글로 된 매뉴얼이나 강의도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보니 스크리브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써보고 싶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입문을 하고 싶어도 지레 겁을 먹고 발걸음을 돌린 사례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스크리브너 공식 포럼이 활성화되어 있지만, 영어로만 소통이 이루어지는 탓에 한글 사용자가 접근하기는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이전에 스크리브너 사용하기 위해 몇차례 시도해보다가 발걸음을 돌린 경험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학, 금융, 여행, 동영상 편집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들에게 실전적인 지식을 소개하고 있는 저 유명한 길벗출판사의 '무따기 (무작정 따라하기)' 시리즈의 신간으로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실제로 소식을 듣고 필자는 이북 버젼을 구매하였고, 오프라인 서점에서 종이책 버젼도 추가로 구매하였다.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는 국내 최초의 스크리브너 가이드북으로 그동안 스크리브너에 호기심을 가지고 써보고 싶었지만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 아쉽게 발걸음을 돌렸던 많은 작가들에게 단비와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는 국내 사용환경에 맞는 윈도우 버전으로 소개하고 있다. 애플 환경에 익숙한 작가라 할지라도 윈도우 사용자 수가 절대적인 국내 환경에서, 맥 유저가 공유나 협업을 하긴 쉽지 않다는 것을 체감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도 아이폰과 아이패드, 맥북을 쓰고 있는 소위 말하는 '앱등이'지만, 공유나 협업 문제로 윈도우용 PC를 별도로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결국 윈도우 환경에 맞는 글쓰기 프로그램을 쓰고 있다고 알고 있다.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는 입문자도 따라할 수 있는 쉽고 자세한 설명으로 독자들이 스크리브너 기능을 마스터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글이 완성되는 작업과정에 맞춰 기능을 소개하고 있어서 스크리브너의 일부 기능에는 익숙하나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은 작가들이 필요한 기능만 골라 익힐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 최은광 작가는 독자들이 글의 종류와 작업의 방식에 따라 필요한 기능을 바로바로 찾을 수 있도록 했고, 목차 구성대로 학습을 하면서도 흥미로운 개념이나 기능을 즉시 찾아볼 수 있도록 책을 구성하였다.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는 5개의 Chapter로 구성되어 있고, 처음에는 프로그램의 설치와 주요 기능을 설명하여 독자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이어서 아이디어 구상, 글의 구성, 완성 후 출력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글쓰기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의 흐름에 맞추어 목차를 구성하여, 독자들이 쉽게 따라하면서 자연스럽게 한 편의 글이 완성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Chapter 1 시작하기 전에'에서는 스크리브너란 어떤 프로그램이고, 대표적인 기능은 어떤게 있으며, 프로그램 설치와 사용환경은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Chapter 2 기초 기능 익히기'에서는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외관과 기본 메뉴의 구성에 대해 설명하고 문서작성과 편집은 어떻게 하고 글의 조직과 구성, 발행은 어떻게 하는지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Chapter 3 집필의 시작 - 아이디어 정리하기'에서는 아이디어 구상을 거친 후 수집한 자료를 어떻게 정리하고 반영해야 하는지, 개요 작성을 위한 시놉시스 작성방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Chapter 4 집필의 전개 - 체계화하기'에서는 글을 세부적으로 분류하고 전체적인 글의 얼개와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Chapter 5 집필의 마감 - 다음어서 출판하기'에서는 퇴고와 글을 마무리하고 출판을 위한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또한 책에서 언급한 기능들에 대해 작가가 실습 예제, 영상 강의, 심화 학습 자료 등을 제공함으로서 독자들이 실제로 사용해보면서 익힐 수 있게 도움을 준다. 실습 예제는 난이도를 고려하여 구성되어 있어서 가장 쉬운 기능부터 차근차근 익히면서도 자연스럽게 심화학습까지 가능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또한, 스크리브너가 보유하고 있는 기능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책에 담지 못한 내용을 추가로 다루기 위해서 작가가 직접 개설한 스크리브너 전용 블로그를 통해 추가적인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 블로그에는 동영상 강의도 제공하고 있고, 스크리브너 최신 업데이트 내용과 한글 패치도 직접 작업하여 제공하고 있다. (블로그 :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 -- 최은광 (길벗, 2023) | 독자 지원 블로그 (eunkwangchoi.com) 특히 50개가 넘는 저자 영상 강의가 무료로 제공되어 있어 헷갈리는 부분을 바로바로 해결할 수 있고, 추후에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단축키 모음, 심화 학습 등 독학에 필요한 자료는 물론, 웹소설 집필용 템플릿까지 제공되어 실제 작업에도 활용할 수 있다. 템플릿은 웹소설 작가 커뮤니티에서 공유되어 온 여러 도구와 작가가 직접 제작한 도구를 결합해서 스크리브너 전용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단순히 양식만 모아둔 것이 아니라 스크리브너의 고유 기능을 구석구석 적용한 작가의 노하우와 꿀팁이 녹아있다.




책의 서두에서 최은광 작가도 언급하고 있지만 '스크리브너(Scrivener)'의 사전적 의미는 '필경사 (筆耕士, scribe)'이다. 필경사는 저 유명한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 등장하는 바로 그 필경사로 '손글씨로 글을 적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또는 전문가'을 의미한다. 타자기가 등장하기 전에는 필경사가 일일이 손 글씨로 작업을 해야 했다. 타자기가 제공하는 수작업이 필요 없는 손쉬운 입출력 기능은 그 자체로 혁명이었고, 당시 개발자들이 목표로 삼았던 것은 두 가지 였다. 바로 '간편한 입력'과 '깨끗한 출력'이었다. 그 이외의 사항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저 두 가지만으로도 세상이 뒤집힐 만한 혁신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PC가 보급되고 타자기의 기능이 워드프로세서로 이식된지 오래되었지만 글쓰기 프로그램은 큰 발전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현대의 작가들에게는 어떤 글쓰기 프로그램이 필요할까? 수많은 글쓰기 프로그램이 저마다의 장점을 어필하고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작가에게 필요한 글쓰기 프로그램은 글을 작성하고 보관하며 재구성하는 기능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크리브너는 단순한 입력과 출력에 그치지 않고 글쓰기의 작업흐름에 따라 아이디어를 수집, 정리, 배치하고 구조화하는 프로그램이다. 감히 말하건대 스크리브너는 디지털 시대의 '필경사'라 생각한다. 아직 스크리브너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는 초보 유저에 불과하지만, 스크리브너의 탄생 배경도 그렇고 하나 하나 기능들을 익혀가면서 이런 나의 생각은 더 굳어져 가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필경사를 마스터하는 그 날까지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와 함께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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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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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찰리 채플린은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을 남겼다이는 일견 행복으로 충만해 보이는 삶도 면밀히 들여다보면 두려움과 고통삶에 대한 ‘비의(悲意)’가 내포되어 있다는 삶의 내밀한 속성을 잘 포착해낸 체험적 진리라고 생각한다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제임스 설터도 "나뭇잎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보면 잎맥이 보이는데다른 건 다 버리고 그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했다이는 저마다의 방향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잎맥처럼 삶은 다면적이고 정답을 찾기 힘든 것이지만삶에 대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멀리서 숲을 조망하기 보다는 숲 안으로 깊숙이 침잠하여 나뭇잎의 형태와 주위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그 미세한 변화들에 주목해야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에는 비록 가난하지만 친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다복한 가정과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노부부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대비되는 두 가정이 등장한다. 멀리서 보면 이 가운데 행복해 보이는 가정을 누구나 쉽게 평가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 설터의 말처럼 삶은 변화무쌍하고 다면적인 것이며,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가기 위해서는 숲 안으로 침잠하여 그 미세한 감정의 떨림들을 느끼고 경험해봐야 한다. 클레어 키건은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마다 적확한 단어를 사용하여 분위기를 선명하게 전달하지만 복잡미묘한 삶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라는 번역자의 소설에 대한 평가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 생각한다.

 

 

"처음에는 약간 어려운 단어 때문에 쩔쩔맸지만 킨셀라 아저씨가 단어를 하나하나 손톱으로 짚으면서 내가 짐작해서 맞추거나 비슷하게 맞출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출발하는 것이 느껴지고, 전에는 갈수 없었던 곳들까지 자유롭게 가게 되었다가 나중엔 정말 쉬워진 것처럼." (p. 83)

 

 

<맡겨진 소녀>는 혈육관계로 묶인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일면식도 없는 먼 친척집에 맡겨지는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탕아', '골칫덩이'라는 말을 자식에게 서슴치 않는 부모에게 소녀는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우연한 계기로 킨셀라 부부에게 맡겨진 소녀는 자신 보다 먼저 소녀의 신을 신겨주고, 소녀의 걸음에 맞춰 보폭을 줄이는 다정하고 세심한 돌봄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킨셀라 아저씨와 손을 잡은 순간 소녀는 그동안 아빠가 내 손을 한번도 잡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당혹스러운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라리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소녀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혼란스러워한다. 때로는 순수한 의도의 사랑과 다정함 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이에게는 슬픔과 아픔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소녀는 깨닫는다. 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후 소녀는 집에서의 삶과 새로운 곳에서의 삶의 차이를 서서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그 여름 그 곳에서 소녀는 인생 처음으로 짧지만 빛나는 나날들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서로의 고유한 존재방식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하지만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삶이란 저마다 쌓아둔 사연들로 섬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서로가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누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오늘밤 너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만 에드나에게 나쁜 뜻은 없었어. 사람이 너무 좋거든 에드나는. 남한테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p. 72)

 

 

삶은 상실과 결핍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다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상처 받은 인간은 소설 속 킨셀라 부인처럼 악의 없는 실수를 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불완전함이야말로 각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채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매듭이 되는 것 아닐까신뢰와 사랑자발적 책임이 동반된 관계를 구축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은 불완전한 현실을 일정 부분 해소시켜주는 심연의 해독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만들어주고삶을 살아가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는 것은 일견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인 행위처럼 보이는 사랑우정신뢰와 같은 가치들이다서로를 향해 뻗는 온기 어린 손짓이 결국 메마른 삶에 활기가 되어 내일을 밝히는 희망이 된다.

 

 

소설을 읽으며 삶의 내밀한 영역까지 뜯어보면 인생이란 희극과 비극강자와 약자피해자와 피의자가 뒤섞인 영화와 같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어쩌면 산다는 것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리는 빗속에서도 춤추는 일에 가까운 것이지 않을까? 삶이란 두려움 속에서도 짓눌리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내면서 지속되는 것이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쌓여진 사소하고 다정한 것들이 모여 지리멸렬한 생을 흘러가게 하는 위대한 힘이 생성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다정하고 세심한 것들은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처음에는 아프게 다가올 수 있지만, 결국 그 진심이 담긴 호의가 마음을 움직이고, 삶을 비추고, 온기를 불어넣게 될 것이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p. 98)

 

 

가정은 정형화할 수 없는 것이기에 형태와 구성은 제각각이지만 하나의 가정은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이룬다. 가족은 더 이상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지는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구성원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맡겨진 소녀>는 내게 원자화된 개인이 새로운 형태의 분자 가족을 형성하는 것이 가족의 새로운 정의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가족의 틀을 파기하고, 친족 관계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가족은 아니지만, 혈연으로 얽힌 관계보다 정서적 동질감이 빚어낸 마음의 끈이 더 끈끈할 수 있다는 것, 진정한 가족은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맡겨진 소녀>는 가족이 성립되려면 적극적으로 상대방과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 또한 가부장 제도의 안전망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것을 극복할 경우 행복이라는 화학반응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개가 됐구나. 저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 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 (p. 75)

 

 

소녀가 킨셀라 아저씨와 산책을 할 때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두 개의 불빛은 어느 순간 그 사이 어딘가에서 또 다른 불빛이 고개를 내밀며 찬란하게 빛나는 세 개의 불빛이 된다. 이는 킨셀라 부부와 소녀가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하였음을 상징한다. 엄마소의 우유 대신 인간이 만든 이유식을 먹으며 성장하는 송아지들처럼 겁에 질린 어린 암소는 우연한 계기로 맺어진 인연을 통해 삶을 개척해나갈 힘을 얻는다. 굴곡진 삶을 견뎌내야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묵묵히 지켜봐 주고 지지해 줄 가족의 따뜻한 관심과 조언 아닐까? 세월의 일렁임을 힘겹게 견뎌내야 할 때 내가 살아 있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 가족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이것 이상의 응원이 있을까? 각자가 가진 삶의 조각들이 가족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완전한 조각으로 완성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행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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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어사 - 지옥에서 온 심판자
설민석.원더스 지음 / 단꿈아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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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컨텐츠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측면에서 보면 저자는 타고난 스토리텔러의 면모를 보이는데, 소설가로서는 어떨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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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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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여기 천재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슈만이 쇼팽을 처음 보고나서 그 경이로움에 대해 남긴 소회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 슈만은 그만의 감성이 담겨 있는 독창적인 음악으로 유명하지만쇼팽멘델스존브람스 등을 발굴해낸 음악 비평가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특히자신과 동갑내기인 무명의 작곡가 쇼팽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보고천재의 탄생을 대중에게 알렸던 음악사상 최대의 찬사가 담겨 있는 그의 평론은 쇼팽이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음악 애호가들에게 널리 회자되는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다.




 


 여러분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거장의 숨결이 느껴지는 새로운 추리소설이 탄생하였습니다. 그것도 시리즈로요.”

 


 다소 낯 간지러운 표현이 될지는 몰라도, M. W. 크레이븐의 <퍼핏 쇼>를 읽고 나서 내가 느낀 소회는 쇼팽의 음악에 대한 순수한 경이와 찬사존경이 담겨 있는 슈만의 표현을 빗댄 위와 같은 문장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물론 나는 슈만 처럼 해당 업계의 전문가거나 엄청난 영향력을 보유한 사람은 아니지만, 오랜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또한 꾸준한 서평가로서 마치 슈만이 쇼팽을 처음 보고서 느낀 흥분 및 경이로움과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굳게 믿는 <퍼핏쇼>를 읽고 느낀 내 소회를 이 리뷰를 통해 조심스럽게 독자들에게 전달해보고자 한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부디 이 같은 진심이 출판사와 또 다른 독자들에게 전달되어 이미 영국과 일본 등 2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는 시리즈의 다음 권들을 빠른 시일 내에 번역된 책으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추리소설의 애호가라면 익히 알고있겠지만 트릭과 반전은 추리소설의 핵심인만큼 지금까지 나온 추리소설에 대한 서평은 주로 독자들이 해당 작품을 읽었다는 것을 대전제로 하여 작품의 스토리와 트릭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하지만 이 같은 리뷰방식은 양날의 검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해당 소설을 읽은 독자들끼리 전체적인 스토리의 얼개를 평가하고, 트릭이 얼마나 정교했는지, 반전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지를 논하는 측면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하지만, 해당 소설을 아직 접하지 못한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트릭과 반전을 포함하여 리뷰를 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쉽게 짐작하겠지만 아직 소설을 읽지 못한 독자들이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리뷰에 앞서 나는 이 같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소설이 왜 뛰어난 추리소설인지 논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연히 작품의 얼개와 트릭, 반전을 포함하여 언급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같은 리뷰방식은 이 리뷰를 쓰는 목적과는 맞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대로 추리소설 애호가이자 서평가로서 나는 이 리뷰를 통해 오랜만에 추리소설을 읽으며 느낀 충족감과 기쁨을 또 다른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이로서 워싱턴 포 시리즈의 다음 권들을 만나볼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다. 따라서 나는 대략적인 작품의 줄거리를 소개하면서 스포일러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이 작품이 왜 뛰어나고 재밌는 작품인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언급하는 리뷰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 작품의 트릭이나 반전 보다 작품에 대한 소개와 가이드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으니 본 도서를 아직 읽지 않은 미래의 독자분들도 안심하고 이 리뷰를 보시길 바란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영국 컴브리아 지역을 지켜 온 '환상열석'에서 불에 탄 시신들이 잇달아 발견된다. 수사관으로서 누구 보다 뛰어난 직감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관계에는 다소 서툰 중년 남자 '워싱턴 포'와 천재적인 지능을 가졌으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괴짜 아가씨 '틸리 브래드 쇼'가 거대한 선돌 사이에서 발견된 꺼져버 목숨들의 비밀을 함께 파헤친다. 워싱턴 포 시리즈의 포문을 여는 <퍼핏쇼>는 영국추리작가협회 (CWA)에서 그해 최고의 범죄소설 작품에 주는 '골드 대거상 (Gold Dagger)'을 받았다. 뒤이어 2편과 3편도 후보에 올랐고, 4편은 CWA에서 최고의 스릴러소설에 주는 '이언 플레밍 스틸 대거상 (Ian Fleming Steel Dagger)'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식스턴 올드 피큘리어 올해의 범죄소설상 (Theakston Old Peculier Crime Novel of the year)' 후보에도 올랐다. 현재 시리즈 5편까지 출간되었고, TV 드라마로도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퍼핏쇼>는 작가 M. W. 크레이븐을 스타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 존르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등 개인적으로 '골드 대거상'을 수상한 작품들에 대해 높은 선호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를 가지고 <퍼핏쇼>를 읽기 시작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흥미로운 사건들에 푹 빠져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 보니 이미 500여 페이지가 모두 넘어간 뒤였다. 오랜만에 소설 본연의 재미를 느끼며 작품에 몰입했던 흡족한 독서 경험을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독자들을 열광하게 하는 <퍼핏쇼>의 매력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고민끝에 나름대로 다음의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번째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존재하고, 캐릭터간의 조화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작품 속에 '고전 미스터리'의 우아한 세계와 이익과 탐욕이 동력이 되어 움직이는 '하드 보일드'한 세계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주인공 탐정 듀오에 맞서는 매력적인 악역이 존재하고, 그가 악을 행하게 된 설득력 있는 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로 캐릭터를 살펴보자. <퍼핏쇼>에서 셜록 홈즈의 든든한 동료로 그의 곁에 머물면서 홈즈의 지성을 이끌어내는 왓슨이 연상되기도 하고아이언맨의 인공지능 비서 자비스가 연상되기도 하는 '워싱턴 포' '틸리 브래드쇼'라는 캐릭터는 개인적으로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로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추리소설 속 명탐정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에드가 앨런 포의 오귀스트 뒤팽 시리즈에 서술자이자 추리를 들어주는 파트너가 있었고 이것이 시기적으로는 최초의 탐정과 보조자의 원조라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탐정의 활약상을 듣고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 역시 뚜렷한 캐릭터성을 갖고 탐정의 수사와 모험을 함께하는 파트너라는 점에서는 셜록과 왓슨이 탐정 콤비의 원조라고 일컬어진다. 추리 미스터리 장르에 '왓슨 역' 또는 '왓슨 캐릭터'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다. 지금까지 추리소설 팬으로서 수많은 작품 속에서 탐정 역할을 하는 주인공을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캐릭터를 봐왔다. 그 수많은 캐릭터들 중에서도 '' '브래드쇼'는 각자 독특한 형식과 매력을 가지고 절묘한 케미를 형성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브래드쇼의 순진함과 순수함은 그의 어두운 기질과 날카롭게 대비되었지만, 여러모로 둘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둘 다 강방적이었고, 둘 다 사람들을 거슬리게 했다. (p. 322)

 


작가 M. W. 크레이븐은 10년 간 군에서 복무하고 16년 간 보호관찰관으로 일하며 경찰과 사회복지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삶이 투영된 '워싱턴 포'라는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그는 뛰어난 수사관이지만 관계에 서툴고, 자신만이 가진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좀처럼 타협하지 않는다. 어둡고 냉소적이며 현실적인 캐릭터다. 이런 그와 전설의 콤비를 이루는 '틸리 브래드쇼'는 열여섯의 나이에 옥스퍼드에서 첫 학위를 따고 박사학위 두개를 추가로 취득할 만큼 천재적인 지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세상 물정에 어둡고 지나치게 순수하다. 틸리는 포를 만나 사무실 밖 진정한 세상 속으로 나오게 된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며 서로가 바라보는 상대의 모습은 세상을 경험하며 당황하고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이었지만, 차츰 서로를 알아가고, 세상에 적응하면서 최고의 파트너로 거듭나게 된다. 포를 통해 변해가는 틸리의 모습을 보며 포 조차도 놀라는 모습은 이를 잘 표현해주는 재밌는 에피소드이다.

 


받아요. 문제 생기면 안되니까.”

틸리는 휴대전화를 무음모드로 바꾸더니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신호가 안잡히네요.”

포가 흠칫했다. ‘내가 뭘 만들어버린거지?’ (p. 213)

 


나는 포와 틸리의 모습이 빛과 그림자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타인과 또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시대와 삶을 이룬다그것이 되풀이되고 순환되면서 빛이 되고그림자를 만든다그림자는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 속에서 불완전한 형태와 빛깔을 띠지만 나와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필연적으로 나를 구성하는 일부분이다. 삶을 탐구하는 여정에서 우리는 모르고 지나쳤던혹은 애써 외면했던 우리 자신의 내면, 또 다른 나와 대면한다. 우리의 삶이 행복의 빛을 향해서 나아갈 수록 그림자는 빛을 따라 묵묵히 우리의 삶을 지지해준다. 삶이 빛나는 순간에도,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도 묵묵히 서로의 곁에서 서로의 삶을 지지하며 진실을 탐구하는 포와 틸리의 모습이 빛과 그림자 같았다. 현실적이며 냉혹한 포와 이상적이며 순수한 틸리는 빛과 어둠처럼 상반된 성격을 가졌지만 그들 각자는 서로에게 최고의 파트너다. 빛의 세기가 더해갈수록 옅었던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면서 꼬리를 끌며 빛을 따라오듯이... 

 


두 번째로 '고전 미스터리'의 우아한 세계와 하드 보일드한 '현대 미스터리'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세상에 존재하는 탐정은 두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얘기한다. 한쪽은 고전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셜록 홈즈의 후예들이고, 다른 한 쪽은 하드 보일드를 대표하는 필립 말로의 후예들이다. (윤영천의 미스터리 가이드북에서 일부 인용) 전자인 고전 미스터리 속 탐정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존경 받는 상류층의 인사들이다. 반면 하드보일드 속의 탐정들은 거친 남자의 세계를 대변하는 노동자나 개인사업자들이다. <퍼핏쇼>에는 코난 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고전 미스터리'의 우아한 세계와 피와 땀으로 점철된 어두운 뒷골목정의가 아닌 이익과 탐욕이 동력이 되어 움직이는 '하드 보일드'한 거친 악의 세계가 공존한다. 고전 미스터리에 향수를 느끼는 팬들과 현대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스타일의 이야기를 원하는 팬들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동일한 속성을 공유하면서도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주인공 '''브래드쇼'의 캐릭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묘한 케미스트리를 빚어내며 자신들이 직면한 현재의 사건과 관련있는 과거의 사건까지 파헤치며 해결해나가는 소설의 스토리와 관련되어 있다.

 


'하드 보일드' "원래 ‘계란을 완숙하다라는 뜻을 내포한 형용사이지만계란을 완숙하면 더 단단해진다는 점에서 전의(轉義)하여 ‘비정 ·냉혹이란 뜻의 문학용어가 되었다개괄적으로 자연주의적인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수법을 의미한다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이 기법은 특히 추리소설에서 추리보다는 행동에 중점을 두는 하나의 유형으로서 ‘하드보일드파를 낳게 하였고셜록홈즈를 창조한 코넌 도일 류의 고전파의 계획된 것과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소설 속 워싱턴 포는 하드보일드류 탐정에 가깝다. 정직된 경찰 출신의 포는 체계적인 계획을 가지고 사건에 세심하게 접근하기 보다는 본능과 영감으로 다양한 아이디어를 시도하는 과정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 이는 천재적인 두뇌와 데이터 분석능력, 최신 IT 장비 활용을 기반으로 포의 직감에 근거를 제시하거나,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브래드쇼와 환상의 케미를 이룬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연쇄살인사건을 분석하고, 현재의 사건이 과거의 어떤 사건과 관계 있다는 것을 밝히며 진실에 다가서는 과정을 통해 독자들은 고전 미스터리물과 현대의 하드보일드한 세계의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포는 생각했다. 물론, 오늘 벌어진 일이 내일의 역사가 되는 법이라고 (p. 47)

 


고전 미스터리와 하드보일드를 대표하는 추리소설들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나의 관심은 오직 진실을 아는 것이라는 에도가와 란포가 창조해 낸 아케치 고고로의 말처럼 과거와 현재, 이상과 현실 속에서 진실을 찾아 방황하는 범시대적인 고뇌를 다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작품이 탄생한 시대적 환경은 다르지만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핵심은 특정 시대의 산물이 아닌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근원으로 반복되는 삶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늘 벌어진 일이 내일의 역사가 되는 법'이라는 포의 대사를 보면서 나는 먼훗날 '워싱턴 포 시리즈'가 추리소설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상상을 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주인공 탐정 콤비에 맞서는 매력적인 악역이 존재하고, 그가 악을 행하게 된 설득력 있는 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악역이 누구인지, 그가 왜 이런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는 이 리뷰에서는 밝힐 수 없다. 어떠한 스포일러도 없이 리뷰를 하겠다는 앞서의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악역에 대한 구체적 언급 없이도 이 악역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존재감을 지녔는지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번 언급했듯이 이 소설의 제목은 <퍼핏쇼 (Puppet Show)>이다. 퍼핏쇼 즉, 꼭두각시 놀음이란 뜻이다. 앞에서 나는 뛰어난 수사관인 포와 천재적인 분석가인 포의 강력한 케미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언급했었다. 하지만 이제껏 존재해왔던 그 어떤 탐정 콤비에 버금가는 전설적인 이들 콤비 마저 꼭두각시 놀음에 놀아나도록 판을 만든 것이 바로 이 소설의 악역이다. 또한, 이 악역은 포와 브래드쇼가 수사과정에서 아포페니아 (서로 연관성이 없는 현상들 사이에서 의미, 규칙, 연관성을 찾아내서 믿는 현상)에 빠져 있을 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까지 한다.

 


역자가 옮긴이의 말에서 밝혔듯이 <퍼핏쇼>'누가 했느냐 (Who done it)''어떻게 했느냐 (How done it)' 보다는 '왜 했느냐 (Why done it)'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범인이 누군지 찾고, 그가 어떤 방식으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탐구하는 일반적인 추리 미스터리와는 달리 사건의 동기에 해당하는 '왜 이런 일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퍼핏쇼>에 담긴 미스터리의 핵심이다. 이야기의 구조상 필연적으로 사건을 일으킨 자와 그가 그러한 행동을 한 이유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앞서와 마찬가지 이유로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지만 책에서도 언급한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것은 좋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뿐이다. (All that is necessary for the triumph of evil is that good men do nothing.)" 라는 에드먼드 버크의 말이 힌트가 될 수 있다. 극중에서도 에드먼드 버크의 이 말은 워싱턴 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데 결졍적 역할을 한다. 이런 매력적인 악역을 후속되는 시리즈에서 계속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쉽기까지 하다.

 


정의 때문에 하는 게 아냐, . 정의를 위한 일이었던 적은 한순간도 없어. 이건 복수야.” (p. 421)

 


나는 고전 미스터리 뿐만 아니라 하드 보일드의 팬이다. 영미권 하드 보일드에 레이먼드 챈들러가 있다면 일본에는 하라 료가 있다하라 료는 데뷔작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를 통해 챈들러의 ‘필립 말로에 비견되며 이후 작가의 분신이 되는 사립탐정 ‘사와자키를 창조해내었다이후 하라 료는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물인 <내가 죽인 소녀>로 나오키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 하드보일드 문학의 대표 기수로 떠올랐다하라 료는 여러 면에서 챈들러와 유사하다본업을 따로 가지고 있다가 40대의 다소 늦은 나이에 작가로 데뷔했다는 점하드 보일드의 거장으로 불리지만 그 명성에 비해 그리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대표적인 과작 작가라는 점에서 그렇다이같은 점은 <퍼핏쇼>의 작가 M. W. 크레이븐도 마찬가지다. (워싱턴 포시리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리즈까지 런칭한 그는 다행히도 그렇게 과작 작가는 아닌 듯하다.)

 


하라 료의 '하드 보일드' '사와자키'를 통해 시작되고 완성된다고 생각한다이는 그가 사건에 중심에 서 있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필연적인 것이긴 하지만 사와자키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었더라면그 아무리 빛나는 웰메이드 스토리가 있었다 한들 시리즈의 성공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와자키는 탄생후 수많은 독자들과 세월을 함께 하며 이제 50대의 중년으로 접어들었다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신주쿠의 어두운 뒷골목을 조용히 비춘다오랜 시간 고단한 현실을 겪으며 그를 기다려온 독자들은 그의 건재함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는다. 나는 <퍼핏쇼>를 읽고, '워싱턴 포''틸리 브래드쇼'라는 새로운 친구를 얻었다. 내가 하라 료의 사와자키와 함께 하며 위안을 얻어왔듯이 이제 또 다른 친구와 함께 할 생각에 흥분이 밀려온다. 앞으로도 나는 새로운 친구와 함께 현재를 헤쳐나갈 힘을 얻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할 것이다. 포가 자신의 소임을 마치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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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5-09 22: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멋진 소개 글 잘 읽었습니다.
고전과 하드보일드의 조화, 와이 던 잇 추리물이라는 점이 매우 끌리네요~

잭와일드 2023-05-09 23:47   좋아요 1 | URL
긴 글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하수 2023-05-20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작품에 관심가지고 꼭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