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소설의 제목이자 주요 모티브기도 한 pink의 “please don't leave me"라는 노래를 소설을 접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노래가 궁금해서 찾아서 들어봤는데 소설의 내용과 가사만 보았을때의 느꼈던 괴기스러움과는 상반되는 경쾌한 비트의 밝은 노래라 좀 당황했다. 오히려 그런 반전의 효과를 노린걸까?여성이 연인에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난 마음만 먹으면 다 해버릴거야. 정말로 내 맘대로 해버릴테니까. 내가 상처받으면 말이야. 너를 산산조각으로 잘라 버릴거야...“라는 말을 하면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너하고 단순한 싸움대회라고 해줘. 가장 세게 때린 놈이 이기는 그런 싸움대회라고. 그런데 자기야. 진심이 아니야. 정말 진심이 아니야. 너없이 살수가 없어. 나의 완벽한 귀여운 "펀치백"이기도 하고. 너가 필요해. 미안하지만...“




“귀여운 펀치백“이라는 표현과 “미안하지만“ 너가 필요하다는 내용은 단순한 연인간의 애칭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과격한 표현이다. 작가가 왜 이 노래를 주요 모티브로 삼았는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광기 어린 소유욕에 관해서는 ‘Boxing Helena'에 비할수 있는 것은 아직 보지 못했다. 외과의사인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다리를 자른다. 여자는 자살기도를 한다. 남자는 다시 여자의 팔을  자른다. 몸통만 남은 여자는 꽃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제대의 주인공이 된다. 헬레나라는 이름의 여자는 절망하지만, 남자는 그런 여자를 숭배한다. 한국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Boxing Helena' 연인을 박싱(박스, 우리 안에 가두기)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변태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랑의 이야기가 존재할 것이다.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극단적이고 엽기적이어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행위라 할지라도 타인간의 행위에 대해 우리가 감히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반대로 그것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거나, 행위의 당사자들에게 회복할수 없는 정신적, 신체적 피해가 발생할때 그 당사자들이 사회를 향해 이것도 우리만의 사랑이라고 주장할수 있을까?나나파 작가의 <please don't leave me>는 후자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의 모든 연인들은 ‘이런 사랑도 있다‘고 자신들만의 사랑 이야기를 세상에 외칠 권리는 있지만 그 권리는 세상이 용인해줄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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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신 토르부터 지혜의 신 오딘, 장난기 많은 로키, 신들의 나라 아스가르드를 지키는 헤임달에 이르기까지 마블의 영화 <토르>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북유럽 신화에서 차용해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블 영화 성공의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신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내는 북유럽 신화의 신비로운 스토리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마블의 세계관은 북유럽 신화와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례를 들면, 마블 영화 속에서는 토르의 동생으로 등장하여 권력을 향한 야망을 보이며 얄미운 행동을 많이 하면서도, 형 토르와의 업치락 뒤치락하는 유쾌한 케미를 보여주기도 하는 로키는 북유럽신화에서 토르의 동생이 아니라 거인족 사이에서 태어난 오딘의 의형제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영화에서 강력한 힘으로 아스가르드 정복을 시도하는 토르와 로키 형제의 누나이자 오딘의 큰딸로 나오는 헬라는 북유럽신화에서는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왕으로 등장한다. 신화에서 헬라의 아버지는 영화와 달리 오딘이 아닌 로키다.



마블 영화 시리즈가 북유럽 신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독특한 세계관으로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캐릭터의 유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북유럽 신화에서 '장난의 신'으로 불리며 각종 사고와 장난을 일으키는 신으로 등장하는 로키는 영화 속에서도 기발한 생각으로 남을 잘 속이는 미워할 수 없는 악동 이미지로 나온다. 신 중의 신, 신들의 아버지, 지혜의 신으로 불리는 오딘은 영화 속에서도 아스가르드의 수장으로서 지혜로운 왕의 표상으로 묘사된다.



Rambler 작가의 <The Last Myth – 최후의 신화>를 읽으며 가장 아쉬웠던 점은 그리스 신화와 북유럽 신화, 동양 신화 등에서 캐릭터를 차용해오면서 이들 캐릭터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혜의 표상인 오딘이 총괄신의 부재를 이용하여 반혁을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눈을 잃는다는 설정이 대표적이다. 또한, 각각의 신화에서 차용한 신들간의 매끄러운 관계설정이 부족해서 이러한 부분이 더욱 두드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동서양의 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활동무대가 제대로 구현되어 있지 않아서 배경설정이나 세계관 묘사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북유럽신화의 ‘아스가르드’, 고대 그리스의 기록에 등장하는 신비의 대륙 ‘아틀란티스’ 성경의 ‘에덴동산’ 등 서로 다른 수많은 신들이 활동하는 영역에 대한 묘사와 영역간의 관계설정이 있었다면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사실 컨텐츠가 가진 힘은 상상력이 점차 발전되고 진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유럽신화에서 기인한 마블의 성공사례도 상상력이 가진 힘을 잘 보여준 사례다. Rambler 작가의 <The Last Myth – 최후의 신화>는 동서양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나가는 흥미로운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소설이다. 이 방대한 작업을 위해 각각의 신화 속의 신들을 불러왔지만, 이들의 인물설정과 세계관을 활용하지 않고 이에 반하는 사건과 캐릭터를 구성하는 어려운 길을 택하고 있다. 북유럽신화를 활용한 마블의 사례를 참고하여 <The Last Myth – 최후의 신화>가 리뉴얼 후 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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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파커는 초인적 힘을 얻은 이후에도 히어로로서의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도망가는 도둑을 목격하고도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며 못본척 지나친다하지만 이후 누군가에게 삼촌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고살인범이 다름아닌 자신이 예전에 못본척 지나친 도둑과 동일인물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는다이는 피터가 '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사실을 깨닫고 스파이더맨으로 각성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힘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이는 히어로물을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말이다하지만 유명한만큼 호불호가 갈리고 패러디와 안티테제가많은 말이기도 하다일단 마블의 캐릭터들을 살펴보면 데드풀은 이를 ‘ 힘에는  무책임이 따른다.‘ 패러디하고 있고리전은 힘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기는커녕 자신의 힘을 싫어하고 괴로워한다자신이 보유한 거대한 힘으로 인해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리전은  격언의 안티테제격인 캐릭터라고   있다한편DC 닥터 맨하탄은 자신이 가진 강대한  때문에 오히려 인간사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나는초능력자는어떻게 해야 ‘‘ 살아갈  있을까?


남산 작가의 <갤럭시 S20 울트라 - 슈퍼 마이너리티 히어로>에는 사소한 초능력 덕분에 모든 것을 잃게  주인공 한여름이 등장한다초능력자라 하기에도 애매한 지극히 사소한 초능력을 보유하게  것도 그렇지만그러한 사소한 초능력으로 인해 그동안 쌓아왔던  자체가 허물어진 것이다하지만  사소한 초능력으로 우연히 초능력자 빌런들을 상대하게 되면서 한여름은 소시민적인 히어로로서의 자신을 조금씩 자각하게 된다.


어째서 은서는 남한테 피해 끼치는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초능력을 사용했을까? 초능력자는히어로는 힘을손에 넣은 인간은 모두 이렇게 비뚫어질 수밖에 없는 걸까?


우연히 생긴 사소한 초능력이 오히려 히어로로서의 존재 의의를 깨닫는데 도움을  것일까? 그렇게 한여름은 ‘저주라고 생각했던 사소한 초능력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소설의 제목 그대로 ‘슈퍼 마이너리티‘ 히어로의 ‘오리진이다한여름도 능력이 강화되면 히어로로서의 책임을 절감하는 순간이 올까? 앞으로가  기대되는 친근하고 인간적인 히어로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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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밸런스 게임 (VS 놀이) 이란 게임의 상대방에게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 (兩者擇一) 형식의 질문을 던지고 두가지 선택지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놀이를 의미한다. 예를들면,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콜라냐 사이다냐, 탕수육을 먹을 때 부먹이냐 (소스를 부어서 먹는 것), 찍먹이냐 (소스를 찍어서 먹는 것) 등의 질문을 하고, 상대방에게 이에 대한 질문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 진행되는 밸런스 게임의 묘미는 바로 상대방에게 반드시 하나만 선택하기 어려운 난감한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난처해 하는 반응을 살펴보는데에 있다. , 질문의 밸런스가 잘 맞춰져 있어 게임의 참가자가 두 선택지 중 어느 한쪽을 선뜻 고르기 어려울수록 잘 짜여진 밸런스 게임의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Clouidy 작가의 <VS 놀이>는 밸런스 게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다.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밸런스 게임의 질문은 이것이다.

 


“오늘의 주제는… ‘오줌 마려운데 화장실 가기 vs 그냥 침대에 싸기’입니다.”



“이건… 토론할 가치가 없을 것 같은데요.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요?”

 


토론 참가자 D의 말처럼 이는 일반인을 기준으로 하면 말도 안되는 밸붕 (밸런스 붕괴)에 해당되는 질문이다. 애초부터 밸런스가 무너져 있을 뿐만 아니라 토론의 가치 측면에서도 의미를 찾기 어려운 질문이다. 밸런스 게임으로서 묘미를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금이나마 있었던 흥미와 기대 마저도 차갑게 식혀버리는 질문이다. 하지만 해당 토론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상황과 조건을 제한하면서 질문의 밸런스를 맞추려는 시도를 한다.

 


“글쎄요… 침대에 쌀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던지, 화장실 갈 시간 조차 아까운 수험생이라면 해당 질문이 밸런스 게임의 질문으로 유효할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밸런스가 깨져 있어 흥미가 반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밸런스를 맞추려 애쓰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모를 질문을 어떻게든 살려가며 토론을 하는 모습이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밸런스 게임의 묘미를 살리는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고민을 하며 극을 전개해나가는 과정을 다듬는다면 더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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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는 다 완벽해. 인간이 예전부터 갈망한 곳이야. 우리 셋도 이곳에서 만나고 친구가 되었잖아. 그런데...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곳은 진짜가 아니고 모두 가쟈야. 저 푸른 하늘., 이 분수대, 지금 이 거리들, 이 모든게 다 가짜인데 진짜인 듯 우린 착각하고 있어.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거고. (...) 이곳이 ‘진짜’라고 믿어버리는 사람들까지 있어. 진짜 세계에 있는 내 자신과 마주치기가 싫고 두려울 뿐이야.”



“그냥 AI 가상세계에 사로잡혀 사는 게 훨씬 행복할텐데 왜 깨어나려고 하는 건지. 현이씨가 사람들을 더 불행하게 만들어요.”



본다펠리스 작가의 <애프트>를 보면서 “무지로부터 비롯되는 행복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SF에서 흔히 묘사되고 있는 시스템으로 인간의 감각을 왜곡시키고 공간을 조작하여 가상화된 허구의 삶을 현실의 삶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 하지만 진실이 왜곡된 삶이 진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공정과 부조리에 관한 진실을 감추고, 문제 자체를 해결해야할 대상에서 배제시키는 시각이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왜곡하고 축소시키는 것 아닐까? 모조사회는 개인을 현혹시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만들지만 그 실상은 사회로부터 착취당하는 거짓된 모조 (模造)의 삶일 뿐이다. 거짓이란 한번 만들어지면 반드시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고, 결국 그것이 진실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 아닐까?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토피아를 꿈꿀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현재의 삶을 딛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서 바람직한 사회나 미래에 달성해야 할 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토피아니즘은 기본적으로 희망의 철학이다. 하지만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는 절망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이 주장하는 유토피아를 사회가 추구해야할 유일한 대안으로 강조할 때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변질될 수 있다. 누군가 바람직한 미래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것을 거부하는 타인에게 강요할 때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를 강요하는 행위와 양립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유토피아는 단순한 공상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꿈을 간직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희망하고, 실패하는 반복되는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희망을 꿈꿀 수 있다. 현실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대안으로 유토피아가 제시되고 디스토피아로 변질된 유토피아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유토피아를 추구하면서 인류는 발전해왔다. 앞으로도 거듭되는 실패를 감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인류는 진보해나갈 것이다. 이상향은 혼자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타인에게 강요하면서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동의 삶을 위해 희생하면서 또, 자발적으로 희생할 용의가 있는 이들이 모여 거대한 결속을 이루면서 이들이 함께 꾸는 꿈은 유토피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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