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한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러한 형태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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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2020 2 김설단 작가님의 <붉은방> 만났다코로나 바이러스는 치사율 자체가 높고 본격적인 증상이 나타나기도 전에 사망에 이르는 <붉은방> 그것과는 다르지만원인 모를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과 병의 확산으로 국가의 치안과 경제가 파탄에 이를 것을 염려하는 소설의 분위기가 2020년의 코로나사태와 상당부분 닮아 있었다.



마스크와 손세정제의 값이 폭등하고출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이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병관리본부에서 발표하는 감염자의 수는 연일 증가하는 것을 보면서 새삼 전염병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에서 기인한다정확한 발병원인을 모르고치료방법을 제시하지 못하며병의 전파속도와 범위를 몰라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 부재하는 동안 대중의 불안과 공포는 극대화된다.



<붉은방> 이러한 상황을 스토리에  녹여내고 있다전염병에 대응하고자 작전지역에 투입된 전문가 집단인 ‘붉은손들이 차례로 희생되고상황을 통제하는 대대장이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병이 확산되고 공포와 불안이가중되는 상황이 소설상에  묘사되어 있다하지만짧은 분량 200 원고지 450매)상의 한계 때문인지 스토리 전개가 단선적인 것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긴장의 고저와 장단을 조율하는 다양한 사건  돌발변수다채로운 캐릭터 설정이 있었다면 보다 입체적이고 완성도 높은 구성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김설단 작가의 소설은 <저수지의 시체들> 통해서 먼저 접했었다. <저수지의 시체들> 논두렁 하드보일드 스릴러를 표방하는 작품으로 ‘무령이라는 가상의 촌동네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범죄를 겪으며 변화하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의결을 섬세하게 조각해나가는 인상적인 소설이었다따라서 <붉은방> 접하면서도 이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는데<붉은방> <저수지의 시체들>과는 달리 풍경이나 감정에 대한 묘사 보다는 추리소설 본연의 속도감을 살리는데 주력하고 있었다뒤늦게 작가의 말을 보며 깨달은 사실은 <붉은방> 거의 20 전에 씌여진 작가의 초기(?)작이라는 사실이다스타일을 변화시키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해왔을지 짐작이 된다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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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항상 유토피아를 꿈꿔왔다. 유토피아는 단순한 공상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꿈을 간직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희망하고, 실패하는 반복되는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희망을 꿈꿀 수 있다. 현실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대안으로 유토피아가 제시되고 디스토피아로 변질된 유토피아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유토피아를 추구하면서 인류는 발전해왔다. 앞으로도 거듭되는 실패를 감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인류는 진보해나갈 것이다. 이상향은 혼자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타인에게 강요하면서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동의 삶을 위해 희생하면서 또, 자발적으로 희생할 용의가 있는 이들이 모여 거대한 결속을 이루면서 이들이 함께 꾸는 꿈은 유토피아가 된다.




서위 작가의 <쥐들의 세상>은 절망에 쌓여 있는 어두운 세상의 일면을 그리고 있다. 물론 각자의 상황과 가치관에 따라 절망이기도 희망이기도 한 것이 세상이다. 소설 속 한 쌍의 연인도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한 사람을 감히 안다고 말하는 것, 또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단편적인 생각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비극적인 이야기의 결말을 보며 어쩌면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기억과 이해 보다 망각과 용서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말의 충격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새로운 존재방식과 이상향에 대한 가능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함께 하는 삶을 위한 자발적 희생과 기억을 이겨낸 용서는 유토피아를 향하는 길이 될 수 있다. 똑같은 풍경이라 할지라도 고독 속에서 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누군가와 함께 바라보는 것은 분명 다를 것이므로... 저 빛나는 한줄기 달빛을 더러운 쥐들이 우글거리는 하수구를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빛’이 아닌 자신을 감시하는 ‘절망의 빛’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그녀의 상황이 아프게 다가온다. 행복했던 기억이 있고, 또 함께 할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들을 기반으로 어떻게든 힘을 내줄 수는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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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젠다 세팅 (Agenda setting)’이란 매스미디어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현행 이슈에 대한 대중의 생각과 토론을 설정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용어다. 흔히 '의제설정 (議題設定)'이라고도 한다. 매스미디어가 특정 이슈를 선정하여 그것을 중점적으로 다루면 대중의 관심은 그 이슈에 집중되고 여타의 이슈는 슬그머니 잊혀진다. 따라서 매스미디어가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 등을 통해 중요하다고 보도하는 주제 (미디어의 의제)가 대중에게도 중요한 주제 (대중의제)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윤지응 작가의 <괴담의 의미>는 발상이 참 재미있는 엽편이다. 괴담(怪談)이란, 말 그대로 괴이하거나 무서운 이야기를 의미한다. <괴담의 의미>는 ‘괴담의 기원과 그 존재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에서 탄생한 이야기다. 정부가 매스미디어를 이용하여 중요의제에서 대중의 시선을 분산시킨다는 아젠다 세팅 이론을 작가는 그 차원을 몇 단계 올려서 적용하고 있다. 즉, 지구를 넘어 태양계 전체를 총괄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있고, 그 신이라는 존재가 태양계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 중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태양계에 살고 있는 생물체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괴담’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하긴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도 수많은 사건사고가 발생하고 시시각각으로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태양계 전체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발생할까? 그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 중에서 중요하고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를 선별하고 해결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신의 입장에서 ‘괴담’의 존재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엽편이라는 지면적 한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괴담의 묘미와 독특한 특성을 살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괴담의 의미>에서 포착한 괴담의 의미와 존재이유, 활용목적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괴담은 철저히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괴담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거나 당대 현실의 세태, 사건사고, 시대정신 등을 반영하여 꾸며낸 이야기들이 많다. 예를 들면 백화점이나 한강다리 붕괴사고가 일어났던 시기에는 부실공사로 인한 건물 붕괴의 피해자들이 나오는 괴담이 유행했고, 사이코패스 범죄가 악명을 떨친 시기에는 이런 범죄를 다루는 괴담이 성행했다. 또한, 납치, 유괴, 인신매매가 성행했던 시기에는 이와 관련된 괴담이 많았다.



<괴담의 의미>는 신선하고 독특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엽편이다. 하지만, 신이 직접 구현해내는 ‘괴담’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자유로에 출몰하는 귀신’ 같은 약간은 식상한 괴담 보다 뭔가 더 현실적이고 시대를 반영한 괴담이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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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토피아를 꿈꿀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현재의 삶을 딛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서 바람직한 사회나 미래에 달성해야 할 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토피아니즘은 기본적으로 희망의 철학이다. 하지만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는 절망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이 주장하는 유토피아를 사회가 추구해야할 유일한 대안으로 강조할 때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변질될 수 있다. 누군가 바람직한 미래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것을 거부하는 타인에게 강요할 때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토피아는 단순한 공상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꿈을 간직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희망하고, 실패하는 반복되는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희망을 꿈꿀 수 있다. 현실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대안으로 유토피아가 제시되고 디스토피아로 변질된 유토피아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유토피아를 추구하면서 인류는 발전해왔다. 앞으로도 거듭되는 실패를 감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인류는 진보해나갈 것이다. 이상향은 혼자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타인에게 강요하면서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동의 삶을 위해 희생하면서 또, 자발적으로 희생할 용의가 있는 이들이 모여 거대한 결속을 이루면서 이들이 함께 꾸는 꿈은 유토피아가 된다.



리마 작가의 워크인은 가까운 미래의 암울한 사회상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온갖 화려하고 복잡한 과학기술들이 수식하고 있는 미래는 시간의 흐름을 걷어내고 바라보면 저마다가 직면한 세상에 맞서 살아가는 똑같은 인간만이 남는다. 리마 작가가 그리는 미래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서 그 아득한 시간의 간극을 걷어내고 바라보면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도 현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한 누군가와,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누군가와 공존하면서 전혀 다른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과학기술의 현실에서의 구현과 관련된 갈등을 보면서 어쩌면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기억 보다 망각과 용서가 필요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인간의 새로운 존재방식과 이상향에 대한 가능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함께 하는 삶을 위한 자발적 희생과 기억을 이겨낸 용서는 유토피아를 향하는 길이 될 수 있다.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면 나머지는 감수할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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