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해삼 작가는 <당신의 J>를 ‘J로 시작되는 불쾌하고 기괴할지 모를 이야기의 모음‘으로 소개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소개처럼 <당신의 J>는 ‘jammy'처럼 다소 긴 분량의 단편도 있지만 대부분 200자 원고지 20-30매 분량의 엽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20회까지 연재되었고, 19년 8월을 마지막으로 휴재중인 상태다. (작품을 시작하면서 50편이 목표라고 하셨으니 어서 복귀하셔서 연재를 이어나가주시길...)



먼저 작품집의 제목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당신의 J>의 사전적 의미는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J로 시작하는 어떤 것’을 지칭한다. 따라서, 작가가 ‘당신'이라고 지칭한 상대방이 소유하고 있는 J로 시작하는 이름이 붙은 물건들을 소재로 하여 씌여진 이야기로 생각해볼 수 있다. 작가는 독자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만들기 마련이니까 어쩌면 작가가 지칭하는 ‘당신‘은 독자이고 따라서, 독자들이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J로 시작되는 어떤 것‘들을 소재로 이야기들이 씌여진 것 아닐까?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회 한회 이야기를 읽어나갈수록 이런 생각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일단 이야기의 제목이 ’JUST’, ’JAMMY’, ‘JUSTIFY’와 같이 명사가 아닌 부사나, 형용사, 동사 형태의 제목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작품집의 전체 구성을 두고 작가의 의도가 느껴지는 대목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떠오른 것은 스티븐 킹의 단편집 <악몽을 파는 가게>였다. 스티븐 킹은 서문에서 자신이 이 단편집을 출간한 이유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내 작품을 꾸준히 찾아주는 독자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한 것들을 여기 이렇게 펼쳐 보인다. 오늘 밤에 나는 이것저것 조금씩 팔아볼 생각이다. 자동차처럼 생긴 괴물, 부고를 작성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남자, 평행우주를 들락거릴 수 있는 e북 독자, 그리고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인류의 종말. 다른 노점상들은 이미 오래전에 퇴근하고 길거리에는 인적이 끊기고 차가운 달의 껍질이 도시의 협곡을 비추는 때에 이것들을 팔고 싶다.“



”악몽을 파는 가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악몽을 파는 가게>는 우리에게 익숙한 평범한 일상을 비틀어 공포와 절망을 창출해내고, 이를 기묘한 유머를 섞어 함께 버무린 독특한 작품집이다. 우연히도 스티븐 킹의 <악몽을 파는 가게>에는 <당신의 J>처럼 20편의 이야기 담겨있다. 또한 <당신의 J>도 우리가 일상에서 직간접적으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를 색다른 시각을 통해 공포와 반전, 기괴함을 창출해내고 있다. 물론 작품의 형식이나 길이 등에서 차이는 있지만 <당신의 J>의 의미는 ‘당신’을 위한, 즉, ‘독자’의 즐거움을 위해 늘어놓는 작가의 기괴한 상품들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당신의 J>에는 미래를 예지하는 신비한 쥬크 박스가 등장하고, 역사 속 인물의 실화나 사건들을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해서 구현하여 독자들에게 충격과 반전을 선사하며,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죽음’에서 벗어나가기 위한 한 인간의 이야기나 신의 존재와 인간의 역할에 대해 고찰하는 이야기 등 다양한 소재를 중심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구성되어 있다. 또한, <악몽을 파는 가게>는 각 단편마다 스티븐 킹 본인이 직접 쓴 자전적인 논평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그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나 작가의 개인사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함께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작품집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는데, <당신의 J>도 동일한 즐거움이 있다. 각각의 이야기에 대한 작가가 남겨놓은 짧은 코멘트가 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켜준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JOURNEY>의 “우리가 행운에 자만해서는 안되는 것도, 불행에 절망하지 말아야할 것도 우리가 결국은 미래를 모르기 때문일 겁니다.”와 <JUST>의 “때론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무언가가 없는 것만큼 슬픈 건 없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는 코멘트는 작가가 가진 아포리즘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또, <JANITOR>에서는 “진정한 두려움에 대해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정말 싫은 사람들과 억지로 어울려야 하는 두려움도 있더군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최악의 존재들만 모여 있는 어떤 집단을 상상해보세요. 거기서 영영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끔찍한 지옥도, 두려움도 없겠죠.”란 코멘트를 남겼는데, 이는 작품과는 별개로 독자들이 제각기 가지고 있는 두려움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당신의 J>는 짧은 이야기들 속에 다양한 소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경험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집이다. 개인적으로 J로 시작하는 단어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작가로서도 좋은 훈련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J>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다채로운 이야기의 즐거움을 느껴보는 것을 권한다.




당신의 J – 브릿G (brit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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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런 순간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누구도 부정할 없는 개별적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도 억센 슬픔의 순간 같은 상실과 결핍의 경험도 지나가면 일상이 되고 인생의 부분으로 녹아 든다. 하지만 상실과 결핍의 경험은 삶의 온도를 변화시킨다. 상실과 결핍의 경험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공간 감각을 둔화 시키기 때문이다.



이나경 작가님의 <포스트 잇!> 오늘 같은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따뜻한 감동이 담겨 있는 이야기다. 아직 상실과 결핍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 남매가 신비한 마법(?) 포스트잇을 만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보는 이들을 미소 짓게 한다. 남매 오빠는 아빠의 부재와 부재의 원인을 아는 듯하지만 여동생은 아빠의 부재라는 상황 자체도 이해하지 못할정도로 어린 나이다. 이야기 남매를 지켜보며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은 유예 기간을 겪어야만 진정한 슬픔에 이르게 된다는 어느 소설의 문구가 떠올랐다.



깊은 슬픔은 단번에 그냥 주어지지 않아. 어느날 문득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눈에서 용암처럼 눈물이흘러나와 귓속에 고이지 않던가.”



우리 각자는 맑은 슬픔, 헛헛한 슬픔, 차가운 슬픔, 말간 슬픔 등을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 방식, 각자가 겪은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들지만, 우리는삶의 흔적, 슬픔을 매개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위로하게 된다.



앞으로 남매가 살아갈 세상은 분명 아빠와 엄마가 살아온 세상과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남매가 살아갈 세상에도 아빠와엄마의 세상이 그랬듯 시대와 상황이 만들어내는 일렁임은 존재할 것이다. 꿈은 거친 삶의 파도 앞에 좌초되거나 상실과 결핍을 겪으며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의 위기를 맞은 남매에게 필요한 것은 힘든 현실속에서도 엄마란이름으로 오빠와 동생으로서 묵묵히 지켜봐주고 지지해 주는 가족의 사랑 아닐까?



우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가 겪는 경험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이다. 세상에 완전한 어른은 없다는말처럼 남매도 자신의 시대에 존재하는 일렁임을 경험하고 극복하면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시대의 풍랑을힘겹게 견뎌내야할 내가 살아 있고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있는 ...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 , 가족의 온기를 느낄 있는 ...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이것 이상의 응원이 있을까각자가 가진 삶의 조각들이 가족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조각(One Piece)으로 완성되는 ... 이것이 포스트잇의 진정한 마법이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행복 아닐까




포스트 잇! – 브릿G (brit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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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0-12-03 0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일 전에 눈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이 아닐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새벽에 침대에서 소리없이 눈물이 흐르는데 귓속에 고이더군요

˝깊은 슬픔은 단번에 그냥 주어지지 않아. 어느날 문득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두 눈에서 용암처럼 눈물이 흘러나와 귓속에 고이지 않던가.˝

소설 속 그 사람도 깊이 슬펐군요
 





<잠자는 숲속의 기사님> 읽으며 예전에 읽었던 김숨의 소설 <너는 너로 살고 있니> 떠올랐다. <너는 너로 살고 있니> 화자는 무명의 연극배우 '선희'. 스쳐 지나가는 단역으로서 무대에서 번도 주인공이 적이 없는 '선희'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일상에서도 특별히 주목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녀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 계기는 그녀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면서부터다. '선희' 경주의 병원에서 11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는 '경희' 간병인으로 일하면서 누구에게인지 모를 편지를 쓰며 '내가 나로 산다는 ' 대해 생각한다.



'선희' 자신의 삶을 오롯이 체감하지 못한다. 마치 짝이 아닌 받침대 위에 생뚱맞게 올라가 있는 찻잔처럼 그녀는 그녀와 그녀의 삶이 어우러지지 못하고,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닌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하는 일상이 누군가의 행복했던 과거나 어슴푸레 다가올 미래 같기도 하지만 결코 현재의 것은 아닌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상실과 결핍의 경험은 삶의 온도를 변화시킨다. 상실과 결핍의 경험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공간 감각을 둔화시키기 때문이다. 손을 뻗으면 뻗은 손을 누군가 잡아줄 거라는 믿음, 누군가를 믿고 허공으로 손을 내밀 있는 용기가 '선희'에겐 결여되어 있다. 그렇게 그녀는 하나의 섬이 된다. 



'선희' 삶의 온기를 느끼는 유일한 대상은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는 '경희'. 이유는 '경희' 깜빡임, 분절음 섞인 호흡 속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삶의 숨결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가벼운 손짓과 미세한 고갯짓에 이르기까지 의미 없는 행위란 없는 연극처럼 '선희' 모두가 아무 의미 없는, 무의식적인 반사반응이라고 말하는 '경희'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선희' '경희' 만나기 전에 살아온 세상을 거짓과 가식, 무의미로 뒤덮인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선희' 세상이 요구하는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들 보다 오직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한 '경희' 거친 호흡에서 위안을 얻고 동질감을 느낀다.



현대인은 재앙과 피곤한 일상을 구분할 없었다.”



<잠자는 숲속의 기사님> 화자도 10년이 넘게 잠들어 있는 연인을 돌보고 있다. 한때 자신을 사랑했고 세상을 향해서도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연인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장기투병을 하고 있다. 화자는 자신의 삶과 가정에 상실과 결핍을 가져온 개인적 불행을 딛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면서 이를 새로운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재앙과 피곤한 일상을 구분할 없는 현대에서 이런 개인적 불행은 사회적인 불행으로 확대되게 된다. 상실로 인한 고통을 가까스로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던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마녀라는 존재는 다시 한번 그녀의 일상을 무참히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마녀 전세계로 퍼지고 있는 불면의 원인은잠의 균형 깨졌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원인으로 생각지 못한 것을 지목한다. <잠자는 숲속의 기사님> 삶의 예측불가능성,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대답은 '인간' 안에 있다는 아닐까? 비록 지금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지만 한때는 다정하고 따뜻한 '인간'이었고, 우리도 그와 같은 ‘인간’이기에 포기할 수 없다는 것 아닐까?




잠자는 숲속의 기사님 – 브릿G (brit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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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동물원이란 공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평소에 접할 수 없는 야생동물들을 볼 수 있는 곳? 아니면 자연에 있어야 할 야생동물들을 가두는 나쁜 곳? 동물원은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이다. 그곳은 학창시절 우정을 나눴던 공간이고, 연인과의 아련한 추억이 담긴 공간이며, 따뜻한 봄날 아이와 함께했던 기억이 서려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동물원을 찾지만, 그곳에 속해 있는 동물의 삶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지하다. 동물원을 방문하면서 동물들의 복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일상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동물과의 조우에 감사하고 동행한 사람들과 추억을 쌓기 바쁘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동물원은 애초에 동물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것이다. 동물원이 더 자연에 가깝고, 야생다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이는 이유도 동물보다는 관람객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일 수밖에 없다. 관람객이 환경에 몰입하여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각종 체험형 동물원이 등장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동물의 행복은 우선시되는 목표가 아니다. 인간의 흥미와 편리를 위해 동물들의 삶이 희생되고 있는 곳, 이것이 동물원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이다. <너구리 집을 나가다>는 독자가 동물원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과 동물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동물원은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과 폭력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야만이 전시되던 시대를 거쳐 동물원도 꾸준히 진화해왔다. 다행스럽게도 진보의 물결은 동물원에도 불어닥쳤다. 동물원의 교육적 기능과 동물 복지가 거론되었고, 멸종위기종을 번식시키고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보전센터의 역할도 대두되었다. 동물원의 존재 목적이 관람에서 보전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동물원 동물들의 삶에 이상 징후가 있다는 것은 최근 발생한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감지되었다. 불법 포획되어 쇼 돌고래로 살다가 고향의 제주 바다로 돌아간 제돌이의 삶이 그랬고, 인간에 의해 동물원에서의 삶을 강요당하다가 인간의 실수로 우리를 나와 인간의 안전을 위해서 사살당한 퓨마 뽀롱이의 비극적인 삶이 그랬다.



인간은 자연에서 멀어질수록 자연을 그리워하고 야생의 동물들을 더 가까이 두고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다양한 동물을 한 장소에서 편하게 보기 위해 만든 동물원이라는 공간이 내포하고 있는 부작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이 아닌 인공의 환경에서 동물이 태어나게 했다면 그리고 그들이 죽는 순간까지 불행한 조건 속에 살다 갔다면 그것은 모두 인간의 책임이다. 일생을 닫힌 공간 안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시달리고 있는 동물원의 동물들은 그들이 생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윤과 효율의 잣대만으로 평가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너구리 집을 나가다>의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너구리 집을 나가다 – 브릿G (brit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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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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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출간된 하루키의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으면서, 내가 하루키의 소설 이상으로 그의 에세이에도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한권 한권 그의 책들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서가의 한 켠이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이번에 <고양이를 버리다 >을 서가에 꽂으며 살펴보니 소설 보다 에세이가 생각 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다.


 

사실 하루키의 신작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는 출간 소식을 접하자 마자 반가운 마음에 구매를 결정했다. 그 이유는 내가 삶과 일상에 대한 빛나는 통찰 등이 담겨 있는 하루키 에세이 특유의 매력에 빠져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고양이를 버리다>라는 제목 때문이었다. 나는 하루키의 팬 이전에 애묘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루키가 고양이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의 전작 에세이 <장수 고양이의 비밀>을 읽으며 여실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루키가 애묘인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많은 고양이를 키워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서는 이러한 애묘인으로서의 하루키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와 정을 나눠왔던 수많은 고양이들 중에서 그의 곁에서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한 장수 고양이 '뮤즈'와의 일화들이 에세이에 담겨 있다. 고양이에게는 고양이의 삶이 있고, 응분의 생각이 있고, 기쁨과 괴로움이 있지만, 하루키는 인간과 고양이라는 종의 구분을 넘어서 고양이의 생각과 행동을 구석구석까지 생생히 느끼며 마음을 교류하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해준 그의 반려묘 '장수고양이'와의 추억에 대해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뮤즈는 같이 살기에 매우 이상적인 고양이였다. 예쁘고, 영리하고, 튼튼하고, 숱한 수수께끼를 품고 있었다. 우리와 고양이 사이에는 늘 가벼운 긴장감이 흘렀고, 그건 그것대로 또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고양이는 흔치 않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 p. 145)

 


<장수 고양이의 비밀>의 온기 어린 기억이 아직도 마음 한 켠에 남아있던 때에 <고양이를 버리다>의 출간 소식을 들었으니 어찌 구매를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구매를 했던 나는 책을 받아보고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놀랐던 건 생각보다 얇고 가벼운 분량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책의 내용과 하루키가 남긴 작가 후기를 보며 이렇게 출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짧은 글이라서 어떤 형태로 출판하면 좋을지 꽤나 고민했는데, 결국 일러스트와 함꼐 독립된 조그만 책 하나로 꾸미기로 결정했다. 내용이나 문장의 결로 봐서, 내가 쓴 다른 글과 같이 엮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p. 98, 작가 후기 중에서)

 


내가 책을 읽으며 당황했던 건 책의 분량 보다도 그 내용에 있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고양이를 버리다>라는 제목을 보고 예전 <장수 고양이의 비밀> 등에서 느꼈던 애묘인으로서의 하루키의 모습을 다시 한번 느끼기 위해 책을 구매했다. 따라서, 당연히 그러한 내용 전개를 기대하고 예상하면서 애묘인으로서 하루키와 어울리지 않는 '고양이를 버리는' 행위가 어떤 반전을 머금고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서둘러 책을 읽어 나갔는데, 책의 내용 전개가 내 예상과는 좀 달랐던 것이다.

 


물론 <고양이를 버리다>라는 제목처럼 에세이에서는 하루키가 고양이에 얽힌 두가지 추억을 언급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번 에세이에서 고양이와의 추억은 그와 추억을 공유했던 다른 누군가의 추억의 한 켠을 차지하는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그때 비로소 책의 표지를 다시 살펴보니 <고양이를 버리다>라는 제목 밑에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고양이를 버리다>는 하루키가 그의 아버지의 역사와 그와 함께한 추억들을 반추하고 있는 책이다

 


"우리는 그 여름날, 같이 자전거를 타고 줄무늬 암고양이를 버리러 고로엔 해변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고양이에게 추월당했다. 뭐가 어찌되었든,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p. 87)

 


"그 때 해안의 파도 소리를, 소나무 방품림을 스쳐 가는 바람의 향기를,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런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p. 87)

 


내가 하루키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행과 음악, 책 등 다방면에 걸친 취향 그리고 귀중하고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자신의 일상에서 벌어졌던 소소한 에피소드와 엮어서 독자에게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하루키 특유의 낙천적이고 밝은 분위기가 나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네 삶이 그렇듯이 하루키 또한 마냥 즐겁고 유쾌한 에피소드만을 다루고 있진 않다.

 


일정 경지에 올라선 작가 답게 이야기를 쓰는 일은 제로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며, 이는 모두에게 즐거운 일은 아니고 때로는 본의 아니게 피가 흐르기도 하는 비정한 세계에 속하는 것임을, 또 그에 책임은 오롯이 자신이 짊어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작가로서의 숙명을 언급하기도 하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마치 갖가지 함정이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은밀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으며, 아무 일 없이 매일 평온하게 살아가기란 그리 간단치가 않음을 토로하기도 한다.

 


"만약 아버지가 병역에서 해제되지 않아 필리핀이나 버마 전선으로 보내졌다면만약 음악 교사였다는 어머니의 약혼자가 전사하지 않았다면그렇게 생각해가다 보면 정말 기분이 묘해진다. 정말 그랬다면, 나라는 인간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p. 89)

 


하루키는 신작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에서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그의 아버지의 역사에 대해 아버지가 세상에 존재했을 때는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그의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더듬어 간다. 그 역사 속에는 그가 아버지와 공유했던 추억 중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이자 본 에세이의 제목이기도 한 고양이를 버리러 간 날에 대한 기억도 있다. 그 역사들은 아버지의 역사이지만 동시에 가족의 역사이며 또한 자신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생에 있어 결과로서의 형태는 분명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진정으로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는 것은 좀 더 다른 것 아닐까? 하루키가 말했듯이 어쨌든 영원히 이기기만 하는 인간은 세상에 아무도 없으니까...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고 나서 하루키의 에세이의 매력은 읽고 나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정말로 보탬이 되는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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