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 신영복 유고 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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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일생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일생을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한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온 매 순간순간의 누적 (accumulation of every single moment)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일생은 생명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지난한 시간과 역사를 거치며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세계관의 형성과정에서 개인은 집단, 조직, 국가라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수많은 사건들을 경험하게 되며, 이 같은 경험들은 개인의 잠재의식 속에 어떠한 형태로 저장되었다가 추후에 재생, 재구성, 재해석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기억 (記憶, Memory)으로 정의할 수 있다.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 (Retrospective Memory)은 마치 동식물이 퇴적, 암석화의 과정을 거쳐 화석이 되듯이 사건의 잔상과 흔적, 진실의 파편 속에서 원형만이 살아남아 개인의 의식 속에 퇴적되고 암석화된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겪고 경험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재생되고 재구성하느냐 에 따라 행복한 기억이 될 수도 뼈아픈 추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개인은 모더니스트 (Modernist)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역사가 (His own Historian)라고 할 수 있다.

 

역사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주체간의 동시다발적인 삶의 교차와 수렴이 일어나는 입체적이고 공감각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는 기본적으로 사라지고 소멸되는 것들에 대해 다루는 것이다. 사라지고 소멸된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개별 주체들의 삶과 세계관에 미치는 영향이 서로 상이하다는 것이며, 이를 서술하고 평가함으로서 역사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은 역사가의 역할이다.

 

“내가 만난 것은 물론 개개인의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들의 총화에서 또 하나의 만남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회와의 만남, 역사와의 만남이었다고 생각한다. ?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P. 25 -

 

기억과 역사는 모두 과거를 현재화하는 수단이지만 역사가 객관성, 합리성, 실증 가능성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기억은 주관적, 직관적, 감성적이라는 면에서 그 차이가 존재한다. 역사는 객관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그 성격으로 인해 과거 사건에 대해 ‘가능한 유일한 것’을 지향한다. 하지만 기억은 개인이나 집단의 경험에 근거하지만 오히려 ‘열린 행위’라는 성격으로 인해 역사가 추구하는 진리와 객관성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따라서, 기억과 역사는 상호보완적인 것으로서 동시에 활용되어야 한다. 기억은 역사의 외연을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과거를 검증하고 역사를 평가하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간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불멸을 꿈꿀수 있다. 기억은 우리의 삶 속에서 고동치는 존재이자 동시에 미래의 삶에 대한 이정표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관계와 소통, 연대를 통해서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역사는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보하지 않는다. 역사는 끊임없이 평가되어야 하는 대상이고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왜곡되고 의혹이 제기되는 사건은 다시 ‘기억’으로 회귀하여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재검증해야하기 때문이다.

 

흐르는 냇물은 우리에게 묻는다. 빛을 반짝이며 흘러가는 물결처럼 과거와 현재라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 유년의 기억과 현실의 존재 사이에서, 당신은 어떤 모습이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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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외출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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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전세계약이 만료되어 이사를 했다. 이사 당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마지막 점검을 하고 부동산에 가서 임대차계약 정리를 했다. 집으로 돌아와 포장되어 옮겨지는 짐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소파 밑으로 흰색 종이가 툭 떨어졌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는데 순간 울컥 눈물이 나왔다. 그것은 오카리나 구조와 운지법에 대한 설명서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갑자기 등장한 설명서를 보고 나는 지난날의 어느 순간을 떠올렸던 것이다. 재작년 내 생일날 온 가족이 모였을 때, 어머니는 요즘 구청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며 생일축하노래를 오카리나로 불어주셨다.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진행성 시력장애를 가지고 계신 어머니는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아들의 생일에 특별한 축하를 해주시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괜히 쑥스러운 마음에 생일날 자리에서는 그냥 넘겼었는데, 후에 오카리나 연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아보았고 그 기억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한 장의 종이에 의해 다시 떠올랐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내 마음 속에도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그것은 그리 크지 않은 나 혼자 쑥 내려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다. 들여다보면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 깊이도 알 수 없다. 한동안은 그 구멍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슬펐다. 그것은 추억의 구멍이었다. 구멍 주위에 침입방지 철책이 있어서 안으로는 도저히 들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얼마간 서 있다가 침입방지책을 넘어서 구멍 속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런 일도 있었지, 저런 일도 있었지. 한 칸 한 칸 내려가면서 그리워하고, 후회한다. 그리움과 후회를 반복하며 조금씩 깊이 내려가면 한동안 구멍 속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게 된다." (155쪽)




기억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법이다과거에 대한 기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고동치는 두번째 심장이기 때문이다우리는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들을 기억하며 살아간다이는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행복한 기억들을 화석화하여 영원과 불멸의 세계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생일날 어머니가 오카리나를 불어주었던 추억은 내게 있어 언제나  햇살의 온기가 가득한 행복했던 한때로 기억될 것이다프랑스의 정신의학자 민코프스키는 '체험되는 시간 (Le temps vecu)'이라는 개념을 주장했다인간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같은 시공간을 공유할  있지만공존을 위한 노력이 존재할때만이 '체험되는 시간' 만들어갈  있다는 것이다단순히 시공간만을 공유하며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을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시간은 '체험되는 시간' 아닌 '죽은 시간'이다노력하는  사람만이 같은 장소에서 체험되는 시간을 공유할  있다.




민트코프스키의 주장처럼 사랑은 시간을 쌓아나가는 일이다. 상대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시간을 그의 곁에서 보내며 그 시간 속에 함께 했던 경험을 담는 일이다. 당사자들만이 기억하는 '체험되는 시간'을 만들고, 한번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이 손가락 사이로 슬그머니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오카리나를 매개로 한 어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나는 체험되는 시간을 구성하는 것은 멋진 대화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만은 아니라고 느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 앞에서는 평소 모습으로 처신할 수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 즉 상대방이 나를 온전히 포용하고 있고 내가 타인에게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받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인생의 퍼즐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퍼즐 조각을 맞춰 가든 항상 빈자리가 남아있게 마련이다. 마치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세계가 있듯이." 제프리 유제니데스 -




'미국 최고의 젊은 소설가'라는 찬사와 함께 등장하여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작가 제프리 유제니데스는 삶이란 퍼즐을 맞춰나가다 보면 누구나 부딪치게 되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미지의 세계로 인한 공백과 한계, 삶의 조각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쩌면 제프리 유제니데스의 이 말이 우리 삶의 핵심적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인생이란 불확실성의 공간 안에서 불완전한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잔인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도덕성은 선입견도 편견도 없이 공정한 운(Chance)밖에 없다는 영화 <다크 나이트>의 검사 하비 덴트,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을 살인의 대상으로 선택하고 동전 던지기를 통해살인 여부를 결정하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살인마는 안톤 시거는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삶의 불확실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아들 또는 딸로 세상에 태어난다. 또 가족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고 마침내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 또 하나의 가정을 이룬다. 가정이란 단어를 정의한다면 한 가족이 함께 살아가며 생활하는 사회의 가장 작은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정은 인간이 태어나 하나의 인격체로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사회적 동물로 진화하기 위한 최소 단위의 생활 공동체인 것이다. 가정은 정형화할 수 없기 때문에 형태와 구성은 제각각이자만 하나의 가정은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으로 하나의 우주적 세계를 이룬다. 어쩌면 가정은 불확실한 삶 속에서 '체험되는 시간'을 공유하면서 그들만의 문법으로 조각난 삶을 치유하고 삶을 재정립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 아닐까?




로버트 노직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에서 사진과 초상화의 차이를 통해 한 사람을 바라보는 행위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한다. 사진이 인물의 순간적 속사(速寫)로 한순간의 단면을 담는 것이라면, 초상화는 긴 시간 동안 각각 다른 빛 속에서 일련의 특징, 감정, 생각을 가진 개인의 다양한 모습, 동시에 발현될 수 없는 여러 부분을 깊이 있게 담아낸다. 그림에는 한 사람을 일정 시간 이상 바라본 만큼의 시간성이 농축되어 있어, 한 사람의 형상이 오랜 시간 그 사람을 겪으며 포착해낸 세부사항들로 구성된 입체적 이미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시간과 빛을 거치며 덧입혀진 개인적 삶과 역사가 녹아 있는 초상화가 순간의 단면을 정확히 포착한 사진 보다 더 풍부하고 깊은 맛을 낼 수 있음을 가장 잘 체감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정의 구성원들 아닐까? 초상화의 매력은 초상화의 대상이 어떤 사람이고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에 따라 좌우되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훌륭한 화가일수록 사진의 매력을 넘어서는 대상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포착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체험되는 시간'과 삶을 공유한 한 가정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세계를 탐구하는 역사가이자 훌륭한 화가이다.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를 만드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다. 이 세상에 완전한 어른은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자신의 시대에 존재하는 일렁임을 경험하고 극복하면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고 상충되는 욕망들로 얽혀 있는 삶과 고통과 환희로 점철된 복잡한 인생 속에서 힘겹게 견뎌내야 할 때, 내가 살아 있고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즉, 가족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이것 이상의 응원이 있을까? 괜찮지 않은 세상 속에서도 '괜찮아', '괜찮아 질거야.'란 위로를 들으며 하루를 마칠 수 있는 것, 우리 각자가 가진 삶의 조각들이 가족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조각(One Piece)으로 완성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행복 아닐까?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세요?" 운전사가 물었다.

"생각하지 않아요. 도쿄를 좋아하니." 나는 바로 대답했다.

운전사는 "오호" 감탄한 뒤, "그럼 괜찮네요."하고 웃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말하리란 걸 염두에 두고 "생각하지 않아요. 도쿄를 좋아하니."라고 했던 것이다.

"괜찮네요."라는 말을 듣고, 하루를 마치고 싶었던. 그런 밤의 이야기다.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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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리커버 특별판)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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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51일은 근로자의 날이다. 1890 5 1일 미국 시카고에서 첫메이데이 (May day) 대회가 개최된 이래로 전세계에서 이 날을 노동자의 날 (May day)’로서 기념해오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노동자의 저항을 기념하는 날에 한국에서는 저항의 주체인 노동자가 빠져 있는 것이다. 한국은 왜 노동자의 날이 아닌 근로자의 날일까?



이에 대한 역사적 근원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일제 치하였던 1923 5 1일 조선노동총연맹 주최로 2,000여명의 노동자가 모인 것이 한국에서 열린 노동절 최초의 행사였다. 이후 1958년부터는 대한노동조합총연맹의 창립일인 310일을 노동절로 정해 행사를 치러오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3년 노동법 개정과정에서 명칭을 '근로자의 날'로 바꿔 기념해왔다. 이후 노동단체들은 ‘5 1일 노동절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해오다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부터 3 10일에서 다시 5 1일로 옮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름은 노동절로 바뀌지 않고 근로자의 날 그대로 유지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실 사전적인 정의를 살펴보면 근로자노동자라는 용어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근로기준법상의 정의에 따르면 근로자는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의미한다. ‘노동자는 사전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근로와 노동의 사전적 차이와는 달리 사회적 심리적인 거리는 너무나도 크다. 우리는 흔히  노동자라는 단어에서 능동적’, ‘저항’, ‘권리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고근로자라는 단어에서는 수동적’, ‘안정’, ‘사무직등의 긍정적 이미지를 떠올린다. 심지어 범죄 피의자의 외모를 묘사하는 전단에 노동자풍의 외모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 당신은 근로자풍의 외모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는 정부차원에서 노동근로로 대체시키며 이데올로기화해온 한국의 역사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유명 연예인들의 페미니즘 관련 발언과 행동이 언론을 통해 화제가 되면서 셀리브리티 페미니즘 (Celibrity feminism)이 이슈화되고 있다. 엠마 왓슨은 히포시 (HeForShe) 캠페인에서 인상적인 연설을 보여주었고, 애슐리 주드는 ‘여성 행진 (Women's March)’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여성비하 발언에 대해 강력한 문제제기로 주목을 받았다.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가진 유명인사들의 이 같은 행동은 분명 대중이 페미니즘을 가깝게 느끼도록 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페미니즘을 어려운 철학이나 정치적 운동으로 여겼던 많은 대중들이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문제가 바로 자신들의 문제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근로가 한국에서 갖는 이데올로기적 모호함과 오해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에는 많은 편견과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되고 보편화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페미니즘 운동이 어떤 것이고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지 분명히 해야할 필요가 있다. 영화배우 메릴 스트립은 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요?’라는 질문에 저는 휴머니스트입니다. 균형을 추구하죠.’라는 대답을 하였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연기하고 영화판 밖에서도 성차별 문제를 끊임 없이 제기하고 여성 시나리오 작가들을 위한 펀딩을 진행하는 등 여성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명확히 선을 그은 것이다.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면서도 페미니스트임을 부정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비단 메릴 스트립 뿐만이 아니다. 레이디 가가와 켈리 클락슨도 같은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이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벨 훅스는 본서 모드를 위한 페미니즘 (Feminism is for Everybody)에서 페미니즘을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한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같은 정의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의 주체에 대해 주목할 뿐 그것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하지 않는다. 즉 페미니스트가 반대하는 것은 '남자'가 아니다.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남성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다. 또한 여성도 때론 성차별주의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페미니즘은 궁극적으로 모든 형태의 성차별을 지양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자유와 평등, 해방을 위한 운동인 것이다.



페미니즘을 위협하는 적은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이다. 페미니즘이 반대하는 것은 성 그 자체가 아닌 성차별을 가져오는 행위이다. 여성도 자신의 성차별주의적 행동을 직시할 수 있고 성차별주의를 반대하는 남성과 연대할 수 있어야만이 페미니즘 운동은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셀리브리티 페미니즘은 그 대중적 파급력으로 볼 때 큰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엠마 왓슨과 비욘세 팬들간의 페미니즘과 여성적 섹슈얼리티의 활용에 대한 논쟁은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적 패선업계와 화장품업계의 이익 반영하는 성차별주의적 미의 기준이 페미니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와 관련하여 중요한 이슈라고 본다. 하지만 페미니즘 용어 자체가 가지는 고정관념과 편견 등 부정적 이미지를 탈피하고 긍정적 페미니즘 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부장제 대중매체에게 이를 빌미로 페미니즘 운동이 사랑 보다는 증오를, 평등 보다는 차별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떠들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지배와 복종, 강압, 억압과 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고 대등한 입장에서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고 상호성장과 자아실현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페미니즘의 비전을 현실화하는 노력을 해나갈 수 있다. 물론 페미니즘으로 가는 길은 하나일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과 삶이 다르므로 각자의 삶에 말을 걸고 변화를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개개인의 구체적인 관심사와 전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의 개혁이 중요하다. 이를 위한 첫 걸음은 페미니즘이 가진 부정적 이미지를 종식시키고 그것이 가진 비전을 제대로 알리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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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오디세이 완전판 세트 - 전4권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
아서 C. 클라크 지음, 김승욱 외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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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오디세이: A Space Odyssey》는 2001로 시작하여 2010, 2061, 3001로 결말을 맺는 장엄한 대서사시이다. 이 시리즈의 시작은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이 아서 클라크에게 함께 정말 괜찮은 SF영화를 만들어 보자고 한 제안에서 출발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의 큐브릭의 관심은 지성이 뛰어난 외계인이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고 인류가 그러한 존재를 발견하였을 때 과연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였다. 큐브릭의 제안을 받은 클라크는 예전에 자신이 썼던 단편소설 '파수병 (The Sentinel)'에서 영화를 구체화할 아이디어를 찾았고 그것이 모티브가 되어 영화사에 길이 남을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SF소설의 전설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가 탄생한 것이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의 영화각본과 소설은 동시에 진행되었고, 세상에 공개된 것도 거의 비슷한 시점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영화와 소설은 세부내용이 조금 차이가 있다. 특히 차이가 나는 것은 디스커버리호의 목적지이다. 영화에서는 디스커버리호의 목적지는 목성으로 표현되지만, 소설에서는 토성으로 설정하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감독 스탠리 큐브릭이 당시 특수효과 기술로 토성을 진정성 있게 묘사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목적지를 토성에서 목성으로 수정하였다고 한다.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인류의 진화과 과학기술, 인공지능과 우주라는 공간에 대해 다루고 있다. 기존의 SF영화나 소설과 다르게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과학적인 사실을 토대로 엄밀한 고찰과 검증과정을 거쳐 표현되었고 특히 영화는 특수 효과 분야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화는 1968년 아카데미 시각 부문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우주라는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는 광활한 공간을 소재로한 작품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스타워즈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도 있고 인터스텔라와 같은 시공간의 차원을 넘나드는 이야기도 있다.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스토리 자체나 소재 때문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에 대한 통찰을 텍스트로서 또 영상으로서 구체화한 측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2시간 3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이어지는 영화의 흐름과 전개는 굉장히 느리며 대사 또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첫 대사가 시작하고 25분이 지나서야 나올 정도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강점 또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영화의 강점은 스토리 텔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주얼로 미래에 대한 상상을 구체화하는데 있는 것이다. 행동 하나하나에 몇분씩 들어가는 건 긴장감 넘치는 전개보단 이미지의 나열로 전개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대사가 없는 이유도, 이 영화는 대사로 주제를 전달하는 게 아닌 이미지로 전달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인공지능과 미래의 디스플레이 기능 등을 토대로 구현한 디스토피아적인 미래 모습은 저자 아서 클라크가 미래에 대한 통찰을 이미지화하여 구현한 것이다. 무한한 우주환경을 배경으로 인류의 도전과 희망을 표현한 부분은 현대인들의 삶과 대비되어 SF소설에서 느끼기 힘든 감동과 뭉클함 마저 느껴진다.

 

 

 

 

 

전 인류가 주목한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간의 인류와 기계의 세기의 대결이 펼쳐진지도 몇 년이 흘렀다. 인공지능 AI는 인류의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장미빛 미래? 암울한 미래?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현실화되었을 때를 가정하여 공포와 위협의 실체에 대해 논하기 전에 그러한 미래에 대한 해답을 그 아이디어의 시초이자 작품을 통해 미래 모습을 구체화하였던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통해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후속 시리즈이자 완결작인 완전판 세트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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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쁜 쪽으로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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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여인숙의 밑바닥 인생들 앞에 한 노인이 찾아온다. 노인은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버티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독려한다.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점차 그의 희망 섞인 말에 기대를 걸고 꿈꿔왔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노인은 사라지고 희망에 가득 차 있던 이들은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 꿈꾸던 삶과 현실의 간극 (間隙) 만큼의 충격을 안고 이전보다 더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때론 희망도 어떤 이들에겐 독이 된다."

 

 

 

 

고리끼의 희곡 '밑바닥에서'는 희망과 절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처절한 현실을 힘겹게 견뎌내고 있는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 섞인 말은 약이 될까? 아니면 독이 될까? 이는 결국 희망의 진정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들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주는 것은 큰 비용이 소요되지 않는다. 희망에 부푼 이들이 현실과 꿈의 간극을 재확인하고 더 깊은 심연으로 침몰해도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러한 꿈을 꾸고 그러한 삶을 살아온 그 자신에게 있다. 희망은 이들에게 절실한 것이지만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장밋빛 희망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절망은 '헛된 희망'을 동반한다.

 

 


 


 

 


김사과의 두번째 소설집 <더 나쁜쪽으로>을 읽고 '희망' '절망' 그리고 '희망의 진정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3부로 나뉘어진 본 소설집의 1부는 김사과의 세계를 바라보는 비판적이고 냉철한 시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1부를 여는 첫번째 단편이자 표제작인 '더 나쁜쪽으로'의 주인공에게 삶은 하나의 거리로 요약된다. 주인공은 거리를 떠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자신은 이 거리, 도시, 세계 안에 속해있어 아무것도 넘어서지 못하고, 아무데도 닿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거리로 돌아온다. 거리 위에는 이 거리를 만드는데 기여한 똑같은 사람들이 가득하고, 그는 그들을 아니 '우리'를 저주한다

 

 

 

 

끔찍하게 쌓아 올려진 이 모든 것이자 그것을 쌓는데 인생을 탕진한 바로 그자들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가.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라니? 모두 그저 쫓겨 온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오직 그 점에서만 우리들은 동지가 아닌가? (p. 28)

 

 

 

 

'샌프란시스코'의 주인공은 여전히 시작에 머무르면서 시작을 반복하고, 결국 아무데도 닿지 못한 채 제 자리에 머무르며 점차 고립되어간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실패를 반복하고 누군가의 삶에 '내가 하는 말'이 영향을 주는 것이 두려워 적게 말하는 것을 선택하고 결국 말을 잃어간다. 결국 그가 신봉하는 것은 말이 아닌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로 국한된 단편적 분석에는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이해는 생략된다.

 

 

 

 

이미지는 살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를 덮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게 말을 걸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그것은 편리하고 편리한 것은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문득 그는 이미지의 바깥을 상상하고 있었다. 한 구체적인 정신을 그는 고려하고 있었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p. 37)

 

 

 

 

', 증기, 그리고 속도'의 인물들에게도 세상은 절망적이다. 그들은 파국이 닥치기 전 허용된 시간 동안 큰 의미 없는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내일은 저 멀리 있다

 

 

 

 

한동안 우리는 사이가 좋았다. 그러니까 그게 닥쳐오기 전까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거. 현실? 글쎄. 뭐 그런거. 우리가 유일하게 갖고 있지 않은. (p. 76)

 

 

 


 


 


 

'지도와 인간'은 내용의 상당 부분이 영어로 쓰여진 파격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형식과 언어의 파괴를 통해 작품의 주제의식이 잘 드러난다. 대화와 혼잣말이 뒤섞이고,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서술방식은 파편화된 개인의 소외감과 쓸쓸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지만 진화를 거치며 각자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퇴행적이고 자폐적인 고유어를 사용하여 결국 개인은 아무와도 소통할 수 없고 점차 고립되어간다.

 

 

 

 

전에는 인간들이 말이라는 것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자해에 가까울지라도, 하지만 내가 말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게임은 끝나 있었다. 지도는 완성되었고, 내 위치는 아무데도 없었다. ... 내가 꽃같이 활짝 피어나는 사이 모든 게 이렇게 철저히 무너져내리라고는... (p. 96)

 

 

 

 

2부는 동일한 시선을 유지하며 그 대상을 한국적 현실에 더 집중한다. '박승준씨의 경우'의 박승준씨는 고시원에 살지만 우연히 줍게된 신상 디올 슈트를 낡은 티와 운동화로 매치하면서 의도치 않게 반문화적, 진보적 성향의 자신만의 고유한 패션을 추구하는 힙스터(Hipster)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이 세계의 주류에서 벗어나려 한 시도의 결과는 파국이었다.

 

 

 

 

갑자기 민영이 비명을 지르며 그를 밀려나고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그는 어리둥절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검은 차가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엄청난 속도로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그가 그 차를 발견했을 때는 차가 이미 그를 덮치는 중이었다. (p. 121)

 

 

 

 

'카레가 있는 책상'의 주인공은 스스로 세계로부터의 고립을 택한다. 그는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채 별다른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살아간다. 또한 대중적인 햄버거나 샐러드 보다는 적당히 자극적이지만 라면보다는 몸에 좋은 카레를 즐겨 먹는다. 하지만 고시원의 이웃들은 그를 카레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린치를 가한다. 이 사건은 주인공이 타인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계기가 되고 실제로 카페에서 본 '버블티 여자'를 상대로 한 범죄를 계획한다. 하지만 또 다른 타인의 타인을 향한 혐오사건들을 목도하면서 주인공은 세계를 향해 완전한 굴복을 선언하게 된다.

 

 

 

나는 부드럽게 으깨어질 것이다. 소화될 것이다. 흡수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더 이상 두렵지가 않았다. 나는 안전하다. 나는 외롭지 않다. 나는 기분이 좋다. 나는(p. 145)

 

 

 

 

'이천칠십X년 부르주아 6'에서는 작품의 무대가 '2070년의 한국'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빈부격차로 인한 양극화 그리고 단절, 파편화, 소외감, 혐오의 정서는 여전하다. 소설 속에서 미래를 살아가는 주인공들도 끝없는 환상 속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천천히 사라져간다.

 

 

 

그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이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것임을 알았다. 현실을 역겨워하며, 죽음을 저주하며.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끔찍한 증오 속에서. 무력감 속에서. 천천히 썩어갈 것임을 직감했다. 영원한 그리움 속에서 (p. 174)

 

 

 

3 '세계의 개' 'apoetryendingmachine'은 작가가 쓴 몇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3부에서도 무심한 듯한 냉철함으로 세계의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작가의 시선은 여전하다.

 

 

 

 

 어차피 아무 의미 없는 것들, 영 움직이지 않는 세계, 무력한 자에게 인식이란 여기저기 널브러져 이상한 빛을 내는 광기일 뿐이다. 그것이 눈앞을 떠나지 않는 것은 악몽이다. 의지를 잃어버렸으므로... 우리는 세계의 개, 남은 것은 시간을 견디는 것, 아무 의미도 바닥도 천장도 없는 (세계의 개, p. 182)

 

 

 

 

우리에게는 아무런 생산능력이 없다. 먹고 쓴다. 오로지 누워 있다. 우리에게는 어떤 대항수단이 없다. 당신들에게 대적할 아무런 의지가 없다. 힘도 없다. 항복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원한 없이, 우리는 투항한다. (우리의 입장, p. 205)

 

 

 

 

책을 덮고 표지를 바라 보았다. 이 책 표지의 대부분은 노란색이 차지하고 있다. 노란색은 색채적으로 가장 밝은 색으로 기쁨, , 에너지를 상징하는 색이다. 하지만 밝은 원색의 표지에서 나는 기쁨과 에너지 보다는 역설적으로 어두움과 답답함을 느꼈다. 이는 비단 <더 나쁜 쪽으로>라는 소설집의 제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표지의 위아래, 양 옆 4개의 사다리꼴이 표현하고 있는 소실점은 모두 저 아래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또한 저 아래로 가는 길에는 레드카펫이 깔려 있다. 레드카펫은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서 개선해 돌아올 때 빨간 길을 걸은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레드카펫은 "극진한 대우" "환대"를 의미하는 것이고 일정한 자격을 갖춘 초대 받은 몇몇만 올라설 수 있다. 빨간색은 불 같은 열정과 광기, 피의 희생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 나쁜 쪽으로>라는 제목은 사무엘 베케트의 <가장 나쁜 쪽으로>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더 나쁜쪽을 논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에게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지금이 최악이 아니고 진정한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냉혹한 현실을 인식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더 나쁜쪽으로 걸어가는 것도 레드 카펫에 오르는 이들처럼 냉혹한 현실을 바라볼 용기와 열정, 희생, 광기가 선행되어야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냉철한 성찰 뒤에 우리가 선택하게 될 길이 설령 더 나쁜쪽이라고 해도 가장 나쁜쪽이 아닌 더 나쁜쪽으로 간다는 것은 아직 삶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표지를 보니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색의 삼원색 중 노랑과 빨강으로만 이루어진 표지에서 파란색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삶이란 불공평하고 잔인한 것이며, 현실 속에 파랑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파란색은 하늘, 대기, 우주, 꿈 등 심리적, 물리적으로 저 멀리 존재하는 것, 즉 희망을 대변하는 색이기 때문이다. 고리끼의 밑바닥에서처럼 헛된 희망은 진정한 절망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고난과 역경을 딛고 저 아래 어딘가를 향하는 레드카펫에 설 사람들에게 창문 틈에서 새어 나오는 한줄기 푸른빛 즉, 삶의 여지를 줄 수는 없었을까

 

 

 

 


 

 

 

 

밖에 나와 하늘을 향해 책을 들어올렸다. 책의 표지를 둘러싼 푸른 하늘이 배경으로 추가되자 색의 삼원색의 조화가 완성되었다. 옅은 푸른색의 하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어딘가에 아직 희망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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