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거짓말을 한다 - 구글 트렌트로 밝혀낸 충격적인 인간의 욕망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지음, 이영래 옮김 / 더퀘스트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사고를 분석하기 위해 수많은 학문 분야에서 다양한 접근방법을 시도하였지만, 지금껏 그 어떤 방법도 사람의 생각을 훤히 보여주지는 못했다. 인간의 생각은 그만큼 복잡한 명제다. 인간을 쉽게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자들이 불러온 파국을 우리는 수없이 지켜봐 왔다.

 

 

<모두 거짓말을 한다>의 저자는 인간 의식의 흐름을 연구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인터넷 검색과 온라인 반응 등을 분석한 빅데이터다. 사람들은 키보드로 얻은 익명성 덕분에 많은 것들에 솔직해진다. 검색을 통해 전문적인 조언을 찾길 원할 때 실제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도 하고, 또 키보드 뒤에 숨은 익명성 덕분으로 검색의 결과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구글 데이터가 가진 힘은 솔직함이다. ,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않을 이야기를 이 거대 검색엔진에 한다는 데서 비롯한다. 또한, 이러한 디지털 흔적들은 축적과 분석이 쉬운 형태로 저장된다. 사람들의 정보 검색 그 자체가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욕망을 가지며, 무엇을 하는지에 관해 막연한 추측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훨씬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이다.

    

 

작고 네모난 검색창에 검색어를 입력하는 일상적인 행동은 작은 진실의 자취를 남기며, 이 자취 수백만 개가 모이면 결국 심오한 현실이 드러난다.” (16)

    

 

구글을 이용한 경험을 떠올려보자. 추측건대 당신은 고상한 사람들 앞에서는 인정하기 어려운 행동이나 생각을 검색창에 입력하곤 할 것이다. 사실, 미국인 대다수가 구글에 매우 사적인 사항을 이야기한다는 너무도 강력한 증거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은 날씨보다 포르노를 더 많이 검색한다. 남성 25퍼센트와 여성 8퍼센트만이 포르노를 본다고 인정한 설문조사 데이터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133)

    

 

저자는 디지털 시대에 이용 가능성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이 새로운 데이터가 인류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빅데이터 그 자체가 아니다. 거대한 데이터 속에 감춰진 진실이다. 구글 검색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데이터가 많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솔직한 생각을 내놓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빅데이터와 데이터 레이크의 기저에 깔려 있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 생각해볼 것들이 많은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빵굽는건축가 2019-11-19 14: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키보드로 얻은 익명성 덕분에 많은 것들에 솔직해진다. .....솔직해지는 자신을 만나는 것이죠. ^^

잭와일드 2019-11-19 22:20   좋아요 0 | URL
네 방대한 데이터 속에 감춰진 진실을 꿰뚫어본 저자의 통찰력이 돋보였습니다.
 
모두 거짓말을 한다 - 구글 트렌트로 밝혀낸 충격적인 인간의 욕망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지음, 이영래 옮김 / 더퀘스트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데이터 속에 감춰진 진실을 꿰뚫어 보는 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는 너로 살고 있니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숨 지음, 임수진 그림 / 마음산책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런 순간순간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닥친 사고, 터무니없는 죽음, 준비 없는 이별 등 상실과 결핍의 경험도 악다구니 같은 억센 슬픔의 순간이 지나가면 곧 일상이 되어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한 부분으로 녹아든다.

 

김숨의 소설 <너는 너로 살고 있니>의 화자는 무명의 연극배우 '선희'. 스쳐 지나가는 단역으로서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된 적이 없는 '선희'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일상에서도 특별히 주목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녀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 계기는 그녀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면서부터다. '선희'는 경주의 한 병원에서 11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는 '경희'의 간병인으로 일하면서 누구에게인지 모를 편지를 쓰며 '내가 나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당신은 당신이 느껴지나요. 나는 내가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75)

 

'선희'는 자신의 삶을 오롯이 체감하지 못한다. 마치 짝이 아닌 받침대 위에 생뚱맞게 올라가 있는 찻잔처럼 그녀는 그녀와 그녀의 삶이 어우러지지 못하고,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하는 일상이 누군가의 행복했던 과거나 어슴푸레 다가올 미래 같기도 하지만 결코 현재의 내 것은 아닌 것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상실과 결핍의 경험은 삶의 온도를 변화시킨다. 상실과 결핍의 경험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공간 감각을 둔화시키기 때문이다. 손을 뻗으면 그 뻗은 손을 누군가 잡아줄 거라는 믿음, 누군가를 믿고 허공으로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가'선희'에겐 결여되어 있다. 그렇게 그녀는 하나의 섬이 된다.

 

"당신이 죽은 사람이면 나도 죽은 사람이에요. 당신보다 더 오래전에. 당신을알기도 전에." (140)

 

'선희'가 삶의 온기를 느끼는 유일한 대상은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는 '경희'. 그 이유는 '경희'의 눈 깜빡임, 분절음 섞인 호흡 속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삶의 숨결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가벼운 손짓과 미세한 고갯짓에 이르기까지 의미 없는 행위란 없는 연극처럼 '선희'는 모두가 아무 의미 없는, 무의식적인 반사반응이라고 말하는 '경희'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선희''경희'를 만나기 전에 살아온 세상을 거짓과 가식, 무의미로 뒤덮인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선희'는 세상이 요구하는 역할을 잘 연기하는 배우들 보다 오직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한 '경희'거친 호흡에서 위안을 얻고 동질감을 느낀다.

 

"빛 속으로 걸어 나가며 빛뿐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남남인 당신과 나를 가를수 있는 것은, 틈새를 통과하며 회칼처럼 가늘고 얇게 버려진 한 줄기 빛뿐입니다." (264)

 

개개인이 켜켜이 쌓아올린 마다의 사연들은 상실과 결핍의 기억을 머금채 조용히 빛난. 면 우리 모두가 은 슬픔, 헛헛한 슬픔, 가운 슬픔, 말간슬픔 등 마다의 상처를 가진 하나의 섬이 아닐까? 섬은 연결과 단절의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은 수면 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서로의 고유한 , 각자가 은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들지만, 우리는 삶의 , 슬픔을 개로 서로의 재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위로를 건.

 

"저 풍경의 화룡점정은 결국 '인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고, 날아가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고, 땀구멍보다 작은 곤충들에게도 이름을 지어주는 '인간'이라는 존재 말이에요." (265)

 

우리가 린 것들, 두고 온 것들은 무일까? 우리는 린 것을 찾기 위해서 은 무버렸는지조수 없기 때문에 서로를 없이 구한다. 곳엔 그 어떤 존재를 해서도 치유 받을 수 없는, 오직 사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재하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비종 2019-11-18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우리는 섬이 되는 마음과 바다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신만의 물이 차오를 때 또 다른 섬과 더욱 동떨어지게 되는 장면을 상상해요. 연결되는 방법은 두 가지이겠죠. 슬픔을 닮은 물을 날려보내거나 좀 더 깊이 잠긴 또 다른 섬과 물속에서 연결되거나. .

사람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건, 오직 사람이 답이라는 건 서글프면서도 희망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나로 살고 있는 걸까.. 오래 생각하다 갑니다.

잭와일드 2019-11-18 19:38   좋아요 1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 자체가 편지형식이고 시 처럼 의미가 함축적인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시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98)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은 수많은 등장인물과 동식물, 사물들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라본 84편의 조각글들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소설을 처음 접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360쪽 분량의 소설이 평균 4쪽 남짓의 독립된 챕터로 분리되어 있는 독특한 구성이었다. 본작 <태고의 시간들> 뿐만 아니라 2018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방랑자들>도 각각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촘촘하게 엮어 하나의 장편소설로 구성한 작품이다. 작가의 이러한 작업방식은 마치 작은 천을 이어붙여 조각보를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여 패치 워크 (patch work)’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태고의 시간들>을 읽으며 이러한 소설의 독특한 구성이 패치 워크 (patch work)’ 보다는 성좌(星座, Constellation)’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성좌 즉, 별자리는 저마다 거리와 밝기가 다른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각각의 별들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제각기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끊임 없이 움직이고 있다. 인간의 가시거리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별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해내지 못하고 하나의 군집된 별자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에 별자리가 정해진 이후 수천년의 시간 동안 거의 별자리의 모습이 변하지 않은 것의 이면에는 바로 이런 사실이 숨겨져 있다.

 

 

<태고의 시간들>을 읽으며 개별화된 각각의 작은 이야기들이 마치 별들이 모여 하나의 별자리를 이루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소설은 미하우와 게노베파 부부, 이들의 자식인 미시아와 이지도르, 그리고 미시아의 딸 아델카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니에비에스키 가족들과 이들의 이웃과 외지인들, 동식물과 사물, 망자와 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체들을 이야기의 대상으로 참여시키고 있다.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을 가진 이들 다양한 개체들의 개별적인 삶은 단선적인 스토리를 위해 봉사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거대한 시간의 간극을 빈틈 없이 수놓아 결국 소설 전체를 구성하는 큰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저마다 개별적 삶을 살면서도 타인과 또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시대를 이루고, 그것이 되풀이되고 순환되는 과정을 거치며 역사를 구성하는 인간의 삶이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 같지 않은가?

 

 

소설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다양한 개체들이 생성, 변화, 소멸하는 태고라는 무대는 소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소설도 태고라는 공간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고 있다. ‘태고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도 하루면 족히 돌 수 있을 정도로 작고, 평범한 시골 마을로 묘사된다. 하지만 우주의 중심에 자리한 태고의 위치와 폴란드어로 프라비에크(prawiek)’, 즉 아주 오래된, 원시의 시간을 의미하는 지명은 태고가 담고 있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태고는 실재하지 않는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면서 태초의 시간을 의미하는, 즉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특정 시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태고의 시간들>20세기 폴란드라는 한정된 시공간을 조망하는 이유는 변화와 소멸을 반복하는 인류 역사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세상의 진실을, 전쟁의 참혹함을 이성만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마술적 리얼리즘 (Magic realism)’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저자 올가 토카르추크의 대답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해 저자는 의식이 닿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을 다루고, 이성을 벗어나 세계의 심연에 도달한다. 신화적 방법론을 통해 반복되는 역사를 설명하고, 삶의 원형을 회복시키는 과정에서 역사가 비켜간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환상을 통해 현실의 회색지대를 조망하여 진실을 보게 하는 것,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기록될 수 없었던 소수자들의 삶에 주목하는 건 문학이 담당해야할 중요한 역할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은 인간을 타자화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동식물과 사물, 망자들의 시선들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인간의 진실을 향해 서로 다른 방향과 세기로 빛을 비춘다.

 

 

인간들은 동물이나, 식물, 사물 보다는 자신이 훨씬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들은 식물과 사물보다는 스스로가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여긴다. 식물들은 사물보다는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꿈꾼다. 그런데도 사물들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존속은 다른 무엇보다 더욱 강한 생명력을 의미한다.” (52)

 

 

소설에서는 붉은 털을 가진 개 랄카를 통해 세상을 향한 동물의 시선을 투영한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 그 끊임없는 변화의 시간들을 내면화한다. 따라서 시간은 인간의 정신 안에서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가 된다. 반면 동물은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의 적용을 받는다. 동물에게는 시간의 흐름을 걸러내는 장치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들은 단지 이곳에서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며 항상 현재를 살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 속에 시간을 묶어 놓는다. 과거 때문에 고통 받고, 그 고통을 미래로 끌고 가기도 한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절망을 창조한다.” (309)

 

 

작품에는 식물의 시선도 등장한다. 보리수는 나무의 꿈에는 동물의 꿈과 달리 감정이 없고, 인간의 꿈과 달리 이미지가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대자연 속 식물의 삶을 통해 삶의 원형의 회복을 꿈꾼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버섯균의 시간이다. 후손들은 선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개별적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버섯균의 삶은 반목과 대립을 되풀이해온 인간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버섯균은 아이들을 선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모든 버섯에게 생장 에너지와 홀씨를 퍼뜨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어떤 버섯에게는 향기를, 또 어떤 버섯에게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길 수 있는 재능을, 또 어떤 버섯에게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길 수 있는 재능을, 또 어떤 버섯에게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자태를 허락해준다.” (225)

 

 

망자들의 시간도 있다. ‘익사자 물까마귀의 시간이다. 현실에서 조명되지 않거나 애써 외면해왔던 전쟁과 학살의 현장을 저자는 망자의 시선을 통해 슬프고 아프지만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잊히고 찢겨진 삶에 위로를 건넨다.



영혼은 정말 많았다. 수백, 아니 수천이었다. 자심 새벽바람의 얆은 막 사이에서 이러저리 흔들리던 영혼들은 곧 끈을 놓친 풍선처럼 하늘로 솟구쳐 올라 어딘가로 사라졌다.” (204)

 

 

미시아의 그라인더처럼 사물들의 시간도 존재한다. 사물들은 자신에게 머물었던 손길 속에서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지금은 차갑게 식었지만 한때 절절하게 끓던 열기를 기억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델카는 태고를 떠나며 어머니의 커피 그라인더를 천천히 돌린다. 이전세대의 어떤 순간에 명멸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머금고 있는 그 커피 그라인더는 그 감정의 온기를 다음세대에게 전할 것이다.

 

 

어쩌면 커피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나아가 미시아의 그라인더는 태고라고 불리는 것의 기둥일지도 모른다.” (54)

 

 

태고는 태초의 시작이자 결말이 되는 곳, 인간과 자연, 신을 포함한 모든 시간들이 흐르고 쌓이는 곳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태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며, 동시에 그 어디에나 존재하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이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 종국적으로 남게 되는 건 채울 수 없는 야망과 끝내 이루지 못한 꿈뿐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서서히,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생의 땅거미가 내려앉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다. 이는 매초 무()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으면서도 의미 없는 존재란 없음을, 인간은 모두 저마다의 방향과 속도로 빛을 내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행위이다. 마치 연약하기 짝이 없는 작은 싹이 혼신의 힘을 다해 그 무거운 흙의 무게를 이겨낸 후 땅 위로 몸을 내미는 순간처럼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11-23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잭와일드 2019-11-23 16:28   좋아요 0 | URL
좋은 소설 덕분인듯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키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글을 읽으며 어느 순간 내가 그의 소설보다 에세이에 더 애정을 품고 있다는 걸 깨달았던 적이 있다. 한 권 한 권 그의 책들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서가의 한 켠이 하루키의 책들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소설보다 에세이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하루키는 에세이를 통해 일상의 빛났던 순간들, 여행과 음악, 책 등 다방면에 걸친 자신의 취향, 귀중하고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독자에게 건넨다. 하지만 우리네 삶이 그렇듯 그의 에세이는 마냥 즐겁고 유쾌한 에피소드만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다. “세상엔 실로 갖가지 함정이,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은밀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아무 일 없이 매일 평온하게 살아가기란 그리 간단치가 않다.”며 삶의 아포리즘을 드러내기도 하고, 일정 수준의 경지에 올라선 작가답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은 모두에게 찬사를 받는 것이 불가능한,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는 비정한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 또 그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작가가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작가의 숙명을 비장하게 언급하기도 한다.



한지혜라는 작가는 그녀의 첫 단편집 <안녕, 레나>를 통해 접했다. ‘삐삐‘, ‘PC통신‘, ‘2002 월드컵등 아련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사물과 사건들, ‘임대아파트‘, '완행열차‘, ‘목욕탕등 현실의 바닥에 묶인 삶의 고단함에 주목한 인상적인 단편집이었다. 우리가 잊고 지냈거나 애써 외면했던 기억들, 현실의 불안과 부조리를 예리하게 파고드는 작가적 시선이 돋보였다.

 

 

그러니까 전부 진짜에요. 무엇을 쓰면 거짓말이 되지 않을까를 가장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내 안의 진짜가 아니면 쓰지 않았어요.”


  

우연히 접한 인터뷰에서 문학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접할 수 있었다. 문학은 결국 우리가 서 있는 이 곳, 우리를 울고 웃게 하고, 희망을 주기도, 절망케 하기도 하는 현실의 일상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언급한 진짜가 담고 있는 의미가 무척 궁금했다. 그 후 그녀의 글을 접한 건 신문의 칼럼을 통해서였다. 삶과 문학을 경계 짓지 않는 그녀의 문학론은 일상의 현실을 파고드는 산문에서 더 빛을 발할 수 있음을 그때 느꼈다. 그래서 그 칼럼들이 한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참 반가웠다.



삶이란 게 참 묘하다. 눈을 뜨면 날마다 새로운 날이지만 실상 삶의 관성은 어제를 포함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살아봤던 시간의 습관으로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더듬어가는 것, 현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과거인 그런 게 삶이라는 생각도 든다.“ (159)

 

 

영화 아메리칸 뷰티 (American Beauty)‘를 보면 오늘은 내 남은 인생의 첫 날이다. (Today is the first day of the rest of my life.)“라는 대사가 나온다. 날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지만 과거의 기억과 삶의 관성을 벗어나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할까? 오히려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나면서도 퇴보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에 더 가깝지 않을까?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과거의 기억은 우리의 삶 속에서 고동치는 두 번째 심장이자 미래의 삶에 대한 이정표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개인은 현실의 삶을 살아내는 모더니스트 (Modernist)인 동시에 과거의 기억들을 탐구하는 역사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순간의 경험이, 체험이 삶을 대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모든 개인은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삶은 순간의 단면을 정확히 포착한 사진 보다 각기 다른 시간과 빛이 누적되어 한 개인의 역사가 입체화된 한 장의 초상화에 가깝다. 사진이 인물의 순간적 속사(速寫)로 한순간의 단면을 담는 것이라면, 초상화는 긴 시간 동안 각각 다른 빛 속에서 일련의 특징, 감정, 생각을 가진 개인의 다양한 모습, 지금까지 한 번도 동시에 드러난 적 없었던 여러 부분을 깊이 있게 담아내기 때문이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읽으며 초상화는 그림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이고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가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대상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작가적 시선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삶을 일정 시간 이상 바라본 시간성의 농축성이 어딘가 불분명한 선들로 이뤄진 한 사람의 형상을 오랜 시간 그 사람과 만나며 끌어 모은 세부사항들의 합성된 이미지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 결과로서의 형태는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정말로 보탬이 되는 것은 좀 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언급하였듯이 삶은 모든 꿈의 성취를 허락하지 않는다. 어쨌든 영원히 이기기만 하는 인간은 없고, 세상 그 어떤 잘난 천재도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실패한 꿈을 대하는 자세, 그 태도가 삶의 색깔을 결정한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이 가는 이유이다.

 

 

한지혜 작가의 매력은 읽고 나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정말로 보탬이 되는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타인을 섣불리 이해하려고 시도하거나, 세상을 안다고 자만하지 않는 것, 진실한 체험에 기반을 둔 담담한 위로를 건네는 것 등일 것이다. 인간은 의도의 유무를 떠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 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자신만의 잣대로 타인을 평가하고 규정해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삶의 흔적, 아픔을 매개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위로한다. 인간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빛과 온기를 나누며 오직 사람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진실과 정의, 인간 고유의 본성 속에서 자신만의 진짜를 탐구하며, 타인을 향해 작지만 흔들림 없는 발걸음을 묵묵히 내딛는 것뿐이다.

 

 

아프고 괴롭고 불안하고 막막한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도망치지 마라. 원래 희망은 아프다. 그래서 꽃이 피는 것이다.“ (280)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작가가 언급한 아주 사소한 진지함으로 태산 같은 막막함을 훌쩍 뛰어넘는 순간을 느낀 기분이다. ‘살아 있는 당신들, 살아갈 당신들이 저마다의 힘으로 끝내 버티기를. 나는 가늘고 길게 쥔 펜으로 앞으로도 계속 당신들을 쓰고, 나를 쓰고, 이 삶을 기록해볼 작정이다.’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무엇보다 미더운 위로가 된다. 서가 한 켠에 자리를 마련하고 싶은 또 한명의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빵굽는건축가 2019-11-15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상의 빛났던 순간들, 여행과 음악, 책 등 다방면에 걸친 자신의 취향, 귀중하고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독자에게 건넨다. 라는 하루키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와요. 좋은글 고마워요

잭와일드 2019-11-15 09:39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ㅎㅎ

막강현짱 2019-11-15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에 더한 애정을 갖는 1인이라 글이 눈에 들어왔네요^^

잭와일드 2019-11-16 00:02   좋아요 0 | URL
저랑 같은 생각이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