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조나단 밀러가 스티븐 와인버그 인터뷰. The Atheism Tapes 6부작 중 2부. 

아서 밀러, 리처드 도킨스, 콜린 맥긴, 대니얼 데넷 등이 다른 부에서 인터뷰이들이다. 

2004년에 조나단 밀러가 Atheism: A Rough History of Disbelief 만드는 동안 이들 포함 여러 사람들과 꽤 긴 인터뷰를 하는데, 저 <무신론의 짧은 역사>엔 그 중 극히 일부만 들어갔고 그러나 이 인터뷰들 내용이 버리기엔 아까워서 그것들을 따로 <무신론 테이프>로 만듬. 


14-15년 동안엔 집 근처 산을 다니면서 Yale Open Course, 그리고 조나단 밀러가 만든 이 다큐들 많이 들었다. 

저 위의 정지화면에서도 보이지만 와인버그는 외모가 아름답게 ;;; 하여간 멋지게 늙은 노인은 아닌 편이다. 그 왜, 항상 눈물이 고인 것같은 눈. (유툽 유저들이 이걸 지적하고 있음. 그래서 나도.) 그런데 이거 들으면서, 구원을 체험함. 표나게 강력한 뭐가 어디 있어서가 아니라, 잘 살아온 인생들의 힘. 그런 거였을 것이다. 조나단 밀러라는 잘 살아온 삶 + 와인버그라는 잘 살아온 삶. 그리고 와인버그의, 과학 정신 in action. 





이건 조나단 밀러가 인터뷰이. 그보다 한참 젊은 여자 방송인이 인터뷰어.  

방송용 인터뷰라도 인터뷰어 인터뷰이가 개인대 개인으로 만나기도 한다, 

심지어 두 사람의 정신이 만나기도 한다..... 이런 인상을 주는 인터뷰다. 


나는 사실 이걸 여러 번 생각했었다. 

한국에서 저 두 사람이 하듯이 대화하면 (20년이 넘는 나이차 같은 건 장벽이 되지도 않으면서) "둘이 사귀냐?" 같은 반응일텐데? 상대의 정신에 흥미를 느끼고, 그걸 눈의 반짝임이나 지속적 눈마주침, 손짓 고개 갸웃함 같은 것으로 표현하는 일이, 거의 여기선 금기 아닌가? 어디서나? 심지어 친구들 사이에도? 언제나는 아니라면 적어도, 자주? 하긴 상대의 정신에 흥미를 느낀다, 이런 일부터가 희귀하게만 일어나지 않나? 흥미로운 정신이 드물기도 하겠거니와, 그런 정신이 있다 해도 누가 거기 흥미를 느끼는 일도 마찬가지로 드물겠어서? 


로버트 해리슨의 Entitled Opinions에도 

우리의 기준에서, "둘이 사귀네 사귀어"인 순간들이 참 많다. 

여자가 게스트일 때 그런 순간들이 더 많긴 한데 남자가 게스트일 때도 일어난다. 

마음이 맞아서 잠시 두 사람이 똑같이 좋아하고, 마음 맞음이 일으킨 설렘이 목소리에 담기고. 정성껏 질문하고 정성껏 답하고. 


고개 갸웃 정도의 제스처는 물론이고 심지어 평소의 눈빛에도, 

사람이 그 안에서 성장한 문화가 담기는 것이겠어서, 

조나단 밀러의 유툽 비디오들을 보면 우리와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제스처와 눈빛. 

적어도, 여기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제스처와 눈빛. 그래서 한때, 강력한 해방감을 이것들을 듣고 보는 것만으로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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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읽은 글. The Mind: Less Puzzling in Chinese? 페이지는: 

http://www.nybooks.com/daily/2016/06/30/the-mind-less-puzzling-in-chinese/
















필자는 이 책의 저자. 제목이 <중국어의 해부>라니 내가 읽고 싶진 않으면서, 어떤 얘기 하는 책인지 (좀 많이) 알고 싶다. "다른 문화를 공부하는 이들은 두 번 득을 본다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먼저, 다른 문화에 대해 배우고, 다음, 자기 문화의 어떤 가정들이 자의적임을 알게 된다." 이런 말로 시작하고, 중국어와 영어의 차이가 중국어로 하는 철학과 영어로 하는 철학의 차이, 그 철학이 다루는 문제들의 차이와 연관이 있는 건 아니냐.. 에 대해 질문하는 글. <중국어의 해부>를 쓸 때 그가 품었던 의문 중엔, 정신 개념을 놓고 서양 철학이 벌여온 싸움의 일부는 서양 언어에 그 뿌리가 있는 게 아니냐.. 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의문, 질문을 영국 출신 재미 철학자 콜린 맥긴의 글들을 읽으면서 다시 떠올렸다 하는데, 

내겐 조나단 밀러가 만들었던 BBC <무신론의 짧은 역사> 시리즈로 알았던 콜린 맥긴. 지금 이거 쓰면서 그의 책을 처음 검색해보는 콜린 맥긴. 많은 책들을 썼고 어떤 건 바로 관심이 간다. 위의 셋 중에선 특히 왼쪽. Mindfucking: A Critique of Mental Manipulation. 마인드퍽킹. 이 말이 책 제목으로 쓰였구나(처음은 아닐지 몰라도)며, 잠시 감사함. 


어쨌든, "정신, 중국어론 그리 수수께끼 아닐 듯?" 이 글의 필자에 따르면, 

중국어에선 동사가 강하고 영어에선 명사가 강하다. feel, experience, 이런 말들이 중국어에선 동사로 표현되지만 (현대 중국어가 영어식 표현 역어들을 갖게 되면서 그 경향이 약해지긴 했어도), 영어에선 명사로 표현되는 강한 경향이 있고, 그 때문일까 본질적으로 동사로 쓰여야할 말들까지 명사화하는 경향이 영어엔 있다. 이 강력한 명사화 경향 때문인지 몰라도, 실체 규정이 아마 불가능한 것들까지, 그걸 부르는 명사가 언어에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로 접근되는 일. 정신의 문제, 심신 문제와 관련한 서양 철학의 곤경은 이런 서양 언어의 특징과 적어도 어느 정도는 관련 있지 않겠냐는게 필자의 결론. 


짧은 글이고 애매하게 끝난다. 프린스턴 철학과의 한 교수에게 이 문제와 관련해 자기 생각을 말했더니, 

"그래서, 심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 같은 식으로 ㅋㅋㅋㅋ; 반응했다나. 


막연히 (무식하게), 마인드-바디 프라블럼 이건 정말 양인들의 프라블럼.. 같은 생각을 나도 하긴 했었다. 이 글이 제시한 문제에 대해 그 필자 자신, 아니면 누구라도, 자세하고 강력한 연구를 해주었으면 좋겠단 생각도 그래서 듬. 


그런가 하면, 동양언어(한국어)와 서양언어(영어) 사이의 차이는 

구속력과 해방력, 이걸 기준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는 생각도 듬. 언젠가 일기를 쓰면서, 누군가를 강력히 비판해야 했는데 그를 지칭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홍길동은.. 홍길동이.. 이러는 것도 너무나 어색했으며, "성 + 직업" 조합도 참으로 어색했고, "성 +"씨"" 조합도 마찬가지. ㅋㅋㅋ;;;; 영어에서 학술적이거나 어쨌든 공식적인 글에선 사람을 성으로만 가리키는 일, 이거 따라해서 성으로만 불러봤다. 그래도 어색했지만. 여기서 나는, 울프를 포함해 블룸스베리 사람들이 쓴 일기나 편지들에서, 사람을 이름으로 (퍼스트네임) 부르면서 그 사람에 대해 못할 말이 없다는 걸 기억했고, 여기에도 영어와 한국어의 차이가 있지 않은가? 자문했다. 한국어에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애정이 강요된다. 아닌가? 그의 이름만을 부를 수가 없기 때문에. 교착어는 애착을 강제하는 거야. : 자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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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강의록의 마지막 강의는 

"틀린 삶을 옳게 살 수는 없다"에 바쳐진 긴 논평같은 것이기도 한데, 

내가 읽은 아도르노 저술들 중에서는 아마 유일하게, "실패하는" 아도르노를 보여준다. 니체, 특히 <짜라투스트라>의, 오독까진 아니면 어쨌든 (아도르노에게선 예상할 수 없을) 피상적인 읽기를 하고 있기도 하고. "도망치라, 친구여, 너의 고독 속으로." 이런 구절을 아도르노는 부르주아 도덕의 추상적 부정...... 같은 것으로만 생각했을까 정말? 


아닐 것같기 때문에, 

만일 아도르노가 바슐라르를 읽었다면, 인간에게서 사회가 아닌 영역에 대한 탐구, 그것의 의의를 알아보았을 것같기 때문에, 아도르노가 너무 강력히 사회의 (사회라는 악의) 전면성, 이런 걸 말하면 흠 비관하기를 여기선 택한 것 같아.. 하지만 왜? 같은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 당시 그가 일부였던 독일 지식인 집단의 무엇인가가 그를 그렇게 이끈? 


그런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우리를 재료로 만든 그것. 그것을 향한 저항. the resistance to what the world has made of us." 이런 구절엔 반박불가의 진실이 있다. 


여기서 아도르노의 "저항하라!"는 샹포르의 "정의가 너그러움에 앞선다"와 근접조우 한다고 생각한다.  

Take care of justice and love will take care of itself. : 아도르노나 샹포르나, 동의했을 것이다. 




*잃어버린 몇 문장은 걸작에 분명한데 

기억해서 복구하는 문장은... 졸작에 분명하고. 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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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인 17강: 


오늘 좋은 삶이란 나쁜 삶에의 저항, 가장 진보적인 정신들이 투명하게 간파하고 비판적으로 해부해 온 나쁜 삶에의 저항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는 가능하지 않다고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부정적 처방 외의 어떤 지침도 구상할 수 없습니다. (....) 내가 염두에 두는 건 간파된 모두의 규정적 부정, 그리고 우리에게 강요된 그 전부에 우리의 저항의 힘을 집중하는 능력입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 반성하면서 작정하고 그것들에 저항하기, 우리의 무력함을 자각하면서도 그런다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세계가 우릴 통해 만든 그것에 저항한다는 건, 우리에게 저항할 권리가 있으므로 외부 세계에 저항한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 시도는 언제나 "세상의 이치"를 강화할 뿐이며 그 "세상의 이치"는 우리 안에도 이미, 언제나 존재하고 작동합니다. (나쁨에) 합류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는 우리의 일부, 그것을 향한 저항의 힘을 우리는 가동해야 합니다.


아도르노가 어떤 극단적인 말을 하든 

"천재에게 실수는 없어. 천재의 실수는 발견의 관문." 이 말(율리시스에서 스티븐. 음 기억을 믿을 수 없으니 이게 맞는지 구글 검색이라도 해봐야겠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이 말 오글거리지만, 진실 아닌가?) 적용될텐데, <도덕 철학의 문제들> 강의 마지막 강에서 하는 말들은 예외다. 아도르노 자신 지금 자기 말을 온전히 확신하지 않는다고 보게 하는 면들이 여러 곳에 있기도 하다. 언어도, 방어-공격적. 


이 대목에 내가 적은 노트를 보니 이런 것도 있다: 아도르노의 비관주의.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여기야말로 그런 곳이다고 생각. 출구가 있어도 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뭔가 기특해져서 잠시 스스로를 쓰담쓰담. 잘 적어두었다, 과거의 나야. 

출구가 있고 그것을 보았음에도 다시 보기를 거부할 때. 그런 때가 비관주의 아닌가? 

출구가 없거나, 있지만 못 보았다면. 볼 수 없었다면. 그 때의 출구없음은 정확하거나 정직한 인식이지 비관주의가 아니지 않나? 


아도르노는 고독을 믿지 않는 것인데, 

그건 사회가 인간을 만드는 정도를 (어쩌면, 고의로?) 과대평가하는 것 아닌가? 




아도르노에게 고독은 언제나 고립이었을 것이며, 

그건 그가 깊은 충족을 주는 인간적 유대, 더 행복할 수 없는 타인과의 공존을 

내밀하게 아는 사람이었던 때문일 것같다. 넘치게 사랑받고 행복했던 아이가 그대로 나이만 먹은 것이 (청년에서 노년까지) 아도르노. 그런 아이가 가졌을 모든 매력, 그런 아이가 자극할 모든 반감이 그의 것이었다. 이런 회고를 그의 측근들이 여럿 남기기도 하지 않았나. 




*아 악몽같은 알라딘 서재 자동로그아웃. 

좀 전 또 자동로그아웃 발생해서 (요즘은 글쓰고 있으면 열어둔 다른 탭에서 수시로 로그인 여부를 확인하기까지 함에도) 꽤 많이 날아갔다. 1분간격 저장이라는 건 맞음? 내가 1분 동안 그렇게 많이 쓸 것같음? : 알라딘에게 묻는 말. 


기억에 기대어 복구하려다, 조금 해보고 포기. 

우리를 만든 세계만이 아니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세계가 만든 우리에 저항하라는 아도르노 말이 

한편 얼마나 진리냐고 적어두려던 포스트였다. 읔. 나중 다른 포스트에서 이어서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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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읽고 남겼던 노트를 보니 "아버지"가 언급되는 흥미로운 대목이 둘 있다. 하나는, 라투어의 질문이 세르의 "지적 형성" 이것에 관한 것이었던 듯한데, 세르가 이런 얘길 한다. 19쪽. (*급히 대강 남긴 노트여서, 말이 엉성하다). 


당신은 내가 받은 사회적, 지적, 정치적 영향에 대해 알고 싶은 거 같다. 하지만 당신 앞에 있는 것은 고독하고 심란한 촌사람이다. 파리에서 1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살았다. 역사라는 걸 모르는 곳이다. 내 아버지에게 그런 표현을 할 능력이 있었다면, 아버지는 사회는 악의 세력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Indeed, if my father could have expressed it, he would have said -- because he believed it and, thus, lived in that certitude -- that the social world is in the hands of the powers of evil사회적 인정의 사다리를 올라갈수록, 가장 사악한 세력에 가까이 가게 된다.


여기서라면 "사회적 인정의 사다리를 올라갈수록"이기보다 그 가장 위에서 그렇듯이 가장 밑에서도. 래도 되지 않을까. 세르의 말이 과장이듯이, 한국의 현실에선 이게 더 진실 아니냐며 바꿔 말해도 과장이긴 하지만. 그렇긴 한데 이거 참 놀랍지 않나? 악이 쥐고 흔드는 사회. 이렇게 말해도 거기 진실이 있다는 것? 


이어 다음 페이지에서, (질문이 어떤 것이었는진 짐작이 안된다. 새로운 질문에 답을 한 게 아니고, 앞 페이지부터 이어지던 세르의 답의 일부였던 건지도), 개인의 교육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얘기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떤 나이 이후에는, 양육의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자신의 결정적 교육을 위해 책임을 져야 한다. 게으르고 유약한 사람만이, 최초의 양육에 의존한다. 이것은 고쳐야할 병이다. 


해석은 철학의 출발이지만 유일하게 중요한 일은 발명이고, 그러니 학생은 어떤 의미에선 학교에 있어선 안된다는 얘길 근방에서 (22쪽) 하는데, 개인이 자기 교육을 책임지라는 말이나 학생은 (발명을 하고 싶다면) 학교를 떠나라는 말에서 보면 세르가 개인과 사회의 분리에서 바슐라르보다 한 술 더 뜨는 듯. 단호하다. 하지만 "학교가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학교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바슐라르 말이, 더 심오 더 급진적이라 생각함.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이 말에 깜놀했었다. 아니 이건 내가 했던 말 그대로가 아니냐며. ㅋㅋㅋㅋ 세르가 저 말 하는 걸 읽기 10년쯤 전 "내가 내 자식이다.." 내게도 남에게도 말함. 너에게 가장 좋은 걸 줄 사람은 너 자신. 이라는 둥 확장도 하면서. 지금 세르의 말 노트 남긴 걸로 보면서도 여러 생각이 자극되긴 한다. "사람은 어떻게 자신이 되는가"처럼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아버지가 되는가"에 대해 누군가 막강한 글을 써주면 좋겠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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