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진보가 갖는 비-직관적 성격을 생각한다면,
마치 환상이 깨질 때의 반응처럼 그 시작부터 명백히 자신을 드러내는 기초 과학의 도덕적 가치에,
우리는 한층 더 자부를, 한층 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와 함께 우리는 객관적 지적 형성이 없는
도덕적 형성은 없다는 것도 이해하게 된다. 낡은 과학 혹은 고급 과학은 에고이즘에 봉사한다고 혹은 배덕에
봉사한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있을 텐데, 이는 헛된 이의다. 과학의 응용에서 과학을 판단해선 안된다.
도덕적 견지에서 보든 심리적 견지에서 보든, 과학의 가치는 과학적 인식이 성취되는 순간에 포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이 한 영혼을 밝히는 그 순간, 그것이 인간 정신의 형성에 갖는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자기 본질을
구성하는 이성의 활동이, 본질 구성된 이성을 풍요하게 하는 그 순간을 우리는 고집해야 한다. 진리를 사유하는
존재는 바로 그를 통해 에고이즘과도 결별한다. 그 존재는 자신 안에서, 모호하며 불순한 주관적 무의식에 보편 의식으로 맞선다. (................)
사실 나는 프랑스 학교들이 보여주는 도덕적 탁월함에 늘 놀란다.
학교의 정신적 환경, 바로 이것을 어른들은 모방해야 한다. "삶 (la Vie)"의 이미지를 본딴다면
그것은 학교가 아니다. 그렇지 않고, 삶이 "학교(l'Ecole)"의 이미지를 본따야 한다. 우리 사회가, 사춘기에
얻게 되는 도덕적 정점에 인간이 늘 머무르게 할 길을 찾아낸다면, 도덕의 문제 그리고 사회의 문제의 작지 않은
부분이 해결될 것이다. 학교의 정신적 환경이 갖는 이 높은 도덕적 가치를, 한 학제의 학문적 조직에서 찾고 거기
제한하려 해선 안된다.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인간 영혼의 정점을, 인간 정신의 정점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견고하고
정연한 수업은, 인식이 발견으로서의 자신의 새로움, 자신의 신선함 안에서 자신을 제시하는 수업이다. 이런 수업에서
정신이 자신을 교정하고 자신을 구성하고 자신을 보편화함을 우리는 안다. 삶의 권태 -- 분열된 정신이 갖는 모호한 의식 -- 는 사유의 즐거움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영혼의 전체에서 낙관주의가 빛난다. 진리를 에워싸면서 건강한 활동이 수정처럼 응결한다. 진리는 하나의 목표다. 진리는 인간적 목표다. (바슐라르, "과학 문화의 도덕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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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밑줄 친 부분들에서
바슐라르가 쓴 문장들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대단해 보인다기보다
어쨌든, 어디서 수없이 들었던 말 같으면서 동시에 심오하게 새롭게도 들리는
이상한 매혹이 있고, 옮겨보고 싶어졌다. 옮겨 오고 그보다 두 배쯤 길게 잡담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긴 것도 아님에도 하고 나니 지치고 맘.
이 문장들도, 바슐라르 과학 철학이 영어번역되지 않은 이유를 알 거 같게 하기도 한다.
어떤 가치가 (중요하고 비범한 가치가) 있긴 한데, 그 가치의 맥락이 대단히 프랑스적인 맥락일 듯.
그 맥락까지 번역을 통해 수입하기엔, 에너지 부족일 수도. 그리고 구문 상으론 복잡할 게 없는 문장임에도
번역이 어려운 문장들 많을 것 같다. il faut insister sur l’instant où une activité de la raison constituante enrichit la raison constituée. (자기 본질을 구성하는 이성의 활동이, 본질 구성된 이성을 풍요하게 하는 그 순간을 우리는 고집해야 한다... 로 해봄). 이런 문장, 쉽지 않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