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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찌히 대학에서 니체의 지도교수였던 프리드리히 리췰이 쓴 파격적인 추천서. 논문이 없었고 그러니 학위도 없었음에도 바젤 대학에 취직할 수 있게 했던 추천서. <포터블 니체>에 카우프만이 쓴 "해제"에 일부 번역되어 있다. 7-8쪽. 


39년간 대학에 있었지만 이 청년만큼 뛰어난 학생을 가르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학생이 내 연구에 기여한 것도 이 청년의 경우가 처음이다. 신의 가호에 따라 이 청년이 오래 살게 된다면, 나는 그가 독일 문헌학의 일급의 학자로 이름을 떨칠 날이 오리라 예언한다. 강하고, 힘에 넘치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용감한 청년이다. 비슷한 성격을 가진 다른 사람들도 놀라게 할 정도로 그렇다. 말을 명료하고 솜씨있게 하며, 조용하고 자유롭게 사고를 전개하는 부러운 재능을 갖고 있다. 그는 영웅이며, 그가 그럴 생각이 없음에도 라이프찌히에 있는 젊은 세대 문헌학자들을 이끌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하루라도 빨리 그의 강의를 듣고 싶어한다. "아니 이 사람은 지금 사람이 아니라 "현상"을 말하고 있잖아"라고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정말이지 "현상"이다. 그러나 그는 같이 있으면 유쾌하고 겸손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추천서에 꼭 필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그는 뛰어난 음악가이기도 하다.


바젤 대학이 니체를 임용하기로 하자 리췰은 또 하나의 추천서를 쓴다. 


니체는 정치 성향이 강하지 않은 청년이다. 독일의 위대함에 동조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프러시아주의에 빠지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자유로운 시민/영적 활동을 지지하며, 따라서 스위스 대학인 귀대학에 잘 적응하고 살아갈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여태까지 그의 연구는 그리스 문학사, 특히 그리스 철학사에 초점을 두어왔다. 그러나 나는, 대학의 실질적인 요구가 있을 경우, 그가 가진 뛰어난 재능으로 다른 분야에서도 최고의 성공을 거둘 것임에 조금도 의심이 없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청년이다. 



19세기 독일에서 문헌학이 지금 한국이나 미국에서 인문학 특히 문학연구와 비슷한 면이 당연히 있겠지만, 

지금 인문학엔 없고 없었고 상상하기 힘든 면도 있었을 것같다. 거의 "과학"이지 않았을까? "독일 문헌학의 일급의 학자" 리췰의 이 말은, 자연과학에서 과학자들이 가질 법한 확신이 담긴 말이 아니었을까. 내 예측은 실현될 것이고 아무도 이의를 갖지 못할 것이다 같은 확신. 


니체의 외모가 평범했으며 여자들에게 인기는 전혀;;; 없었다.. 고 모든 전기가 말하기 때문에, 

니체는 "현상"이다... 는 리췰의 말이 더 상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똑같은 말을 해도 니체가 하면 (다른 청년 문헌학자들에 비해) 뭔가 아주 대단히 다르게 들릴 때가 많았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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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자체의 속성은 아니지만 어쨌든 현재의 경향으론, 

어법에선 굳어 있고 의미에선 구속력이 없는, 어찌 봄 모순처럼 보일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어의 이런 면이, "정신의 삶"이란 걸 한국어에 담기 어렵게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실은 많다. 얼마 전부터 자주 생각하는 주제. 


Entitled Opinions에서 게스트가 대학원생이었던 에피도 하나 있는데, 스탠포드 물리학과 박사과정이었던 Kathryn Todd(여학생. 물리학 전공 여학생이면 그냥 바로, 리스펙트....)가 게스트고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주제였던 에피. 오늘 아침 이거 들으면서 생각했다. 일단 이런 말들을 번역으로라도 한국어 안으로 끌고 와서, 해봐야하지 않을까. 






오프닝에서 이런 말을 한다: 

Everyone is entitled to his or her opinion. That's what das Man says. But is it true? 

Is everybody entitled to an opinion? That's a question we're not gonna resolve here today. All I know is that on this show everyone is entitled to my opinions and to the opinions of my guests. 


We're not miserly here. We're in fact exceedingly generous with our opinions. 

We're here to instruct and delight, and to talk about literature. 

So, is everybody in? Is everybody in? The symposium is about to begin.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누구나 자기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누구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까? 이건 오늘 우리가 해결할 질문은 아닙니다. 나는 다만, 모두가 나의 의견을 그리고 내 게스트들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만 압니다. 


우린 전혀 인색하지 않아요. 아니 우린, 우리 의견을 아주 넘치게 퍼줍니다. 

우리의 목적은, 가르치며 또 기쁨을 주는 것이죠. 그리고 문학에 대해 얘기하는 거에요. 

그럼, 다들 들어왔나요? 모두 들어왔나요? 잠시 후 심포지엄을 시작하지요. 


(ㅋ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 ;;;;;;;;;;;; --> 이러면서 옮겨 보았다. ㅜㅜㅜㅜ 이것도 포함). 


어쨌든 이 오프닝과 그에 비교할만한 그 비슷한 내용의 한국어판을 상상하면서, 

영어의 경우엔 언어와 정신의 삶이 유연하게 동행해 왔지만, 한국어는 (영어와 비교한다면) 무슨 2인3각 경기같은? 거의 언제나 둘 사이에 강요(억지), 삐걱임이 있는. 그렇지 않나 했다. 사실 opinion 이런 기초 어휘들은 물론이고, to instruct and delight 같은 구절도, 영어로 쓰이면 그냥 바로 정신의 한 편이지만 한국어로 옮겨지면 그렇지 않지 않나? "가르치고 기쁨을 주려 해요." 이것과 정신 사이엔 어느 쪽에서든 좁혀야 할 거리가 있지 않나? 


정신의 삶이라는 게 겨우 존재하는 정도인 것과, 누구에게든 "책임"을 제대로 지우고 묻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실상 같은 일 아닌가? 


아아아.......;;; 횡설수설은 그만두고, 

한국판 Entitled Opinions가 있으면 좋겠다. 미국판이 그러듯이 게스트가 교수들 위주인 건 여기선 힘들 것같으니, 

호스트도 게스트도 대학생이거나, 아니면 호스트는 대학원생 게스트는 그게 누구든이거나. 미국판이 그러듯이 문학과 철학에 중점, 그러나 생명 윤리나 컴퓨터 공학이나 대학의 사명, 인문학의 사명 (다루어졌던 것들이다. 대학의 사명은 스탠포드 총장이었던 존 헤네시가 게스트, 인문학의 사명은 헤이든 화이트가 게스트) 다양한 주제에 대해, 정신의 삶을 위한 대화. 


최승자와 <이 시대의 사랑>에 대해,

부산의 매력에 대해, 

고양이의 매력에 대해, 

야구의 매력에 대해, 그런 대담을 듣고 싶고 

미국판처럼 긴 세월에 걸쳐 주제 목록이 작성되는 것도 상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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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인 너는 그러니 이걸 알아야 해. (정확하지 않지만 대강 이런 뜻으로). 그게 너라면 무어냐고 자문해 보았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질문이 이런 형식일 때 답은 사실 이 영화밖에 없는 듯했다. 나와 가깝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 영화를 안 보았다면, 혹은 봤지만 별 생각 없다면, 싫을 것 같다. (그때부터 그를 싫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의 위대함에 대해서 그리고 명대사들을 같이 얘기해보고 싶을 것같고, 그러면서 그것들에 대해 내가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이 보완, 확장, 심화되는 일이 일어나면 좋을 것 같다. 


이런 "--같다"들로 생각이 흘러갔음. 이 영화엔 "그때 그가 우리집 거실에서 죽어버린 것같았어" 이런 명대사도 있는데 이게 어떻게 내 인생 몇십년의 요약인지, 당신 인생의 이야기고 내 인생의 이야기인지, 껄껄 허허 ;;;; 웃고 맥주 잔 비워가면서 얘기할 수 있다면 좋을 것같다까지. 


그러나 이 영화말곤 

떠오르는 게 없다는 그것은 

가장 중요한 건, 나만이 그것의 주인. 그런 거라서인가? 식스핏언더에서 네이트 부친, 나타니엘 1세의 명대사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너, 그리고 나머지. 그 둘은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의 증명 같은 게 있는 건가 여기에? ;;;; 나만 그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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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의 종강. 

다음 주 수요일이 기말시험이긴 한데, 월요일과 화요일엔 작은 책들 읽고 퀴즈와 토론을 한다. 오늘은 주교과서.. 를 뗀 날. 마지막 읽은 글이, 기후변화가 주제고 "이 문제에 관한 과학자들의 연구를 우리 자신 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세심한 검토에 바탕한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중요한 건 논의에 우리가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같은 말로 끝난다. 내가 가져간 토론 주제는, 1. 이 말을 그대로 할 수 있는 기후변화말고 중요한 다른 문제론 무엇이 있나. 2. 이 글은 우리에게 책임있는 시민으로 알아야 할 것으로 기후변화를 말하고 있는데, 알기의 다른 종류로 (책임있는 시민이 아니라 사인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면 이걸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느끼게 하는 내가 사랑하는 무엇. 그 무엇은 무엇인가. 


2번은 My Dinner with Andre. 이 영화에 한 비평가가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쓴 것이다. 여기 "거의"를 써야 하는 건, 정확히 기억을 해낼 수 없었기 때문. "내 베스트프렌드들이 보지 않았을 거라곤 상상할 수 없는 영화"였던가, (저게 말이 되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면 보아야 하는 영화" (이것도 아님, 이렇게 단순한 말이 전혀 아님). 내 베스트프렌드가 이걸 모른다는 그런 아이디어도 내가 견디지 못할 영화.. 뜻은 그런 뜻인데 그걸 저보다 훨씬 재치있게, 압축적으로, 하던 말이 있었다. 보고 나서 어디 적어두었던 것도 같아서, 나중 찾아질수도. 영어로는 어떤 구절이었나도 거의 기억이 나지 않고 ("베스트프렌드"는 거의 확실히 들어가지만) 어디서 읽었나도 전혀, 기억할 수 없다. 이런 일이 처음이면 지금, 심장이 내려앉으며 놀라고 있을 수도 있는데 이미 좀 익숙한 일이다. 


2번 질문에 대한 답으로 야구 (내가 미친 듯이 사랑하는. 공감을 얻는 일이 드문), 나의 고양이, 이런 얘기들이 나왔고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도 나온 답이었다. 


*지금은 감감하지만 꽤 오랫동안 최승자 시 다수를 거의 외다시피 했었다. 특히 대학 1-2학년 그 2년 정도, 매일 읽음. 학위를 받고 책들을 정리할 때, 최승자 시집들은 (시집들 거의 전부를 누구 주었지만) 완전히 낡은 그 외양만으로도 내 육신의 일부같은 그런 느낌 있어서 그냥 두었다. 그런데 얼마 전 꺼내서 보는데, 읽을 수 없었음. 한 편 정도 억지로 읽고 나서, 덮어야 했다. : 음.. 하여간 이런 것 포함해 여러 생각들을 저 답을 들으며 했다고, 더워서 팔이 뜨겁게 따끔거리고 호흡이 쉽지 않은 가운데 굳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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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여자들: 회초리를 넘어서> (1996) 


니체 모친 프란치스카의 독실한 신앙을 탓하는 최근의 논평자들을 다음의 질문에 비추어 검토할 것이다: 프란치스카가 그와는 다른 사람일 수 있었겠는가? 내 주장은, 프란치스카가 부권주의적 영향들의 산물이며, 아니 실상 그 희생자라는 것이다. 독실한 신자들이었던 부친, 그리고 남편과 살았던 사람이 그녀 자신 독실하지 않았다면 그게 충격적인 일 아닐까. 나는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트, 니체가 사랑했으며 또한 비판했던 그녀에게도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이 또한 그녀가 처해 있던 상황을 고려하면 전적으로 온당한 접근이다. 직계 가족 내에 소통할 수 있는 어떤 남성도 없이 (이건 니체 자신에게도 불운이었다), 반항아였던 엘리자베트에게 그녀의 재능을 분출할 출구는 없었다. 그녀의 재능에 대해 우리가 어떤 말을 하든, 그녀에겐 적어도 뛰어난 조직 능력이 있었다. 니체에게 학문적 토대를 견실히 쌓을 수 있게 했던 슐포르타, 독일에서 그런 학교는 20세기로 진입하고도 한참 후에야 여학생들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니 니체가 자기 여동생을 "사랑했다" 혹은 "증오했다"고 말하는 건 사정을 극히 단순화한다. ("서론") 



어제 입수한 책. 

어린 시절 엘리자베트는 오빠를 숭배했고, 

천재.. 인 오빠가 시를 쓰다 파지를 내거나 하면 그것들까지도 다 챙겨서 서랍에 차곡차곡 보관했다고 한다. "철학자/작가로서 니체의 천재성은, 천재적 문서보관인이었던 누이의 덕도 조금은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말이 로널드 헤이먼의 전기에 나온다. 그런가 하면, 엘리자베트를 "반유태주의에 빠진 거위 anti-semitic goose"라 부르고 "(그녀가 벌이는) 이 모든 추악한 짓의 기원이 사랑이라는 게 더욱 끔찍하다"같은 니체가 남긴 말들도 많이 인용되지 않았나. 오빠의 철학을 이해하려고 과외까지 받지만 과외교사였던 (그 자신 좀 유명한 철학자였던?) 누군가가 포기하며 했다는 말, "도저히 가르칠 수 없다. 철학을 할 수 없는 정신이다" 그것도 여러 곳에서 인용되었고. 


위에 옮겨온 대목 읽으면서, 적어두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11시엔 점심을 먹어야 하니 지금쯤 그걸 적기를 포기해야할 듯. ;;;;; 음 어쨌든, 

구원의 관점에서 만사를 보는 것이 좋지만, 그러지 않아야 할 때도 있으며, 아마 (내가 페미니스트라 해도. 어쩌면 그러므로 더더욱) 니체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그녀들이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더라면..."의 관점에서 그들 삶에 다른 차원을 주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같다. 같은 생각이었다.;;; 소설이 아니라 연구서에서면. 음. ;;;; 여러 모로 ;;;; 이거 찍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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