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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 

이해 가능함의 문제에 대하여. — 쓸 때 작가는 이해되기만을 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이해되기를 원하는 만큼 이해되지 않기도 원한다. 책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 책을 향한 이의제기는 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 저자의 의도였다. — 그는 "아무나" 자기 책을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모든 고고한 정신과 취향은 자신을 전하려 할 때 자신의 청중을 선택한다. 그리고 청중을 선택하면서, 동시에 그들은 청중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차단기를 내린다. 문체의 모든 섬세한 법칙들이 여기에 자신의 기원을 두고 있다. 




아래 포스트에, 

웃겨서 웃다 울었다고 쓴 로버트 해리슨의 말은 실은 <즐거운 학문> 381번 단장의 직접 인용이었다. 

그의 애청자가 되고 나서 여러 번 일어났던 일. 그의 말에 강력하게 공감하거나 반발했는데 실은 인용이었던 말들. 


아래 포스트에 쓴 것과 비슷한 얘기를 

유학 시절 한 한국인 학생과 하다가 극딜(이 말, 이 말이 여기서 딱 맞는 것같다) 당한 적 있다. 

(당신이) 한국 교수들 다 보셨어요? 성실하고 뛰어난 교수들이 얼마나 많은 데 그러세요? 

그의 말이 옳기를 순간 강력히 염원했다면, 그게 내 (내 정신의) '고고함'의 증거 아닐까? ㅎㅎㅎ;;; 

하긴 내가 개인적으로, 가까이서 알았던(아는) 교수라야 뭐, 한 세 명? ;;;; 그가 옳기를 바라다마다다. 


그렇긴 한데, 

지금(김 안주로 맥주 마시고 있는 지금 이 저녁)의 나는 니체의 위의 단장을 섬세하게(대충, 자기 맘대로가 아니라) 

이해할 사람도 사실 많지 않을 것같고 그래서 니체 문장들 다수가 그렇지만 이 단장도, 시험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성실하고 뛰어나면 뭐해? 이런 문장도 이해 못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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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itled Opinions에 스탠포드 총장 존 헤네시가 출연했을 때. 

EO엔 에피마다 긴 인트로가 있는데 (이에 대해 해리슨 자신이 설명하기를, 

자기가 원하는 청취자를 선택하는 수단이라고. 자기 방송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차단하는 장벽이라고. 그가 이 말할 때 매우 웃긴데, 실제로 그의 인트로들이 노골적으로 엘리티즘 표방할 때 많다. 이젠 지적 엘리티즘이란 게 어디서나 부적절, 소수이며 약자... 나 다름없어서 해리슨의 잘난척이 웃겼던 거겠다. 그 맥락과 말투가 웃기기도 했으나. 하여간 나는 고요히 집중해 생각하는 모드로 듣고 있다가, 저 말을 듣고 거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그렇게 한 번이라도 웃고 나면, 어떤 지겨워짐과 실망이 있어도 그 대상으로부터 fall out of love 안하는 그런 웃음? 그런 웃음 없나. 하여간) 하여간 이 에피 인트로에서는, 


대학의 사명에 대해 얘길하는데, 

해리슨에 따르면 자연과학은 지식(인식)을 추구하고,  

인문학은 자기-인식을 추구한다. 과학과 인문학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같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인식을 통해 자기-인식을 얻는 존재이므로. 과학이 하는 지식의 추구를 인문학의 목적인 자기-인식과 분리할 수 없다. 


이 정도면 대단하지 않나? 

라디오 방송으로 (길다 해도 3분은 넘지 않는 시간에) 하는 말로는?

명확하고 강력한 mission statement 아닌가? 


이런 말할 때 해리슨에게,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는 거야 당연하고 (이 점 지적하는 게 그를 향한 모욕이고)

자기 말에 담긴 그 내용을 실제로 오래 생각했고 살아왔던 사람의 분위기? 품위? 자연스러움? 권위? 이런 것 있다. 

대학의 사명, 대학에서 인문학과 과학이 공존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 정도(이 정도라도) 생각을 해본 사람이 한국엔 있을까? 없다고 해도 될만큼 드물지 않을까? 그래서 누가 무슨 이 주제로 고상하고 고차원적이고 심오한 말을 해도, 거의 언제나 의심스럽지 않을까? 말로는 누가 못해. 혹은, 말은 잘해. 사실, 립서비스라도 제대로 (비문 없이; 최소한의 정신을 담아) 하는 사람조차 희귀하지 않나. 


인트로 끝나고 나서, 

스탠포드라는 공동체에서 givers and takers에 대해 두 사람은 얘길 하는데, 

공동체의 번영은 자기가 거기서 받은 것 이상을 주는 사람들이 많을 때 가능하다.... 가 해리슨의 요지. 

헤네시는 (해리슨의 충정은; 감사히 받고) 이 대학의 수장으로 자신이 할 일은 대학 구성원 모두에게 그들이 번영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하기라.. 그런 얘길 한다. 


이 대화도, 이걸 한국의 대학으로 옮겨 오면 이런 대화가 비슷하게 성립은 하나. 

성립을 위한 가능성의 조건은 무어냐 (스탠포드가 되는 거 말고). 성립하지 못함이 말해주는 사정은 무어냐. 

사실 형식적으로는 성립 못할 것도 없어보이긴 한다. "우리 대학의 구성원 모두가 대학에서 받은 것 이상을 대학에 돌려줄 때 우리 대학이 번영할 것이다." "총장인 내가 할 일은, 구성원 모두에게 번영의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다." 특히 '명문대'에 속하는 대학에서면, 그 학교 교수와 총장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듣는 그 학교 구성원 중엔 자기가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하는 (경악하며)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이런 등등이 오늘 빠졌던 잡념. 

내가 생각한 답 하나는, 그게 어디든 공동체 혹은 사회가

그 구성원에게 해야(보장해야) 하는 일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널리 공유돼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적어도, 사회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더 giver여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구성원이 자연히, taker를 넘어 더 많이 돌려주는 사람이 되는 거 아닌가. 적어도 그게 '이념'이어야 하지 않나. 어쨌든 대학의 경우, 대학이 구성원에게 주어야 하는 것에 대해 명확하고 강력한 합의가 있어야 하지 않나. 요즘도 돈으로 교수직 살 수 있는 학교가 있다던데 실제로 그런 학교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 학교 때문에도 어느 학교에서든 그럴 수가 없어지지 않나. ;;;; 




*너무 웃겨서 우는 일. 

그러고보니 더 이상 이러지 않게 된 거 같으며, 

정말 순수의 상실이 일어났구나 내게. 완전히 일어난 거야. 끝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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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하며 고고하게 만듬 (Lofty and ennobling). 

니체 언어의 특징으로, 혹은 어쨌든 그의 의도의 특징으로 이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언어와 의도 둘 다가 후기 낭만주의의 "사후강직"이랄까, 초월을 향한 재점화된 믿음 그것의 시적인 표현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니체의 독자들 다수가 니체를 전통 사유의 경계 안에 곧 포함시켜왔음은 따라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 독자들이 그를 수준이 좀더 높은 사회진화론자로, 무제한이며 파괴적인 의지의 교사로, 최고의 니힐리스트로, 유대-기독교 사유에 필요했던 구조적 보완물로, 문화가 억압해온 섹슈얼리티의 해방자로, 혹은 새로운 교설의 (초인, 영겁회귀, 힘에의 의지) 교사로 여길 때, 이들은 니체의 사유를 전통 형이상학의 연속일 뿐 아니라 전통 형이상학 안에 온전히 갇힌 것으로 본다. 요약하면, 여기 새로운 말이나 새로운 교설은 사실 없다고, 니체는 그가 맹렬히 공격했던 전통 안에 그 자신 갇혀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 전통은 지금 존재-신학 사유라 알려진 것이며, 니체는 이걸 신이라 불렀다. 


그들의 주장을 판단하는 일이 우리에게 갖는 의의는 그러니 작지 않다. 

니체라는 수수께끼같은 사상가의 본성만이 아니라, 전통 사유 자체의 생존가능성의 문제가 여기 있다. 전통 사유의 한계, 쇠락, 혹은 미래에 관한 전망의 문제가 여기 있다. 이 책의 기저에 놓인 문제가 이것이다 -- 그것이, 상이한 여러 관점들에서 접근되긴 하지만. 그래서, 이 책에 담긴 텍스트들은 모두, 우리의 판단이 필요한 이 더 큰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니체 사상을 "해석"하는 작업이다. 해석의 작업은 더 이상 주변적인 것일 수 없다. 한편에서, 니체는 해석을 요구한다. 다른 한편에서, 그의 비평자들이 해석의 역학을 수행하고 있다. 해석의 가치는 -- 적어도 그 가치의 일부는 -- 이 책에 실린 텍스트들의 시도를 통해 판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의 쓰기 자체에 대하여, 우리가 그에 대한 어떤 접근(접근권)을 주장할 수 있나? 니체의 쓰기를 해석할 수단은 무엇인가? 니체의 텍스트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해석"되어야할" 무엇이란 말인가? 





이 책은 MIT 출판부, 85년간. 

하이데거, 들뢰즈, 클로소우스키, 블랑쇼, 데리다 등이 이 책에 실린 글들의 저자들이다. 위의 두 문단은 "인트로덕션"의 처음 두 문단. 


지속적으로 제대로 공부한 적 없으니 어디서 어떻게 그러한가 분명히 알진 못하겠으나, 

후기구조주의... 그것이 인문학자들의 문장에 남긴 악영향이 드러나는 문장들이 여기 모여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번역을 잘했다는 소리가 전혀 아닌데, 당연히. 지금 옮겨 놓고 다시 읽으니) 한국어로 오히려 더 말이 된다 느껴진다. 영어로 보면 횡설수설에 근접. 


그렇긴 한데, 

니체를 해석함은 전통 사유의 한계, 쇠락, 혹은 미래를 조망하는 일. 

이 말이 이상하게도 바슐라르의 니체 읽기와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저 부분에서 "전통"을 뺀다면. 바슐라르의 읽기에서, 니체는 사유의 한계, 쇠락, 혹은 미래를 보게 하는 사상가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음. what should be called thinking? (하이데거의 what is called thinking? 처음 알았을 때 웃겼던; 제목. 그 제목을 향한 논쟁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하이데거를 모르므로. 어쨌든 그 제목을 조금 비틀어) 바슐라르는 이 질문에도 답하려 한다, 니체를 통해. 


오늘 아침에도 동네 철봉에서 매달리기를 조금 했다. 턱걸이는.. 내년이라면 1은 하려나? 

집안 문에 설치하는 철봉, 그거 달고 싶어진다. 서재에 글 하나 쓰고 20초 매달리고. 팔굽혀펴기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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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에서 구입하고 배송 대행한 것이라 

6권 밖에 안되지만 라면 박스만한 박스로 왔다. 파손 방지 뽁뽁이가 공간 대부분을 차지. 

읽지도 않을 책들을 알라딘으로 모자라 미국에서도 ;; 사나르느라 바쁘.... 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올해 초 60만원 정도를 두 달 연달아 쓰고 나서. 그땐 정말 거의 매일 아마존에서 책들 검색하고 카트 담아뒀다가 들어가 보고 빼고 다시 넣고 보고 빼고 추가하고 마침내 결제해서 카트가 비면 다시 카트 채우기 시작해서, 반복. 이러면서 수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든 필요하고 동시에 좋은 책을 사야겠다며. 돈이 많으면 한 번 눈이 간 책이면 다 사겠지만. Leo Damrosch가 쓴 윌리엄 블레이크 전기, 퍼시 비셰 셸리 전기 (정신과 의사가 쓴), 조지 엘리엇 전기도 샀고. 철학책들 다수. 블룸스베리 그룹 관련 책들 다수. 이 중 읽은 책이, 있긴 있다. 아마 한 권. The Bloomsbury Cookbook. 블룸스베리 사람들이 먹었던, 혹은 묘사한 음식들의 레시피 재연하면서 한편 그들의 역사도 복원하는 책. 아무튼 내 형편 내 기준에 책값으로 너무 많이 연달아 쓰고 카드 결제 해본 다음, 안쓰고 있다. 한참 안쓰다 이 달에 다시... frenzy) 박스를 풀고 책들 꺼내고 포장재 정리해서 박스와 포장재는 버리고, 6권 책이 오는 데 쓰인 엄청난 양의 포장재에 잠시 가책을 느끼고, 하면서 나름 감정 복잡해졌다. 언제 다 읽지. 어디다 두지..? ;;;; 


마지막의 Life of Pi는 내가 주문한 책이 아니다. 

배송대행 업체에서, "배송신청하지 않은 상품이 도착했습니다. 신청서를 작성해주세요"라길래 보고 확인했더니 

(나는, 내가 술 취하고 아마존 들어가서 책들 보다가 어떤 미친 순간에 알지도 못하는 책을 주문했을 가능성을.... 꽤 높게 잡아야했다) 내가 주문한 책이 아닌게 확실했다. 발신자는 thrift books라는 중고 서점. 내가 그 서점에서 중고로 산 책이 꽤 되긴 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가 상상할 수 없지만 하여간 그런 일이 일어남. thrift books에서, "괜찮습니다. 가지시거나 아니면 책이 필요한 곳이 근처에 있다면 기증하세요"래서 내가 갖게 된 책. 


대학원 시절엔 키에르케고르의 유혹자의 일기였나 

아마존 중고로 주문했더니 상품 정보의 판본과 다른 (아주 다른. 상품 정보에선 프린스턴 출판부에 98년간, 일반 판형이었다면 내가 받은 건 Knopf의 57년간 초소형판. 만지면 먼지될 것같이 낡은. 그렇게 다른) 책이 와서, 이게 뭡니까? 이메일 했던 적 있다. 그랬더니 바로 "환불했습니다. 책은 버리세요" 답장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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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6-07-25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응들이 쿨하네요. ^^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오늘 유럽에서는 검역 제도처럼 민족과 민족이 갈라지고 서로 차단되어 있다. 

그에 비해 우리는 너무 분방하고, 너무 악의적이고, 너무 제멋대로이고, 너무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너무 여행을 많이 했다. 우리는 산 위에서 사는 것, 멀리 떨어져서 "반시대적으로" 사는 것, 과거나 미래의 세기에서 사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독일 정신을 허영심에 들뜨게 하여 황폐화시키는 저 옹졸한 정치의 목격자로서 느끼는 분노를 경감시킬 수 있다. 




출전은 <즐거운 학문> 377번 단장이다. 책세상판 번역으로 옮겨 적으면서 아주 조금 바꿈. 

밑줄 친 부분, 영어판에선 이렇게 되어 있다. For that we are too open-minded, too malicious, too spoiled, also too well informed, too "traveled": we far prefer to live on mountains, apart, "untimely," in past or future centuries, merely in order to keep ourselves from experiencing the silent rage to which we know we should be condemned as eyewitnesses of politics that are desolating the German spirit by making it vain and that is, moreover, petty politics. 


저녁을 좋아하는 반찬 (시금치무침, 동태전) 만들어서 먹고 

이 단장 읽다가 이 문장에서, 예상 않던 일인데 격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니체 언어로, 발이 가벼워졌다. 몸은 춤추게 되고...;;; 공기는 차고 건조하다. (에어컨, 언제나 자동건조 설정). 이 대목 읽을 때 이미 산에 와 있는 거 같았고, 당장 오늘 저녁에라도 고정 독서대에 몽테뉴 전집을 펴서 고정해두고 매일 한 번 이상 16세기로 가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20세기의 어떤 연대도 허락되지만, 21세기는 2016년으로는 오지 않는다. 그러다 


분방함. open-minded. 이 둘을 놓고 잠깐 생각하다 

아 내게 독어 원서도 있지 참. ㅋㅋㅋ 독어 어휘는 어떤 건가 찾아보았다. 

그 단어는, unbefangen이었고 이 단어를 독영사전에서 찾아보니 impartial. 

독한사전에서 찾아보니 공평무사한, 솔직한, 자연스러운. 


이 단어의 의미도 감격스러웠던 것임. 아아. impartial. 이 말은 얼마나 멋진 말인지. 으흑으흑. 혹은, 하악하악. 

무사한. 이 말도. 자유인. 


프란츠 오버벡이 니체와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니체 편의 일방적인 추종 관계였고 부르크하르트는 그를 언제나 불편해 (혹은 무서워) 했다.. 고 하던 때. 그리고 니체와 그 자신의 관계에 대해선, "그에게 진정한 친구는 없었다. 그의 사상에 따르면 진정한 세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친구들에게 그는 언제나 "난제"였다"고 하던 때, 그럼에도 니체가 쓰러지자 바로, 만사를 제쳐두고 그를 구하는 일에 합심하는 두 사람을 기억하면서 감동했었다. 편파적이지 않을 때, 그럴 때 진정 편파적일 수 있다니깐. 아니아니, "정의가 사랑에 앞선다"일 때 사랑할 수 있다니까. 오버벡이 쓴 어떤 글엔, 니체의 마지막 편지를 받자마자 놀라고 걱정하며 바로 그를 찾아온 부르크하르트를 기억하는 내용이 있다. 부르크하르트는 오버벡과도 별 친분이 없었음에도, 그가 니체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고. 그 대목도 예상치 않게 감동;; 감동적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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