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시작해 지금까지 하고 있는 일. 22년 일기, 벼락치기로 몰아 쓰기. 

물론 공백으로 남은 날들 페이지 찾아서 채우고 (그날은 이랬겠거니....) 있는 건 아니다. 7월 한 달은 거의 안 썼고 (하루 씀) 공백 페이지가 많은 달들이 있긴 해도 그래도 그런 달들 아니면 거의 매일 꾸준히 쓴 편. 월별 리뷰(....)를 벼락치기로 하고 있다. 그 달의 근심거리는 무엇이었고 누굴 읽었고 어떤 생각을 했나. 월별 리뷰를 한 달 전체가 공백으로 남은 7월치 페이지들에 순서대로 쓰고 있다. 1월의 일기. 2월의 일기 (....) 오늘 6월을 끝냄. 약간 저 이미지 느낌이기도 하다. 일기장 넘기면서 공책에 메모함. 그 메모를 참고하여 일기장에 리뷰를 작성함. 알라딘 다이어리는 12월 31일 이후 이어지는 여분, 공백 페이지들이 적지 않다. 이 점, 알라딘 다이어리의 강점. 연말에 그 해를 리뷰하는 내용을 거기 쓰기. 나도 지금 7월치 페이지들을 다 쓰고 나면, 다른 달들 공백에도 쓸 수 있겠지만 12월 31일 이후의 공백 페이지들에 이어 쓸 작정. 


30대 10년 동안 이렇게 쓴 일기 10권이 있다면. 

진심으로, 진지하게, 후회하면서, 상상하게 된다. 

그 해 일기 좀 가져와봐라 (내가 나에게...). 가져와서 다시 알게 되는 그 해 7월. 

이런 체험 꼭 하고 싶지만, 할 수가 없다. 


가장 배울 가치 있는 것 아닌가, 일기 쓰기. 이 생각도 진심으로, 진지하게, 한다. 

무엇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 "diarist"로서의 인간이 된다는 건 무슨 뜻인지. 


........ 지난 세월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나는 무엇보다, 반드시, diarist로 살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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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01-02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23년 1월 2일, 일기쓰기의 열망을 일으켜 주시네요. 밀린 일기 쓸 때 죄책감 느낀 적 많았는데 ㅋㅋㅋㅋㅋㅋ 올해부터 밀리지 않으려고요. 일단 오늘부터 시작해볼게요!!

몰리 2023-01-03 07:54   좋아요 3 | URL
아 정말, 필수과목이었다면 좋았을 거 같아요. Becoming a diarist. (강의 제목으로 좋다!) 그래서 일기가 이미 수십 ㅎㅎㅎㅎ 권인 삶을 살았다면!

blueyonder 2023-01-03 1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공감합니다. 지나고 보니 기억은 흐릿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은 없어서 한 평생이 그냥 꿈만 같네요... ㅎㅎㅎ

몰리 2023-01-03 17:22   좋아요 1 | URL
그 길었던 ㅎㅎㅎㅎㅎ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도 놀랍구요) 세월이 다 어디로 어떻게 갔는지. 이젠 (마침내, 마지막으로 ㅠㅠ) 진짜로 살아야할 시간이 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2023-01-18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헤밍웨이가 쓴 가장 짧은 단편 소설이라 전해져 온 6단어 소설. 

<미국 단편 소설> 주제 강의가 있어서 들어보는 중. 단편 소설을 정의하고 그에 보태어 "미국" 단편 소설을 정의하는 대목에서, 이 전설적인 6단어 소설에 대한 긴 논의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헤밍웨이는 친구들과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누가 가장 짧은 소설을 쓸 수 있나 내기를 하게 된다. 나는 6단어로 쓸 수 있어. 그가 말했고 냅킨 위에 쓴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더 짧은 소설은 나오지 않았고 그는 판돈 전부를 가져갔다.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많은 편집자들과 작가들이 (특히 아서 C. 클라크) 반복해 말해 왔다. 그러나 아니다. 저 6단어는 실제로 광고로 나온 적이 있는 6단어이고 그 광고에 대한 (이건 얼마나 우리 가슴을 치는 광고인가...) 글들이 헤밍웨이의 소년 시절 이미 나와 있었다. 헤밍웨이를 이 6단어 소설의 원작자로 보고 싶어하는 미국 대중의 욕구는, 이 6단어 소설을 근본적으로 미국적인 소설로 보겠다는 욕구다. 여기 담긴 내용은 보편적이기도 하지만 미국적이기도 하다. 자비를 향한 호소,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있다. 특히 20세기 전반 삶의 불확실성이 있다. 만일 가장 미국적인 작가로 추앙받은 헤밍웨이가 실제로 이 6단어 소설을 썼다면, 이 짧은 소설은 "patina of native genius"를 갖게 된다. 



새벽 캄캄할 때 별도 보고 하늘도 보면서 강의 듣는 건 제정신 유지에 가장 도움되는 활동이다. 오늘 새벽엔 위에 적은 저 내용에 특히 감탄했다. 오늘을 위한 제정신이 그렇게 확보되었. 


"patina of native genius" 이 구절은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patina, 구리 등 금속 물건의 표면에 생기는 녹색의 녹(?). 오래 아끼며 쓴 물건의 표면이 갖게 되는 윤기. 세월의 증거. 기억된 세월의 증거. 


"미국 원산 천재성의 은은한 증거"? 


어쨌든 "patina of native genius" 이것을 갖겠다는 게 얼마나 어디서나 사람들의 영원한 욕망인가. 이것을 찾고 규정하고 추앙하겠다는 그 욕망. 너무 자주 왜곡되거나 잘못 이용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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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다음의 사실에서 시작한다. 20세기에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전쟁, 기근, 억압 없는 세계가 더 이상 유토피아가 아니게 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실현되지 않았다. 왜? 저자들에 따르면, 현대의 기술적 진보가 "이론적 의식의 후퇴"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진보는 사회의 자연 지배, 유례 없는 수준에서 사회의 자연 지배를 뜻했다. 이 진보한 세계에서 기술적 이용의 대상이 아닌 모두가 무가치하다. 진리, 자유, 정의, 인간성의 원칙들은 모두 현실성을 상실하고 공허한 말로 남을 뿐이다. 사회에서 이 원리들을 실현하겠다는 야망이 실체를 갖지 못한다.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정치적 층위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에 나설 수 없다. 


진보의 이념은 "이성"의 기치 하에 진행된 18세기 부르주아 계몽 철학의 핵심 요소였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어떻게 이 철학 운동이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기도 전에, 그들이 "계몽의 변증법"이라 부르는 과정에 의하여, 자체의 가치를 상실하는가 분석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진보의 이념에 내재하는 모호성이 분명히 인식되고 극복되지 않는 한, 이성의 자기 파괴가 미래에도 계속될 것임을, 그와 함께 전체주의의 새로운 형식들이 생산될 것임을, 보여준다." 



3년을 읽었는지 4년을 읽었는지 (찾아보면 확인 가능한데 찾아보지 않는다) 매일 한 문단씩 오래 읽은 <부정변증법>이 이제 끝나기 1페이지 전. 이 어려웠고 때로 (아주 가끔) 공허했던 책에 이어 읽을 것은 불어판으로 (ㅎㅎㅎㅎ 웃어야 할 거 같. 실제로 웃) <계몽의 변증법>. 위에 대강대강 옮겨 본 두 문단은 불어판 뒷표지에 실린 소개글이다. 영어판 뒷표지에 실린 소개글과 많이 다르다. 특히, 기술적 진보가 "이론적 의식의 후퇴"와 함께 하기 때문에, 가능한 유토피아가 실현되지 못했다.... 는 게 저자들의 출발 지점이다, 이 대목. "이론적 의식의 후퇴" : 이 구절에 이렇게 밑줄을 긋는다는 그것이 프랑스적이라 느껴진다. 영어판에서는 (문화산업, 반유태주의, 2차 대전 중에 쓰인 책으로서....) 구체적 사항들에 집중하는 소개. 


















<진보의 종언>. 

이 책 부제는 Decolonizing the Normative Foundation of Critical Theory.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식민주의의 문제에 얼마나 둔감했나 살피고 탈식민주의 문제 의식과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만나게 하기를 도모하는 책. 지금 이 주제로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굉장히 호평받은 책인데, 나는 읽다가 더 이상 읽을 힘이 남지 않아 책을 치우고 그런 후 별로 아쉽지 않은 상태에서 오래 살아왔다. 이런 문장, 공허하다. 그게 15회 반복되면. 그러면 읽을 힘이 남지 않음. 특히 미국에서, 유능한(유망한) 학자들이 이 경로로 가는 경우 적지 않은 거 같다. 무얼 하든 순수히 아카데믹함. 물론 그렇지 않은 (아카데믹하고 사회적 실천력도 강력한) 학자들도 많다. 


<계몽의 변증법>. 처음 읽을 때부터 지금까지 감탄하고 때로 과몰입하고 옹호하고 그래온 책. 나는 이 책에 편파적이고 이 책이 받은 어떤 비판에든 (누가 나보고 그래 보라면) 그 비판에 맞서 이 책을 옹호하기 위해 칩거하고 머리 싸맬 의지, 등등 있다. 그렇긴 한데 이 책 포함 아도르노 저술들에 그가 해결하지 못한 곤경, 그의 딜레마... 이런 것이 점점 더 보이기도 한다. 만일 이성의 자기 파괴,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는 전체주의, 이 문제들을 아도르노와 같이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의 곤경, 딜레마는 피하고 싶다면, 내 경험으로는 바로 그와 관련해 프랑스 저자들에게서 극히 중요한 도움 얻을 수 있다 쪽이다. 프랑스 저자들 중에서도 특히 제국(제국주의) 프랑스를 지옥으로 살았던 사람들. 그들이 알았던 특별한 지옥에서 같이 한 철을 살아보기.


사실 저걸 (아도르노의 딜레마를 프랑스 사유로 해결하기) .... 써보려고 하는 중인 것이긴 합니다. ;;;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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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전들이 다 그렇겠지만 <로마제국 쇠망사>도 판본이 너무 많아서 이 책을 처음 읽으려는 독자에게 혼란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레오 담로시가 강의에서 추천한 건 펭귄판. 추천의 이유는 "발췌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실은 발췌본인 경우가 많고, 기본이 붙인 저자 주석을 존중하지 않고 명확한 기준 없이 일부 삭제하고 일부 보존했다 혹은 전부 삭제했다 하는 경우들이 많은 가운데, 펭귄판만 저자주 포함 원저 전부를 보존한 판"이기 때문이라고 약간 숨차게 (하 이건 하고 싶지 않은 얘기인데 안할 수 없는 얘기기도 하니 얼른 해야한다...) 말씀하심. 


각주를 방대하고 세밀하게 붙이는 건 기본의 시대에 새로운 (거의 처음인) 것이었다. 기본은 고전 그리스어, 라틴어 포함 유럽 언어들에 능통했고 이 책을 쓰기 위해 이 언어들 전부에서 폭넓게 읽었다. 그리고 영어 아닌 문헌들은 전부 번역 없이 때로는 아주 길게 인용했다. 이 때문에 이 책을 출판하면서 저자 주석을 아예 전부 삭제해도 그게 스캔들이 아닐 수 있었다. 이 주석들이 있다 해도 누가 그걸 읽겠으며 이해해? 그렇지, 주석은 필요하지 않다. (....) 이 점 말하고 나서 이어지는 담로시의 말은: 그러나 주석들을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을 다 읽지 않은 것이다. 주석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형성하는 추가의 서사들이 있고 추가의 우주가 있다. 능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담긴 무수한 인용들이 있다. 만일 네가 학창 시절 라틴어를 조금 공부했고 이 책의 라틴어 인용들을 보고 순간 어렴풋이 이해하기도 한다면 너는 아마도 강렬한 회한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 시절 라틴어를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고. 


라틴어를 공부한 적 없으니 저 회한을 느낄 일도 없긴 한데, 이 회한 자체는 보편적 경험 아닌가. 그 시절 --를 더 해야 했다, 회한. 그런데 라틴어는 유럽 문화, 역사를 조금만 깊이 있게 들어가도 거의 필수라 느껴지긴 한다. 라틴어 문헌을 번역 없이 길게 인용하는 책들은 20세기 초까지도 흔했. 그런데 어쨌든 저런 이유에서 담로시가 추천하는 펭귄판은, 지금은 위의 판(Everyman's Library)이 교체한 거 같다. 박스당 3권, 두 박스 6권으로 나온 위의 판 1권에 상세한 해제가 있는데, 아예 처음부터 기본의 저자주석 문제를 논의한다. 그게 얼마나 중요하고 그래서 온전히 보존해야 하는지.   


그런데 외국어 공부는, 특히 흔히 쓸모없다 여겨지는 외국어 공부는, 생계가 안기는 부담 없이 그걸 할 수 있다면, 정신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지 않나 생각한다. 인생의 황혼기에 라틴어 공부. 70대에게, 정신을 위한 일용할 양식. 너무 바로 상상할 수 있음. 





컬럼비아 대학에 재직하는 데이빗 맥훠터라는 언어학자가 "(권력을 갖는 언어로서) 프랑스어는 끝났다"고 말했고 아무도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글을 읽음. 이 글은 왜 프랑스어가 여전히 배울 가치가 있는 언어인가 말하는 글이었다 (다시 보려고 검색했으나 찾지 못하는 중). 맥훠터는 미디어가 사랑하는 학자다. 그리고 뭐랄까,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바로 소비될 문장들로 하는 학자.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머지 않아 "아앜 이 분 charlatan" ("사짜"), 그러게 된다.  


왜 불어가 여전히 중요한가. 이에 대해 저 글에 확 와닿는 새로운 내용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금 웃겼던 건, 미국의 고등학교(대학도 그렇지만)에서 불어의 지위 하락에 항의(?)를 프랑스가 정부 차원에서 했었다던가. 불어 교육 강화를 위한 구체적 목표와 방침을 프랑스가 직접, 일일이, 전달했다던가. 거의 내정간섭이었다던가. 그랬다고 함. 불어 교육 강화를 옹호하는 입장인 필자도 "아이고내가 웃겨서 정말" 투였. 과거 제국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아서인가, 일해라절해라 할 수있는 건. 천조국에 일해라절해라. 


프랑스-모로코 전에서 프랑스 편이 되기도 하는 심정을 알면서, 이 편향 왜 생겨났나 생각해 보았다. 몰입(과몰입)해 읽은 프랑스 저자들이 있는데, 특히 올해는 "이걸 내게 알게 하다니. (........) 감사하다" 하게 되는 때가 자주 있었다. 계속 포스팅한 랑프리의 경우엔, 나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유럽인으로 말한다, 나는 유럽인이 아니라 세계인으로 말한다... 이걸 보여주기도 한다. 그게 전혀 "ridiculous" 하지 않다 (억지스럽거나 허세 아님). 프랑스인에서 시작하여 유럽인이고 세계인인데, 그러나 또한 언제나 프랑스인. 그가 조국, 애국에 대해서 억압, 강압적이지 않게 말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 있기도 할 것이다. 국적을 초월하면서 또한 언제나 국적으로 돌아오는 중임. 이걸 그에게서 배웠다 생각하게 되는 때가 있었다. 


배워서든 아니든 저걸 할 수 있어야만 세계 사랑(아렌트), 이것도 할 수 있게 되는 거 아닌가. 

프랑스-아르헨티나 결승전은 스트레스가 두려워서 아직 안 보았는데 (차기 월드컵 때 보기로...), 아르헨티나 팀이 음바페를 증오한다는 내용 위 동영상 보면서, 이런 내용을 대하는 방식에서 극히 미미하지만 좋은 방향으로 변화가 있었는데 그게 다 프랑스 저자들에게서 배운 덕분이라 생각함. 그런 생각이 들고 맘. 


(*동영상 내용. 우승을 자축하면서 아르헨티나 팀과 팬들이 음바페를 저주함. 그런데 먼저, 음바페가 남미 축구를 무시하는 발언을 했음. "유럽축구의 수준이 세계 축구의 수준. 월드컵에 가면 브라질, 아르헨티나 팀들을 만나는데 그들은 세계 수준이 아님." 아르헨티나는 이를 반박함. "남미 축구를 해보지 않았다면 축구를 해보지 않은 것이다. 음바페에게 축구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음바페를 인종주의적으로 모욕함. "너의 어머니는 나이지리아 출신, 너의 아버지는 카메룬 출신.") 


............ 아무튼. 곧 그 시절이 되고 말 이 시절. 

더 했기를 원하게 될 그 무엇을 더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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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많이 오면 평소 산책 경로는 다니기 어렵게 된다. 숨어 있는 공터. 숲 속의 작은 길. 제설 작업 하는 분들 없음. 나 말고 다른 산책자들도 덜 나오심. 이른 새벽에는 무섭고 위험해짐. 동네에 조금 멀지만 아주 넓은 운동장(공연장 겸하는)이 있는데 여기가 대안. 여긴 눈, 비 피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그런데 지금 시설 보수 진행 중이라 입장 못하게 막아 놓았고 나는, 그래도 운동 하는 분들 있을 테니 그 분들 틈에서 (혹시 걸려도 같이 걸리면....) 생각으로 눈 많이 온 며칠 전 가보았는데 발자국은 많이 나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발자국이 있다는 건 나도 들어가도 된다는 것. 들어가서 걸었다. 걸을 만큼 걷고 나서 나오려고 하는데, 내가 가는 방향으로 차가 진입해 정차했다. 운동장을 채운 조명들이 있지만 그래도 어둠 속에서. 차를 마주 보면서 걸어가기가 뭣해진 나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걷기 시작했고 그리고 메아리치는 (메아리는, 쌓인 눈 때문에?) 남자의 외침을 들음. 어 거기, 저기요. 이 쪽으로 나가세요. 이 쪽. 


그게 마치 위의 사진 속 같았음. 

스릴러, 호러 영화에서 많이 본 어떤 장면 같았음. 

내가 가던 방향에 정차했던 그 남자는, 차문을 열고 내려와 서서 소리치면서 나갈 방향을 알려주고 탄식했다. "아이 C" (C까지는 아니었겠지만 한숨이 강하다보면 그럴 수 있겠지). 





어제 다시 가보았는데  

차량에 근거하여 같은 분인 것으로 짐작되는 그 남자와 다시 마주침. 이어폰 꽂고 걷는데 갑자기 남자가 나타남.  

내가 먼저 말했다. 저 조금만 걷다가 갈게요. 눈이 많이 와서 걸을 데가 없어요. 

그러자 그는 이 분이 그 때 그 분과 같은 사람인 거 맞는가, 세상 다정하게 말했다. 네 걸으세요. 라고. ㅎㅎㅎㅎㅎ 

비아냥, 반어적. 이런 게 아니었. 순간 세상이 달라지게 하는 다정함이었. 

그리고 그는 빗자루를 꺼내 와서 눈을 쓸기 시작했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는데 그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조금씩 눈을 쓸었다. 그리고 나는 걸었. 근처에 눈을 쓰는 사람이 있으니 무섭지 않고 좋았다. 





그러니까, 어떤 도덕적 충격, 도덕적 패배가 

한국의, 한국인의, 경험이었나. 이것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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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23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
문단 문단 읽어나가면서
무서움 만큼
눈 위에 찍힌 발자국들

목소리,,,
저기요 ㅎㅎㅎ

마지막 라스트 씬은
요네스뵈의 스노우맨이 아니길 바랬습니다 ^^

몰리 2022-12-23 08:38   좋아요 1 | URL
그 남자의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면! ㅎㅎㅎㅎㅎ
<사이코> bgm. 혹은 스크림.
요네스뵈. 그가 노딕 느와르 부흥을 이끌었다는 칭송 듣고나서
장바구니 담아, 담아는 두었는데, 아 노딕!!!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