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니하머스의 서문과 함께 재간된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 수요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먼저 적어두자. 50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 영어권에서 니체를 보던 관점을 혼자서 바꾼 책이라는 게 이 책의 의의에 대한 합의고, 그것만으로도 (그 사이 내용으론 그를 능가하는 책이 혹시 나왔다 해도) 읽을 이유가 있을 책. 니하머스가 신판의 서문에서 정리 및 강조하고 있지만, 역사적 가치만이 아니라 논의의 면에서도 여전히 중요하게 참고할 지점들이 있고 또 카우프만은 (모두에게 그런 건 아니겠지만) 문장이 개성과 매력이 있는 저자라서, 그것도 이 책이 절판 상태에 있지 않게 해야할 이유에 속할 것이다.
오늘 "힘에의 의지의 발견" 장을 읽다가
카우프만의 한계라면 이거겠구나 했던 걸 적어두기 위한 리뷰.
저 장엔, 카우프만 자신이 여기 니체 해석의 난점이 있다고 먼저 말하는 대목이 여럿 있다. 예를 들면, 장의 끝으로 향해 가면서: "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인간이 가진 힘에의 의지에 의해 추동된다고 니체는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구상한 힘에의 의지 개념은, 그가 가졌던 힘에의 의지의 산물임을 그가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니체는 크레타의 에피메니데스가 빠졌던 곤경에 빠진다. 그의 말이 맞다면, 그 말은 허구다. / 이런 문제들은 니체가 잘 다루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는 쓸만한 인식론을 만들지 않았다. (...) 이 지점에서 니체의 철학은 자기-반박을 하고 있으며 부조리하다 보이고, 그러니 더 이상의 고려는 없는 게 좋을 것같다."
이게 니체 해석의 난점이다.. 다음 그의 코멘트가 거의 전부 이런 식이다.
니체 자신 그걸 못했다. 그 점을 그 자신 모호하게 두었다. 그 점에 대해 그는 "결코 명시적이지 않다."
특히 이 "그 자신 명시적이지 않다"가 여러 번 반복된다.
바슐라르의 "개념의 지성주의 vs 이미지/상상력의 행동주의" 구분에 따른다면,
개념의 지성주의의 한계. 니체의 사상을 오직, 혹은 거의 전적으로, 개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걸로 볼 때 발생할 한계. 이게 오늘 조금 신기했던 건, 카우프만은 영어권 니체 연구자들 중에선 아마 드물게도, 시인 니체가 철학자 니체기도 하다... 입장일 거라서다. (그게 주제인 글도 있었던 것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명시적으로 이 주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던 것도 같은데 지금 찾을 수 없다).
상상력의 행동주의, 이 관점에서 니체를 읽는 바슐라르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바슐라르를 알았다면 (<공기와 꿈>이 카우프만의 책보다 7년 먼저 나왔다) 그가 가졌을 출구. 문제의 만족스런 해결. 이런 것이 거의 보일 정도다. 정복과 지배, 힘에의 의지를 향한 도취한 긍정, "무리"를 향한 경멸. 이런 것들에 대해 카우프만은, 여기 민망한 "우월감"과 지배욕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것들이 바로 승화되며 정신화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같은 논평을 한다. 카우프만은 뛰어난 학자였기 때문에, 저것들에 대한 바슐라르의 진정 독창적인 (니체 해석의 여러 곤경들을 해결할 수 있게 할) 이해를 알았다면 그가 어떻게 말했을까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