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에 대하여"
플리니우스와 키케로가 우리 삶의 목표로 제시한 영예.
내 생각엔 전혀 그렇지 않다. 은둔에 정반대되는 기질이 야심이다. 야심과 휴식은 같은 집 안에 머물 수 없는 둘이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오직 그들의 팔과 다리를 무리 바깥에 둘 뿐이다. 그들의 영혼은, 그들의 의도는, 어느 때보다 더 무리 한복판에 있다. "노인이여, 남들의 귀를 채울 허섭스레기를 모으는가?" (페르시우스). 이들은 더 잘 도약하기 위하여 뒤로 물러섰을 뿐이며, 무리 속으로 더 깊이 투신하는 데 필요한 추진력을 모으고 있을 뿐이다. (....) 에피쿠로스와 세네카, 전혀 다른 유파에 속한 이 두 철학자가 자기 친구들에게, 공무를 포기하고 고독이라는 더 높은 지위로 후퇴하길 청하며 쓴 편지들 속 조언들을 들어보자.
"지금까지 당신은," 이들은 말한다. "바다를 헤엄치고 떠다니며 살아왔다. 이제 항구로 피신하고 거기서 죽어갈 때다. 당신은 당신 삶 전부를 빛에 바쳤다. 이제 남은 부분을 그림자에 바치라. 직업이 주는 결실들을 포기함 없이 직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니 명성과 영예를 향한 모든 관심을 끊으라. 당신의 과거 업적에 어린 광채가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빛을 주고 당신의 은신처까지 당신을 따라가는 일, 그 위험을 경계하라. 여타의 쾌락들과 함께, 남들의 칭송이 데려오는 쾌락을 포기하라. 당신의 지식과 당신의 능력, 이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라. 당신을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하는 한, 당신의 지식과 능력은 그들이 가진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알아볼 사람이 극히 적은 어떤 예술에 왜 평생을, 자기 전부를 바치냐고 물었을 때, "극소수가 내겐 충분합니다. 한 사람도 내겐 충분합니다. 단 한 사람도 없다 해도 내겐 충분합니다"고 답했던 그 사람을 기억하라. 그는 진실을 말했다. 당신과 당신의 동무 한 사람이면, 서로를 위한 무대로 충분하다. 아니 당신을 위해 당신 자신이면, 서로를 위한 무대로 충분하다. 당신에게 세상 사람들은 한 사람이어야 하고, 당신의 한 사람은 세상 전부여야 한다. 우리의 게으름과 우리의 부정직에서 영예가 오기를 바라는 건 비천한 야심이다. 우리는, 자기 동굴로 들어가는 길을 열심히 문지르며 내는 동물들처럼 행동해야 한다.
<우상의 황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의 26번 단장엔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 체험을 남들에게 전할 때 우린 우리 자신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다. 우리의 진정한 체험은 전혀 수다스럽지 않다. 이 체험들은, 그러고자 한들 스스로를 소통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들에게 꼭 맞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을 갖고 있는 무엇이든, 우리는 이미 그 말들 너머에 있다. 말엔 언제나 한 톨의 경멸이 자리한다. 언어는, 평균적이며 중간이고 소통 가능한 것을 위해 발명되었다. 언어와 함께 화자는 즉각 자신을 속화한다."
니체의 단장도 한편, 너에게 고독을 권한다겠지.
그런데 울프의 <파도>나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같은, 본격모더니즘의 유명한(악명높은) 책들,
이 책들은 몽테뉴가 말한 "나와 내 동무, 나와 나 자신이면 충분한 무대"를 위해 쓰여진 작품들 같으며,
그렇게 쓰여지면서 체험에 꼭 맞는, 정도가 아니라 체험을 넘어서는(체험을 이끄는) 말들을 발명했다. 고 봐도 되겠다 생각함. 사실 바슐라르의 모든 문학 책들이, 그들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