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x Feet Under에서 잊히지 않을 만한 죽음으로 에밀리의 죽음도 있다. 싱글. 40대 초반. 

싱글일 뿐만 아니라 직장이 있긴 한데 직장도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직장에서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그런, 그럴 수 있는 직장) 다니고 어떤 관계로든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런 삶에 만족한다. 저녁에 집에 오면 정돈된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tv를 켜고 그 앞에 앉아 타파웨어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저녁을 전자렌지 돌리고 먹는다. 어느 날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 저녁을 먹다가 기도에 음식이 걸려서 질식사한다. 혼자서 하는 하임리히 법을 알았기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지만 아니었.... 이 아니고 질식사한다. 너무 조용히 살았던 사람이라 직장이 있었음에도 그녀의 죽음은 바로 알려지지 않는다. 한참 후에야 이웃들의 악취 신고로 아파트에서 문을 열고 들어와서 사체를 발견한다. (사실 이건 좀 그럴 수는 없을 듯. 직장이 도대체.......) 


그리고 Fisher and Sons에서 그녀의 장례식을 맡아서 리코 포함 그 집 남자들이 에밀리의 시체를 가지러 그녀 집으로 오는데, 그녀는 에어컨을 켜지 않고 (위 이미지가 보여주듯이 죽기 전 반팔 위에 긴소매 긴 가운을 입음, 캘리포니아가 덥지 않은....) 밥을 먹었고 죽었기 때문에 시체가 극심히 부패한 상태다. 부풀고 파리가 우글거리는 시체를 그녀의 머리 근방 파리 시점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리코가 절규하기도 한다. "제발, 제발. 죽을 거면 에어컨을 켜고 죽어라 사람들아." 


저런 나이가 내게도 올 것인가 과연. 이러게 되던 에피였는데 ;;;;;; ㅋㅋㅋㅋㅋㅋ 아 정말 시간은, 시간 앞에선 모두가 무력합니다. 하튼 거의 무한 반복 시청하던 Six Feet Under라서 몇몇 제외하곤 어떤 에피든 그걸 언제 처음 봤고 이런 기억은 거의 없는데, 에밀리가 죽는 이 에피는 그게 있다. 에피 제목은 The Invisible Woman. 이걸 처음 보면서 확 빨려 들어가고 그녀가 혼자 사는 집 안의 냄새까지 그 안에 들어가서 내가 체험하는 거 같던 그 느낌 남아 있다. 



지금 집엔 욕실 바로 앞에 냉장고가 있고 냉장고 옆에 밀착하여 책장이 ㅋㅋㅋㅋㅋ (이것도 구석 활용) 있는데, 이 책장은 좀 비싼 나름 "고오급" 책장, 어디 놓든 "뽀대"가 나는 책장이다. 거의 10년 전, 비싼 것도 사고 싶다 가끔은 나도 비싼 것을 사고 싶다... 심정으로 샀던 책장. 싱글일 때 좋은 것이 욕실 문을 닫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고 샤워나 기타 욕실을 쓸 때 이 책장 위에 전화기로 듣고 싶던 강의나 보고 있던 다큐멘터리나 이런 것 틀어놓고 욕실 문 열어 놓고 쓴다. 이게 책장이 나름 ("나름" 이게 중요합니다) 고급, 내게는 아무리 보아도 눈이 즐거워지는 웰메이드 책장이라서인게 클 거 같은데, 그렇게 그 책장 위에 올려둔 전화기에서 뭐라뭐라 사람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나는 그걸 들으며 인간이 욕실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그런다는 게 아주 "행복의 충격"으로 체험되는 때도 이미 많았. 이사와서 아직 5개월도 안되었으나 이미 많았. 던 것이었. 


그러던 어느 날은 그 책장 위로 햇빛이 (욕실 옆, 그러니까 냉장고의 다른 앞이 방이고, 그 방엔 큰 창이 있다. 그 창에서 들어오는 햇빛) 들어와서 책장과 전화기를 비추고 있었는데


아 이 집에서 나는 죽어도 좋을 거 같다. 

로 해석되는 감정이 밀려듬. The Invisible Woman에서 에밀리가 그렇게 늦은 오후의 햇살이 블라인드 틈새로 들어오던 거실에서 쓰러져 죽었지. 에밀리처럼 그렇게 이 집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햇빛을 보면서 죽는다 해도 슬프거나 분노하거나 무섭지 않을 거 같다.... 는 게 이 감정의 정체냐? 


.......... 아 아니야. 나는 이 집에서 죽어도 좋을 거 같은 집은 이 집이 아니라니깐. 

진짜로 그런 집으로 가고 살아보는 게 이제 남은 삶의 목표여야 하지 않겠니. 



하튼. 그렇습니다. 정말 어떻게 하루가 가는지 모르겠는, 시간이 금싸라기같은 (소중한데 그래서 뭔가 감사한데 그러나 너무 빠르고 너무 허망하게 사라지는.....) 매일을 보내는 중. 오늘은 새벽에 일어나서 온종일 일했던 결과를 바로 눈 앞에서 잃고 말았는데 (어쩌다? 냐고는....) 그래서 술을 마셔도 될 거 같아지는 추석 이브입니다. 포스팅 폭주를 한 번....;;;;;;; 원스 모어. 죽기 전 원스 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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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10-27 1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ㅠㅠ 왜 하필 이름이 에밀리여서 제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에밀리 디킨슨의 삶이야 말로 제가 원하는 삶인데.....).
그런날의 햇살이 있죠. 행복의 충격이 느껴지는 날. 저도 제 마지막은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집^^ 건강하소서~

몰리 2021-10-27 18:39   좋아요 1 | URL
노후엔 ㅎㅎㅎㅎㅎ 집멍, 집멍을 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좋은 죽음, 죽음의 준비.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구글 이미지에서 "넓은 마당" 치고 얻은 이미지. 

좋아하는 동네 공원엔, 화룡점정으로 아늑한 화장실이 있다. 공원 화장실 중엔 안 아늑한 (무서운 눅눅한 등등) 화장실이 있고 이 쪽이 더 많은 거 같은데, 이 화장실은 아니다. 숲에 감싸인 공원. 숲에 감싸인 화장실. 동그란 모래 마당. 걷고 운동하고 화장실 가고 싶어지면 바로(!) 갈 수 있게 위치와 동선 아주 딱이다. 물 많이 가져가서 물 계속 마실 수 있다. 오늘 비가 와서 못 가고 있는 중. 비 오는 날 신을 신을 마련해야. 지금 운동화는 아끼느라고; 비 오는 날은 신지 않는데 이 운동화 말고 운동화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운동화말고는 운동이 안되는 운동화들. 


화장실 안 관리 표시판을 보면, 화장실 위치가 "넓은 마당"으로 되어 있다. 

"넓은 마당"에 있는 화장실. 결코 넓지 않은데 (위 사진 속 집 잔디마당과 콘크리트 합친 면적 정도), 그래도 넓은 마당. 이름 짓기를 포기함과 조금 고심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름? 



지성의 삶을 위한 표준. 

이것 아무리 생각해도 충분히 생각한 게 아닌 주제라 생각한다.  

이게 없으면, 사적 개인의 의지와 변덕이 (그러니까, 그 개인의 횡포가) 권위로 자신을 행사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변덕, 횡포를 권위로 체험함. 이건 단 한 번을 겪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무엇을 정신에 남긴다고 하면 과장인가? 그런데 반복적으로, 거의 그걸 규범으로 체험한다면? 


사고의 기조가 냉소적이고 무엇도 오래 생각하지 않음/못함. 지성의 패배주의로서의 오래 생각하지 않음. 

정신은 이렇게 훼손되며 그리고 사회적 삶에서는........  



그런데 나나 잘해야겠으며 

호구지책이 시급하다. 이제 창문 열어두면 손발이 시렵던데 

........ 곧 해가 바뀔 거 아님. 해는 바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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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테랑 당선하던 날 밤 파리 시민 반응. 

혹시 푸코 나오는 동영상이 찾아질 수도?! 해서 유튜브 검색해 보니 

푸코 나오는 동영상이 (있다면 이미 유명했겠....) 찾아지지는 않지만 다수 동영상들 찾아진다. 이런 영상 (지지하는 정치인 당선에 기뻐하는 시민들, 기뻐서 거리로 나온 시민들) 좋아하시면 미테랑 당선하던 날 파리 시민들 영상도 보러 고고. 노무현 당선하던 날 서울 시민들과 거의 같. 02 월드컵 때 상가집에서 활짝 웃으면서 박수 치고 뛰던 상복 입은 상가집 사람들 생각나는 장면들도 찾아지고, 제일 원하던 선물 받은 거 같은 표정으로 행복해 하는 꼬마들도 있고. 


미테랑의 업적, 유산은 그의 집권 당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논란이 그치지 않나 보았다. 

81년 당선하고 95년까지 재임했기 때문에 사실 90년대에 청년;이었다면 좀 알고 있을 법도 한데 

나는 전혀. 전혀 몰랐. 어제 오늘 유튜브 동영상 몇몇 본 걸 토대로 짐작하면, 정치적 추문이 적지 않게 있었나 보았다. 그게 좌파가 입은 타격이 되었고. 당신과 함께 프랑스가 추락했어! 식의 댓글도 많다. 그런데 정반대의 댓글도 많다. 프랑스가 가졌던 가장 위대한 대통령.... "오 불어를 정말 잘 한다. 나는 96년생이라 그가 좋은 대통령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불어로 연설을 잘 한다는 건 알겠다. 내 아버지에 따르면 미테랑은 개자식이었다" : 이런 댓글도 있었는데 "96년생"에서 터짐. 


그러나 96년생, 낼모레면 스물이지.... 웃을 일이 아님. 

낼 모레면 스물이 아니어도, 올해 다섯살이라 해도, 웃어선 안될 일이다. 

............... 여기까지 쓰고 깨달음. 96년생이면 올해 스물여섯이군요! ;;;;; 아 올해가 21년. 21+4+1.




바슐라르는 과학철학 책에서도 느낌표 과하게 쓰는데 

이게 그의 기벽이 아니고 프랑스 사람들은 책에서 다들 그냥 흔히 느낌표를 과하게 쓰는 건지 모름. 

콩도르세 전기를 보면, 긍정적 방향에서 감정의 강조가 필요한 문맥은 물론이고 극히 슬프고 불행한 일을 말할 때도 연달아 느낌표 쓴다. 프랑스 저자들 책을 주로 보고 있으면 느낌표가 과해지는 일이 발생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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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06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테랑 숨겨진 딸! 이야기 흥미롭게 읽었는데(프랑스 남자들의 이중생활) 작가로 교수로 성공한 모습에 프랑스 시민들이 많은 박수를 보내 더군요
프랑스 인들은 미테랑 부인을 더 좋아 함
프랑스가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결혼제도 임에도 이렇게 유명인의 숨겨진 아이들이 많아서
줄줄이 회고록 내면 대 히트를 ㅎㅎ

근데 미테랑 이런 저런 포퓰리즘 정책으로 프랑스의 재정 교육 다 망쳐 놨지만
재임기간동안 외국인 학생들 많은 혜택 받아서
미워 하기 힘든 존재 ^ㅅ^

몰리 2021-09-06 20:04   좋아요 1 | URL
1시간 분량 다큐가 찾아지는데 딸이 중요하게 출연하네요! 딸이 아주 똑똑해 보이는!
어쩌니 저쩌니 해도, 그는 해외 정상 누굴 만나도 꿀리지 않았어 그는 프랑스의 자부였어! 그 이후 누구에게도 이게 없어! :이런 반응도 있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프랑스 대통령이 뭐랄까 거의 미국 대통령급? 그렇게 느껴지던 게 미테랑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 (모르면서 어렴풋이, 그 시절 어디선가 들려오고 보게 되던 바의 ˝존재감˝으로...) 유럽 통합에 대한 비전이 있었나 보기도 하더라구요. 이게 어떤 거였나 좀 알고 싶어지는...

 




한국에서 "정신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극히 시사적인 텍스트로 

서정인의 <강>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주 인용되었던 아래의 문단.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 온 셈이다. 차라리 천재이었을 때 삼십 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땔나무꾼이 되었던 것이 훨씬 더 나았다. 천재라고 하는 화려한 단어가 결국 촌놈들의 무식한 소견에서 나온 허사였음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 된다. 그들은 천재가 가난과 끈질긴 싸움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열등생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몰랐다. 누구나가 다 템스 강에 불을 처지를 수야 없는 일이다. 허옇게 색이 바랜 짧은 바지를 입고 읍내까지 몇십 리를 걸어서 통학하는 중학생. 많은 동정과 약간의 찬탄. 이모집이나 고모집이 아니면 삼촌이나 사촌네 집을 전전하면서 고픈 배를 졸라매고 낡고 무거운 구식의 커다란 가죽 가방을 옆구리에다 끼고 다가오는 학기의 등록금을 골똘히 생각하며 밤늦게 도서관으로부터 돌아오는 핏기 없는 대학생. 그러다 보면 천재는 간 곳이 없고, 비굴하고 피곤하고 오만한 낙오자가 남는다." 



80년대에는 자주 인용되었는데 지금은 

서정인이라는 이름도 흔히 듣는 이름이 아닌 듯? 했으나 검색해 보니 최근까지 국어 시험에 자주 선택되는 작품인가 보았다. 80년대초 작품일 걸로 짐작했는데 68년에 발표되었다고. 


저 문단의 화자가 말하는 일은 

정신의 형성 (이건 바슐라르의 "과학 정신의 형성" 이 제목에서 그대로 빌어다 쓰는 구절입...) 이것이 금지된 곳, 차단된 곳에서 일어나는 일. "천재"든 "수재"든 세월 속에 열등해지게, 그럴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곳. 그런 곳에서는 그러니까, 그러므로 "대기만성" 형의 인간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더는 이런 처지가 아님? 

그러려고 하면 누구나 자기가 될 수 있었던 인간이 되어가.... 그럴 수 있게 되었? 

아니면 여전히 너무 많은 불필요한 싸움과 낭비가 인간을 일그러뜨리.;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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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북사랑 2021-09-06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속적으로 한국 대학 교육에 대해 문제 제시해주시네요. 몰리님 최근 페이퍼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변산공동체 윤구병 선생님께서도 비슷한 뉘앙스로 말씀하셨는데, 저도 몰리님 덕분에 서정인 선생님의 <강> 소개받았네요^^ 감사합니다

몰리 2021-09-06 16:48   좋아요 2 | URL
네 대선 경선 시작하고 나서 이재명이 저는 개인적으로 ㅎㅎㅎㅎㅎ (네 개인적으로. 쓰면 안된다는 말, 개인적으로) 참 싫은데 이재명이 될 거 같으니까 불안하고 고달파지는 느낌입니다. 그런 데다가 돈도 벌어야 하고 (한숨). 사실 한국 사회의 변화, 발전은 눈부시다고 해도 과장 아니다 쪽이긴 한데, 그래도 우리에게 더 좋은 일들이 더 빨리 있었더라면... 하게 되어요. 좋은 학자들이 좋은 책을 많이 썼다면!

2021-09-06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격일 한 문단씩 읽어온 이 책. 영어판과 같이 읽었다. 가끔 불어판도. 

이 책 읽는 동안 같이 읽은 바슐라르는 적어도 두 번 책이 바뀐 거 같다. 바슐라르는 아주 두꺼운 책은 쓰지 않았고 사실 거의 전부 얇은 편. 아도르노도 아주 두꺼운 책을 썼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책들 중 <부정변증법>은 사실 분량에서도 거의 대작 풍모 나는 책이긴 해서, 적어도 3년 동안 아도르노는 내내 이 책인데 바슐라르는 하나 치우고 하나 더 치우고 ... 그랬던 느낌. 


이 책 번역에 나는 여러 번 감탄했다. 이건 뭐 나님, 나새끼, 노바디 나부랭이;의 의견일 따름입니다만, 한국어 번역된 철학 고전 중 번역이 잘된 책을 선정한다면 베스트에 꼭 넣어야 할 책이다 쪽이다. 사실 오역이 (영어판, 불어판 기준) 없지 않고, 역어 선택이 문제라 보일 대목들도 있고 인용 표시와 관련한 오류도 적어도 하나 발견했던 거 같고, 흠잡을 데 없는 번역인 건 아니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아주 자주 쓰는 아주 복잡한 문장들을 그 복잡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정확하고 아름답게 옮긴다고 감탄할 수 있는 대목들 아주 많다. 


그런데 번역이 잘되면 뭐하나, 우리의 현실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데, 아무 뜻도 가질 수 없는데! 며칠 전 이와 같이 한탄하고 노트를 남겨 둠. 읽은 문단은 3부의 1장, 칸트 윤리학 비판하는 장에 있고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포함함. 


"그러나 예지적 성격과 경험적 성격의 구분은, 순수 의지 혹은 부가요인 (das Hinzutretende) 앞에 다가오는 영원한 장벽(Block)에서 경험된다.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외적인 고려이며, 여러모로 종속적인 그릇된 사회의 주체들의 비합리적 이해관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일반적으로 현사회 속에서 예외 없이 모든 개인에게 그의 행동을 미리 규정해주는 것이자 만인의 죽음이기도 한, 부분적 개인이익의 원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독어, 영어, 불어 참고하지 않고 한국어만으로 아도르노의 저런 문장들이 이해될 수 있겠? 

이해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잘못? 이해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 (....) 내 생각에 가장 필요한 건 칸트 윤리학에 깊이 영향 받은, 그러면서 우리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 하튼 도끼같은 책. 그래서 많이 팔리고 논의된 책. 그런 책이다. 그런 책이 단 하나만 있더라도, 칸트 윤리학에 대해 쓰는 아도르노 문장들이 (한국어 번역만으로) 이해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아도르노 윤리학에 깊이 영향 받은 또한 우리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 도끼같은 책이 쓰이기 시작하고. 그렇다고 생각한다. 영향이 싫다면, 영향 없이, 자생, 자력으로, 아무튼 도끼같은 책.  


칸트 번역도 그렇겠지만 특히 아도르노 번역에서 실감할 수 있을 거 같다. 우리는 한국어로 진짜로는 사유를 한 적이 없다는 것. 정신 모두를 말 속에 담는 일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난해한 철학서의 "이상적 번역"을 한국어로는 사실 상상도 하기 어렵다는 것. 아무리 어휘와 문장이 정확하고 아름다워도 거기 내용을 담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책들이 해보이는 것처럼 내용을 담는 시도를 본격적으로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독재가 아주 옛일이 아닌 사회에서, 말과 삶, 정신이 분리되면서 살아간다는 게 뭐 그리 분노할 일은 아니겠지만, 나는 이 분리가 꼭 필요하고 이 분리에서 "득을 보는" 이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성의 삶을 위한 표준. 이것에 반대할 이들. 본능적으로 반대할 이들. 본능적일 뿐만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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