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영어번역은 잘 되어 있다. 그렇긴 한데, 영어로 니체를 읽는 일이 내게 "즐거움"이던 적은 한 번도 없다고 고백해야겠다. 영역에서 니체의 어휘는 지나치게 추상적이 되고, 뉘앙스로 많은 걸 전하는 니체의 독어 문장들과 비교한다면 (의미의) 연속성이 위협적일 정도로 부재할 때가 많다. 독어로 읽을 때, 독자는 한 예리하고 재치있으며 열정적인 정신과 함께 한다고 느낀다. 니체는 결코 장황하게, 혹은 조야하게 자신을 표현하지 않으며 그의 방식은, 그의 내용은 박식하고 인유로 가득하더라도, 언제나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그의 아이디어들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우아하게 흐른다. 니체의 독어판은 영어판보다 훨씬 짧고 더 즐겁고 더 매혹적으로 느껴진다. 영어판 니체는 독어판의, 차갑게 현대적이며 파편적인 그림자처럼 보이곤 한다. 프로이트와 달리, 니체는 오역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정수, 그의 Heiterkeit -- 희열과 분노, 조롱과 열광으로 폭발할 때가 많은, 기이한 종류의 지적 평정 -- 는 독어 아닌 다른 매체에서는 재생되지 않는다. 




이 책 "서문"에서다. 

저자 레슬리 챔벌린은 여자고 (표지 안쪽에 사진이 있는데) 젊다. 책이 96년 초판이라 지금은 아니 젊으시겠으나, 저 사진에선 삼십대 초중반으로 보임. 니체에 관한 책인데 저자가 여자고 젊은 경우는, 내겐 이게 처음이지 않나? 잠깐 생각해 봄. 어쨌든 그녀는 (표지의 바이오에 따르면) 엑세터와 옥스퍼드에서 독어, 러시아어를 전공했다. 모스크바에서 기자로 살았고 음식, 여행, 공산주의, 철학에 관한 책들을 썼다. 


영어권 니체 연구자인데 주로 독어로 읽고 영어판은 인용할 때 쓰는 사람이, 

사실 많지 않은 것 같고 아마 그래서겠지만 영역된 니체에 대해 독자 개인의 경험을, 옮겨온 위 문단만큼이라도 길게 얘기하는 일도 자주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어쨌든 내 경험으론 (많은 경험은 아니지만 물론) 그렇다. 나는 이런 얘기 좋아하니까, 그런데 자주 듣는 얘긴 아니니까,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게, 니체의 정수. 격정으로 폭발할 때가 많지만 실은 고요. 영어판으로 읽으면서 저 비슷하게 느낀 적이 없으니, 정말 독어로 읽으면 그럴까 궁금하구나. 독어로 읽고, 레슬리 챔벌린의 말이 얼마나 맞는지 아는 일이 죽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일까. 오래 살고 볼일. 


이 책 서문의 이 대목에서 시작한 다음, 

왜 한국에선 (특히 고학력자들) 이해가 희귀하고 대화가 불가한가 두 문단 쓰는 걸로 맺겠다가 계획이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 ㅜㅜ 그리고 그거 뭐 적어서 무슨 도움이 되겠나. 내 생애 동안 바뀔 리 없는 그것을. 나와 무관한 걸로 내 영역 바깥으로 밀어내고 이미 많이 남지도 않은 세월 동안 해야할 일을 해야하지 않겠니. ;; 


산책하기가 아주 좋은 환경이란 건 지금 사는 동네가 내게 주는 축복이 분명. 

축복이 이게 다가 아니어서, 평소 아주 조용하기도 하다.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가끔, 고요함이 자각되면서 깊은 산속 절에 들어온 것같다고 순간 느낄 때도 있다. 그 정도의 고요함은 가끔이지만, 소음은 거의 언제나 없다는 것도 내겐 축복. 최근 동네의 한 언덕에 새로 등산로가 놓였는데 층이 꽤 많은 계단도 있다. 비가 많이 오지 않으면 나가서 그 계단도 뛰어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하고 싶은 오후다. 나쁜 외부 영향, 사건에 맞설 힘을 주는 가장 빠르며 게다가 가장 확실한 수단은, 운동. 그렇지 않나? 격하게, 는 아니라도 움직이면 그것들의 적어도 일부는 나와 무관해지지 않나? 철봉 매달리기 그거 며칠 했다고 이젠 지하철 타면 손잡이 잡고 턱걸이하는 날 상상하게 되던데. --;; 부지런히 단련해서 마침내 암벽등반도 하는 수준이 된다면 매달려 올라갈 수 있는 무엇에서든 그러겠지. 그러고 싶다. 그 정도만 해도, 인생에 대해 전혀 몰랐던 예감도 없었던 무얼 알 거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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