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오래 전. 아주 오래 전의 일. 

현실의 일곱 베일 중 한 베일만 벗기면 바로 그 시절 그 시간 그 방으로 갈 수 있을 것같게, 

선명히 기억나고 멀지 않게 느껴지는 어느 날이다. 비 무척 많이 오고 나는 집에서 오후 내내 바슐라르를 읽던 날. 바슐라르를 워낙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바슐라르 읽다가 가슴이 터지는 것같았다거나 극적인 경험을 한 적은 없는데, 이 날은 그에 근접했었다. 바슐라르만이 쓸 그 놀라운 표현과 문장들에 감탄하고 감사하며 읽고 있는데, 독서대 위 바슐라르 책을 감싸고 빛이, 빛이 나더니 그 빛이 나를 감싸고 온 방을 채우는 것 같았던 날. ;; 형광등 없이 간접조명들로 워낙 늘 컴컴하게 사는 미국식 방이라, 책상 위 스탠드 빛에 시력 약해지던 눈이 갑자기 민감하게 반응했던 거 아니냐면,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 행복감을 기억함. 바슐라르에 따르면, 상상력이란 미래에 대한 특별한 한 태도이기도 해서 용기의 한 종류인데, 무엇도 두렵지 않고 무엇도 싫지 않던 그 날의 그 "용기"도 기억함. 


<대지 그리고 의지의 몽상>에 굉장히 놀라운 문장들이 많고 

사실 울프 <올란도>에 바쳐진 주석들은 이 책에 담긴 최고는 아니다. 

그래도, 언제 보아도 나는 반응한다. 수업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한 장면.. 이런 게 화제였을 때, 

귀촌한 부모님 때문에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했는데 입학하던 날 학교 운동장의 커다란 나무. 부모님과 셋이 팔을 둘러도 둘러지지 않았던 나무. 이런 얘기 한 학생이 있는 걸 보면, 나만 반응하는 건 아닐 것임. 





태풍이 왔는지,

지금 비가 무섭게 퍼붓고 있다.

한 두어시간 전부터 퍼붓기 시작해서,

한 시간 전쯤에, 빗속을 운전하여 세차를 하겠다며 나갔다 왔는데,

그때도, 이건 과장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들통 같은 걸로 "들이 붓듯이" 쏟아지던 비였다가,

계속 그리고 여전히 그런 비다. 공중에서 강물이 엇갈리며 흐르는 거 같은 비. 물 "방울"이 아니라 물 "길"이 오는 비. 지금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록적인 강수량일 거 같다. 여기 산 세월 동안 거의 처음 보는, 난폭한 비.


 

 

 

 


 

빗소리를 들으며 바슐라르를 읽고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은 바슐라르를 읽은 일.

이라고 생각하며, 가장 잘못한 일은 바슐라르로 논문을 쓴 일.

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뭐 성공적이지 못한; 농담 같은 생각을 했던 적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인문학은 삶의 밑천이라는 김우창 선생 말에 따르거나, 같은 취지에서,

교양은 삶에서 더 많은 것을 뽑기 위해 (Cultivated men get more out of life than uncultivated men) 필요한 거라는 시릴 코널리의 말에 동의한다면, 그러한 인문학과 그러한 교양의 무궁무진한 원천 중 하나가 바슐라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지와 의지의 몽상>엔,

울프의 <올란도> 서두에서, 벌판의 참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땅 위로 만져지는 뿌리 위에 누워서는 "참나무 뿌리는 지구의 등뼈"라 느끼는 올란도에 대한,

아주 아주 좋은 문단들이 있다.

 

그 중 하나:

"울프의 소설에서 참나무는 그 자신 하나의 인물이다. 책의 표지에 참나무 이미지가 그려진 건 그러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올란도>에서 참나무가 하는 역할을 이해하려면, 우린 우리 삶의 어느 순간에, 웅장한 한 나무와 그것이 우리에게 주었던 견고함의 교훈을 사랑했어야 한다."

 

요 문단이 등장하기 위해서,

다른 여러 문단들이 있어야 했고, 그것들 없이 요것만 요렇게 똑 떼어놓으면,

어째 이것이 감동적일 것인지, 이해가 .... 안될 거 같긴 한데 ........... 그렇다고, 모두를 옮겨올 수도 없고.. ㅠ.ㅠ 어쨌든, 이 짧은 세 개의 문장들이, 오늘 나의 오후를 환히 밝혀주었고, 비가 미친듯이 퍼붓고 있는 날씨다보니 어째 더, 그랬다고 적어두고 싶어졌다.

 

견고함의 교훈.

웅장한 한 나무.

우리 삶의 어느 순간에 우리가 사랑했던 웅장한 한 나무.

그것이 우리에게 주었던 견고함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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