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롤리타>의 성공 이후 삶이 바뀌었다고 느끼십니까?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답: 강의를 그만둘 수 있었지요. 이게 거의 답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면, 전 가르치는 일을 사랑했어요. 코넬 대학도 사랑했고요. 러시아 작가들과 유럽의 위대한 문학을 가르치면서 강의 원고를 작성하고, 그 원고에 따라 강의 하는 일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육십을 넘어가면, 게다가 계절이 겨울이면, 가르치는 일이 육체적으로 아주 고됨을 알게 돼요. 이틀 중 하루는 아침 일찍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눈을 치우고 차를 빼는 일서부터, 학교 건물의 긴 복도를 지나 강의실로 들어가는 일까지, 또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은 어떤 도시인가 설명하기 위해 칠판에 더블린 지도를 그리고, 1870년대 뻬쩨르스부르크-모스크바 노선의 반-수면차는 어떻게 생겼나 그려 보여주는 일이 힘들기 시작합니다. 이 사항들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율리시스>와 <안나 카레니나>는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인데 말이죠.

 

이유는 모르겠는데, 강의하던 시절의 가장 선명한 기억은 시험 날의 풍경이에요.

원형 극장형 강의실에 아침 8시부터 10시반까지 시험이 있곤 했어요. 8시가 되어가면 씻지도 않고 수염 더부룩한 남학생들과 나름 깔끔하게 잘 차려입은 여학생들이 도착하고, 강의실 안엔 지루함과 재난의 소리가 버석거리기 시작합니다. 여덟시 반이 지나면 기침 소리, 목젖을 울리며 킁킁 거리는 소리가 들려와요. 그 사이사이에 책장과 블루북 넘기는 바스락 소리가 들려오지요.

 

시험을 죽쑬 것이 분명한 순교자 학생 그룹 중엔 심오한 명상을 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두 손을 돌려 머리 뒤에 깍지를 끼고 눈을 감고 있지요. 학생들을 둘러 보고 있으면, 나를 향하는 멍한 시선이 있는데, 그 시선엔 바로 저기 금지된 지식이 있는 건가 하는, 희망과 증오가 동시에 담겨 있지요. 안경 낀 여학생이 시험 도중 내 쪽으로 와서 질문을 합니다: "카프카 교수님, 1번 질문에서 원하시는 건 ...? 아니면 그 중 반만 대답해도 되는 건가요?" C- 성적으로 동지가 될 남학생 집단, 이 나라의 중추가 될 집단의 학생들은 이런저런 사소한 교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답을 씁니다 ... 나를 보는 것같은 시선이 느껴져 고개 돌려 마주보면, 그 시선은 재빨리 경건한 명상에 빠지며 강의실 천장으로 향합니다. 열기가 점점 더해지면서 창 유리에 흐릿하게 김이 서리죠. 남학생들은 천천히 스웨터를 벗습니다. 여학생들은 딱딱 빠르게 껌을 씹습니다. 십분이 남고, 오분, 삼분, 그러다 시험이 끝났었어요.

 

문: <롤리타>에 바로 지금 말씀하신 것같은 신랄한 풍자의 장면이 등장합니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걸 아메리카를 향한 대가급 풍자이며 사회적 논평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지적이 타당한가요?

 

답: 제겐 도덕적이거나 사회적인 풍자가가 되겠다는 의도도 없고, 그런 기질도 없습니다. 비평가들이 <롤리타>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작품으로 보든 말든, 제겐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메리카를 조롱한다는 기쁜 소식이, 그런 소식이 널리 퍼지고 있다면, 그건 유감입니다.





*위의 책에 실린 앨빈 토플러가 인터뷰어, 1964년의 인터뷰. 

전에 읽다가 너무 좋아서 (특히 "카프카 교수님") 대강 옮겨 두었던 대목이다. 

수업에서 카프카를 읽으면, 담당 교수 이름을 카프카로 혼동하는 일. ㅋㅋㅋ 뜻밖에도 자주 일어나는 일. 

그런데 나보코프는, (실제 음성학적으론 전혀 아니어 보이지만) 어떤 강력한 이유로 카프카와 혼동되기 쉬운 이름 같다. -kov, Kaf- 정도면 음성학적으로도 강력한 이유인가. 


고유명사를 정확히 기억하게 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 걸까. 

**원문 확인은 하지 않고 올림. 번역이 틀린 부분 있을 수 있습니다. 혹은 나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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