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우린,

인간의 삶이란, 그것이 정신의 풍요와 해방에 기여하지 않는 한 대체로 무가치하다는 걸 실감한다. 

젊은 시절 우리를 매혹했던 우리의 동물적 매력이 어떠했든 간에, 그것이 존재의 이 훼손된 텍스트(오염본)에서 하나의 오자도 수정하게 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시간은 낭비된 것이다. 서른 다섯이 넘었으면서 우리에게 가르칠 것이 없는 -- 우리가 스스로 배울 수 없으며 책으로 배울 수도 없는 것으로 -- 사람이라면 만날 가치가 없다. (4) 




급진주의가 아닌 사람은 친구하지 않겠다는 니체의 말은 

코널리의 위의 말과 공명한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얘기는 아니겠지만, 물론. 


바그너에 관해, 그게 그의 실제 입장은 아니므로 거의 "실험적인" 차원에서, 

일반적이며 편파적이지 않은 얘기를 해줄 수 있을 걸로 페터 가스트에게 니체가 기대했던 것처럼, 

그리고 가스트의 바그너 얘기를 (그게 그의 요청에 충실하지 않더라도) 니체는 집중, 몰입해서 들었을 것처럼, 

(가스트의 얘기라면 몰입해 듣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애초 저런 요청을 할 수 있었던 걸테고) 오버벡이 무슨 얘길 하든 니체는 그걸 듣는 걸 즐겼을 것이다. (*음 이 문장.. 나중에 고쳐 쓰고 싶다. ㅜㅜ;; 나쁜 문장..;;;) 


오버벡의 급진주의에 대해 말하던 편지에서, 

그 대목 바로 위에선 오버벡이 자신과 "식탁, 집, 그리고 생각" 셋에서 친구라고 하기도 한다. 

"friends at table, at home, and in thought." 생각에서의 친구. 독어로는 Gedankenfreunde. 


생각에서의 친구. 

진리의 시간적 핵심, 그걸 알기 때문에 (타인을 향한) 강요를 모르는 정신. 혹은, 소유를 모르는 정신. 

니체가 오버벡 칭송의 맥락에서 급진주의라 부른 것엔 저런 면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지하철에서 읽으려고 대출한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 

이거 조금 읽다가,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급속히 읽기 싫어짐에 어리둥절. 

이상하게도 쿤데라에겐 강요를 알며, 소유도 아는 (소유를 과시하는) 면모가 있다는 생각이 듬. 지성적이고 좋은 얘길 할때조차도. 이 점, 지금은 이 정도로밖엔 쓰질 못하겠으니 나중에 다시 생각하고 다시 써봐야겠음. 그런데 여하튼, 예를 들어 모더니즘 소설이 주제일 때, 아도르노가 무슨 논의를 하든 거기에 (내가 잘 알고 하는 얘기니 받아들여.. 식의) 강요나... (이게 나의 재산이다.. 식의) 과시는 없는데, 쿤데라에겐 있다고 느껴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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