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이론> 영역했고 "탑" 아도르노 학자로 꼽히곤 하는 로버트 훌롯-켄터의 책. 이 책에 "아도르노로의 복귀 Back to Adorno" 이런 글이 있는데,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나눈 대화의 한 대목이 인용되어 있다. 호르크하이머가 무얼 어떻게 하든 자긴 비관주의로 되돌아올 뿐이라고 하고, 그에 맞서 아도르노는 진정한 인식엔 항상 가능성의 인장이 찍혀 있고, 철학적 체험과 비판적 에너지는 모두 그 가능성과 함께 하는 거라며 강인하게 낙관주의적인 쪽에 서는 대화. 대화의 끝에 가서: 


아도르노: 내가 했던 말은 순진하다는 비판을 받았어요. 

이런 비판은 그 자체 이미, 아무도 행복을 믿지 않는다는 인정이 아닌가요? 

이 순진성이, 순진하지 않은 분석적 지식보다 더 우월한 형식의 인식이 아닌가요? 


호르크하이머: 나는 행복을 믿지 않아요. 

행복을 믿는 누구든, 최악의 의미에서 순진한 사람인 거에요. 


아도르노: 우린 동시에 더 순진하고, 그리고 덜 순진해야 해요. 


훌롯-켄터가 이런 대화를 길게 인용하는 건, 

아도르노가 비관주의적이며 <계몽의 변증법>은 니체적 이성 거부다... 같은 얘길 하는 하버마스를 반박하기 위해서다. "하버마스가 그 자신 알아본다고 주장하는 아도르노 사상의 비관주의. 그의 그런 주장이, 그가 알아본다는 아도르노의 비관주의보다 더 비관주의적이다. 심지어 비관주의도 변증법적이다. 누구보다 아도르노의 경우, 그의 전생애에 걸쳐 씌어진 저작들의 그 엄밀함과 에너지, 그것의 근원에 변화를 향한 희망 없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여기엔 가장 순진한 종류의 낙관주의가 있다. 이 낙관주의가, 타협의 거부를 통해, 인식의 수단이 된다."


밑줄 친 문장에, 아무리 동의해도 지나치지 않다. ㅋㅋㅋ;;; 

"순진한"에 쓰이고 있는 단어는 naive. the most naive optimism. 정말 아도르노의 경우, 그렇다. 그런데 그를 칭송하는 것도 칭송하는 거지만,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 순진함. 이것의 반대엔, 멍청함... 그리고 냉소적임.. 이 있지 않나는 생각을 했다. 평생 멍청하기만 하고 한 번도 순진한 적은 없었을 것같은 누군가를 생각했다. 여기서 멍청함은, 어쩌면 그 기원이 순진함이지만 그것과 닿지도 그것이 되지도 못하며 늘 그것을 배신하는 형식의 인식. 순응하는 정신에서 어김없이 일어나는 일이지 않나. 반지성주의엔 그런 멍청함을 구제하고 싶은, 그것에 그것이 가질 수도 있었을 영예를 주려는 욕망이 있지 않나. 아닌가. 그런가 아닌가. 


니하머스의 <니체, 문학으로서의 삶> 이 책, 

아도르노가 말하는 순진함이 1도 없는 책. ;;;; 이런 식의 비판도 가능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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