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고 이 핑계 저 핑계로 사들인 책 중 왼쪽 책도 있다. 아도르노와 크라카우어 서한집. 

아도르노가 쓴 편지들은 다수 출간되었다. 벤야민과 왕복 서한도 있고 (가운데),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들도 있고. 


바슐라르 합리주의 주제로 쓴 페이퍼에서도 아도르노 인용할 수 있었다. 하려고 들면 할 수 있다. 

<부정변증법>에, 인간에게 주체성이나 합리성은 마치 코뿔소에게 갑옷으로 기능하는 외피 같은 것, 그렇게 자체 형성한 감옥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 있다. 그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인간은 흉포해진다. 


그 대목은 이렇게 번역되었다. 

"삼각룡이나 코뿔소 같은 종족들은 몸을 보호해 주는 갑옷 같은 외피를 마치 몸에 유착된 감옥처럼 끌고 다니면서 -- 최소한 의인화해서 본다면 -- 그것을 벗어던지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듯하다. 생존을 위한 장치 속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 코뿔소의 특수한 야수성을 설명해줄 수 있듯이, 자인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끔찍해지는 인류의 야수성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영어 번역은 온갖 혹평은 다 들은 번역인데 

영어 번역에서는 "protective armor" "ingrown prison" 이런 구절들 쓰인다. "dreadful ferocity of homo sapiens." 어쨌든 이 경우엔 영어 번역에서 쓰인 구절들이 이 사태의 끔찍함을 더 생생하게, 선명하게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아도르노의 이런 관점과 더 이상 극명한 대조이지 않을 수 없는 무수한 문단들을 바슐라르가 쓰셨다. 인간에게 합리성이란 어떤 영적인 즐거움이고 가치인가. 인간에게 주체성이란 어떤 자유이며 도약일 수 있는가. 하여, 이 점을 말하면서 아도르노 <부정변증법>을 인용하는 일에 성공함. 억지스럽게 보이지 않고 아 그러네, 이 두 사람을 대화하게 하는 일이 시급하다...... 라고 리뷰어들도 생각하기를 희망하는 중. 





합리주의자의 정신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 주제에 대해 그가 남긴 말들 읽으면서 여러 생각들이 들었는데, "이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하냐, 이것도 있었다. 합리주의 문화가 형성하는 합리주의 고유의 이해가 있다. 나와 너를 초월하는 이해. 표준이 된 전통과의 다자 대화가 결정하는 이해. (바슐라르가 한 지점에 고정되기를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글쓰기를 하셔서, 요약이나 정리가 사실 잘 되지 않는다. 해놓고 보면 부정확하다 느껴지고). 


예술은 아니겠지만 학문, 사상의 영역에서는 이게 결정적. 

저런 이해의 공간이 있다면 거기서는 뛰어난 학자가 나온다. 

저런 이해의 공간이 없다면, 나오지 않는다. 저 공간에서 좋은 이해를 지속적으로 받아보았고 그 이해의 경험이 축적될 때에만, 그 자신 전통의 일부가 될 무엇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저런 공간이 없다면 아무리 개인이 똑똑하고 게다가 열정적이고 성실하고 하다 해도 '숲으로 돌아갈' 뿐. 


(..... 마무리 어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