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Piezoelectricity라는 말도 생소하고 

월터 기톤 케이디라는 저자 이름도 바슐라르 책에서 본 게 다인데, 전기학 분야의 고전인가 봄. 

케이디는 20세기 미국의 물리학자, 전기학자. 


<응용 합리주의> "결론"에서 바슐라르가 

18세기 프랑스에서 전기학 연구했던 피에르 베톨롱과 20세기 미국의 전기학자 케이디를 비교한다. 

베톨롱의 전기학은 과학이 아직 아니었던 과학. 케이디의 현대 전기학은 확고히 과학. 온전히 과학. 

과학이 아직 아닐 때의 과학들이 얼마나 거침없는 광증들의 장소였나에 대해서는 <과학정신의 형성>에서도 긴 내용 볼 수 있는데, 베톨롱의 전기학에 대해 그와 비슷한 지적들을 이 책에서 함. 요즘 과학사 연구 경향에서는 이렇게 과거 과학이 아직 과학이 아니었다, 합리성을 몰랐다, 지적하는 게 바로 비판의 대상일 것이다. 바슐라르는 일관되게 이런 입장이다. 과학 이전의 과거 과학(전과학)과 현대 과학 사이에 중대한 단절이 있음.  


하튼 둘을 비교하면서 이런 문단을 쓴다. 


"베톨롱의 책과 케이디의 책을 같이 읽던 그 가을 날들을 기억한다. 이 두 저자들을 가르는 시간은 두 세기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의 사유엔 어떤 공통의 척도도 없고 이들을 연결할 어떤 친연성도 수립할 수 없다. 18세기의 박식이 갖는 막대한 종합은 이제 더는 무엇도 합해내지 못한다. 20세기에 수정의 실험으로 결정된 한 세부, 그것에 관한 정밀하고 논증된 종합은 과학 현상의 견고한 핵심을 형성한다. 라 브리(la Brie) 평원을 명상하면서 레옹 고즐랑은 썼다: "라 브리는, 물이라기보다는 바다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베톨롱의 책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비슷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학은, 그러나 과학 사유는 아니다." (.....) 


그 가을의 세 달. 케이디의 책을 읽을 때, 어느 페이지에나 배우고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 내용이 있었다. 60대 나이에, 나는 학창 시절을 다시 찾은 즐거움을 느꼈다. 내 나이의 사람들 모두가 그러듯이, 나는 이십대의 유토피아를 다시 살았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 과학의 아름다운 책들을 놓고 공부하는 스무살이 되고 싶다. 케이디의 책, 글래스스톤의 책, 로카르의 책, 보웬의 책, 헤르츠베르크의 책." (원주: 꼭 집어 이 저자들을 말하는 건 이들을 실제로 내가 1947-48년 동안 읽고 공부했기 때문이다). 햇빛 비치는 내 테이블 위에 이 책들이 놓여 있다. 9월이 내 뜰의 과일들을 무르익게 한다. 곧 10월이, 그 위대한 달이 온다! 모든 학교들이 새로이 청춘을 찾는 달, 모두가 근면한 사유를 다시 시작하는 달. 한 권의 좋은 책이 있다면, 한 권의 어려운 책이 있다면, 나는 영원한 10월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이성엔 그같은 활력이 있는 것이다! (.....)" 


이런 문장들이 바슐라르 책들이 주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가 알게 하는 문장들인데 

질색하는 사람들도 (특히 요즘엔) 적지 않은 거 같다. 이 다음 이어지는 문장들도 이와 비슷하게 완전히 바슐라르적 삶의 예찬, 공부 예찬 ㅎㅎㅎㅎㅎ 문장들. 오늘 읽으면서 나는 거의 울었. 이런 말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정으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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