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신은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우주를 창조했다."

<응용 합리주의>에서 이 문장도 예가 되겠지만, 바슐라르 저술에는 이런 덫 같은 문장들이 곳곳에 있다. 피상적으로 이해한다면 그를 우습게 보이게 할 문장들. 악의가 있거나 준비가 덜 된 독자라면 걸려 넘어질 문장들.  


악의. 이건 누구보다 미셸 세르가 잘 보여주지 않나 함. 

이유가 무엇이든, 세르가 바슐라르 주제로 말하거나 쓸 때 거기 분명 악의가 있는 거 같다. 


그런데 어쨌든 <응용 합리주의>는 

합리주의가 무엇인가 알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비합리란 무엇인가 알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내 괴로움의 원천은 비합리였다... 그 비합리란 이렇게 규정된다, 방향으로다 몇몇 과거사를 추억하고 진상 규명을 하게 한다. 한국사회의 무엇이 비합리인가, 우리는 어떻게 비합리 속에 사는가, 이것에 대해 갑자기 선명하게 보게 한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소중하고 예찬할 책이겠지만

하버드 대학의 과학사학자 피터 갤리슨이 쓴 위의 책, <객관성>, 이 책과 극히 흥미롭게 비교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그래서도 소중하고 예찬할 책이지 않나 한다. 49년에 바슐라르가 <응용 합리주의>에서 제시한 발견과 기준이 있어, 그리고 그것들을 들어본 적 없다는 듯 쓰여지는 요즘의 책들이 있어. 




그런데 이사온 집이 지금까지도 아주 마음에 든다. 사실 예전 집과 비교해서 8-10평 정도 넓어진 게 다라 할 수도 있을 거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8-10평이 인간 정신에 갖는 이 절대적인 힘에 대해 생각해야. 그러나 그게 아닌 거 같다. 어떤 것은 더 나빠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욕실. 예전 집 욕실은 넓었고 바닥이 평평했다. 지금 집은 배수구 방향으로 표나게 바닥이 기울어지는 옛날 집. 욕조를 놓을 수 있긴 한데 욕조를 놓느냐 마느냐를 떠나 의외로 계속 불편).  


.... 음 이어질 얘기는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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