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슬세권에 편의점이 생겼다. 마치 마술처럼. 

다 좋은데 딱 하나, 근처에 편의점이 필요하다, 하니까 편의점이 생김. 

 

매장이 넓어서 진열대 사이를 서너 사람이 횡대로 편하게 오갈 수 있을 정도다. 

냉장고 앞에 서면 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작대든 편안한 심정으로 냉장고 안을 볼 수 있다.

실제로 복작대지는 않지만 만일 복작댄다 해도. 그만큼 냉장고와 다른 진열대 사이 공간이 널찍함.  

와 여기 미국 같다. 미국은 다 크고 넓었지. 다른 편의점들도 이랬어야 한다. 이런 편의점은 없었다. 여기가 처음이다. 


첫눈에 (처음 입장에) 반한 편의점. 

반하니까 꼭 여기서 당장 술을 사야 할 거 같았고 샀다. 맥주도 이 동네의 다른 편의점들에 비해 여러 종류 들여놓고 있었다. 


그 맥주를 지금 마시고 있. 


사야 한다고 벼르던 책들인데 이사하면서 발견된 책들이 있다. 

프리고진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같은. 그런 책들도 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직 안 읽었고 제대로 읽고 싶은 책들이 줄줄이 빽빽이어서, 그리고 책장에 빈 공간도 거의 없고, 하여 새로 사들이기는 아직 하지 않는 중이다. 그런데 알라딘 중고에 이 책 나와 있길래 이건 냉큼 구입함. 히친스의 암 투병기. 투병기에서 "투"는 빼야 하겠다. 서두에 "암과 싸운다"는 표현이 얼마나 부적절한가에 대해 말하는 내용이 있다. 투병기 아니고, "짧은 병의 기록" 쯤? ;;; 


그는 말술이었고 체인스모커였다. "저자 사인회 같은 걸 하면 그는 앉은 자리에서 위스키 한 병을 다 마시면서 멈춤 없이 담배를 피우곤 했다" 대강 이런 얘기, 그가 암진단 받기 전에 누가 썼던 걸 읽은 기억이 있다. 이 책에 그의 동료였던 사람이 쓴 서문이 있는데 비슷한 내용이 있다. 그가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고 담배를 많이 피웠는가. 


히친스 자신이 책 서두에서 이에 대해 말한다. "내가 그토록 강인한 체력이 아니었다면 나는 더 건강하게 살았을 것이다" 이런 문장으로다. 이 책을 냉큼 구입한 이유가 무엇보다, 이런 문장이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문장을 읽는다면, 나는 마침내 담배를 확 끊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암 환자가 된 다음 그가 체험한 감정 중엔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나"도 있었다. "내게 다음 연대를 위한 계획이 있었다. 그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감안하면, 내가 가질 자격이 되는 계획이었다." 


00-10년대 무신론 캠페인 하던 이들 중에서 히친스는 좀 다른 거 같다.  

마틴 에이미스가 그를 회고하면서, 젊은 시절 히친스와 어느 파티에 갔을 때 히친스가 파티에 온 사람들을 한 번 죽 보고 나서 "모두에게 짧게 들이댄 후 떠나도록 하겠다 (I'll just make a brief pass at everyone and go)" 말했다고 쓰기도 했는데, 나는 이게 아주 너무 마음에 들었었다. 이게 만인의 삶의 방식이라면 좋겠따 같은 생각이 들었던 거 같기도 하다. 모두가 모두에게 짧게 들이댄 후 떠나기. ;; 여기 유토피아가 있는 거 같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