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나우스가드가 하던 말. 

문학이란 공간을 창조하는 일. "I write because I am going to die"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 


이거 참 심오하고 널리 적용된다고 여러 번 생각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 만드는 공간도 있을 것이고 (일기가 대표적이고)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공간도 있을 것이고 

공동체가 같이 만드는 공간도 있을 것이다. 


우정, 사랑이라 불리는 것이 결국은 그 공간에 관한 것이 아닌가. 


대학의 학풍. 학풍이라 불리는 것도 

소속한 이들의 공동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공간에 관한 것이 아닌가. 

정신사. 지성사. 이런 말들도, 통시적 공시적 공간들을 가리키는 것 아닌가. 


그 공간을 만들지 못했을 때, 아니면 

그 공간이 붕괴했을 때, 그 때 모두가 끝나는 것 아닌가. 


하튼 이러저러 (특히, 대학의 학풍.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 생각들이 있었는데

오늘 도착한 슬로터다이크의 Spheres 3부작의 3부 Foams 열어보니 

아니 이 비슷한 논의로 시작한다! 인간들이 함께 만드는 공간! 

이해와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여러 번, 아 내가 궁금했던 바로 

그 문제를 다루시네요, 어쩔........... 순간들이 있었다. 오늘의 이 발견도 조금 놀라움. 


그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자취를 남긴 건 하이데거라는 거 같다. 그러나 니체도 무한히 언급되고 

바슐라르도 끝없이 (주로 암묵적으로지만) 참조되고, 아도르노도 그렇다. 아도르노의 경우엔, 한편 짜증스러워하면서 

읽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틀린 삶을 옳게 살 수는 없다" <미니마 모랄리아>의 이 유명한 문장, 이 문장을 


본격적으로 공격, 논파하는 문단들을 쓰기도 했고 

그게 무슨 뜻인가 밝히는 (그러니까, 아도르노도 하지 못한, 혹은 하지 않은 해명을 하는) 

긴 문단들을 쓰기도 했다. 이런 면모가 참으로 감탄스럽다. "틀린 삶을 옳게 살 수는 없다" 이런 말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데, 그게 아주 강력하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말 아닌가. 그게 왜 그런가, 해명하는 건 슬로터다이크의 글로 처음 읽었다. "악행의(나쁜 삶의) 중력"을 왜 그 영향권 안에 놓인 누구도 이기지 못하나. 그리고 어떻게, 그런 인식이 그 자체가 봄눈 녹듯이 사라지는 삶의(존재의) 풍요가 또한 인간의 삶에서 가능한가, 이건 바슐라르가 누구보다 강력히 보여주긴 했지만 슬로터다이크도 만만찮게 강력히 말한다. 그것도 아도르노를 직접 지목하면서. 


저런 면모가 철학 독자들에게 슬로터다이크가 특히 더 흥미롭게 느껴질 면모긴 하다. 

그런데 "철학으로 전향"을 슬로터다이크를 통해 한다면, 21세기의 이 시점에선 그게 최고의 전향이고 입문일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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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4 0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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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4 04: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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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4 04: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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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4 05: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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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4 06: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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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4 07: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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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4 2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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