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오디오북도 있지만 종이책도 사두었었다. 

읽고 싶지만 언제 읽냐. 이사하면 읽냐. 하다가 길고 덥고 습한 여름에 이런 책이 제격이겠지 

인류의 위대함, 무엄함, 역사의 잔인함, 냉엄함, 등을 알게 할 책 아니냐 (.....) 꺼내 와 봤다. 

원자탄 발전에 자기 몫을 한 다수 물리학자들의 집단 전기 같은 책이기도 해서 전기 애독자라면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가게 될 책이기도 하다. 


어니스트 러더포드. 뉴질랜드 오지에서 감자 캐던 촌놈이었던 러더포드. 

케임브리지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전보가 왔을 때 그는 감자를 캐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캔 마지막 감자다!" 그는 삽을 던지며 외쳤다. 


영국으로 온 그는 어떻게 뛰어난 물리학자가 되었는가. 그라는 물리학자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 주제에 대해 여러 재미있는 일화들을 차근차근 들려준다. (하나씩 다 올리고 논평하고 공유한다면 좋을 것이다). 

그는 그 자신도 노벨상을 (물리학상이 아니라 화학상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그의 평생 농담 대상이 되었다는) 받았지만 그의 문하에서 11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 기록은 아직 능가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닐스 보어가 그의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난 제자였다고 말할 때 그건 조금도 공허한 말이 아니게 된다. 


그가 제자들에게 행사했던 독특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권위적이지 않은 부성의 카리스마. 

실험실에서 그는 "파파"로 불렸다. 학생에게 탐색이 필요한 아이디어가 있다면 그는 집중해서 세심히 끝까지 들었다. 

그는 호쾌하게 웃었고 농담했고 노래했다. 그런데 그의 이런 면모를 억압하는 막강한 제자가 그에게 있게 되는데 




 


헨리 모셀리. 

Henry Gwyn Jeffreys Moseley. 1887-1915. 

그는 혼자 있기를 좋아했고 신중했다. 러더포드를 "파파"라 부르는 등의 친밀한 행동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실험실에서 러더포드가 조심하며 행동하게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그였다.  

그는 러더포드가 실험실을 자기 식민지처럼 운영한다고 생각했다. 


연도를 보면 바로 짐작되지만 

그는 1차 대전에서 사망했다. 27세. 전쟁이 나고 그는 바로 참전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1916년의 노벨 물리학상은 그의 것이었다고, 후대의 물리학자와 논평가들은 말한다고 한다. 


모셀리의 업적이 (27세에 죽었지만 그의 이름을 딴 "모셀리 법칙"도 있고 위키피디아 항목이 짧지 않다) 

어떤 업적인가는 몇 년 지나야 어렴풋이 이해할 거 같다. 러더포드의 업적도 그냥 막연히 대강 모호하게 

보고 있을 뿐이다. 그렇긴 한데 


스승을 조심하게 만들던 제자. 

이거.......... 이런 게 폭풍 간지 아닙니까. 저세상 텐션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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