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발견한 책 중 이것이 있다. 표지디자인이 뭔가 사이키델릭한. 

집에서 발견(발굴)한 건 아니고 그게 그러니까 그 책계의 소리바다에서. 

마르크스 과연 얼마나 어떻게 읽게 될까 몰라도 일단 주변(에리히 프롬이 자전적인 내용으로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만남> 같은 책도 썼던데 그런 책들)은 둘러보는 것이. 


출간 연도 보면 마틴 제이가 40대초 나이일 때 나온 책이다. 

저자 서문을 보면, 책의 기원은 그의 대학원 시절의 한 일화에 있다. 

때는 69년. 사회과학자들의 한 학회에서 미국의 좌파 운동에 대한 격한 토론이 있었고 

토론에서, 혁명은 미국적 삶의 방식과 완전히 결별할 때 가능하다는 입장인 이들이 있었다. 

"Total Break with America." 그들의 주장에서 이 구절이 취재되었고 대서특필되었다. 

그 구절의 출전으로 마틴 제이가 지목되었다. "학계의 사회주의자 마틴 제이, 미국의 전면 거부를 요청하다." 


마틴 제이는 그 구절을 사실 반대의 맥락에서 (""total break with america"는 요청은 반-생산적인 수사적 과잉일 뿐이다") 썼던 거지만 그는 잠시 캠퍼스의 유명인이 되어야 했다. 급진주의자 친구들이 그에게 갑자기 친한 척을 했고 그런가 하면 대학원의 한 교수는 그를 질책했다. 그 교수에게서 잃었던 신임을 회복하는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했다. 


이 책의 기원은 바로 그 사건에 있다고 회고한다. 



그는 44년생이고 69년이면 그러니까 25세. 우리식으로 26-7세. 

그가 서른 되기 전에 쓴 박사학위 논문인데 고전이 된 책 <변증법적 상상력>. 

이거 나는 수시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런 일은 (그러니까, 한국에서) 재연될 수 있는가. 

생각하는 편이다. 위의 책 <마르크스주의와 총체성> 저자 서문에 미미하지만 힌트가 있다.  

40대의 그가 기억하는 20대의 그에게, 40대의 그에게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자신"("confidence" 컨피던스.....) 이게 있다. 나는 학자이고 나는 사회과학을 하고 나는 학회에 참여하고 나는 발언하고 나는 내 발언에 책임을 지고.... 이게 있다. 


그렇다면 그런 "자신"은 어떻게 가능한가. 

고전이 되는 박사학위논문. 마틴 제이가 보여주는 거 같은 종류 자기신뢰. 

이런 게 나오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답하기 어렵다면, 거의 나올 수가 없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로. 

일단 억울하면 출세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해야 하는 사회에서 

조금의 권력이라도 가진 모두에게 "because I say(said) so" 이것이 허락된다. 출세의 보람 하나가 여기 있는 것이다. 

맹목이 성공의 보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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