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8월 13일. 프랑크푸르트. 아도르노 장례식. 

흙을 뿌리는 사람은 그의 아내 그레텔 아도르노. 

그녀 옆은 막스 호르크하이머. 호르크하이머 바로 뒤는 정치인이라고 (빌리 브룬데르트?) 하고 

정치인 뒤에 하버마스. 이 때 이미 그리 젊지 않아 보이는 하버마스. 최근 철학사 방대한 규모로 

출간하신 하버마스. 



아도르노 글에는 

난해함으로 요약할 면모 외에 

굉장히 보기 드문 면모가 또 있다. 

이것도 난해함에 포함되거나 어쨌든 난해해지지 않으면서 실현되기는 어려운 특징일 듯한데 

고도의, 그리고 복합적인 진지함. 자기가 다루는 주제에 대해서도 그보다 더 성실할 수 없이 성실하고 

자기 글을 읽을 독자에 대해서도 그렇다. 독자의 (그러니까 인간의) 지성에 대해, 최상의 존중을 유지하면서 쓴다. 


본격 저술에서도 그 점 느껴지지만 

바로, 분명히 느껴지는 건 편지나 강의록. 혹은 에세이들. 

강의록 읽다가 격하게 감동하게 되는 때가 있는데, 그게 다 그의 그 엄청난 존중력 때문. 

<사회학 강의>의 마지막 강의에는 학생들의 소란으로 수업을 마무리하기 어려워지자 "조용히 하기 바랍니다" 

"나는 여기서 말할 권리를 얻은 사람입니다" 이 요지로, 그러나 아도르노 언어로, 그러니까 정연하고 장엄하게 

극한의 품위를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나오는 말들이 있다. <사회학 강의>는 68년 봄에 있었던 강의. 학생들이 

그의 수업 강의실에서도 수시로 동요했다는 게 강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hissing] --> 이렇게. 

"[hissing] 지금 그 소리는 내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리입니까 아니면 내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수전 벅-모스의 이 책에 

68년 봄 독일 대학가가 어땠나 자기 경험을 회고하는 내용이 있다. 


아도르노 읽기 위해 독일어 공부 꼭 하고 싶지만 당분간 (적어도 몇 년) 어려울 것이다. 

대신 할 수 있는 건, 영어로 나와 있는 아도르노 책은 모두 읽기. 사실 거의 갖고 있는 편이라 

새로 구할 책 별로 없다. 그러나 강의록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고, 갖고 있는 책들 중 읽지 않은 것이 

적지 않고, 읽으려면 단 두 페이지 읽으면서 체력 소모 극심하고, 해서 만만한 목표는 아니다. 그리고 

저 <부정 변증법의 기원> 같은, 아도르노 연구에서 고전이 되다시피한 책들... 이것들도 다 읽어야지. 일단 

다 읽는다고 생각하고 시작해야지. 이런 생각을 19년 하반기에 여러 번 했다. 보통 학위 받고 직후 몇 년 

젊은 학자들의 "early career"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하는 그 시기, 그 시기를 나처럼 낭비하고 

그 좋은 시절을 컴컴하고 보상 없는 어딘가로 방류하고 만 경우, 어떻게 회복 혹은 구원이 가능하겠는가. 

아도르노 전작주의. 아도르노 모두 읽기. 이것이 분명히 그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회학 강의>를 끝내고 나서 

<사회 이론의 철학적 요소들> (*이것도 강의록이다) 이거 읽는 중인데 

여기에도 감동 포인트.... 수시로 있다. 어쩌면 이런 얘기를 이렇게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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