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게이의 가장 범작은 이 책일지 모른다. 

무성의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던 거 같다. 그냥 계획도, 점검도 없이 막 쓴 거 같은. 

무얼 주제로 쓰든 실제로 그럴 분은 아닐 거 같아서, 쓰던 당시 아프셨거나.....


수업에 제대로 신경 쓸 여유가 없으니 

전에 남겼던 노트 참고해서 준비하는데 

어제는, 이렇게 혼란한 노트에서 어떻게 일관성 있는 얘기를 만들 수 있었나,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일관된 흐름이 있는 얘기를 했다고 기억하는데 남겨진 노트들은 카오스. 


혼돈에서 질서로. 

가게 하는 강력한 요인은 당연히 무엇보다 학생들이다. 

주고받음이 선명하고, 그러면서 주제와 지향의 정수가 (까지는 아니라면 어쨌든 중요한 요소들이....) 추출되고 

가야할 방향들이 보이고.... 그럴 때 있다. 그러지 않을 때도 많지만. 


감정과 이성의 분리가 우리에게 일어난 최대 재난에 속하지 않는가. 

감정을 짓밟아도 되는 인간이, 감정맹, 감정치들이 출세하는 사회였다 이 사회는. 

감정이 비틀리는 곳에서 이성이 온전할 수 있는가. 감정도 이성도 온전하지 않은 인간을 양성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하나가 주입식 교육이다. 밑줄 쫙. 이 접근에서 지식은 자의적이다. 자의적인 

지식이 (유기성이 부정되는 지식이) 지식으로 대접받는 곳에서, 폭군의 정신, 폭군의 태도가 번성한다. 

유기적 사유 하지 못하는 인간들만 남는다. 



혼란스러운 노트라는 건 이어지는 저런 내용들. 

이런 내용으로 어떻게 시작해 어떻게 끌고 가냐. 걱정했는데 

굉장히 좋은 피드백 주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얘기들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우리의 모든 시도가 일찌감치 좌절된다.... 주제로 말한 학생이 있었고 

감명하면서 들었다. 우리의 인간관계도, 우리의 지식추구도, 멀리 가지 못한다. 

조금 가다가 끊긴다. 차단된다. 


그러니까. 인식의 기관들을 탕탕 절단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낙지 탕탕. 

멀리 조심스럽게 깊이 오래 탐구하지 못한다. 


피터 게이의 <계몽시대>가 아주 좋은 예를 준다. 

인식의 기관들이 풍요하며 섬세하다는 게 무엇이냐. 

관절들이 유연하고 건강하다는 게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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