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사드 후작의 책은 두 권이 있다. 

이것과 같은 출판사 같은 판형으로 나온 <소돔 120일>. 

<규방의 철학>을 구입하려고 어제 검색하다가 

같은 출판사 같은 판형으로 <규방의 철학>, <쥐스틴>, 그리고 기타 저술들을 묶은 책이 

중고로 나와 있는 거 보고 (눈을 믿을 수 없어한 건 아니지만... 조금 놀라며) 퀵주문.  



그러니까 Justine과 Juliette은 자매인데 

쥐스틴은 덕, 미덕을 대변함. 쥐스틴이 주인공인 <Justine>의 원래 전체 제목은 

<쥐스틴, 혹은 덕의 불운>. 줄리엣은 악덕을 대변함. 줄리엣이 주인공인 <Juliette>의 원래 전체 제목은 

<줄리엣, 혹은 악의 번영>. 


제목들이 웃기다. 지금 쓰면서도 잠시 웃었다. 

<계몽의 변증법>에 계몽이 어떻게 도덕을, 도덕철학을 청산하는가 주제인 장이 있고 

그 장 제목이 "줄리엣, 혹은 계몽과 도덕"이다. 제목의 줄리엣이 이 사드의 반-여주인공. 

10여년 전 <줄리엣> 읽으려다가 도저히 읽을 수 없던 기억 있다. 아무리 난교와 살인, 폭력, 배신과 

음모가 난무한다 해도 


숨막히게 고풍스러운 언어. 그리고 길다. 천페이지가 넘는다. 

"줄리엣, 혹은 계몽과 도덕"에서 인용되는 내용으로 보면, 재미 없을 수 없는 책인데 

몇 페이지와 대결하고 그걸 끝으로 덮어 둠. 10여년 만에 다시 읽으려 하는데 조금 달라져 있다. 

숨막히게 고풍스럽던 언어가 매력적이다. 심지어 사드도 이렇게, 더듬더듬, 시를 쓰듯이 더듬더듬, 그 세계와 그 인류를 탐구했구나. 



아침엔 철학자가 "치매와 기만" 주제로 얘기하는 걸 들었다. 

노인 간호가 제기하는 여러 도덕적 질문들이 있는데 그 중 특히 모호하고 

철학적 탐구가 요구되는 질문이 이거라면서. 치매 환자에게, 거짓말 해도 되는가. 

내 아내는 어디 갔냐고, 30년 전 죽은 아내를 찾는 치매 노인에게, 요앞에 잠깐 나갔는데 곧 올거라고 

답하는 것에 아무 문제도 없는가. 


특수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거짓말이 용인되는 상황에서 거짓말이 축적되면 너는 거짓말장이가 되는 것인데 

도덕적 차원과 존재론적 차원이 만나게 된다. (....) 상대에게 자기 결정을 할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우리의 판단으로 상대에게 우리가 부여하는 지위. 이것엔 이미 까다로운 도덕적 의미("difficult moral baggage")가 있다. (....) 이런 얘기를 한없이 진지하게, 한없이 몰두해서 한다. 


우리의 문제는 

언제나 진행 중인 우리의 대화 안으로 가져와야 한다. : 서양 지식인들..... 에게서 기본적으로 느껴지는 것. 

안 그러는 지식인도 있지만 그런 지식인은 지식인이 아닌 것으로. 


아무튼 나는 이게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여전히 놀랍다. 

언제나 진행 중인 우리의 대화. 이게 된다는 게. 그게 되려면 필요한 "신뢰'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날이 갈수록 더 분명히 보고 알기 때문인 거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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