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에서 쓰는 토론 주제는

거의 전부 내가 만든다. 읽는 글과 

직접 연결되는 것도 있지만 아닌 것들도 있어서 

스티븐 제이 굴드의 글을 (인간 본성의 생물학적 결정론에 반대하면서, 사회 구조의 우선성을 말하는) 

읽은 수업에서는 깊이는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가, 이런 주제로 토론해 보기도 했다. 굴드의 주장에, 굴드의 글 읽기 전부터 

동의하는 독자에게도 이 글은 불편하거나 난감하거나 미흡할 거 같은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이 글이 얕기 때문이다. 피상적이다. 어려운 주제를 너무 쉽게 만든다. 얕음과 깊음. 그 인상들은 어디서 오는 건가. 


이 주제로 토론하기 전에도 

엘리트주의는 반민주주의적이다... 입장인 학생과 

나 사이에 조금 길게 대화 오갔던 수업이 있었다. 이 수업에서 더 격하게 

말해 보게 되었는데 


"깊이" 이 말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실체화하면서 쓰는 것은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소수에게, 다수를 무시할 수단 하나를 더 주는 것이다... : 그는 이런 입장이었다. 


지성의 특권은 특권이 아니다. 

혹시 특권이라면, 그것을 확산함이 그것을 해소하는 길이다... : 나는 이런 입장이었다. 




깊이의 구제. Rescuing Depth. 

하여튼 저 비슷한 제목으로 페이퍼를 하나 쓸 작정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긴 하다. 

깊이 따위 처분하라. 이러는 로티가 민주주의적인 거 같아 보임? 아니다! 아무도 듣지 않을 얘기를 

아무도 들을 수 없게 하면서 깊이, 이걸 긍정하고 탐구한 바슐라르가 민주주의적이다. 해방적이다. (...) 대강 

저런 얘기 하게 될 거 같고. 그런데 나는 한편 신기한 건 


최순실이 몇 년 전까지 쥐고 흔들던 나라에 

엘리트주의가 있기는 함? 


신경숙과 창비. 여기 무슨 엘리트주의가 있음? 

(*아 그들은 애초 대중주의인가. 대중 영합, 기만주의인가. 엘리트주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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