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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영역
사쿠라기 시노 지음, 전새롬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순수의 영역>은 질투에서 비롯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가 ‘사쿠라기 시노’는 비현실적인 사랑의 감정이나 흥미진진한 사건 없이 잔잔한 일상속의 질투, 욕망을 그렸고 작가적 필력으로 나를 그 잔잔한 일상의 세계에 몰입하게 했다
얼마 전 읽은, <긍정의 뇌>의 저자‘질 테일러’는
“인간이 사고에 몰두할 때 좌반구의 뇌와 우반구의 뇌는 뇌량을 통해 쉬지 않고 대화를 하며, 이 내적 대화는 인간 의식의 중요 기준이 된다.”고 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를 인식하고 나의 이익을 계산하는 것은 좌반구의 뇌가, 전체를 보고 타인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것은 우반구의 뇌가 하는 일일 것이다. 결국 인간은 두뇌로 인해 두 개의 마음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개의 마음은 평상시에는 잘 분리되지 않고 드러나지도 않지만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큰 자극이 가해지는 순간, 어느 뇌의 작용이 큰가에 따라 상반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순수의 영역> 주인공들도 들끓는 내면 속 두마음의 불협화음을 꽁꽁 숨겨둔다. 아주 가까운 남편 혹은 아내, 애인 앞일지라도 드러내지 않는다.
소설 속의 ‘순수의 영역’은 천부의 서예 능력을 타고났지만, 또래에 비해 지능이 떨어지는 지적 미숙 상태의 25살의‘준카’.그녀는 소녀 같지만 소녀도 아닌, 그 나이 또래의 여성적 매력과는 동떨어진, 성별마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함과 투명성을 지닌 여자다.
준카는 구시로 시립 도서관에 새로 부임한 관장 ‘노부키’의 여동생인데, 노부키는 25살이나 된 여동생, 준카를 돌보는 것이 힙겹다. 그러면서도 준카를 좋아하고 기꺼이 돌보아줄 뜻도 있는 ‘리나’라는 여자 친구가 있지만, 그녀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결혼할 여자가 같이 져야할 큰 짐을 가진 그는 그런 조건을 달고 결혼해서 행복해 질수 없다고 생각한다.
노부키는 어릴 때 자살한 어머니 때문에 준카와 함께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이런 성장 배경이 그의 성격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일까.
그는 인간관계가 주는 삶의 재미보다 일에 더 집착하고 때로는 애써 얻은 소중한 것을 무작정 버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오래 사귄 여자 친구와의 관계도 더 이상 진전이 없다. 그런 그가 레이코라는 여자를 만나면서, 레이코의 요조한 듯 음탕한 묘한 매력에 점점 끌려 들어간다.
또 한사람 주요 등장인물은 준카의 천부적 서예 재능을 질투하는 서예작가‘류세이’.
류세이는 그의 어머니에 의해 만들어진 서예작가이다.
류세이의 어머니 역시 서예작가였지만 현재는 뇌경색으로 누워있다. 아들을 작가로 키웠던 대단한 열정은 그대로 집착으로 변해, 병을 핑계 삼아 아들을 여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다.
류세이는 한때 창작만 꿈꾸던 순수작가였지만, 부인 레이코의 경제력에 기대어 병든 어머니를 돌보며 어머니의 서예교습서를 운영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레이코를 만나 열렬히 구애한 끝에 결혼을 했고, 세상이 자신의 서예실력을 알아주길 기다리지만 기대는 좌절되고 상처를 입는다. 언젠가는 성공하여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부인에게 떳떳한 남편이 되고 싶은 욕망은, 그의 순수함을 점차 변질 시키고 서예 실력도 그 자리에 머물게 한다.
그리고 천부적인 서예실력을 가진 준카를 만나 다시 한 번 절망한다.
류세이의 부인인 양호 교사 ‘레이코’.
레이코는 모든 일을 내가 선택하고 책임도 지는 삶,
외로움도 호사롭게 누릴 수 있는 삶,
혼자 시들어가는 삶,
혼자 잠들고 혼자 눈뜨는 삶,
그런 삶의 내면을 지닌 여자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이라는 형태에 그 어떤 기대도 없었고 상대방에게 아내가 있는 것조차 상관없었다. 오로지 상대에 대한 자기의 감정에 따라 움직였다.
류세이의 서예에 대한 재능과 그녀에 대한 류세이의 순수한 열정에 대한 동경으로 결혼한 지 10년. 10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계속된 시어머니 병간호와 늘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류세이. 세월이 그녀의 마음을 변하게 만들었는지, 아님 변함없는 환경이 그녀의 열정과 동경을 좀먹었는지 모르겠지만, 류세이와 결혼할 때 가졌던 동경심과 새롭게 자리잡은 경멸 사이를 오가며 류세이와 시어머니를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주변에 새롭게 등장한 노부키에게 좋은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들 네 사람은 류세이가 시립도서관을 빌려서 개최한 개인전에서 만난다.
준카는 자신이 가진 천부적인 서예 능력을 모른다. 그러므로 류세이가 뭘 부러워하는지도 모른다. 오빠 노부키가 누구에게도 신세지는 것이 싫어 정착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모른다. 그리고 레이코가 자신에게 숨기고 오빠 노부키를 만나는지도 모른다. 준카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 어떤 것에도 질투 따위의 이기적 감정은 없다, 그녀는 그냥 오빠를 좋아하고 레이코와 류세이 그리고 오빠의 여자 친구 리나를 좋아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과 욕망을 채우는데 준카를 이용하거나 관계 속에 끼워 넣을 뿐 준카를 한 사람의 인격체, 그 자체로 봐 주지 않는다.
류세이는 준카의 실력을 어떻게 훔칠까,
레이코와 노부키는 준카를 통한 자연스런 만남을.
그리고 리나 역시 멀어지는 노부키 마음을 준카를 통해 얻고자 한다.
준카가 마지막으로 서 있었던 누사마이바시 다리.
준코를 따라온 서예교습소 원생 요시후미의 비틀린 질투심 때문에 ‘순수의 영역’그 자체인 준카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준카의 죽음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밀려온 후회와 정화의 시간.
그러나 정화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준카가 남긴 ‘마지막 유작에 또 다른 욕망의 파도가 덮친다.
모든 사람의 마음엔 분명 ‘순수의 영역’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수의 영역은 잠깐 존재할 뿐. 곧 뒤따르는 다른 감정에 덮여버리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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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책장을 덮고 다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쓴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순수의 영역>의 마지막 장면처럼.
<순수의 영역>을 읽는 내내 감정을 가라앉히고 주변 사람들의 기색을 살피게 되었다.
아마도 작가가 전달하는 심리 묘사에 나도 걸려들어 주인공의 기분으로 산 모양이다.
몇 년 전 홋카이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지금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삿포로에서 오타루 가는 열차를 탔을 때의 기억.
열차가 오타루에 가까워지면서 철로가 바다 옆을 지났다.
바다를 스치듯 달리는 기차.
파도가 제법 거칠었던 바다가 바로 옆에서 출렁이어 마치 바다 위를 달리는 것 같았다.
광활하고 웅장했던 태평양 바다. 그때 일본이 섬나라라는 것이 몹시 실감났다.
<순수의 영역>을 읽는 내내 오타루로 갈 때 보았던 바다가 떠올랐다.
그리고 겨울 홋카이도의 흰색과 회색이 <순수의 영역> 배경지로 겹쳐졌다. 물론 <순수의 영역> 배경은 일정이 짧아 가보지 못했던 ‘구시로’라는 곳이지만.
구시로엔 세계적인 습원이 있어 꼭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순수의 영역> 때문에 보고 싶은 것이 또 하나 더 생겼다.
몹시 추운 겨울날 아침 이면 구시로 강에 연잎 얼음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구시로 강이 흐르는 누사마이바시 다리에서 연잎 얼음과 시립 도서관을 바라보고 싶다는. 그리고 내 마음의 ‘순수의 영역’을 찾아볼 것이라는.
근데 어쩌나.
홋카이도의 방사능 수치가 엄청 높다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