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서브 로사 4 - 베누스의 주사위 로마 서브 로사 4
스티븐 세일러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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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랜만에 돌아온 <로마 서브 로사> 시리즈입니다! 비교적 빠른 속도로 출간되다가 한동안 뜸해서 어찌 된 일인지 쪼콤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 요렇게 무사히 4권이 나와서 기쁜 마음, 한량 없습니다. 쿄쿄. 제가 워낙 미스터리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로마 서브 로사>의 매력이 미스터리가 전부는 아니거든요. 솔직히, 이 작품에서 미스터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다고 볼 수 없답니다. 그보다는 그 시대 로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내려고 노력한 흔적과 작가가 들려주는 수많은 뒷이야기들에 빠져드는 느낌을 애정하는 거죠. 내가 결코 살아볼 수 없는 세계, 그 세계 속에서도 사람들이 웃고 울고 사랑하고 증오하며 만들어내는 온갖 드라마들이 정말 일품입니다. 

우리의 멋쟁이, 고르디아누스가 어느 새 오십 대를 맞이했습니다. 멋진 남자의 매력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나이를 먹었을 때 더 깊은 맛을 내는 법! 이라고 믿고 싶은 저의 눈에 이 고르디아누스는 여전히 매력남입니다. 그의 큰아들 에코는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쌍둥이를 둔 가장이 되었고, 둘째 아들 메토는 자신이 그토록 동경하던 카이사르 밑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이집트 노예였으나 사랑에 빠져 아내로 맞아들인 아내 베테스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고르디아나도 벌써 열 세 살이 되었으니 세월의 흐름이란!  고르디아누스의 '더듬이' 도 소소한 일거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평온한 생활. 그 평온한 세상을 깨트리기 위해 두 사람이 그의 집 문을 두드립니다. 

척 보기에도 요상한 행색을 한 두 사람. 한 사람은 대모신 키벨레를 모시는 환관 사제인 트리고니온.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고르디아누스가 이집트에 머물 때 배움을 얻었던 스승 디오입니다. 로마의 세력 안에 들어온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독립을 원하는 자국의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다가 로마로 피신해있었는데요, 그 대신 그의 딸 베레니케를 여왕으로 옹립하고자 이집트에서 100인 사절단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온갖 암살과 위협에 사절단은 해체되고 사절단의 수장이었던 디오마저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고르디아누스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족마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고르디아누스는 그의 청을 거절하고, 그 날 디오는 누군가에게 무참히 목숨을 잃습니다. 그 사건을 해결해달라며 매력적인 여인 클로디아가 접근해오고, 고르디아누스는 다시 한 번 그의 '더듬이'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매번 그랬지만 이번 작품에 숨겨진 이야기 역시 복잡하면서도 단순해요. 진실을 찾아 복잡한 길을 돌고돌았지만 그 끝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단순하죠. 게다가 등장인물들조차 쉽지 않습니다. 이집트 패권을 차지하려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그들을 방패로 삼아 권력을 차지하려는 클로디우스와 저지하려는 키케로, 카일리우스. 그리고 그 중심에 디오 살인사건이 있습니다. 이번 편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역시 '정치'의 탈을 쓴 음모와 소문, 배신과 모함입니다. 뱀의 혀를 가진 듯한 키케로가 펼치는 법정공방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어요. [임페리움] 에서 보여주었던 정의로운 모습은 사라지고, 제 머리속에서 키케로는 약삭빠른 이미지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또 대모신을 모시는 트리고니온과 같은 갈루스(환관 사제) 와 축제를 등장시켜 로마의 종교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한층 높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누스의 주사위'는 던질 때마다 새로운 수가 나오는 주사위 수라고 해요. 승리의 확률이 높다고 한다는데 이 작품에 꼭 맞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파헤치고 파헤칠수록 드러나는 새로운 사실들. 새롭게 드러나는 사실들이 많아질수록 사건은 진실에 가까워지죠. 승리는 역시 우리의 멋쟁이 고르디아누스의 것이라는 건 의심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늘 깔끔하게 사건을 해결하는 고르디아누스이지만, 그도 가족 문제는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3권에서의 메토와의 갈등도 그렇고, 앞으로는 딸 고르디아나가 속을 좀 썩일 것 같네요. 베테스다를 똑닮아서 당차고 똘똘한 고르디아나와 아버지로서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고르디아누스가 앞으로 어떤 부녀관계를 보여줄 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이번 편은 특히 이야기가 풍부해서 읽는 즐거움이 컸어요. 1권 이후 제대로 된 '로마 서브 로사'를 보여준 작품인 것 같습니다. 조금 오랜 기간을 두고 출간되어서 그런 걸까요? 이런 큰 재미를 맛볼 수 있다면 기다리는 괴로움도 겪을만 한 듯 싶습니다. 아아, 즐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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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와 코기
타샤 튜더 지음, 김용지 옮김 / 아인스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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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쿄. 요렇게 사랑스러운 책이 또 있을까요? 바라보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따뜻한 책입니다. 타샤 할머이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도, 저처럼 이름은 들어보셨을 거에요. 저도 이 할머이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아요. 그저 전원생활을 하면서 여러 동물을 키우고, 수많은 그림책을 출간했다는 정도랄까요. 제가 이 타샤 할머이에 대히 알게 된 건 저희 엄마 덕분이었답니다. 시골생활을 쪼콤 동경하시는 저희 엄마가 어디선가 이 타샤 할머이에 대해 듣고 저에게 타샤 할머이와 관련된 책을 전부 구입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지금 저희집 거실 한 켠에는 타샤 할머이가 지은 책들이 촤라락, 진열되어 있어요. 집에 오는 친척들이 다 눈을 빛내며 군침을 삼키곤 한답니다. 

하지만 워낙 다른 읽을거리를 쌓아놓고 있는 전 정작 제가 구입한 타샤 할머이 책들을 자세히 읽어볼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 [타샤와 코기] 책을 만나게 된 거죠.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타샤 할머이와 강아지 종류 중 하나인 코기 개들에 관한 이야기에요. 1959년에 기르기 시작한 미스터B를 시작으로 2000년에 태어난 메기까지 수많은 코기와 함께 한 아름다운 이야기랍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글자보다 사진들이 풍부하다는 점이에요. 사진만 보아도 타샤 할머이가 이 강아지들을 얼마나 사랑했는 지 저절로 전해져 오거든요. 

전 사실 이 코기 종을 일본에서 처음 봤어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 때 본 강아지가 정말 이 코기 종이 맞는 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처음 이런 모습을 한 개를 봤을 때 맨 처음 든 생각은 '다리가 무척 짧구나!'였습니다. 북슬북슬한 노란 털은 탐스럽지만 다리가 무척 짧고 여우와 흡사해서 그다지 정이 가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한 수많은 코기 종을 보고 있자니, 꼭 껴안아 보고 싶을 정도로 정이 담뿍 들어버렸답니다. 캬캬. 정말 사랑스러워요. 특히 2000년에 태어난 메기의 표정은 정말이지 '이 개가 뭘 좀 아는구나'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답니다. 아니, 개가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요! 

타샤 할머이는 코기 종을 등장시킨 그림책 [코기빌 마을 축제]를 통해 코기의 인기를 높인 점을 평가받아 1983년 미국 펨브로크웰시코기 클럽의 명예회원으로도 뽑혔다고 합니다. (이런 클럽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그 책이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얻은 인세 수입으로 꿈에 그리던 버몬트 주 산 속에 땅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하니, 살아있는 코기나 그림책 속의 코기나 타샤 할머이에게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셈입니다. 쿄쿄. 쪼콤 가격이 세긴 하지만 타샤 할머이와 코기들의 영혼의 교감을 엿보기에는 더없이 훌륭한 책인 듯 합니다. 아웅, 사랑스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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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빅토르 로다토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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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소녀 마틸다, 죽은 언니의 삶을 스토킹하다-라는 문구만 보고 확 덤벼들었다가, 나가떨어지기를 몇 번.  이렇게 어려운 책은 오랜만입니다. 화자가 어린 소녀인 데다 서술체가 아니라 대화체로 쓰여 있어서 방심했던 탓일까요? 이 소녀, 정말 심오한 정신 세계를 가지고 있어요. 저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정신 세계를요. 게다가 말투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만큼 톡톡 튀고 화제 또한 탱탱볼처럼 탱탱. 여기 저기 튀었다가 부딪히기 일쑤입니다. 덕분에 책을 읽는 기간이 엄청 늘어져 버렸습니다. 영화 <레옹>의 '마틸다'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이 소녀 마틸다, 그녀는 대체 어떤 아이인 걸까요. 

이 책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틸다에게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던 우수한 유전자를 지녔던 언니 헬렌이 있었어요. 네, 있었습니다. 그 언니 헬렌은 이미 이 세상에 없거든요. 마틸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달려오는 기차에 치었다고 합니다. 헬렌을 밀었던 남자가 누구였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고 해요. 엄마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마틸다의 기를 죽였던 헬렌. 언니의 죽음 이후 금이 가기 시작한 가족 관계에 위기를 느낀 마틸다는 스스로 언니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리라 다짐하죠. 헬렌의 이메일부터 조사하기 시작한 마틸다는 생전의 그녀 삶 속으로 깊이 침투하여 언니가 가지고 있던 비밀의 한 자락을 움켜쥡니다. 사랑스러운 소녀보다는 어쩐지 말괄량이 삐삐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마틸다는 과연 언니의 죽음의 비밀을 밝히고 가족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마틸다] 를 제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또래의 아이들이 현실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일 거에요. 아니면 우리가 너무 십대 초반의 소녀들의 마음을 얕잡아보고 있었던 걸까요. 제가 지켜봐온 십대 소녀들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우니까요. 당차고 똘똘하고 머뭇거리지 않으며 똑바로 자신의 길을 향해 달려나가는 마틸다는 그녀의 부모들보다 더 그녀를 대단한 인물로 보이게 해요. 하지만 그런 겉모습 안에는 역시 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혼란스러워 하는 또 다른 소녀가 발버둥치고 있었던 거겠죠. 언니의 죽음의 비밀을 알아내고, 가족의 끈을 어떻게든 이어보겠다고 애쓰는 소녀는 결국, 다른 소녀들이 그렇듯 한 단계 더 높은 계단을 밟게 됩니다. 다만 그 성장이 마틸다에게는 좀 더 가혹했던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책 뒷면 날개에는 오프라 윈프리가 추천하는 여덟가지 질문이 실려 있습니다. 저는 그 중 -좋은 결말보다는 불길한 끝을 기다릴 때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그 불길한 끝이 다가오지 않는 것이겠죠. 생각하기도 싫지만 불길한 끝을 상상해본다는 건, 정말 그것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게 미리 마음단련을 하기 위함이지 않을까요. 문득 죽음과 애도와 성장. 이 세 가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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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기린
가노 도모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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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아주 시시한 이야기.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이야기예요...십 대 때 산다는 게 아주 힘들었어요. 매일 숨이 턱턱 막히고, 살아 있다는 데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할 수 없고...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그 시절은 새하얀 공백이에요. 어떤 친구가 있었고, 무슨 꿈을 꿨고, 뭘 낙으로 삼아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냈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나지 뭐예요. 꼭 스티로폼처럼 하얗고 가볍고 버석버석했던 거예요, 그 무렵의 전.  -p267




진노 선생님이 이 말을 노마 아저씨에게 하는 순간, 저의 십 대를 대신 이야기하는 줄 알았습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에요. 전 '아주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도 숨이 턱턱 막힌 적도 없었으니까요. 적어도 제 자존심상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랍니다. 다만. 그냥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너울너울 흘러가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누군가는 가장 빛나는 십 대를 정말 재미있고 뜻깊게 보냈다고 이야기하던데, 저는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손톱만큼도 들지 않을 정도로 그리 좋은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침에 일어나 학교 가고 공부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평범한 일상에 부모님의 이혼다툼. 그 안에서 내 꿈은 뭐였는지, 그 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냈었는지 저조차도 새삼스레 궁금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진노 선생님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역시 저는 보건실에 갈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 그 선생님과 나는 닮았으니까. 

모르는 척 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나를 둘러싼 투명한 유리벽이 있다는 걸. 그 유리벽은 저에게만 있었던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남학생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틀림없이. 여학생들이라면 그래도 한 번쯤은 유리벽을 가진 경험이 있지 않을까요. 진짜 자신은 유리벽 안에, 유리벽 바깥에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마음. 조금이라도 진짜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진정한 상대를 찾아내고 싶은 바람으로 꾸며진 자신이 있을 뿐이었던 거에요. 저에게는 그 바람을 내보일 수 있는 장소가 보건실이었던 거고, 큰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있는 진노 선생님 앞이었던 거죠. 

제가 죽은 뒤로 이렇게 많은 일이 생길 줄 몰랐어요. 더구나 노마 아저씨가 나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있을 줄이야. 나오코가 그렇게 상처받고 깊은 충격을 받을 줄도 몰랐어요. 조금 아쉬운 건 담임 선생님인 오바타 선생님께 좀 더 마음을 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에요. 뭐, 우리 나이에 선생님들이란 잔소리쟁이에 진심으로 우리 생각을 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선생님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테지만 오바타 선생님의 진심어린 걱정을 좀 더 일찍 알아챌 수 있었다면 저도 이런 지경까지 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갈라진 길에서 유리 기린처럼 고민하고 선택한 건 내 자신이니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없겠지만요. 

그래요. 제가 지은 <유리 기린>은 제 자신을 생각하며 쓴 거에요. 주위 친구들의 선망어린 시선, 나는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대책없는 믿음. 하지만 여러분이 생각하신 그대로 내 안은 비뚤어져 있었어요. 오만하고 변덕스럽고 유리 기린만큼이나 부서지기 쉬운 자신. 그래서 나와 같은 사람을 알아보고 그런 사람들에게 빠져들기도 했죠. 진노 선생님이나 구보타 유리에 선배같은. 글쎄요. 나는 구원한다거나 구원받는다거나 그런 거창한 것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가 끌렸던 사람들에게 진짜 내 자신을 각인시켜두고 싶었어요. 나오코나 진노 선생님, 그리고 나처럼 불안정했던 유리에 선배가 행복해지길 바랐어요. 그러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나의 이 삶도 언젠가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길 거라 생각했거든요. 나의 마지막 선택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건 그냥 남겨두고 싶네요. 

이 모든 일은 제가 소녀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모두 부서지기 쉬운 진짜 자신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그것이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 뿐이에요. 유리벽 안에 갇힌 유리로 된 자신. 그것을 과감히 깰 수 있게 하는 한 두명의 사람만 발견해도 당신은 행복할 거에요. 저는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뒤늦게나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어 기뻐요. 여러분이 저에 대한 책을 냈다는 것도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 사람들의 마음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서 하마터면 내 이야기라는 걸 깜빡 잊을 뻔 했지 뭐에요. 모든 사람이 상처를 이겨내고 행복하길 빌어요. 나를 죽인 그 사람조차도. 과거의 상처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텐데 그 사람도 안타깝네요. 

저의 이 마지막 편지, 잘 전해졌나요? 어떻게, 왜 전해졌는지는 궁금해하지 마세요. 세상은 설명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니까요. 이제 좀 쉬어야겠어요. 어쩐지 마음이 홀가분해져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마지막으로. 고마웠어요. 여러분은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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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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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던 명절도 어느새 끝이 보인다. 먹고 치우고 먹고 치우고. 끼니 때는 왜 그리도 빨리 찾아오는 지 시대가 아무리 바뀌었다고는 해도 여인네들은 부엌에서 허리 펴고 쉴 시간이 얼마 안 되었을 거다. 어렸을 때는 그리도 좋더니, 어른이 된 후에는 명절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한국 여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국 여인이면서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 이렇게 말을 꺼내놓고 보니 이번 비로 피해를 당한 분들에게는 내가 투정을 부리는 정도로만 여겨질 것 같아 민망하다. 빨리 침수피해가 복구되기를. 

잠시 다른 길로 벗어났지만 언제부터인가 명절이 다가오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예전에 학교 졸업하고 공부를 하고 있을 때는 잘 될 거라는 긍정적인 말씀을 많이 해주셨기 때문에 그리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는데 '결혼'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건만 (뭐 거의 되어가고는 있지만) 남자친구는 있느냐, 빨리 만나야 되지 않겠느냐,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상대가 있으면 얼른 가라 등등 나의 명절은 결혼에 관한 온갖 이야기로 가득 메워졌던 것이다. 주변에서 자꾸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니 부모님도 마음도 더욱 조급해지신 듯, 친척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보름달을 볼 때마다 '우리딸, 빨리 결혼하게 해주세요오'를 연신 외치느라 바쁘시다. 

'내가 결혼하려고 태어난 건 아니잖아'를 소심하게 읊조리면서, 그런 와중에 제인 오스틴의 [설득]을 읽고 있자니 예나 지금이나 '결혼'이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인 건 부정할 수 없겠다. 남녀의 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문제를 극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다루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제인 오스틴. 그녀의 작품에는 통속소설이라고 간단히 치부해버릴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결혼에 대해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 시대상, 남녀가 밀고 당기기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 어디서 본 것 같은 설정임에도 읽다보면 헤어나올 수없는 매력이 느껴진다. 

이야기는 '설득'에 의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한 연인으로부터 비롯된다. 앤 엘리엇과 웬트워스 대령. 결혼을 약속했던 그들의 관계는 앤이 그녀가 존경하는 레이디 러셀의 조언에 흔들리면서 깨어지고 그로부터 8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시작된다. 이야기는 철저히 앤의 관점 (정확히는 작가의 관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웬트워스 대령의 심리를 정확히 알 수 없어 답답하기는 하다. 게다가 요즘처럼 톡톡튀는 남녀관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주위환경을 고려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관계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밀고 당기기식의 사랑이 보이지도 않다. 하지만 차근차근 전개되어가는 과정과,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분위기의 사실적 전달을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의 결혼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남녀간의 사랑이나 주위 사람들의 참견과 설득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과 국경을 초월해 가장 재미있는 요소 중 하나다. 오늘날에는 결혼정보업체로 대변되는 '결혼시장'이, 먼 옛날에는 사교계에서 행해졌을 수도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하지만 어떤 조건을 가졌든 간에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를 생각하는 변치않는 마음, 신뢰라는 것에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이 인기가 많은 것은, 그런 변하지 않는 마음들이 있다는 것을 고전으로부터 확인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구 때문이 아닐까. [오만과 편견] 과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이고, 제인 오스틴의 다른 작품들과도 그다지 다른 분위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설득] 역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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