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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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불화는 신들과 인간들 사이에서 사라지기를! 그리고 현명한 사람도 거칠어지게 만드는 분노도 사라지기를! 분노는 똑똑 떨어지는 꿀보다 더 달콤하고 인간들의 가슴속에서 연기처럼 커지는 법이지요. 꼭 그처럼 저도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에게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지난 일을 잊어버리고 가슴 속 분노를 억제해야지요. 이제 저는 나가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헥토르를 만나기 위해.

p444

예기치 않은 사고로 한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추방당한 파트로클로스를 두고 아킬레우스는 '놀랍다'라고 이야기한다. 빛나는 황금같은 왕자, 여신과 인간의 아들로 태어나 '우리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가 될 거라는 예언'에 걸맞는 능력을 가진 그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를 동무로 지정했다. 어째서 그였는가. 왜 파트로클로스가 아니면 안되었을까. 처음 그 의문을 떠올렸을 때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와 모든 면에서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작고 가냘펐으며 빠르지도, 튼튼하지도 않은 데다 노래 실력도 형편없는 아이. 아버지로부터도 '아들이라면 저래야 하는 거다'라며 비난을 받는 아이. 자신의 아들을 추방하는데도 일말의 망설임조차 느끼게 하지 않는 아이. 그 사고가 있었던 이래 그의 주변에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아킬레우스와 모든 것이 다르다고 해도 '놀랍다'라는 말로 파트로클로스를 표현했다는 것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모두가 아킬레우스를 뛰어난 전사로 여겼다. 아리스토스 아카이오이, 그리스의 으뜸. 여신인 어머니 테티스마저 그가 비록 요절하기는 할 것이나 엄청난 명예를 얻게 될 것이라 말했으므로. 사람들 앞에서 아킬레우스는 완벽해야 했고, 그 또한 자신을 그렇게 옭아맸다. 그가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한명, 바로 파트로클로스였다. 파트로클로스 앞에서만 아킬레우스는 솔직해질 수 있었고, 함께 해변을 달릴 수 있었으며, 아무도 봐서는 안 되는 훈련하는 모습조차 보여줄 수 있었다. 오로지 단 한명,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필타토스.

 

트로이아와의 전쟁에서 헥토르를 죽이게 되면 자신에게도 금방 죽음이 다가올 것을 알고 있는 아킬레우스에게 명예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더욱 그 명예에 집착했다. 냉정하고 이기적이고 오만했다. 그러나 '놀랍다'고 표현한 것처럼 파트로클로스는 굉장히 다정하고 이타적인 사람이다. 끌려온 여자가 심한 취급을 당하지 않도록 최대한 많이 자신들의 막사로 데려와 보살폈으며, 전투에는 소질이 없는 대신 상처받은 사람들 옆에서 그들을 치료하고 위로했다. 아킬레우스를 비롯한 모든 남자들이 명예와 탐욕에 매달릴 때 그는 오히려 그 속에서도 소소한 것들과의 즐거움을 선택했다. 그래서 '놀랍다'는 것이다.

 

작품이 파트로클로스의 1인칭 시점에서 쓰였기 때문에 그의 아킬레우스를 향한 사랑이 절절히 느껴지는 데 반해, 아킬레우스의 감정선은 다소 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피를 내려다보면서 내가 죽을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 하지만 꿈속에서 나는 아랑곳하지 않아. 가장 크게 느껴지는 감정이 뭔가 하면 안도감이야.

p287

아킬레우스는 꿈을 꾼다. 자신이 헥토르를 죽이는 꿈. 그런데 꿈 속에서 그가 느끼는 감정은 안도감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일 때 파트로클로스는 이미 세상에 없으므로. 헥토르를 죽여야 자신도 죽을 수 있다면 기꺼이-라는 심정. 이 장면 하나로 그가 얼마나 파트로클로스를 진심으로 생각했는지 모두 설명된다.

 

인간들과 신이 함께 하는 세상의 이야기가 작가 매들린 밀러의 손에서 재탄생됐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사랑 뿐만 아니라, 탐욕에 물들어 자기 잇속만 챙기려하는 아가멤논, 번지르르하게 말을 늘어놓는 오디세우스, 아킬레우스보다 더 오만방자하게 굴다가 그 자만심으로 결국 목숨을 잃은 피로스, 심지어 여신 테티스 등 다양한 캐릭터의 목소리들이 녹아들어있다. 사랑하는 이의 추억을 나눈 테티스가 파트로클로스에게 베푼 마지막 자비, 결말까지 아주 만족스럽다. 결국 이 작품은 그리스 영웅들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가슴 절절한 사랑이야기다.

 

사실 이 [아킬레우스의 노래]를 두 번째 읽는다. 처음 읽고 났을 때 도저히 리뷰를 남길 수 없었다. 내 글로 내가 느꼈던 수많은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한줄 평이라면 당연히 -잊을 수 없는 작품-이라는 평을 남겼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다시 읽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나는 무엇에 이리 울컥하는 걸까. 어떤 부분에 이렇게 나의 감정선이 흔들리는 것인가. 매력적인 작가, 인상적인 작품. [키르케]도, 또 그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는 말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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