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여자가 말하다 - 여인의 초상화 속 숨겨진 이야기
이정아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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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장영은의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을 읽고 난 뒤부터였으니,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거창하게 여성 서사라 지칭하기는 했지만, 이후 여러 여성들의 지나온 삶의 궤적이 궁금해졌다. 그녀들이 이루고 싶어했던 것들, 그녀들이 걸어왔던 과정, 그런 그들을 가로막았던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장벽들. 마치 과거의 그네들이 여럿이자 한몸으로 나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서 여성을 주제로 한 책을 찾아 장바구니에 가득 쌓아두었다. 어쩌면 그 때부터였던 걸까. 즐거움만을 위한 독서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의 독서의 목적은 '즐거움의 추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책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 지, 그리 깊게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한 페이지의 종이를 넘기는 것만으로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다면 더 무엇을 바라야 하는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가슴 속에 의문이 피어났다. 나는 왜 독서를 하는가. 두 아이를 양육하면서 잠자기에도 모자르는 시간을 아껴 왜 책을 읽는가. 아직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 속에서 이 책 역시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림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었던 여성들의 이야기이므로.

 

모든 '그림 속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작품의 주인공인 여성보다 화가 자체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 중에서 나의 눈에 띈 여성 중 한 명은 '베네치의 매혹적인 매춘부' 베로니카 프랑코였다. 그녀는 26세기 베네치아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자 코르티잔(고급 매춘부)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자유분방한 기질, 강한 성적 매력으로 수많은 남성들을 유혹했고 코르티잔 최초로 베네치아 문학 살롱에 참여해 쟁쟁한 학자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1575년에는 자신이 쓴 시와 서간문을 엮은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화가 도메니코 틴토레토의 <가슴을 드러낸 여인의 초상>은 베로니카를 고전적 미학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냉철한 지성으로 가득한 얼굴과는 대비되는 관능적인 움직임과 드러내진 가슴이 특징이다. 당시 베네치아 남성들은 이 그림에 뜨거운 찬사를 보낸 반면 여성 귀족들은 적대감을 드러냈지만 정작 베로니카는 초상화에 크게 만족했고 세상의 논란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당시 베네치아 여성들에게 정절이 강요되었던 시대적 배경과는 달리 코르티잔이었으나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누었고, 정절을 강요받지 않았으며, 글을 쓰고 노래를 한 여인. 외출은 물론 여행도 마음껏 다닌 이 여인은 지식, 예술, 유행, 사치, 낭비의 정점에 서서 문학과 성악, 라틴어를 사랑했다. 자신의 성적 매력을 영민하게 이용했으나 1580년 경 전쟁과 전염병이 도시를 덮쳐 불안과 공포가 매춘부를 향한 폭력으로 표출되자 마녀로 몰리기도 했지만 위기를 모면한 후, 비참한 상황에 놓인 여성들과 고아들을 돌본 베로니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신의 자리를 정확히 파악한 주체성 있는 여성의 표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 여인은 화가이자 그림 속 주인공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은 인물이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를 그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그녀는 17세 되던 해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미술 스승인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폭행은 몇 개월에 걸쳐 반복적으로 행해졌으며 순진한 소녀였던 아르테미시아는 자신과 결혼하고 싶다는 스승의 말을 믿었으나, 그는 이미 유부남에 아내의 어린 여동생까지 강간한 파렴치한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아르테미시아의 아버지가 소송을 걸었지만 모든 수모는 그녀의 몫이었고, 타시의 유죄가 확정되었음에도 그가 감옥에 가는 일은 없었을 뿐더러 아버지는 적당한 돈을 받고 타시와 화해한다. 그 돈으로 딸을 서둘러 무능한 화가와 결혼시킨 어리석고 멍청한 아버지. 피해자였으나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은 아르테미시아는 거장 카라바조와 비교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으나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하지 못했다. 성 추문에 휩쓸린 그녀의 그림을 아무도 사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안에는 아르테미시아의 분노와 테시를 향한 복수가 가득 담겨 보는 이로 하여금 목이 베이는 적장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두 인물에게 자신과 테시의 얼굴을 담아 영원한 복수를 완성한 아르테미시아. 당시 그림 관람자가 기득권층 남성들인 탓에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은 한동안 창고에 처박히지만 그녀는 1616년에 여성 최초로 피렌체 화가 길드에 가입한다. 고난과 분노를 딛고 당당했던 화가. 그녀의 삶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가 보여주겠어요. 당신은 카이사르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p113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의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시달이다. 독특한 외모로 화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고 낭만을 쫓는 이들의 숭배를 받은 그녀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열정적인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랑이 너무 지나쳐 숭배가 된 나머지 정상적인 남녀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그들은 결국 시달이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해 망가져가면서 파국을 맞이한다. 1861년 딸을 사산한 후에는 아편에 손을 대 끝내 급성 아편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시달. 자유로웠지만 평범한 한 여인의 삶이 왜곡된 사랑을 만나 어떻게 망가졌는지 알 수 있는 예라고 할까. 다만 <오필리아>를 관람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큰 행운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정월(나혜석)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여성으로 조선 여성 최초로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최초로 유화 전시회를 열었으며 세계 일주를 하고 문인 및 여성운동가로 활동했다. 유교의 영향이 강하게 남은 개화기 조선에서 자유 연애를 선언하고 여성 해방을 주장했으며 3.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 옥고를 치르기도 한 사람. 조선 최초의 페미니스트로서 글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조선의 가부장적 제도에 맞섰지만 운명은 그녀를 결코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결혼 기간 내내 바람을 피운 남편 김우영과는 달리, 최린과 단 한 번 연애했다는 이유로 빈몸으로 집에서 쫓겨났고 죽을 때까지 자녀들도 만나지 못한 채 친정 식구들에게도 버림받았다. 그림을 통해 재기를 시도했지만 작품은 사람들의 비난만 살 뿐이었고, 설상가상으로 1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화실에 불이 나 평생 그린 작품 대부분을 잃고 만다. 1938년 마지막 작품인 <해인사 석탑>을 완성한 후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녀. 결국 무연고자 병원에서 1948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왜 그렇게 여성들의 삶은 굴곡진 것이어야 하는가. 화가로서도 그림의 대상으로서도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이야기들에 더 마음이 쓰였다. 물론 화가의 충만한 사랑을 받으면서 미소짓는 여인의 그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원래 인간이란 좋은 일보다 나쁜 일에 더 귀가 기울여지는 법 아니었던가. 모든 여인들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과 관련된 화가의 일생, 에피소드, 시대적 배경 등에 대해 촘촘히 알 수 있어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2020 우수출판 콘텐츠 선정작>에 꼽힐만 하다.

 

** 출판사 <영진닷컴>으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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