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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파수꾼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3월
평점 :
주거침입, 기물파손, 절도미수 혐의로 유치장에서 감옥 갈 날만 기다리는 레이토 앞에 생전 듣도보도 못한 이모님, 야나기사와 치후네가 나타난다. 레이토의 어머니 미츠에와는 이복자매 사이로, 어째서인지 그 동안 연락 한 번 없다가 이번에 레이토 일로 할머니가 다급하게 소식을 전하면서 그를 도우러 와준 것. 그런데 감옥에서 풀려나게 해주는 조건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진 이 부자 이모님은 레이토에게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녹나의 파수꾼이 되어달라고 하는데, 단순히 미신이나 전설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이 나무에 기념을 하러 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딘가 심상치 않다. 녹나무에 관한 것은 모두 스스로 직접 체득해야 한다면서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무엇 하나 가르쳐주지 않는 치후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요청으로 기념하러 오는 사람들, 이웃들도 레이토에게 말을 아낀다.
답답함과 무료함이 느껴지는 생활이지만 감옥에 가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하며 생각보다 성실하게 파수꾼 역할을 수행해내는 레이토. 어느 날 아버지의 뒤를 쫓아 녹나무에서 벌어지는 일을 파헤치려는 대학생 유미를 만나게 되고, 그녀가 아버지가 간직한 비밀을 캐내는 일에 동참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녹나무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치후네가 야나기사와 가문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입장, 그녀의 과거, 레이토의 어머니 미츠에와 관련된 이야기등을 알게 되면서 점차 그녀에게 가족의 정을 느껴가는 레이토다. 유미의 아버지가 간직한 비밀, 또 다른 기념자 소키의 사연, 그리고 차후네가 감추고 있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작품은 감동적인 하모니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대부분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할까요(왠지 정중하게 써야 할 것 같은 기분). 그의 미스터리 작품들도 물론 좋아하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에는 그야말로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미스터리와 휴머니즘의 정수를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을 따스하게 비추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번 [녹나무의 파수꾼] 이 더 기대되었다고 할까. 어쩐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 맛보았던 그 감동을 이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미야를 뛰어넘는 작품은 한 동안 보지 못할 듯 하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미야는 역시 최고였던 지라.
녹나무의 비밀을 밝히는 건 엄청난 스포가 될 것 같아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녹나무가 존재한다면 정말 멋진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말이나 글로 전해지지 않는 어떤 것을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감사의 마음, 죽은 이에 대해 오롯이 생각할 수 있는 공간. 미스터리 작품 속에서 인간의 선함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악인이 있고, 그 악인이 저지른 악행을 추적해나가는 것이 기본 플롯인데 반해 [녹나무의 파수꾼]에서는 녹나무에 얽힌 미스터리와 더불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선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
주인공 레이토의 성장을 그려낸 작품으로 손색 없기도 하다. 어수룩하고 미덥지 못했던 그가, 녹나무 파수꾼으로서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해냄과 동시에 누군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를 자청하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어쩌면 그 또한 녹나무가 레이토에게 주는 선물이었을까. 작가의 미스터리 작품들도 물론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장르의 이야기를 더 많이 발표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따스한 온기,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