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Yujin's Book Story (Yujin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yujin</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un, 24 May 2026 16:47:57 +0900</lastBuildDate><image><title>Yujin</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4024916328087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yujin</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Yujin</description></image><item><author>Yujin</author><category>Everyday, Every night</category><title>4월 독서목록</title><link>https://blog.aladin.co.kr/yujin/17256872</link><pubDate>Mon, 04 May 2026 13: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ujin/17256872</guid><description><![CDATA[1. 양면의 조개껍데기(김초엽. 래빗홀. 2025. 384쪽): 자기 자신이 되는 꿈을 꾸는 존재들의 이야기. 그 꿈은 녹슬고 싶은 안드로이드의 것이거나(&lt;수브다니의 여름휴가&gt;) 분리된 자아를 아니 육체를 공유하는 또다른 나를 없애고 싶어하거나(표제작) 하는 걸 넘어 다른 세상으로의 이동/이주/침투를 원하기도 한다(&lt;달고 미지근한 슬픔&gt;,&lt;비구름을 따라서&gt;). 가능하거나 불가능하기도 하고, 이루거나 포기하기도 하는 꿈. 비록 미래 혹은 이곳이 아닌 존재들의 이야기이지만 지금 여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인 바로 핍진성이 이번에도 오롯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가장 좋았던 건 동화같은 &lt;소금물 주파수&gt;.<br><br>2. 엄마 집에서 보낸 사흘(프랑수아 베예르강스, 양영란 역. 민음사. 2007. 233쪽): 소설가인 화자는 아내로부터 자신이 글을 쓰지 못하는 동안 가족들에게 예민하게 굴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선인세를 받은 출판사에 뭐라도 줘야 할 지경이라 화자는 일단 그간 집에 오라고 성화를 하신 엄마네 집에 머물면서 책을 써보기로 한다. 하지만 엄마 집에는 가기 싫다. 화자는 엄마와 엄마의 애인, 다섯 누이들, 그리고 여러 애인의 이야기를 한다.<br>철이라고는 전혀 없는 아들 - 막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 이자 습관적으로 바람 피우는 남편이면서 슬럼프에 빠진 작가인 화자는 그야말로 애물단지다. 엄마 집에 가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가는 것조차 하지 않으면서 계속 자신의 페르소나만 만들어내고, 비슷하게 전개되는 애인들과의 이야기만 늘어지게 할 뿐이다. 캐릭터가 한심하긴 하지만 전혀 공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공감하는 것도 아니지만. 엄마 집에 가긴 가야하는데 귀찮기도 하고, 엄마가 딱히 보고 싶지도 않지만 엄마의 하소연에는 응답을 해야 할 거 같고. 애인들에 대해 쿨하게 굴고는 싶지만 사실은 찌질하다는 걸 들키고야 말고.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간다. 그래서 조금은 갈피를 잡기 힘들기도 하고 단순히 철없음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문제들도 슬쩍 보이기는 하지만 2005년 작품이라는 점을 크게 감안해서 흐린 눈으로 넘어가 주기로 했다. 다만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번역되더라도 - 그럴 일은 요원해 보이지만 - 읽지는 않을 것이다.<br><br>3. 대문자 뱀(피에르 르메트르, 임호경 역. 열린책들. 2026. 368쪽): 사랑하는 작가의 초기 미발표작. 저자는 초기에는 범죄 소설을 쓰다가 공쿠르 상 수상 이후에는 범죄 소설은 더이상 쓰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 책은 저자의 초기 작품이고, 저자 또한 자신이 마지막으로 출간하는 범죄 소설이 이 작품인 게 상당히 의미있다고 얘기한다.&nbsp;<br>예순 셋 마틸드는 천천히 운전을 해서 포슈 가로 접어든다. 차를 세우고 내려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하던 남자의 생식기와 목에 총을 쏜 후, 겁에 질린 반려견에게마저 총을 쏜다. 그리고 루틴을 지켜 쉴리 다리로 가지만 총을 버리는 대신 그대로 집으로 와 싱크대 서랍에 넣어둔다. 죽은 남자는 재벌 기업가. 이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마틸드를 관리하는 '인사부'의 앙리는 평소와는 다른 마틸드의 일 처리에 그녀에게 연락하기 전에 그녀가 요청한 무기와 방법 등을 점검하는데, 그녀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틸드는 사실 최근들어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과거 레지스탕스 시절부터 냉혹하게 일을 처리해 왔던 자신을 믿기에 자신이 적어 놓은 쪽지와 처리한 - 하지만 사실은 처리하지 않은 - 무기들이 제대로 처리됐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한편 형사 바실리에브는 이 사건이 다른 사람들의 짐작처럼 원한에 의한 살인이 아닐 거라는 예감을 가지지만 사건에서 배제된다.<br>마틸드의 캐릭터가 정말정말 매력적이다.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킬러라니. 물론 전에 없던 캐릭터는 아니지만 그녀만큼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는 캐릭터는 드물다. 게다가 마틸드는 공과 사를, 연민 혹은 추억과 생존을 구분한다. 그래서 그녀의 움직임이 불안하면서도 기대됐다. 이야기는 앞을 알 수 없게 전개되고, 예상치 못한 죽음도 - 마틸드에 의해 혹은 상관없이 - 계속 생겨나서 집중하며 읽게 된다. 거기에 더해 이 책의 결말은, 정말 강렬하고도 완전했다. 그동안 이 저자의 범죄 소설은 의도적으로 피해 왔지만 이제는 읽어봐야겠다.<br><br>4. 아서 밀러 희곡집(아서 밀러, 김윤철 역. 평민사. 2000. 366쪽): &lt;시련&gt;,&lt;대가&gt;,&lt;추락 이후&gt; 세 편의 희곡이 실려있다. &lt;시련&gt;은 전에도 읽었지만 다시 한 번 읽었고 나머지 두 편은 처음이다. 아버지의 유품이 쌓인 다락방을 정리하기 위해 온 부부와 중고물품처리업자 이야기인 &lt;대가&gt;와 한때 촉망받는 신인 스타였던 여배우의 이야기인 &lt;추락 이후&gt;는 처음일 뿐 아니라 저자의 작품들 중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서 더 흥미로웠다. &lt;시련&gt;에서는 시간이 지나고 대화를 나눌수록 흔들리는 빅터의 심리 묘사가 대사를 통해 섬세하게 드러나는 게 인상적이었고, &lt;추락 이후&gt;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여러 등장 인물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연출이 흥미로웠다. 희곡 읽는 건 좋아하지만 연극 공연 관람에는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lt;추락 이후&gt;는 공연을 보고 싶어질 만큼.&nbsp;<br><br>5. 무료 주차장 찾기(오한기. 작가정신. 2025. 156쪽): 연작 소설 세 편. 전업 작가인 화자는 글도 잘 안 써질 뿐 아니라 청탁도 들어오질 않고 있는 상황이다. 육아를 전담하면서 여러 알바를 하고 틈틈이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며 주말에는 딸이 좋아하는 숲 체험학습을 위해 올림픽 공원에도 간다. 이 과정에서 가장 문제되는 건 주차 요금. 주차 문제는 딸의 어린이집 친구 아빠를 열받게 해 그가 행동(?!)을 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화자와 멀어지게도 하며 화자의 과외 수입원이 되거나 예상외 지출 항목이 되기도 한다.&nbsp;<br>뭐랄까, 재미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nbsp; 공감을 못한 건 내가 운전도 육아도 안 하는 상황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필력이 약하다는 것도 한몫 했다고 생각한다. 이 글들을 만약 블로그에서 봤다면 오, 잘 쓰네 하며 읽었을 지도. 하지만 저자가 그리고 발문을 쓴 김화진 작가가 말한 대로 에세이 같기도 소설 같기도 한 글들을 출간된 책으로 보니 뭔가 싱거운 느낌이 든다. 이건 플롯이나 스토리의 문제는 아니다. 행간에서 '어때, 이 정도면 진짜 있었던 일 같지? 근데 이게 소설일까, 에세이일까?'하고 이죽거리는 듯한, 그걸 감추지 않는 저자의 화법이 좀... 굳이 이 작가의 글을 읽고 싶지 않아진달까?&nbsp;<br><br>6. 여름철 대삼각형(이주혜. 민음사. 2025. 240쪽): 유산 후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는 남편과 이혼한 후 조용하지만 약간은 무기력한 삶을 사는 태지혜. 어릴 때 부모에게 버림받고 할머니 손에 자라 처음 고백받은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일견 평범한 듯 살고 있는 송기주. 학교 선생님이었지만 공교육의 무기력함에 상처받고 학원 강사로 전직해 아버지의 임대아파트에 얹혀 살다시피 하는 반지영. 이 세 여성의 이야기가 조금씩 전개되며 엮인다. 처음엔 그저 비슷한 또래 여성들의 세 가지 다른 삶을 이야기하려나 싶었는데 물론 그런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뜻밖에도 꽤 장엄한(?) 결말을 맞이한다.&nbsp;<br>가족과 직장, 주거 문제와 부모, 자식간의 관계 등 삶을 옭아매는 건 하나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힘든 삶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내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모여서 나누면 조금 가벼워지기는 하지. 서로 다른 지점에서 빛나는 세 개의 꼭지점이 여름철 대삼각형을 이루는 것처럼, 각자의 자리에서는 조금 초라한 빛일 수도 있지만 선을 그어 연결하면 무엇보다도 찬란할 수 있다.&nbsp;<br><br>7. 피아노에 관한 생각(김재훈. 책밥상. 2024. 232쪽): 작곡가이자 오랫동안 피아노를 연주하고 관련 공연을 연출하기도 한 저자가 피아노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는다. 단순히 추억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물론 부제가 '버려지는 피아노를 만지며'인 만큼 가장 큰 비중은 더이상 '인기 악기'가 아닌 피아노에 대한 안타까움이 차지한다. 하지만 피아노의 역사와 저자의 과거, 저자가 피아노를 소재로 연출한 공연에 대한 이야기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br>나 또한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웠고, 학원 가기 싫어서 몸부림쳤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후회되기도 한다. 악기 하나 제대로 익혀두는 게 얼마나 삶에 큰 윤기를 주는지 그때는 몰랐다는 게. 저자는 피아노에 소질도 있고 흥미도 있었나보다. 어릴 때의 여러 일화들이 공감이 가기도 했고 약간은 부럽기도 했다. 특히 저자가 작곡을 전공하게 된 계기인 고등학생 때 조율사와의 만남은 은은하게 감동적이었다. 직전에 선생님과의 대화가 있어서, 통찰력이란 지식이 많고적음의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저자의 피아노에 대한 애정이야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만, 저자에게선 단순한 애정이 아닌 그 이상의 과감하고 이성적인 면이 보인다. 이건 단순히 피아노를 해체하여 PNO를 만든 것만을 보고 얘기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런 면이 있었기에 저자의 손에 의해 피아노의 수명이 조금은 더 늘어날 수 있었겠지.&nbsp;<br>읽으면서 나도 피아노를 치던 과거가 그리워졌다. 지금도 악기 중에서 피아노를 가장 좋아하고 피아노 협주곡이나 리사이틀 공연 실황을 자주 보고는 하지만, 다시 한 번 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nbsp;<br><br>8. 방해금지(프리다 맥파든, 김대웅 역. 북플라자. 2026. 332쪽): 퀸 알렉산더는 남편을 죽이고 차로 도망치는 중이다. 남편은 퀸을 오랫동안 학대해 왔고 오늘 저녁에도 퀸의 목을 졸랐다. 퀸은 그저 손에 닿는 부엌칼을 휘둘렀을 뿐이다. 남편의 시신을 부엌에 놔둔 채 차로 국경을 향해 가지만 폭설에 발이 묶이고, 퀸은 어쩔 수 없이 가까운 모텔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모텔에 투숙객이라고는 점쟁이 노파 한 명 뿐. 주인 남자는 친절하긴 하지만 그와 함께 운영한다는 아내 로잘리는 보이지 않고, 장기투숙객 그레타는 퀸에게 오래전 이 모텔에서 한 여자가 살해당했고 범인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퀸은 일단 오늘밤만 넘기기로 하고 투숙하는데, 퀸에게 슬픈 건 유일한 가족인 언니 클라우디아를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것 뿐.<br>익숙한 듯 새로운 이야기이다. 그레타의 존재와 행동이 신비감을 주고 로잘리와 닉이 의심스럽지만 반전은 따로 있었다. 그들 각각의 사정이 모두 약간씩 슬펐다. 심지어는 불륜녀마저도.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지만 각자의 상처는 흔적을 남길 거 같다.<br><br>9. 디카페인 커피와 무알코올 맥주(조우리. 마음산책. 2024. 220쪽): 11편의 순한 이야기. 대부분의 화자가 여성, 퀴어 등 사회적 약자이다. 이들은 성향도 취미도 생각도 다르지만 서로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모두가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관계에서움츠려들지도 않는 착한 존재들. 이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소설집 제목처럼 정말 자극없이 재밌는 이야기들.<br><br>10. 뤼미에르 피플(장강명. 한겨레출판. 2025. 392쪽):&nbsp; 신촌 뤼미에르 빌딩 8층에 사는 각양각색의 인간들의 사연. 평범한 사람은 없다. 박쥐 인간이거나 쥐 인간이기도 하고, 어느날 아침 깨어보니 전신마비 상태이거나 빚을 갚기 위해 매를 맞아야 하기도 하며 노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무녀이기도 하다. 이야기들이 다 신박해서 재밌게 읽었다. 간혹 좀 징그럽거나 슬프기도 했지만. 가장 좋았던 건 역시 &lt;810호 되살아나는 섬&gt;. 진짜로, 누군가 이 자연을 되살리는 노래를 좀 불러줬음 좋겠다.&nbsp;<br><br>11. 역사의 끝까지(루이스 세풀베다, 엄지영 역. 열린책들. 2020. 320쪽): 후안 벨몬테는 과거의 혁명 전투에서의 경험을 모두 내려놓고 이제는 해변가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자신을 절대적으로 따르던 동지 한 명과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수상쩍은 남자가 찾아와 후안을 산티아고로 호출하고, 그곳에 간 후안은 옛 상관이었던 크라머와 마주한다. 크라머는 최근 칠레에 입국한 두 명의 용병 - 에스피노사와 살라멘디 - 을 찾아달라고 하고, 후안은 옛 동료였던 그들을 찾아낸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고용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유유히 도망친다. 후안은 그들의 소재를 크라머에게 알렸음에도 작전이 틀어진 것에 또다른 음모가 있음을 짐작하고 크라머와 크라머에게 의뢰한 KGB 장교 출신인 슬라바를 찾아간다. 후안은 에스피노사와 살라멘디가 사실은 피노체트 시절 고문 기술자였던 미겔 크라스노프를 탈옥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br>길고 긴, 깊고 깊은 역사를 압축해서, 그것도 조금도 생략하거나 간과하는 부분 없이 읽은 기분이다. 그만큼 저자의 필력이 대단하다. 좋아하는 작가라고는 하지만 오래 전 세 권 정도 읽고는 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집어든 책이 긴 여운을 준다. 특히 베로니카가 내뱉은 처음이자 마지막 그 말들이. 내가 베로니카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그리고 내가 후안이라면 절대 듣지 않았을 그 말이. 과연 진정한 단죄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그게 가능은 한 걸까? 혹은 용서는? 난 이런 상황이라면 용서따윈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지만 베로니카의 마음 속에 있었던 건 어쩌면... 아, 다시 읽어야겠다.<br><br>12. 기기묘묘 방랑길(박혜연. 다산책방. 2025. 320쪽): 마을의 최대감 댁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인 금두꺼비가 없어졌다는 것. 집안의 종들이 괜한 추궁을 당하지만 하인들은 금두꺼비가 살아나 스스로 담을 넘었다고 한다. 이른 아침부터 웅성대는 것을 흥미롭게 듣고 최대감 댁을 기웃거리던 오지랖 넓은 윤대감 집 막내 아들 효원은 그 일을 해결해 보고자 하는데, 친구인 오윤이 마을 근처 산에 사는 사로라는 자에 관해 귀띔해 준다. 여우의 자식이라는 풍문이 도는, 신비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며. 효원은 사로와 함께 금두꺼비 일을 해결하고 마침 이제는 길을 떠나겠다는 사로에게 동행을 청한다.&nbsp;<br>제목에서 기대를 내려놓고 시작했으나 뜻밖의 진중한 이야기를 만났다. 어쩌면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어릴 때 전래 동화집에서 읽었음직한 이야기들이지만 사로와 효원의 우정과 애민의 마음이 잘 배어나오는 따뜻한 이야기들이다. 권선징악은 기본으로 갖고 가고 거기에 유머코드가 살짝 더해지는데 과하지 않아서 좋았다. 마지막 챕터에선 조금 감동적이기까지. 2권이 나와도 좋을 듯.&nbsp;<br><br>13. 나의 챔피언 런트(크레이그 실비, 고정아 역. 미세기. 2024. 324쪽): 양 목장을 운영하는 애니네 집. 애니에게는 특별한 개 런트가 있는데, 런트는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움직이지 않고 오로지 애니의 말만 듣는다. 지역은 오래전부터 경제적으로 불황이 계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가뭄까지 더해져 애니네 목장도 많이 어렵다. 이 와중에 동네의 목장들을 모두 사들이고 물길마저 막은 빌런 변호사는 애니네 목장도 탐낸다. 그러던 중 런트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애니. 하지만 런트는 다른 사람이 있으면 움직이지 않는데...<br>초등 고학년 정도에게 권할 만한 동화. 하지만 약간의 오류(?)는 있다. 런트가 다른 사람이 보이면 꼼짝도 안 한다고 하는데, 가끔은 움직이나 보다. 적당히 현실적이고 꽤 따뜻했던 이야기였다.&nbsp;<br><br>14. 젊음의 나라(손원평. 다즐링. 2025. 292쪽): 화자 '나라'의 꿈은 배우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AI가 연기하고 만들어내는 컨텐츠가 가득한 상황. 나라는 슈퍼리치들의 유토피아 '시카모어 섬'에 스탭으로 들어가 그곳의 극단에서 연기하게 되기를 바라며 자주 VR로 그곳에 접속하지만 현실은 초라하다. 유일한 가족인 엄마와는 긴 통화조차 어색한 사이고, 돈 때문에 함께 사는 룸메이트인 이민 2세대 엘리야는 자신의 외모가 '진짜 한국인'과 다르다는 걸 마치 공인된 사회적 약자로서의 권리인 양 이용한다. 고령 인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화 사회에 돌입한 상황에서 노인 인구들은 경제 상황에 따라 5등급으로 나뉜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데, 나라는 이 시설을 운영하는 기업 유카시엘에 입사를 하게 된다. 유카시엘은 시카모어 섬과도 연계되어 있다는데...<br>고령화 사회가 얼마나 진행되든, 소위 말하는 복지라는 건 결국 경제력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그건 작가가 상상한 미래든 지금 독자들이 살고 있는 현재든 마찬가지. 그래서 작가의 상상이 새삼 끔찍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시카모어 섬이라는 (허황된) 유토피아라도 바라볼 수 있는 이 책 속 사회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일 것이다. 같은 시각에서, 엘리야의 노인 혐오와 삐뚤어진 피해 의식도 새롭지 않다. 여러 설정만 근미래일 뿐, 결국 지금 여기의 이야기.&nbsp;<br>(스포)다만 결말 부분에서 좀 급작스럽게 해피 엔딩으로 흐르기는 했다. 엄마와 이모의 만남은 짐작 가능했고 딱 좋았지만 나라의 채용 소식은 좀 갑작스럽지 않나?&nbsp;<br><br>15. 악당은 모두 토요일에 죽는다(정지윤. 고블. 2026. 288쪽): SF 연작 소설집. 국내 최고 학부인 S대를 배경으로 교수의 잃어버린 고양이 찾기에서 시작되어 연쇄살인과 마약 거래를 거쳐 급기야는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까지 이른다. 처음 두어 편은 재밌게 읽었는데 갈수록 허황된 느낌이어서 뒷부분은 좀 심드렁하게 읽었다. 그래도 아이디어는 신박했고 세계관은 꽤 탄탄했다. 다만 문장력은 좀 부족하지 않았나싶다.&nbsp;<br><br>16.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요(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앤 마거릿 대니얼 엮음, 하창수 역. 현대문학. 2018. 728쪽): 피츠제럴드의 미발표 단편집. 각 작품 앞에 왜 이 작품이 발표되지 못했는지 설명이 있는데, 대부분은 게재하길 원하는 잡지에서 거절당했거나 그들의 수정 요청을 작가 자신이 거절해서이다. 잡지 편집자들이 수정을 원했던 건 이 작품들의 상당수가 편집자(혹은 독자)들이 원하는 피츠제럴드의 작품'답지' 않아서이다. 당대의 피츠제럴드는 상류층 배경의 사랑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었나보다. 하지만 작가 자신은 그런 이야기들로만 알려지기를 거부했고, 이 작품들도 상당히 실험적으로 사랑 자체보다는 사랑에의 실망이라든가 삶의 아이러니, 욕망의 허무함 등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역시 표제작. 제목과는 달리 여성 인물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점에서 아주 기꺼웠다.&nbsp;<br>PS. 독서 중 재밌는 일이 있었다. 표제작을 읽으면서 하이든의 교향곡 49번을 듣고 있었는데 내가 읽는 장면과 음악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거다. 하이든 49번은 La Passione(수난)으로 알려져 있는 어두운 곡인데,&nbsp; 애틀랜타가 지역 축제 행렬에 참가하지만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장면과 2악장이 딱 어울렸고, 애틀랜타가 딜래넉스와 팬저 양의 말다툼을 숨어서 듣게 되는 장면에선 3악장 미뉴에트의 조여오는 듯한 음률이 맞아 들어갔다. 이 우연의 일치가 너무 즐겁고 좋아서 챗지피티와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있다.<br><br>17. 키오스크 학교(이서아. 민음사. 2025. 388쪽):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모두 키오스크가 되고 싶어한다. 쓸모 있고 싶기 때문이다. 모라와 초희, 도준, 원혜와 주디는 키오스크 학교 신입생이다. 배치된 곳에서 직업 훈련을 받고 심장 대신 광석으로 만들어진 장치를 갖고 있는 ORE(오어) 인간들의 감시를 받으며 완전한 키오스크가 되기 위해 살아간다. 이들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br>1부에 인물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익숙한 듯, 흔한 듯 하지만 새로웠던 이야기들. 부모 혹은 보호자의 부재로 시설에 들어가야 했던 아이들, 그 시설에조차 수용될 수 없어서 자신들만의 가족을 이루어 버려진 곳에서 살아가야 했던 아이들, 또 시설이었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해줬던 보육교사를 잃어버린 아이들. 그리하여 20대의 나이지만 키오스크 학교에 입학할 수 밖에 없었던, 소위 말하는 인간성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은 아이들의 이야기는 이 이야기 속 근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대한민국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익숙하지만 새로운 시선을 보여줬던 1부와는 달리 2부에 들어서면 이야기가 클리셰로 흘러 조금 안타까웠다. 신인 작가의 역량 부족인가. 그럼에도 이 작가의 다음 장편이 기대된다.&nbsp;<br><br>18. 콜리니 케이스(페르디난트 폰 시라흐, 편영수 역. 마르코폴로. 2024. 192쪽): 이제 막 변호사가 된 카스파르 라이넨은 당직을 서던 중 법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살인범의 국선 변호사가 되기로 한다. 피의자 콜리니와 만나지만 입을 열지 않는 피의자. 라이넨은 다음날 아침 어린 시절 절친의 누나이자 여름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던 요한나의 전화를 받고서야 피해자가 자신을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대해줬던 절친 토머스의 할아버지였던 한스 마이어라는 걸 알게 된다. 피해자와의 관계 때문에 국선 변호를 사임하려던 라이넨은 영향력있는 법조계 인사이자 대학 시절 은사인 변호사 마팅어, 그리고 단골 빵집 사장의 얘기를 듣고 계속 변호를 하기로 한다. 콜리니는 범행 동기에 대해 계속 입을 다물고, 피해자가 사회적 지위가 높은 기업 수장이기에 언론의 관심은 집중된다.<br>(스포)책 날개의 저자 이력이 특이해서 읽기 시작했다. 변호사인 저자의 할아버지가 바로 나치 장교였고, 할아버지의 과오를 자신이라도 속죄하기 위해 법조인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법정에서 할아버지의 비겁한 변명을 조목조목 반박했다고. 이 책 또한 청산되지 못한 과거를 이야기한다. 독일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가진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혼란을 틈타 은근슬쩍 죄과를 덮으려는 움직임이 독일 내에서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드러 법'이 그 예인데, 이 법으로 인해 나치 부역자들이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을 피했다고 한다. 소설 속 피해자도 그 수혜자 중 하나였다. 사건의 전말이 천천히 밝혀질 때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법의 외면으로 사적 복수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콜리니와 가족의 이야기는 당시의 독일 뿐 아니라, 인종 범죄의 피해자들 뿐 아니라, 현대 세계 곳곳의 많은 범죄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니. 이 책이 독일의 과거 사죄와 청산의 오류를 고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니, 문학의 현실적 효용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다만 콜리니의 마지막은 마음 아플 뿐이다.&nbsp;<br><br>19. 엄마, 시체를 부탁해(한새마. 바른북스. 2024. 236쪽): 잘 쓰여진 날카로운 시각의 범죄 단편들. 첫 작품이 새드 엔딩이었고 표제작도 해피하게 끝났다고 보기에는 찜찜했지만 이야기들 자체는 잘 짜여져 있다. 이렇게 뒷맛이 찜찜한 이야기들을 '이야미스'라고 한다는 건 처음 알았다. 이 작가의 특기라고. 하지만 이 작품들의 촘촘함은 그 찜찜함을 넘어선다. 그리고 뒤에 배치된 이야기들은 상당수 결말이 꽤 시원한 편이어서 즐겁게 읽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건 &lt;마더 머더 쇼크&gt;.<br><br>20. 헨치 1, 2(나탈리 지나 월쇼츠, 진주 K. 가디너 역. 시월이일. 2022. 312쪽, 288쪽): 히어로 옆에는 사이드킥이 있고, 빌런 옆에는 헨치가 있다. 애나는 바로 프리랜서 헨치.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오면 마치 인력시장처럼 그곳에 가서 특정 빌런의 회사에 불려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애나가 선호하는 건 재택으로도 할 수 있는 데이터 분석이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은 계약직의 삶. 절친 준과는 이런 에이전시 인력시장에서 대기하다가 만났는데, 누구보다도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어 주는 좋은 친구이다. 어느날 애나는 빌런 일렉트로닉의 신제품 발표회 겸 시장 아들 협박 현장에 들러리로 서 있다가 히어로 슈퍼콜라이더가 개입해 닥치는 대로 공격하는 바람에 다리뼈가 산산조각이 난다. 오랜 회복 기간 동안 준의 집에 얹혀 살며 상황을 곱씹어보던 애나는 히어로들이 소위 세상을 구하는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힘을 전혀 제어하지 않아 생기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실제로 얼마나 많은 생명과 재산상의 피해가 있었는지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기 시작한다.<br>'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이건 할리웃 히어로물에서 수시로 언급되는 명언이다. 당장 악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생명을 구하는 것. 그 과정에서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해서, 우연히 그 건물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해서, 우연히 내 사업장이 격전지가 되었다고 해서 또 빌런 편에 있었다고 해서 당연하게 죽어야 하는 건, 당연하게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건 아니다. 애나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것. 그래서 애나가 빌런 레비아탄과 함께 해나가는 일들이 속 시원하게까지 느껴진다. 이 책 한정이지만 진짜 빌런은 히어로들인 것처럼 보일지경. 이 책 속 이야기에선 맹목적인 히어로의 짧은 식견이 문제이지만 현실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의 비도덕성이나 부수적 피해를 감수하도록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특정인에 대한 마녀 사냥 혹은 앞뒤 가리지 않는 추앙, 그럴듯한 소문에 쉽게 휩쓸리는 줏대없는 대중들 등. 결말이 살짝 열려 있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읽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깊이 있는 이야기였고, 읽는 내내 즐거웠다.&nbsp;<br><br>21. 죽은 자들의 백과전서(다닐로 키슈, 조준래 역. 문학과지성사. 2014. 252쪽): 9편의 단편집. 모두 죽음이 언급되거나 주요 소재로 쓰였다. 하지만 단순히 죽음이라는 소재가 주는 무게감이 전부는 아니다. 저자는 서정성과 비통함, 환상과 핍진성 아래에 냉소주의를 엷게 깔아두었다. 그리고 비판의 대상은 기존 종교에서부터 이데올로기, 근대화, 신분제도 그리고 자본주의에 전도된 문학계까지 가리지 않는다.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lt;왕들의 서 또는 광대들의 서&gt;.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가장 재미있었던 건 &lt;영예롭도다, 조국을 위한 죽음이여&gt;.<br><br>22. 작은 빛을 따라서(권여름. 자이언트북스. 2023. 268쪽): 내장산 가는 길목 '필성 슈퍼'의 둘째딸 은동의 장래희망은 배우. 용돈을 받는 족족 모아두는 이유는 연기 학원에 등록하기 위함이다. 어느날 은동은 할머니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부끄러워하며 감추고 싶어하는 할머니에게 몰래 글을 가르쳐주고 용돈을 받기로 한다. 한편 동네에 갑자기 등장한 '엉터리 마트' 때문에 은동이네 슈퍼는 위기를 맞이한다.<br>어쩌면 삶은 계속 다가오는 크고작은 위기를 쳐내는 게 전부인지도 모른다. 필성슈퍼에 엉터리 마트가, 곧이어 폐점한 엉터리 마트 대신 들어온 대기업 대형 마트가 가져온 위기들처럼. 아니, 그건 아닐 거다. 난 계속되는 위기 속에서 반짝이는 작은 빛을 얘기하고 싶었지만 문득 어쩌면 위기 속의 빛이 아니라 작은 빛이 계속 반짝이는 와중에 불쑥 끼어드는 굴곡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굴곡 때문에 인식하지 못하는 작은 빛들이 더욱 소중해지는 삶. 그건 그냥 주어지는 건 아니겠지. 손님이 없어도 셔터를 올리고 슈퍼를 열어 기다리는 삶. 매일 한글을 연습하는 삶. 친한 친구가 내가 원했던 영역에서 나보다 월등한 능력을 보일지라도 좌절하지 않는 삶. 삶의 모든 순간을 기를 쓰고 살아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작은 빛을 주워모으듯 따라가다 보면, 내 삶에 충실하다 보면 언젠가는 빛으로 가득한 곳에 도착해 있겠지. 처음 상상했던 그 모습은 아닐지라도.&nbsp;<br><br>23.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임수현 역. 민음사. 2005. 180쪽): 두 편의 희곡. 하지만 무대에 대한 설명이나 지문이 없어서 마치 소설처럼 읽힌다. 표제작은 'deal'을 제안하는 딜러와 최선을 다해 방어하는 손님과의 팽팽한 대립을 보여주는데, 표면적으로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듯 하지만 둘의 대화는 그저 평행선을 달린다. 욕망을 드러내보이길 원하는 딜러의 속삭임은 마치 악마의 그것같다. 하지만 손님은 딜러에게 쉽게 자신의 무엇도 내보이지 않는다. 딜러는 차가운 이성의 외피를 쓰고 대화를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손님은, 처음에는 연약해 보이나 점점 차가워지며 딜러에게서 심정적으로 한걸음씩 물러난다. 이들 대화의 끝은 허무하게까지 느껴지지만, 독자에게는 안도감을 준다. 물론 그 안도감은 갈등의 해소를 통한 건 아니다. 두번째 작품 &lt;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gt;은 독백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전체가 한 문장이지만 쉼표가 잦아서 쉼표를 마침표처럼 읽게 된다. 작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작가가 마침표를 쓰지 않은 건 아마도 이 상황이 화자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났든 실제로 일어났든 독자가 하룻밤 머물 공간을 찾는 화자의 여정을 조마조마하며 따라가도록 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고 난 그 의도에 완전하게 반응했다.&nbsp;<br>두 작품 모두 처음부터 줄거리가 잡히지는 않지만 곧 따라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점점 구체화되는 과정이 독자에게는 꽤 재미를 준다. 하지만 이걸 과연 어떻게 무대에서 구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연출자의 재량에 달려 있겠지만, 이게 무대에 올라갔을 때 잘못(?)하면 사변적으로 흐르기 쉬울 거 같다. 그리고 난 늘 그렇듯 희곡을 읽는 건 재밌지만 굳이 연극은 보고 싶지 않다. 사실 표제작을 읽을 땐 딜러에게 화가 나기까지 했다. 내 욕망을 알려 하지 마세요, 라고 큰 소리로 말해 주고 싶을 정도로 손님에게 몰입했지만 두번째 작품을 읽을 땐 왠지 이 작품의 화자가 표제작의 딜러가 된 게 아닐까 싶어서 연민이 들었다. 보통 희곡을 읽을 때 등장인물에게 나 자신을 대입시키는 일은 잘 없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렇게 되었던 게 내겐 신기한 경험이었다.&nbsp;<br><br>24. 당신의 비밀을 묻어드립니다(엘 코시마노, 김효정 역. 인플루엔셜. 2024. 384쪽): 핀레이 도노반 시리즈 3권. 3권이 나온 줄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얼마나 기뻤던지. 1,2권이 잘 기억이 안 나긴 했지만. 핀은 여전히 새 책의 진도를 못 빼고 있고 여기에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마피아 두목 펠릭스에게 협박까지 받는다. 전문 킬러 '싹쓸이'의 정체를 밝혀 없애라는 것. 이 와중에 핀의 모자란 점을 훌륭히 보완해 주었던 베이비시터 베로는 학창 시절 여학생 클럽의 돈을 횡령했다는 죄를 뒤짚어 써 급하게 돈을 마련해야 한다. 펠릭스의 압박은 점점 세게 다가와 핀은 일주일 안에 싹쓸이가 누군지 알아내야 하는데, 경찰로 의심되는 그를 찾기 위해 고민하던 중 마침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경찰 아카데미가 열린단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핀과 베로.<br>여전히 핀은 답답하지만, 많이 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로맨스에서는... 뭐,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 그간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경찰관이랑 맘놓고 진도를 빼겠어. 경찰 아카데미에서의 둘의 행동이 꽤 대담해서 조마조마해하면서도 재밌게 읽었다. 뒷부분에 적극적이었던 핀도 좋았고. 하지만 난 여전히 줄리언이.... 어쨌든 이번에도 이래저래 한고비는 넘겼고,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nbsp;<br><br>25. 인간으로서의 베토벤(에드먼드 모리스, 이석호 역. 프시케의숲. 2021. 360쪽): 베토벤의 전기. 물론 베토벤의 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작곡가라고 얘기하기에는 내가 그에 대해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생각에 집어들었다. 두께도 적당하고, 저자의 필력도 보장되고. 원제는 그냥 '루드비히 판 베토벤'이었던 거 같은데 번역판의 제목이 꽤나 적절하다. 이 책은 단순히 작곡가의 재능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제목처럼 한 인간으로서의 베토벤 - 15세부터 보이던 기벽이라든가 "겉으로는 미친 작곡가 행세를 하지만 속으로는 성공에 대한 야망과 집념을 품고 있던 베토벤"(129쪽), 자기자신에 대한 확신이 가득차 있던 베토벤 등- 을 이야기한다. 물론 베토벤의 천재적인 재능에 대한 이야기도 뺴놓지 않고.<br>특히 흥미로웠던 건 잘 알려진 일화들에 대해 저자가 바로잡은 것들이다. 흔히 교향곡 3번의 제목이 '보나파르트'에서 '영웅'으로 수정된 게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라고 알려져 있으나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곡의 리허설(1804년 6월) 때 이미 나폴레옹의 황제 선언이 있을 지 2주가 지났을 시점이나, &lt;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의 대교향곡&gt; 리허설은 예정대로 진행됐다고. 이 일화를 전한 제자였던 페르디난트 리스의 기억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출판업자에게 보낸 악보에서 '보나파르트'라는 단어를 종이가 찢어지도록 격하게 지워낸 흔적이 있는 건 사실이다. 저자는 제목 수정이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p.176&nbsp;<br>또한 가장 핫한 이슈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고 언급한다. 바로 불멸의 연인에 대한 것. 저자는 이 부분에서 확신을 갖고 있고 나 또한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베토벤에 관한 다른 책에서도 그러했듯, 영화 &lt;불멸의 연인&gt;이 주었던 찝찝함은 많이 희석됐다.&nbsp;<br>대부분의 전기가 그러하긴 하겠지만 시기를 잘 나눠서 정리해 준 게 좋았다. 주요한 곡들에 대해 언급해 준 것도. 베토벤의 괴팍한 성정이야 유명하지만 그의 자기 확신과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자기애는 그에 대한 애정을 배가시켜줬다.&nbsp;<br><br><br>26. 베토벤과 아홉 교향곡(엑토르 베를리오즈, 이충훈 역. 포노. 2020. 260쪽):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얼른 집어왔다. 아니, 그 유명한 베를리오즈가 베토벤에 대해 이렇게 긴 글을 썼다고? 물론 베토벤이야 당대에 이미 유명한 작곡가였고 슈베르트를 비롯 많은 후대 작곡가들이 그를 존경했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쓴 글이 있는 건 처음 알았다. 이 책은 베를리오즈가 자신의 평론집과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베토벤 관련 글을 모은 것이다. 서론에 해당하는 첫 챕터의 엘리트주의에 놀랐고 마지막 단락의 동양 음악 운운에 살짝 긇혔지만 난 베토벤을 사랑하니까, 그를 사랑했던 당신의 글을 읽어주지 라는 맘으로 읽었다. 제목처럼 베토벤의 교향곡 9곡을 분석한 글이 주이고, 뒤에 그의 다른 곡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nbsp;<br>교향곡 1번에 대해 '여전히 모차르트의 영향 아래 있다'고 혹평한 거 외에는 찬양 일색이다.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부분을 위해 악보도 실려 있다. 까막눈인 게 한스러웠다. 이 책을 펼쳐놓고 베토벤의 교향곡을 한 곡씩 들으며, 글과 음악을 맞춰가며 읽었으면 최상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출근길에 들고 나와 텍스트만 쭉쭉 읽었다. 다음에 혹시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읽어보고 싶다.&nbsp;<br>]]></description></item><item><author>Yujin</author><category>독서목록</category><title>3월 독서목록</title><link>https://blog.aladin.co.kr/yujin/17192623</link><pubDate>Thu, 02 Apr 2026 17: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ujin/17192623</guid><description><![CDATA[1. 낮은 해상도로부터(서이제. 문학동네. 2023. 376쪽): 단편집. 조금은 싱겁다고 할까. 약간은 유치한 작품도 있었지만 내용이나 필력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단편 속에서 화자가 계속 바뀌는 건 처음 한두 번이라면 새롭고 흥미로웠겠지만 단편집 전체에서 반복되다보니 너무 피곤했다.&nbsp;<br><br>2. 랩 걸(호프 자런, 김희정 역. 알마. 2017. 412쪽): 도서관에서 이제야 내게 차례가 돌아왔다.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역시 저자의 입심이 대단하다. 저자의 소설을 먼저 읽어서 잘 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소설보다 이 책이 훨씬 재밌었다. 과학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에 대한 편견과 평가 절하로 인한 부당한 대우를 고발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사실 이런 내용만 가득할까봐 걱정스럽기도 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걸 굳이 되풀이해가며 읽기에는 당시의 내가 많이 지쳐 있었어서). 저자 자신이 가진 과학에 대한 열망과 헌신, 좋은 파트너를 만난 행운과 가진 것 없이 맨땅에 머리 부딪치면서도 과학을 할 수 있기에 누린 행복이 가득하다. 나무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이 많지는 않지만 나올 때마다 저자가 얼마나 그 얘기를 쓰면서 재밌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책에서 저자 인생의 전반에 걸쳐 거의 다 털어놓아서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에세이 한 권 더 내줬으면 좋겠다.&nbsp;<br><br>3. 망각하는 자에게 축복을(민지형. 안전가옥. 2023. 312쪽): 부잣집 입주 가사도우미 재이. 이 바닥에서 일할만큼 일해서 눈치가 빤하다. 지금 일하는 이 집은 사모는 매일 운동을 다니고 사장은 최근 IT 시장 전체를 지배하는 호라이즌 사의 전 이사로 늘 유유자적이다. 어느날 사장이 호라이즌 사의 최신형 기기인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들여온다. 일정 시간에 걸쳐 자신의 뇌를 스캔해서 기억을 업로드한 후 그 기억으로 들어가 다시 체험을 할 수 있는 기계. 사장이 며칠간 골프 여행을 떠나자 재이는 호기심에 사장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보는데, 부인과의 아름다운 첫만남과 침대에서의 기억이 있다. 사장이 여행하는 동안, 그간 엄격한 자기 관리의 모습을 보였던 사모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사장의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사용해 보더니 사장이 여행에서 돌아온 후 갑자기 사장을 부엌칼로 난도질하고 자살한다. 재이는 충동적으로 사장의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챙겨 그 집을 나오고, 호라이즌 사의 이사인 리사가 접촉해 온다.<br>기억은 주관적이다. 기억은, 무엇도 증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목하는 점은 기억의 주관성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자신의 상황과 위치와 해석에 따라 아름답게도 또 비참하게도 남는 기억. 그 기억을 영상으로 만들어 공유하고 사고파는 근미래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했다. 기억은 미화되거나 왜곡될 수 있지만 그걸 공유하고 매매하는 인간들은 그런 점은 간과한다. 그 어떤 행복한 기억도 이면은 다를 수 있음을. 그래도 이 소설 속 많은 끔찍한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비록 소설 속일지라도 사회가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졌다는게, 쓰레기를 그래도 치웠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작가는 아마도 사람들에게서 작으나마 선함을 보았나 보다. 그게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br><br>4.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애슐리 엘스턴, 엄일녀 역. 문학동네. 2025. 440쪽): 에비는 남자친구 라이언의 같이 살자는 말에 행복과 불안을 동시에 느낀다. 라이언은 이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고 할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자기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완벽한 남자다. 비록 가난한 에비를 의심하는 라이언의 오랜 친구들의 시선을 견뎌내야 했지만 에비는 이제 라이언의 제안을 수락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비가 살고 있다고 라이언이 알고 있는 집을 세팅해야 한다. 단기임대로 빌린 초라한 아파트를 생활감 있게, 라이언으로 하여금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병들과 에비의 직업에 맞는 책들로 말이다. 사실 에비는 에비가 아니다. 만들어진 인물이다. 실제의 '나'는 루카 마리노. 홀어머니 밑에서 행복하지만 어렵게 자라다 엄마를 암으로 잃고 아르바이트 장소에서 도둑질을 하다 걸려 '스미스 씨'에게 발탁되었다. 라이언은 이번 작업 대상이고 에비에게는 자신이 변해야 하는 인물의 설정과 서사만 전달될 뿐 이 작업이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모른다. 라이언과 함께 참석한 경마 대회에서 라이언의 옛 친구를 만난 에비는 그 친구의 애인이 본인을 루카 마리노라고 소개하자 불안을 감출 수 없다. 자신과 비슷한 외모에 자신의 고향 이름을 대며 그곳에서 홀어머니와 살다 엄마를 암으로 잃었다고 말하는 그녀.<br>초반부터 도파민 폭발이다. 루카의 지략과 흔들리는 마음, 자신을 루카라고 소개하는 여자와 스미스의 정체에 마냥 순진하지만은 않은 라이언까지 흥미를 놓지 못할 요소들이 계속 등장한다. 중간에 살짝 늘어지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결말까지 내 맘에 딱 들었다. 해피엔딩을 만든 게 루카 자신이라는 점이 특히 더. 오랜만에 만족스럽게 읽은 범죄 소설이었다.<br><br>5.&nbsp; 죽이고 싶은 아이 1. 2(이꽃님. 우리학교. 2021,2024. 200쪽, 216쪽): 고등학교 1학년 서은이가 벽돌에 머리를 맞아 숨진 채 발견된다. 그것도 학교 뒷마당에서. 용의자는 서은과 가장 친했던 주연. 주연이 서은과 전날 다투었다는데, 주연은 도무지 그일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진실은 주연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br>1,2권이 시간차를 두고 출간됐지만 그냥 한꺼번에 읽었다. 어차피 이어지는 이야기였어서. 이 소설은 관계와 숨은 진실에 관해 이야기한다. 흔히들 남녀 관계는 본인들만 아는 거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관계에 적용되는 말이 아닐까 늘 생각해왔다. 둘 사이의 일은 둘만 아는 거지. 하지만 그 관계 내에서도 둘 사이의 입장과 판단은 다르다. 여기서 각자가 품은 진실이 달라진다. 소설에서는 '모두가 믿는 게 곧 사실'이라고 얘기한다. 이건 현실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 그런데 그게 늘 일어나는 일이라고, 남들이 다 믿으니 그게 곧 진짜라고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가도 되는 걸까? 이 모든 일이 지나가고 난 뒤에 남은 사람들은, 특히 당사자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모두들 사건의 진실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이 모든 '사건'은 결국 사람의 일이고 늘 사람이 그곳에 있다. 하지만 그건 늘 잊히지. 주연과 서은, 그리고 모든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팠던 이야기였다.&nbsp;<br><br>6. 숲의 신(리즈 무어, 소슬기 역. 은행나무. 2025. 696쪽): 에머슨 캠프는 유서 깊은, 나름 잘 조직된 캠프이다. 이혼 가정의 트레이시는 아빠와 아빠의 애인에 의해 이 캠프에 합류하게 되는데, 오랫동안 여름마다 여기에 왔던 아이들에게 섞이지 못하고 겉돌지만 역시나 자기처럼 뒤늦게 들어온 바버라와 친해진다. 바버라는 이 캠프 부지의 소유자인 반라 가문의 딸이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모두가 좋아하는 아이다. 그런데 어느 아침 일어나보니 바버라가 침대에 없다. 당연히 캠프와 반라 가문이 지내고 있는 '독립독행'의 사람들은 물론 마을 전체가 나서서 그녀를 찾는데, 사실 바버라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반라 가문의 아이가 사라진 적이 있다. 모두가 사랑했던 어린 베어. 이야기는 오래전과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br>중간쯤 읽는데 갑자기 짜증이 치솟아서 잠깐 덮었다. 정말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여성들이 계층, 직업, 성향, 상황에 상관없이 남자들에게 무시당하고 착취당하고 휘둘리고 심지어 누명까지 뒤집어쓰는 구나. 지겹다, 정말.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형사 조도, 캠프의 지도교사로 일하고 있는 가난한 루이즈도, 심지어 상류층의 앨리스도 본인의 뜻이나 능력보다는 젠더로 평가받는다. 이야기는 범죄 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다. 하지만 바버라의 실종은 맥거핀에 불과하다. 문제는 소위 상류층이라는 인간들의 위선과 계급 의식, 성차별 그리고 욕망. 진실이 모두 드러난 뒤에도 그들은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대체 무엇이 변할까. 그래서 미지근한 결말이 이해가 됐다. 그게 최선이었겠지. 다만 새로 드러난 진실을 견디는 것도 결국은 여성의 몫일 거라는 거. 그게 마음이 아팠다.<br><br>7. 사랑의 입자(김리리,김민령,김진나,신현이,이금이,전삼혜,정은숙. 문학동네. 2018. 220쪽): '사랑'을 테마로 한 청소년 단편집. 전삼혜의 이야기는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지만 다시 읽으니 또 새롭고 좋았다. 주제인 사랑은 물론 성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이나 남매간의 애정, 때로는 로봇의 애정까지 이야기한다. 다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신현이.<br><br>8. 킬 유어 달링(피터 스완슨, 노진선 역. 푸른숲. 2025. 360쪽): 웬디는 요즘 남편 톰이 점점 밉살스러워진다. 영문학자이자 작가인 남편이 같은 학교 교수들을 초청해 파티를 연 날, 고질적으로 문제가 되어 왔던 술을 역시나 과하게 마신 톰은 자신이 새로운 소설 집필에 들어갔으며 그건 살인에 관한 이야기가 될 거라고 말한다. 직감적으로 그들이 공유한 비밀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아챈 웬디는 톰에 대해 살의를 품는다. 이야기는 그들의 현재에서 조금씩 과거로 역행하며 진행된다.<br>그들의 비밀을 알아채는 건 그닥 어렵지 않다. 사실 읽으면서는 이 책이 범죄 소설이라기 보다는 그저 중년 부부의 저물어가는 인생과 결혼 생활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술에 의존하는 톰과 그가 꼴보기 싫지만 그럼에도 결혼 생활을 지켜나가고픈 웬디. 그들이 처음 만났던 시절과 헤어져 있던 기간의 삶, 그리고 재회. 굳이 이들이 함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이들의 인생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각자 조금씩 어긋나는 기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치하는 좋았던 기억. 하지만 책 중반에 또다른 사건이 일어나고, 이야기는 여전히 과거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챕터 끄트머리의 작은 반전. 사실 맘에 드는 반전은 아니었지만 역시 스완슨이구나 하긴 했다. 재밌게 읽었다.&nbsp;<br><br>9. 내일을 위한 힌트(기준영. 문학동네. 2025. 268쪽): 순한 단편집. 화자들이 다 순하고 이야기들이 다 순하다. 물론 사건과 갈등이 없는 건 아니고 역경과 고난도 주어진다. 하지만 그저 묵묵히 견뎌나갈 뿐이고, 착하게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다. 반짝이지 않아도 칙칙하지는 않게 생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들. 정말 모든 이야기들이 다 좋았다.<br><br>10. 디 아더 와이프(마이클 로보텀, 최필원 역. 북로드. 2025. 528쪽): 오래전부터 파킨슨 병을 앓고 있는 조 올로클린. 16개월 전 아내를 수술합병증으로 떠나보내고 지금은 아직도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한 10대 작은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대학 신입생인 큰 딸은 멀지 않은 도시에 있다. 갑자기 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가보니 아버지는 그냥 쓰러진 게 아니라 뒷머리를 둔기로 가격당했다고 하고, 아버지의 침상 옆에는 낯선 여자가 앉아 있다. 그녀는 자신이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아버지의 다른 아내라고 말한다. 올리비아 블랙모어는 외과의였던 아버지의 예전 환자였고 장래가 기대되는 테니스 선수였지만 사고를 심하게 당했고 아버지가 그녀를 수술하고 재활을 도왔다. 조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걸 고민하는 한편 올리비아에 대해 조사를 시작한다.<br>초반, 상간녀의 당당함에 혼자 열받았다. 조가 그녀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됐고. 남자들이란... 그저 예쁘면 호감이지. 설사 그게 아버지의 정부라 해도 말이다. 올로클린 시리즈의 9권이라는데 이런 시리즈물의 첫 권이 아닌 작품을 처음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내가 이 시리즈를 처음부터 꾸준히 읽었다면 조에게 더 공감했을까? 사건 조사는 느리게 진행되고 중간중간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의심을 더하지만 범인은 가까운 데 있었다. 그리고 피해자도 잘한 건 없고. 솔직히 말하면 제목으로 낚았네, 싶다. 시간이 좀 아깝기도 했고.&nbsp;<br><br>11.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조나탕 베르베르, 정혜용 역. 열린책들. 2023. 624쪽): 1888년 뉴욕. 스물여섯 살의 제니는 동네 시장에서 마술 공연을 하며 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다. 어느날 공연에 멋지게 차려입은 신사가 나타나 다른 마술 공연의 트릭을 찾아내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눈앞의 지폐에 흔들린 제니는 신사와 함께 본 공연의 술수를 바로 알아차리고, 후에 신사가 준 주소로 찾아가는데 그곳은 당대에 유명했던 핑커턴 탐정사무소. 신사는 로버트 핑커턴이었다. 로버트는 제니에게 현재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심령술사 폭스 자매의 속임수를 알아내는 임무를 함께하자며 거액을 제시한다. 당시 폭스 자매의 교령회는 종교 집회만큼이나 열렬한 팬들을 몰고 다녔고, 핑커턴 탐정사무소는 아버지 대의 영광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제니는 교령회에 참석하지만 속임수를 알아내지 못하고, 무대 뒤에서 자매 중 둘째인 마거릿이 성희롱을 당하는 걸 구해주며 그녀에게 신뢰를 얻는다. 한편 로버트의 동생 윌리엄은 거친 인간으로, 마술사인 제니를 고용하는 걸 못마땅해하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폭스 자매의 비밀을 폭로하겠노라 하고 먼저 비밀을 밝혀내는 쪽이 핑커턴 사무소의 경영을 맡기로 하자고 로버트에게 제안한다.<br>마술과 심령술, 탐정 기술 등이 엮여 있지만 이건 가족의 이야기이자 제니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주제들이 좀 산만하게 섞여 있다. 각 챕터 첫머리에 제니의 아빠가 쓴 마술 교본이나 핑커턴 지침서 등이 등장해서 챕터의 방향을 알려 주긴 하지만 폭스 자매, 제니 그리고 핑커턴의 서사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불쑥 튀어나온다. 사실 내 독서를 가장 시큰둥하게 만든 건 제니였다. 제니의 우왕좌왕이 그녀에게 공감하기 힘들게 했어서. 아마도 저자는 제니의 휴머니즘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거 같은데 그 부분에 있어서도 제니는 임무와 자신의 신념 사이에서 갈팡질팡이다. 물론 이런 점에서 제니의 성장이 보여지기는 하지만... 조금만 더 정돈된 스토리였다면, 차라리 분량을 줄여서라도 단순화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nbsp;<br><br>12. 메르헨(연여름. 아작. 2024. 184쪽): 갑작스런 폭설에 전철에 오른 남자. 우연히 14년 전 인연을 만난다. 자신이 나호인지 은호인지 맞혀 보라는 듯 웃고 있는 여자에게 남자는 일부러 틀린 답을 말하고, 둘의 기억은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 60세 이하의 죽은 자를 되살려 낼 수 있는 세계. 그렇게 재생인은 죽음 직전까지의 기억만 가지고 깨어나 센터에서 적응 기간을 거쳐 사회로 나온다. 남자는 센터에서 일하는 직원이었고, 은호는 쌍둥이 언니 나호가 깨어나자 나호를 만나러 센터에 갔다가 남자와 처음 맞닥뜨린다. 재생인에게 일어나는 부작용 때문에 재생인들은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상황에서, 은호는 나호가 죽기 전부터 둘이 함께해 오던 집필 작업을 마무리하길 원한다.<br>나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 사실 재생인이라는 설정 외에는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좋은 건 차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 떄문. 그리고 쌍둥이 자매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할 거리를 주고, 거기에 작가 특유의 차분함이 배어나오는 문장들이 서정성을 더한다. 이 작가를 좋아해서 즐겁게 읽었다. 다만 다음에 읽을 작품은 좀더 깊었으면 좋겠다.&nbsp;<br><br>13. 오컬트 포크 호러(박해로. 북오션. 2024. 248쪽): 샤머니즘 기반의 호러 연작 소설집. 가상의 지명인 수낭면을 중심으로 토속적인 분위기의 작품 3편이 있다. 가벼운 걸 읽고 싶어서 집어들었는데 가벼워도 너무 가벼워서... 작가가 가진 주제의식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세 작품 다 한 번쯤은 들어본 이야기에 문장력도 좋지 않았다. 한마디로 필력이 달리는 글들.&nbsp;<br><br>14. 남편을 죽이는 서른 가지 방법(서미애. 엘릭시르. 2024. 448쪽): 작가의 초기 단편집. 사실 이 작가의 명성에 비해선 내가 이 작가의 작품을 별로 안 읽어와서 기대가 컸는데, 초기 작품들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이 작가의 특성인건지 여성 캐릭터들이 다 너무 나약해서 내 취향은 아니었다. 게다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여성혐오적인 편견을 바탕으로 쓴 작품들도 몇 편 있어서 더 흥미가 떨어졌다. 그래도 가장 좋았던 건 &lt;살인 협주곡&gt;.<br><br>15. 워터멜론 슈가에서(리처드 브라우티건, 최승자 역. 비채. 2007. 252쪽): 매일 다른 색의 태양이 뜨는 워터멜론 슈가의 이야기. 워터멜론을 끓여 생긴 슈가로 원하는 걸 만들고, 워터멜론 송어 기름으로 램프를 태우며, 아이디아뜨(iDEATH)에 모여서 식사를 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호랑이들이 있었고, '나'는 호랑이들이 부모님을 잡아먹은 걸 기억한다. 내게 어쩔 수 없다고 얘기하면서 내 산수 숙제를 도와줬던 걸. 나는 책을 쓰고 있지만 진전은 없다. 그래도 마을의 누군가 물으면 난 계속 쓰고 있다고 대답한다. 오늘도 삐걱거리는 널빤지를 밟으며 다리를 건너 마가렛이 나를 찾아오지만 난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응답하지 않는다. 마가렛은 '잊혀진 작품들'로 가버렸다. '잊혀진 작품들'에는 인보일 일당도 살고 있다. 친구 프레드가 찾아와 플린이 식사 준비 담당이라고 얘기하고, 난 아이디아뜨에 가서 모두와 함께 식사를 한다.<br>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배어 나오는 핏물을 감출 수 없다. 편안하게 읽고 있다가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 사실 이 작품의 많은 상징들에도 불구하고 난 그저 이상향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호랑이들이 살점을 뜯어먹었던 기억이 있을지언정 물 속에 관을 묻고 워터멜론 송어가 눈맞춤을 하는. 하지만 어떤 곳에서도 사람의 잔인함은 사람을 죽인다. 꼭 물리적으로 힘을 가하지 않더라도. 결국은 Ideal과 Death는 같은 곳을 지향하고 있는지도.&nbsp;<br><br>16. 종말까지 다섯 걸음(장강명. 문학동네. 2025. 212쪽): 종말을 소재로 한 짧은 소설들. 5개의 챕터인데 각 챕터의 첫 번째 작품들이 연작이고, 차례로 각 챕터의 키워드(부정 - 절망 - 타협 - 수용 - 사랑)를 구현한다. 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와 상당히 비슷하다. 아마도 작가의 의도가 그런 듯. 각 챕터에 속하는 소설들은 키워드를 구현하고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익숙한 소재를 끌어다 쓴 경우가 많고 대부분은 그걸 뒤틀었다. 작가의 시각은 맘에 들었지만 다 재밌진 않았다. 그래도 지루해질 만 하면 챕터가 바뀌면서 궁금했던 이야기가 계속되어서 잘 읽었다.&nbsp;<br><br>17. 기억을 비추는 환등열차(심은정,최현유. 안전가옥. 2024. 424쪽): 수현은 삼도천을 건너는 환등열차 안에서 깨어난다. 판결대를 향해 가던 환등열차는 갑자기 악귀의 공격으로 사고가 나고 함께 있던 담당 차사 원정의 도움으로 열차 밖에 내던져진 수현은 다행히 삼도천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기억의 일부를 잃게 된다. 악귀가 가져가 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임시로 차사 일을 하게 된 수현. 살아있을 때 위기협상가였던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다른 승객들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주면 자연히 수현의 기억도 돌아올거라는 말에 원정과 함께 일을 시작한다.<br>요즘 유행하는 소위 힐링 소설류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이야기들의 장점은 뚜렷하기에 그냥 쉬어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려 했는데, 초반부터 수현 때문에 열받았다. 어떻게든 자신보다 어린 여성은 경력이 길든 경험이 많든 상관없이 상사로도 선배로도 절대 인정 못하겠다는, 존댓말도 못 쓰겠다는, 어떻게든 이겨먹어야겠다는 한국 남자 특유의 꼬장이 정말이지... 그렇다고 각 에피소드들이 뭐 그렇게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랬다.<br><br>18. 펄프픽션(조예은,류연웅,홍지운,이경희,최영희. 고블. 2022. 256쪽): 한국형 펄프픽션을 표방하는 앤솔러지. 다 독특하긴 했지만 가장 주제에 부합했던 건 홍지운. 가장 좋았던 건 최영희. 사실 조예은 때문에 집어들었는데 너무 평범해서 조금 실망했다. 그래도 필력은 여전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걸로 만족.&nbsp;<br><br>19. 인어의 걸음마(이종산,이유리,전삼혜,이서영. 서해문집. 2021. 168쪽): '다름'을 소재로 한 청소년 대상 앤솔러지. 전삼혜 때문에 대출했는데 보니 이미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은 거였지만 즐겁게 다시 읽었다. 근데 다시 읽어도 여전히 같은 부분에서 열받네 - 작중 인물이 얄미워서. 표제작은 과연 표제작다웠다. 그래서 가장 좋았고. 나머지 작품들도 좋았다.&nbsp;<br><br>20. 베리 따는 사람들(아만다 피터스, 신혜연 역. 서사원. 2024. 408쪽): 1962년 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사는 원주민 가족은 여름 한 철 블루베리 따는 일을 하기 위해 미국 메인 주의 한 농장으로 온다. 아버지는 이 농장에서 감독관 역할을 하며 일을 해오곤 했고 엄마는 여름 노동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막내딸 루시가 사라진다. 방금 전까지 바로 위의 오빠 조와 함께 냇가에 있었는데... 한편 어린 노마는 자꾸만 악몽을 꾼다. 오두막과 커다란 바위. 노마가 악몽을 꾸면 엄마는 두통에 시달리고, 노마는 엄마를 위해 자신의 의문을 눌러야 한다. 집에는 노마의 아기 때 사진이 한 장도 없는데, 예전에 집에 불이 나서라고는 하지만...<br>조와 조의 가족들이 허물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마음 아팠다. 원주민으로서의 그들의 지난한 삶은 루시의 실종으로 더 큰 아픔이 된다. 그들이 백인이었더라도 루시를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루시는 그냥 실종된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받을 상처에서 한두 개 쯤은 덜 받을 수도 있었겠지. 조의 삐뚤어짐도 마냥 아프기만 했다. 누구보다 조의 마음이 이해되었기에. 나 자신을 착한 그들에게서 제거하고 싶은 마음. 처음부터 내가 없었더라면 그들에게 닥칠 불행은 훨씬 적었으리라는 믿음. 마지막 장까지 모두 읽은 후에는 조에게 평안이 온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설을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을까? 그들이 견뎌 온 길고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이야기 밖의 독자들은 그들의 행복한 앞날을 상상하고 싶겠지만, 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는 것을 멈출 수 없을 것만 같다.&nbsp;<br><br>21.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김기태. 문학동네. 2024. 336쪽): 작년에 명성이 꽤 자자했지만 난 왠지 기대가 되지 않았는데, 도서관에서 눈에 띄어 들고 왔다. 기대가 없어서인지 전반적으로 재밌게 읽었지만 딱히 새로울 것은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하지만 사회와는 분리될 수 없는 이야기들. 주인공들이 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성향을 갖고 있어서 읽는 사람도 크게 복잡할 게 없다는 게 이 이야기들의 장점이자 단점. 장편이 출간되면 읽어봐야겠다.<br><br>22. 저편에서 이리가(윤강은. 민음사. 2025. 172쪽): 이제 전세계는 커다란 얼음 덩어리이다. 수시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한반도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지역은 크게 세 군데. 가장 남쪽의 '온실 마을'에서 생산된 식량은 유안같은 짐꾼들에 의해 중부 '한강 구역'으로 이송되고, 한강 구역에서 생산된 무기들은 국경인 '압록강 기지'로 이동한다. 유안은 이동 범위를 압록강까지 넓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이장의 말에 그건 한강 구역의 일이 아니냐며 한강 구역에 간 김에 짐꾼인 화린에게 따진다. 하지만 화린은 한강 구역의 구역장의 뜻임을 알려준다. 내친김에 함께 압록강 기지로 이동하는 둘. 거기서 유안은 원래 한강 구역 출신이자 화린의 친구인 기주, 그리고 대륙군의 탈영병 출신인 백건을 만난다.<br>해피엔딩일지 아닐지 조바심내며 읽었다. 해피엔딩이기를 바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전쟁통에, 이 눈보라 속에 그게 가능할까...? 그런데, 해피엔딩이 뭔데? 이들에겐 그저 생존이 해피엔딩인가? 혹은 잘, 의미있게 죽는 거? 아니,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죽음에는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 그래서 나도 이들이 살아남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저편에서 들리는 짐승의 소리는 과연 이 눈보라 속에서도 생명이 살 수 있다는 희망일까, 아님 이들의 목숨을 가지러 오는 맹수의 모습을 한 죽음일까? 그럼에도 희망을 본 건 나만은 아닐 것이다.&nbsp;<br><br>23. 춘천 사람은 파인애플을 좋아해(도재경. 열린책들. 2024. 312쪽): 즐겁게 읽은 단편집.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아서 좋았다. 작가의 의도는 어떠했을지 모르겠으나 내게 각 작품들 속 장소가, 장소의 이동이 꽤 의미있게 다가왔다. 서울과 파리(&lt;그가 나무 인형이라는 진실에 대하여&gt;), 춘천 집 뒤의 숲 속 공터(표제작), 화재가 난 마을의 유일하게 불타지 않는 집(&lt;마인드 컨트롤&gt;), 우크라이나와 그 밖의 나라들(&lt;방독면을 쓴 바나나&gt;), 카트만두(&lt;노르웨이와 카트만두 사이&gt;) 등. 의미있는 장소로의 이동을 통해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상황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이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건 이별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삶이란 그렇게 끊임없이 이별하고 이동하는 것인지도.<br><br>24. 내일의 엔딩(김유나. 창비. 2024. 156쪽):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자경은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교사로 일하며 자경을 키운 아버지는 이제 뇌경색으로 투병 중이다. 자경은 회사를 옮기고 알바를 하면서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힘에 부친다.&nbsp;<br>여성과 돌봄 노동에 관한 흔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이야기 속 자경은 여러 가족 중에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돌봄 노동을 떠맡은 건 아니기에. 그러나 홀로 돌봄으로 인해 한 개인과 가정을 지탱하기 힘들어지고 그럼으로써 사회적으로도 고립될 수 밖에 없게 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생활에 치이고 경제적으로 허덕이면서 자꾸만 주위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지 못하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입을 닫을 수 밖에 없게 되는 자경의 모습은 단순히 안쓰럽다고 말할 수 만은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게 끝난 후의 그녀의 모습도. 그래도 작가는 자경에게 희망을 준다. 다시 사람에게 손 내밀 수 있게. 늦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역시 난, 사람으로 채우는 건 따뜻하지만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그렇게 따뜻하게 끝나서 다행이었고, 좋았다.&nbsp;<br><br>25. 나무를 훔친 남자(양지윤. 나무옆의자. 2024. 276쪽): 특이하고 괴상하지만 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죽어가는 나무가 불쌍해서 회사에서 나무들을 빼돌리고(표제작), 부당한 노동에도 자신만이 할 수 있고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에 잠도 자지 않고 쿠키만 구워대고(&lt;알리바바 제과점&gt;), 자유를 위해 부유함을 포기하고(&lt;우리 시대의 아트&gt;), 수조에 갇혔지만 도망치치도 않고(&lt;수조 속에 든 여자&gt;). 도저히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지만 이것이 이들이 이 사회를 견뎌내는 방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이들의 모습을 짜증내지 않고 그저 지켜볼 수 있었고. 누구나 자신만의 상처를 핥는 방법이 있는 거니까. 그럼에도, 이 소설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이런 주제들에서 조금은 벗어난 &lt;인류의 업적&gt;.&nbsp;<br><br>26. 두리안의 맛(김의경. 은행나무. 2024. 292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명의 인간은 그저 교체 가능한 부품임을 이야기하는 단편들. 작은 부품 하나일 뿐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빛나게 꾸려가고 싶어하는 소시민들의 안간힘이 보여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따뜻함이. 이 작가는 처음 읽는데 읽을수록 잘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들에게 너무 공감되어서 읽는 게 오히려 힘들기도 했지만 잘 읽었다.<br><br>27. 그녀를 지키다(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정혜용 역. 열린책들. 2025. 632쪽)]]></description></item><item><author>Yujin</author><category>독서목록</category><title>Veiller sur elle - [그녀를 지키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yujin/17192610</link><pubDate>Thu, 02 Apr 2026 16: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ujin/1719261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4988&TPaperId=1719261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072/76/coveroff/893292498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4988&TPaperId=1719261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녀를 지키다</a><br/>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03월<br/></td></tr></table><br/>(약간의 스포 있음)<br><br>유서 깊은 작은 수도원 사크라 디 산미켈레의 지하에는 그녀가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유폐된 피에타. 그녀를 본 사람들은, 심지어 수도사들까지도 묘한 흥분에 휩싸이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열망을 품게 된다. 여러 사건이 있은 후 이 수도원 지하에 숨겨진 그녀. 수도원장은 이제는 임종의 자리에 있는 '그'가 자신에게 하고픈 말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를 보러 가기 전에 먼저 자신만이 갖고 있는 열쇠로 그녀를 확인한다. 임종의 자리에 누운 그는 오랫동안 이 수도원에 머물고 있고, 수도사들 사이에서 그의 신분에 관해 말이 나온 적도 있지만 이제는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이며 시시각각 죽음에 다가가고 있을 뿐이다. 그는 지난 82년간의 생을 돌아본다.&nbsp;<br>1904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인이었던 그는 조각가인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미켈란젤로보다는 미모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미모 비탈리아니. 1차 대전은 아버지의 생명을 앗아가고 엄마는 피 한방울 안 섞인 '삼촌'이 있는 이탈리아로 그를 보낸다. 그저그런 석공이었던 삼촌 알베르토는 늘 술만 퍼마시며 허송세월을 하다 갑자기 소도시 피에트로달바로 이주하고, 거기서도 미모를 학대하지만 이제 열두 살이 된 미모는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이 고장의 가장 높은 귀족인 오르시니 후작 가문의 막내딸 비올라와 마주친다.<br>내가 처음부터 그를 가엽게 여긴 건 그가 왜소증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 응답받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응답받지 못한 이유도 왜소증은 아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클리셰로 읽힐 지도 모른다. 신분의 차이, 신체의 차이, 그리고 전쟁... 그러나 미모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그의 재능으로. 물론 그 악마적 재능이 그를 늘 도와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이 모든 상황을, 사람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재능 덕분이다. 그러나 그 재능으로도 미모는 비올라를 지키지 못한다. 천재성을 타고난 비올라. 모든 것을 기억하고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비올라. 하지만 세상은, 심지어 가족조차도 그녀에게 친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젠더를 형벌로 지고 살아간다.&nbsp;<br>아니, 미모는 그녀를 지킨다.&nbsp;<br>"빌어먹을, 넌 정상적일 순 없는 거야? 네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그저 정상적인 거 말야."<br>(중략)<br>"아니야, 미모. 그 말이 맞아. 내 평생 정상적이기 위해서 네가 필요했어. 그런 노력을 할 때 넌 내 구심점 노릇을 하니까. 그래서 네가 늘 유쾌한 존재일 수는 없는 거지. 하지만 내 안에는 아무리 너라도 절대 고치지 못할 비정상성이 있어. 그건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고 그 점에 관한 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 " (594 - 595쪽)<br>비올라의 천재성과 그것을 압박하는 가족과 사회에 대한 반발은 비앙카를 통해 드러난다. 중세 이후 서양 예술사에서 그리고 기독교에서 곰은 억제되어야 할 힘이며 길들여져야 할 야성이었다. 비올라는 비앙카를 지킨다. 비앙카에게서 달아나지도 비앙카를 사냥하거나 구속하거나 혹은 길들이려고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앙카로 인해 비올라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비앙카의 죽음과 비올라의 죽음이 잇단 건 우연은 아니었다. 그리고 비올라의 죽음이 미모에게 돌려준 것 또한.&nbsp;<br><br>난 확신한다. 이 작품에서 모든 독자들이 전율하는 지점을. 예상을 했다하더라도 미모가 얘기하는 피에타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가슴 속의 울림을 누구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미모가 비올라를 세 번 배신해야 했는지, 왜 비올라가 그토록 고통받아야 했는지 마지막에서야 모든 게 맞춰진다. 어쩌면 비올라가 한 가장 숭고한 일은 한 인간 - 미모 비탈리아니 - 을 구한 것이었는지도. 그리고 미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비올라를 지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그건 세상을 구한 것인지도.<br><br>PS. 원제 Veiller sur elle를 직역하면 '그녀의 위에서 깨어서 지키다'라는 뜻이다. 이 제목은, 비올라보다 작은 키의 미모가 지하에 놓인 피에타 상 위에서 산 40여년의 세월만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072/76/cover150/893292498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0727651</link></image></item><item><author>Yujin</author><category>독서목록</category><title>2월 독서목록</title><link>https://blog.aladin.co.kr/yujin/17129987</link><pubDate>Wed, 04 Mar 2026 16: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ujin/17129987</guid><description><![CDATA[1. 로열 로드에서 만나(이희영,심너울,전삼혜. 위즈덤하우스. 2023. 168쪽): 메타버스 앤솔러지. 이희영의 작품은 클리셰이긴 했지만 가장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심너울은 설정은 재미 있었지만 용두사미. 결말도 뻔했다. 전삼혜가 가장 좋았다. 몽글몽글 귀엽기도 하고,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하고.&nbsp;<br><br>2. 런던 비밀 강령회(사라 페너, 이미정 역. 하빌리스. 2024. 484쪽): 1873년 파리. 유명 영매 보델린의 제자로 있는 레나는 보델린으로부터 선천적인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레나는 원래 과학과 이성만을 신봉하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레나가 부모님이 계시는 런던을 떠나 이렇게 보델린과 함께 머물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인 동생 에비가 살해당했기 때문. 보델린은 범죄 피해자의 강령회를 열어 피해자의 영혼이 자신에게 빙의하게 해서 범인을 찾아낸다. 에비는 예전부터 강령회에 관심이 많았고 보델린의 제자로 있기도 했다. 보델린은 런던에 있을 때 런던 강령술 협회장인 볼크먼과 친하게 지냈지만 협회가 강령회에서 사기를 친다는 오명에 휩싸이고 여러 비리에 연루된 듯하자 모든 강령회가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신변의 안전이 염려되어 파리로 와 있었던 것. 그런데 협회장 볼크먼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협회의 부회장 몰리는 보델린에게 런던에 와서 볼크먼 강령회를 열어 범인을 밝혀달라고 부탁한다. 피해자가 죽은 곳에서 강령회를 열어야 하기 때문. 레나는 이번 기회에 에비의 강령회도 열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보델린과 동행한다.<br>(스포)작가의 전작이 사실 성에 차진 않았어서 큰 기대없이 집어들었기에 꽤 흥미롭게 읽었다. 번역, 교정은 별로였지만. 19세기 '신사' 클럽의 비합리성과 독선, 위선 그리고 비리. 진짜 능력있는 여성은 외면당하고 매장당하는 현실에 퀴어 코드까지 더해져서 이야기를 풍부하게 할 소재는 충분했다. 다만 서술이 좀 산만했고 사건의 해결이 너무 유령 의존적이었달까. 이성적으로 차근차근 단서를 따라가던 레나가 마지막에서야 진실을 알아차리는 게 의아했다. 그 정도면 진작 에비의 의도를 알았어야 하지 않나? 아무리 동생과 생각이 다르고 동생이 믿는 걸 안 믿었더라도, 이건 좀 다른 얘기잖아. 물론 범인의 정체를 살짝 비튼 건 그나마 약간의 재미를 더하긴 했지만 그게 뭐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건 사건 해결이라기 보다는 그냥 레나가 영혼을 믿게 되는 이야기,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래도 앞에서 말했듯 별 기대없이 읽어서 나쁘진 않았다.&nbsp;<br><br>3. 살인 리스트(재키 캐블러, 정미정 역. 그늘. 2024. 452쪽): 범죄 전문 기사를 쓰는 프리랜서 기자 메리 엘리스. 1월 말이 되어서야 지난 크리스마스 때 우편으로 온 선물들을 풀어보는데 선물 중에 있던 다이어리에 이상한 게 씌어 있다. 1월 1일 옥스퍼드, 리사 죽이기. 2월 1일 버밍엄, 제인 죽이기. 3월 1일 카디프, 데이비드 죽이기. 4월 1일 첼트넘, 메리 죽이기. 겁에 질린 메리는 경찰서에 찾아가고 경찰은 이미 죽은 리사 터너 살인 사건과 관련해 메리를 미심쩍게 보지만 결국 2월 1일에 부유한 독신 여성 제인 홀랜드가 사망하자 네 군데 경찰서는 비상 경계 태세에 들어간다. 문제는 이 이름들이 너무나 흔하다는 것. 4월의 타겟은 메리 엘리스가 거의 확실하지만 나머지는? 게다가 범인은 CCTV에 찍히지 않는 건 물론이고 법의학적 단서도 전혀 남기지 않았다.<br>별 내용 없는 거 같은데도 은근히 긴장하며 읽었던 게, 아무래도 '죽을 날'을 받아놓은 듯한 메리의 심정에 공감해서인 듯. 중간중간 메리의 과거사와 하우스메이트인 피터 및 피터의 애인 메간과의 에피소드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지루하지 않게 4월 1일을 기다리게 한다. 범인이 가까이에 있을 거라는 건 중간에 메리가 한번 더 받은 협박 편지 때문에 짐작했지만 진짜 범인은 너무 의외였다. 난 다른 사람을 의심했는데. 범행 동기도 찌질했고. 게다가 작은 반전도 좀 슬펐다. 그건 아니잖아. 선한 사람의 희생은 소설 속에서도 슬프다. 범인이 희생시킨 **도 그렇고, 그들이 희생시킨 &amp;&amp;도 그렇고. 긴장감과 설정에 비해 범인의 정체와 범행 동기가 너무 약해서 이 작가를 계속 읽어야 할 지 잘 모르겠다.<br><br>4. 공(김유나. 위즈덤하우스. 2025. 120쪽): 숙취에 시달리며 깨어난 아침, 병석은 집 안에 시츄 한 마리가 있는 걸 발견한다. 어제 입었던 옷 주머니에서 펫샵 영수증을 발견한 병석은 파양을 위해 펫샵으로 가지만 주인의 어이없는 태도에 개를 다시 데려오게 된다. 하지만 곧 접대용 일본 골프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br>강아지에 관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사내 정치에 시댈리는 직장인의 이야기. 이리 치이고 저리 굴려지는 공 같은 1N년차 부장급 영업직의 고뇌와 고충. 답은 없다. 그저 굴러가는 방향이 낭떠러지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br><br>5. 눈 맞추는 소설(김금희,장은진,김종광,서이제,임선우,황정은,천선란 (지은이),김선산,김형태,성보혜. 창비교육. 2025. 264쪽):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는데 생각보다 무거웠다. '개, 고양이, 새 그리고...... 의 이야기'라 했는데 '그리고.....'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7편 중 절반 이상이 이미 다른 단편집에서 읽은 작품들이었지만 다시 읽으니 또 새로웠다. 그 중 황정은은 또다시 힘겹게 읽으며 감탄했다. 진짜 잘 쓴다. 임선우는 처음 읽는 거 같은데 - 아니, 다른 앤솔러지에서 봤을 텐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 정말 좋았다. 결말을 계속 고쳐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그래도 7편 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김금희. 처음 이 책을 집어들 때의 기대를 가장 잘 충족시켜 줬다.<br><br>6. 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강승희 역. 천문장. 2019. 260쪽): 코데레는 동생의 전화를 받자마자 표백제와 고무장갑 등 청소도구를 한아름 챙겨서 동생이 말한 곳으로 간다. 욕실에 있는 시체. 동생 아율라는 그가 자신을 때리려 했다고 했다. 코데레는 일단 청소부터 시작한다. 사실 아율라가 이런 식으로 남자를 죽이고 코데레에게 전화한 게 처음은 아니다. 벌써 세 번째. 눈부신 미모의 아율라는 모든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고, 쉽게 연애를 시작하지만 끝은 늘 이런 식이었다. 코데레는 자신에게 화났냐는 아율라의 물음에 대꾸하는 대신 시체를 어디에 버려야 할 지 고민한다.<br>읽기 시작하면서부터 화가 났다. 아율라가 사람을 죽여서가 아니라, 언니 혼자 청소를 해서. 동생들이란 정말... 같이 청소해야지! 같이 고민하고, 같이 걱정해야지. 왜 사고는 동생이 치고 수습은 언니가 하냐? 아니, 이건 언니와 동생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난 이 책을 읽기 직전까지만해도 뭔가 속 시원한 이야기일 줄 알았다. 여성에게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남자들을 사적으로 응징하는. 그런데 아니었다. 예쁜 여자가 친 사고를 못생긴 여자가 뒷처리하는 이야기는 짜증만 불러올 뿐이다. 그냥 가정폭력에 의해 망가진 여성을 다른 여성이, 자매가 돌봐주는 이야기였다면 이렇게까지 짜증스럽진 않았을 듯. 굳이 아율라는 숨넘어가게 아름답고 생각은 짧은 여자로, 코데레는 외모 컴플렉스를 가진 깐깐한 여자로 그려야 했나 싶다.&nbsp;<br><br>7. 별 별 사이(김동식,김주영,전삼혜,홍지운. 우리학교. 2021. 148쪽): 청소년 SF 앤솔러지. 청소년기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냈는데, 네 편 다 좋았다. 다 재밌었고. 김동식은 좀 멀멀하긴 했지만. 가장 재미있었던 건 홍지운이지만 가장 마음에 닿았던 건 전삼혜.<br><br>8. 중독의 농도(김민령,장은선,송미경,전삼혜,김학찬,오문세,김봉래. 문학동네. 2015. 196쪽): 중독이라는 주제로 묶인 청소년 앤솔러지. 엮은이가 의도적으로 그런 것 같은데, 중독의 정도가 약한 작품부터 배치해서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핸드폰 중독과 시험 중독, (가상의)공기 중독 등이 이야기되지만 내 생각에 가장 심각한 건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중독들. 물론 모든 중독이 관계성에 영향을 미치지만 송미경의 작품에서나 장은선의 작품에서 보이는, 아직 미숙하기에 제대로 대처하기 힘든 관계성의 이야기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부디 이 아이들이 괜찮아지기를.&nbsp;<br><br>9. 서울에 수호신이 있을 때(이수현. 새파란상상. 2022. 448쪽): 어릴 때부터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희미하게 보곤 했던 은지는 취준 중 밤늦게 동작대교 한복판에서 거대한 멧돼지와 마주친다. 당황하는 사이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자전거를 끌고 나타난 훤칠한 남자가 멧돼지를 현충원 쪽으로 몰아 제압하는 걸 목격한 뒤 얼결에 부암동의 상담소에 취직하게 된다. 상담소장이라는 현허는 성별도 나이도 짐작하기 힘든데다가 드나드는 손님도 많지 않고 가정집 같은 사무실도 체계가 없다. 하지만 곧 현허는 신령이고 멧돼지를 제압했던 비휴 또한 사람 이상의 존재임을 알게 된다. 현허의 심부름을 하며 조금씩 서울의 신성한 존재들을 알게 되는 은지.<br>작가가 서울에 애정을 가지고 자료 조사를 방대하게 했다는 게 드러나는, 재밌는 이야기. 몰랐던 설화도 많이 알게 됐고, 새삼 서울 구도심의 거리와 여러 유적지의 모습도 환기되어 좋았다. 거기에 더해 작가는 서울 중심의 사고 방식 또한 비판하는 균형감도 보여준다. 결말은 안타깝긴 했지만 최선이었다고는 생각한다. 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해질 만큼 깊이 빠져 읽었던 이야기. 가능하다면 정말 후속작이 나왔으면 좋겠다.&nbsp;<br><br>10. 일곱 번째는 내가 아니다(폴 클리브, 백지선 역. 서삼독. 2025. 448쪽): 조는 느긋하게 집으로 걸어들어가 냉장고를 열고 맥주를 마신다. 위층에서는 여성이 샤워를 하고 있다. 조는 위층으로 올라가 그녀가 문을 열고 나오자 늘 갖고 다니던 서류 가방 속 칼로 그녀를 살해한다. 사방에 조의 흔적이 있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한 번도 체포된 적이 없는 조의 DNA 정보는 경찰에게 없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크라이스트처치 카버'라고 명명한 연쇄살인범 조. 하지만 언론에 알려졌듯 조가 살해한 여성은 일곱 명이 아니다. 여섯 명 뿐. 조는 어눌한 말투와 느린 행동으로 동정을 사 경찰서에 청소부로 취직했고 가끔씩은 버스를 공짜로 타기도 한다. 낮 동안의 직업을 이용해 자신이 하지 않은 살인의 진짜 범인을 찾으려는 조.<br>경찰 수사의 헛점을 공략하고 자만했던 조. 나르시시즘에 취해 다른 사람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던 조. 조의 시점이 강하게 서술되어 나 또한 샐리를 제대로 못 알아볼 뻔 했다. 하지만 이런 독자에게 균형감을 주기 위해 소설은 샐리의 시점 또한 공평하게 보여준다. 이게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인 듯. 사실 살인마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을 읽다보면 그가 잡히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 책은 샐리라는 선하고 바른 인물의 관점 또한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객관적인 시선을 잃지 않게 해준다. 결말은 기대만큼 속시원하진 않았다. 여성 혐오의 대가를 제대로 치르기를 바랐는데. 다음에도 이 작가를 읽을지는 잘 모르겠다.<br><br>11. 평균율 연습(김유진. 문학동네. 2024. 208쪽): 프리랜서 편집자 수민은 유학생활 중 만난 수찬과 결혼 생활을 하다 수찬의 요구로 이혼하는 중이다. 우연히 피아노 조율 영상을 보게 된 수민은 불안한 직업적 상황을 개선시켜보고자 피아노 조율을 배우기 시작한다.<br>유려하게 오가는 과거와 현재. 아름다운 이별이란 없다. 하나의 관계가 끊어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지난한 과정이 필요한지. 내 일이 아님에도, 남의 관계라도 그 종말을 지켜보는 건 힘겨웠다. 난 사실 처음부터 수찬이 원망스러웠고 수민의 엄마 또한 그러했는데 정작 수민은 담담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속은 쉽지 않았겠지. 마지막 장면에서 수민이 얘기했듯, 다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다 잘 될 것이다.&nbsp;<br><br>12.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박지영. 위즈덤하우스. 2025. 112쪽): '생애전환 시행령'. 생애 전환기가 되면 다음 생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지 선택할 수 있다. 모든 국민은 만 40세와 66세에 검진을 받고 사람으로 살 지 혹은 다른 생으로 살아갈 지 선택하고 전환할 수 있다. 승혜도 두 번째 생애 전환기가 다가오고, 승혜는 이런저런 고민 끝에 타자기가 되기로 선택한다. 승혜 타자기는 빈티지 샵에 놓이게 되는데, 부코스키의 문장을 누군가가 타이핑 한 후로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로 불린다.&nbsp;<br>무생물의 삶이라니, 신선했다. 그러니까 의식이 있는 무생물의 삶. 근데 이제 고통도 있는. 그 지점이 좀 별로긴 했지. 무생물이 되면 고통도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의식을 가진 대가인가? 하지만 생을 전환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육체적 고통은 차치하고라도 그리움과 아픔을 갖고 가야 한다면 차라리 그냥 지리멸렬한 인간으로 남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러나저러나 힘든 삶이다.&nbsp;<br><br>13. 북 오브 도어즈(개러스 브라운, 심연희 역. 문학수첩. 2025. 592쪽): 뉴욕의 서점에서 일하는 캐시. 오늘도 나이 든 단골 손님 웨버 씨는 마감 시간까지 책을 읽고 있다. 캐시가 마감을 하고 돌아서니 웨버 씨가 더이상 숨을 쉬지 않고, 슬픔을 느끼며 수습을 하던 중 웨버 씨가 앉아 있던 자리에 수첩만 한 크기의 책이 놓여 있는 걸 발견한다. 속지에는 캐시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메모와 함께. 책을 집에 가져 온 캐시는 이 책이 모든 문을 가고 싶은 곳에 있는 문으로 바꿔 주는 문의 책이라는 걸 알게 된다. 친구 이지와 함께 문의 책으로 곳곳을 다니던 중 비밀의 도서관 사서 드러먼드 폭스와 마주치는데, 드러먼드는 그 책이 캐시와 이지를 위험하게 만들 거라고 경고하고 역시나 책을 좇는 자의 공격을 받는다.&nbsp;<br>문의 책을 비롯, 다른 모든 책들 - 기억의 책, 행운의 책, 환상의 책, 기쁨의 책, 절망의 책 등 - 이 다 신기했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모든 책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면 한다. 책은 그냥 그 자체로서, 그것이 담고 있는 진실로써, 이야기로써 독자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결말에서 이 모든 책들이 파괴되기를 바라며 읽었다. 이야기 속에서나마 책이 파괴되기를 바라는 건 정말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다. 결말은 해피엔딩이었지만 글쎄... 나만 불안해? 캐시를 비롯, 다들 너무 관대한 거 아냐? 어쨌든 즐겁게 읽었다. 제발 내가 걱정하는 점을 가지고 후속편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으면.&nbsp;<br><br>14. 7맛 7작(박지혜,장아미,한켠,조동신,유사본,손장훈,김영주. 황금가지. 2017. 304쪽): 음식을 주제로 한 앤솔러지. 공모전 입상작들이라고 한다. 다 입상작들일텐데 필력의 편차가 좀 큰 편. 특히 캐릭터가 일관성이 없고 전형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그래도 재밌었던 건 손장훈 &lt;군대 귀신과 라면 제삿밥&gt;, 유사본 &lt;하던 가락&gt;. 손장훈은 마지막 여성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더 완성도가 높았을텐데.&nbsp; 유사본은 반대로 마지막 그 한 문장이 작품성을 더 높였다.&nbsp;<br><br>15. 아름다운 여름(체사레 파베세, 이열 역. 녹색광선. 2025. 184쪽): 옷가게에서 일하는 열 여섯 지니아의 단조로운 삶은 화가들의 모델로 일하는 아멜리아와 친해지면서 변하게 된다. 대담한 아멜리아를 따라 로드리게스와 어울리게 된 지니아는 그들과 함께 화가 귀도의 작업실 겸 집에 방문하게 되고, 화가인 귀도를 위해 아멜리아가 모델을 서줬는지, 귀도와 아멜리아는 어떤 관계인지 신경이 쓰인다.&nbsp;<br>옮긴이도 얘기했듯, 저자는 10대 소녀의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섬세하게 드러내는지. 모든 사랑은 여름처럼 뜨겁고 짧으며 강하게 빛나지만 한순간에 사그라든다. 이 여름이 지났고 겨울이 오고, 지니아는 좀더 어른이 되었다. 이제 다시 여름이 오겠지만 이번 여름은 지난 여름과는 다를 것이고, 지니아도 지난 여름의 그녀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성장하며 인생은 이어진다. 사랑은 그저 사랑으로서 아름다운 것.&nbsp;<br><br>16. 명신학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김동식,김선민,문화류씨,홍지운,정명섭. 요다. 2020. 252쪽): 학교를 배경으로 한 괴담 앤솔러지. 기대가 컸던 건지 다 용두사미였다. 다른 앤솔러지에선 재밌게 잘 쓴다 했던 작가들도 여기선 다들 하향평준화가 되어버린 건지. 학교에 이른바 '안전수칙'이라는 게 있고 그 중 하나라도 어기면 무서운 일을 당한다는 설정은 좋았는데 작가들이 다들 설정 구현에만 신경쓰고 이야기의 완성도는 외면한 듯.&nbsp;<br><br>17. 한참을 헤매다가(정미진. 엣눈북스. 2025. 392쪽)&nbsp;: 재욱은 어릴 때 엄마가 자신을 죽이고 자살하려는 현장에서 살아남아 도시의 가장 큰 병원장인 양아버지 밑에서 자란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서울에서 전학 온 은수의 안내를 맡게 되는데, 여행작가인 엄마를 따라 세계 곳곳에서 살아온 은수의 씩씩함과 자유로움에 빠져든다. 여름방학을 맞아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한 날, 둘이 같이 키우던 강아지 호수가 갑자기 아파 병원에 가느라 은수에게 미쳐 연락을 못했고, 그날 은수는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다. 그리고 15년 후 재욱은 뇌공학자가 되어 인간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기술을 개발한다. 은수의 무의식 속에 들어가 그녀를 깨우려는 재욱.<br>아이디어는 좋은데 문장력이 부족하고 디테일이 유치하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궁금하지만 각 장면장면을 읽어나가는 건 괴로웠다. 게다가 캐릭터들의 생각이나 행동들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현실적이지 못했다. 다음 작품은 좀 나으려나?<br><br>18. 클락워크 도깨비(황모과. 고블. 2021. 109쪽): 조선 말 깊은 산속. 연화는 대장장이인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대대로 무기를 만들던 장인 집안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떻게 이 깊은 산까지 흘러들어와 솥이나 만들어 양곡과 바꾸며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 없다. 연화는 혼자 놀러갔던 무덤가에서 마지막 도깨비 갑이와 만나 밤마다 씨름을 하며 함께 논다. 어느날 괴한들의 침입으로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연화는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수레를 가지고 갑이와 함께 한양으로 내려온다. 자신의 수레에 아버지의 원진을 싣고 갑이의 불을 원동력으로 인력거를 끄는 연화.<br>굽힐 줄 모르는 연화 때문에 조마조마해 하며 읽었다. 연화의 불이, 불같은 성격이 연화를 불행으로 밀어넣을까봐. 당시는 그런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작으나마 연화의 뜻으로 가득한 마을이 반가웠다. 이렇게 조용한 해피엔딩이라니. 하지만 해피엔딩만은 아니었다. 딸들을 향한 연화의 노래에 결국엔 눈물이 흐르고 말았으니. 그러나 연화는 딸들을 기다릴 것이고, 딸들은 가슴 속에 품은 불로 길을 밝혀 돌아올 것이다. 그 시절에도 지금도 안에 불을 품고 있는 여성의 길이 평탄하지는 않을지언정, 그 불을 절대 꺼트리지는 않을 것이다.&nbsp;<br><br>19. 저녁의 비행(헬렌 맥도널드,주민아 역. 판미동. 2021. 488쪽): 전작 『메이블 이야기』에서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참매를 길들이며 이겨냈던 저자의 신간이어서 동물들에 관한 저자의 깊은 시선이 담겨 있을 거라 기대하며 집어들었다. 역시 저자는 다양한 생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생활과 엮어 풀어낸다. 저자가 어린 시절 잔디밭에 얼굴을 파묻고 관찰했던 벌레들, 집 주변 공터에 있던 수많은 새들, 또 어른이 되어 관찰할 수 있었던 수많은 동물들 -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볼 수 있었던 철새들과 특별히 관찰할 수 있었던 백조들, 야생돼지와 산토끼,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 된 칼새들의 이야기가 각 챕터마다 삶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펼쳐진다. 각각의 이야기는 아름다웠고 특히 해질 무렵 공기의 흐름 속에서 잠이 든 채 하늘을 유영하는 칼새의 이야기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물론 마냥 아름다운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니다. 난민, 장애인, 망명자 등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삶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외면할 수 없으니까.&nbsp;<br>전반적으로 좋기는 했지만 문장 때문에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번역과 교정이 엉망이었다. 원문의 문장도 단출하진 않았을 거 같긴 하지만 번역시 모든 단어를 1:1로 옮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게다가 비문과 오타도 2~3페이지에 한번씩은 나온다. 가독성이 떨어져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읽어야 했다.<br><br>20. 전교생의 사랑(박민정. 문학동네. 2025. 316쪽): 단편집. 앞의 다섯 편은 어린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조명한다. 표제작의 '전교생'은 전학생의 일본식 표현. 난 우리나라 표현 그대로 전교생한테서 사랑받는 뭐 그런 소녀의 이야기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네 꿈을 위해' 혹은 '프로니까'라는 말로 교묘하게 조종당해 성을 팔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밀어넣어지는 '연습생'들은, 그리고 아역 배우들은 그 시절을 보낸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뒤의 4편은 연작인데, 역시 여성 아이돌 이야기. 다만 배경이 일본이고, 현재는 잊혀지거나 다른 길을 가는 멤버들의 이야기이다. 뒤의 작품들은 분위기가 조금 달라서, 일상 생활에서의 위선과 은근한 '급 나누기'에 따른 소외를 이야기한다. 어느 것하나 쉽게 지나쳐 가기 힘든 우리 사회의 불편한 현실들. 이 책을 읽을 때 내 기분 탓이었는지, 답이 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작품들은 훌륭했으나 이 놈의 사회는 발전이 없다는 생각. 그러니 계속 지적해야겠지. 작가들은 쓰고 독자들은 읽으면서.<br><br>21. 불멸의 인절미(한유리 (지은이)위즈덤하우스2024. 112쪽): 회사를 그만두고 집필 노동자의 길을 택한 유리는 인절미라는 기니피그를 키우며 친구 여름과 신림동 반지하 3룸에서 살고 있다. 몇 년 전 인절미와 같이 키우던 티라미수를 잃고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인절미를 돌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유리. 취직을 하면 인절미를 돌볼 시간을 낼 수 없고 시간을 확보하면 병원비를 댈 수 없는 현실. 유리는 인절미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있기에 의뢰받은 소설 속에서 인절미가 불멸의 삶을 살 수 있게 우주로 보내기로 한다.&nbsp;<br>후회의 마음이야 잘 알지. 내가 주지 못할 것을 어떻게든 갖게 해주고픈 마음도. 현실은 잔인하지만 마음만은 깊고도 깊다는 걸 인절미는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까. 먼 미래에 '그들'이 비웃듯 인간이 다른 생명체들을 비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좁은 공간에서 이상한 먹이를 얻어먹으며 삶을 이어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이 이상한 지배구조는 씁쓸하다.&nbsp; 하지만 좁은 방 안에서 인절미와 티라미수를 거두던 유리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없는 살림에 미나리를 사고 기니피그 영양제를 주사기에 넣는 유리에게. 병원비와 약값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뒤지는 유리에게. 이 지구의 모든 '반려'동물과 인간을 위해 기도한다.&nbsp;<br><br>22. 매듭 정리(이경희. 위즈덤하우스. 2023. 68쪽):&nbsp; 화자는 싱글 대디이다. 딸 소연은 아기 때부터 뭐든 스스로 해냈다. 하지만 소연이 유독 서툴렀던 부분은 순서를 지키는 것. 마치 소연의 엄마가 그랬듯 시간에 맞추거나 차례대로 뭔가를 해내는 걸 어려워하던 소연은 그러나 가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출산 후 사망한 엄마와 함께한 추억을 이야기하거나 먼 우주로 여행갔던 이야기를 하거나.&nbsp;<br>짧은 시간 동안 읽고 긴 시간을 생각했다. 그렇게 매듭을 묶어버릴 수 있는 마음을 나는 감히 따라가지 못한다. 시간이라는 건 없고 우리가 내린 작은 결정에 의해 생겨난 수많은 우주가 있을 뿐이라는 얘긴 어렴풋이 따라갈 수 있지만 그걸 이해했다고 해서 내가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 내게는 과거와 미래가 있다는 걸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소연은 알고 있었지. 어떤 우주에서 자신을 먼 곳으로 데려가 줄 누군가를 위해 여기서 매듭을 묶어야 한다는 걸. 그나마 소연이 그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매듭을 묶을 수 있어서, '오늘도 행복했'다고 얘기해서 다행인 건가. 그래서 소연의 아빠는 소연이 매듭을 묶는 걸 이해하지 못한 채 받아들인 건가.&nbsp;<br>난 알 수 없다. 그렇게 매듭을 묶는 마음도, 그걸 지켜보는 마음도.&nbsp;<br><br>23. 3층의 탐정 폴리와 라이스(오세민. 스토리비. 2024. 492쪽): 명문가 출신의 장교 리니아 폴라리스. 자신의 배경을 부하들을 위해서 쓰던 그녀는 마지막 전투에서 7명의 부하들을 귀환시키지 못한다. 집으로 가자던 외침이 무색하게, 갑자기 나타난 상관 후시 루 대령에 의해 부하들이 모두 우주로 흩어진 것. 리니아 폴라리스는 살상 무기 거래로 부를 축적한 집안과 연을 끊고 3층 랄 시티로 내려와 폴리라는 이름으로 탐정 사무소를 차린다. 우주 쓰레기들이 지구로 쏟아진 두 차례의 '스카이폴' 이후 지구는 하늘 위의 6층과 지상의 3층으로 나뉘었다. 궤도 엘리베이터로 6층과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3층민은 6층에 갈 수 없다. 6층은 상류층의 거주지이기 때문. 폴리가 이곳에서 복수를 다짐하며 탐정 일을 하는 동안 후시 루 대령은 폴라리스 집안의 충신답게 폴리를 감시하며 치안책임자로 3층에 머물고, 뛰어난 해커이자 2층 출신인 라이스를 폴리 곁에 붙여둔다.<br>마음 아픈 사랑 이야기를 연달아 두 편 읽고난 후에 가벼운 이야기를 읽고 싶어서 집어들었는데, 내 취향이 전혀 아니어서 읽는 게 고역이었다. 나름 세계관을 정교하게 설계하고 각 챕터를 유기적으로 엮기 위해 노력은 했으나 서술이 산만하고 문장이 유치했다. 뭔가 있을 거 같은 캐릭터들도 전형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역할을 잃었고. 더 재밌을 수 있었을텐데 안타깝다.<br><br>24. 삼척, 불멸(김희선. 위즈덤하우스. 2023. 64쪽): 병상에 오래 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화자는 딱히 슬프지는 않다. 운명하시는 순간 화자에게 침대 밑에 있는 열쇠를 가져가라 했지만 화자는 잊고 있다가 장례 며칠 후 아버지가 계시던 병원에 다시 갔고, 그곳에서 아버지와 담배 친구였다던 청소부에게서 그 열쇠를 받아온다. 사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부터 삼척이란 없다는 얘길 반복했다. 화자는 사진관을 운영했던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삼척과 관련된 다큐 비디오를 발견한다. 확인을 위해 삼척으로 향하는 화자.<br>짧지만 긴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 난 이 책을 읽었음에도 삼척은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삼척에 가려고 나선 순간, 삼척 가는 길에 꾼 꿈, 그리고 손에 쥔 열쇠. 어쩌면 그곳은 삼척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삼척은 머릿 속에만 존재할 수도 있고 집단 최면일 수도 있으며 그냥 삼척일 수도 있다. 이건 사실이나 지식이 아닌 기억의 이야기이므로. '형태도 없고 기원도 없는'(43쪽).<br><br>25. 나의 여자친구(서미애. 위즈덤하우스. 2023. 100쪽): 고시생 종호는 우연히 지하철에서 다시 만난 대학 동아리 친구 수빈과 사귀기 시작한다. 그런데 수빈은 자주 연락이 되지 않고 가끔 만날 때도 저녁 9시까지 귀가해야 한다며 서두른다.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다가 겨우 만나게 된 어느날 수빈은 양아버지가 자신을 학대한다며 도움을 요청한다. 종호는 수빈의 이야기를 듣다가 수빈의 양아버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br>초반에 상당한 어설픔을 보였던 종호가 후반부에선 꽤 날카롭다. 평범한 고시생이 어떻게 살해 계획을 세우고 실현하는지 궁금해하던 시선은 종호의 움직임에 따라 사건의 진실에 다다르고, 드러난 진실은 흔하디흔한 돈 얘기였지만 그만큼 핍진성이 짙기도 했다. 재밌게 읽었다.&nbsp;<br><br>26. 궤도(서맨사 하비, 송예슬 역. 서해문집. 2025. 240쪽): 국제 우주정거장. 지구를 90분 간격으로 16번 도는 우주비행사 여섯 명의 하루. 각자 국적과 성별은물론 과거도 다르고 그리운 사람도 다른, 같은 공간과 심지어는 소변(을 정화한 물)까지도 공유하지만 다른 마음과 생각을 품은 사람들의 이야기. 지구에서는 거대한 태풍이 발생하고 달에 착륙하기 위한 다른 우주비행사들이 출발한다.&nbsp;<br>그저 하루 열 여섯 번의 일출과 일몰이 있는 이야기. 무중력 공간 속 우주비행사들처럼 둥둥 떠다니며 읽고 싶은 문장들. 문장이 하나같이 아름다워 오랜만에 필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치에의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편히 자란 백인 여성의 나이브함이 보였다고 하면, 심한 건가?&nbsp;<br><br>27.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김목인. 위즈덤하우스. 2023. 80쪽): 평범한 회사원 G는 우연히 경매 사이트에서 아코디언을 발견하고 입찰한다. 마음을 졸였지만 단독 입찰로 낙찰을 받은 그는 프랑스 소도시의 판매자가 낙찰자가 먼 한국에 있다는 걸 알고 소극적으로 나오자 당황한다. 번역기를 돌리며 성심성의껏 악기를 배송받으려 노력하는 이유는 그 아코디언이 전설적인 뮤지션 마르셀 아졸라가 연주하던 카바뇰로 아코디언과 동일한 회사의 것이기 때문.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에 취재를 온 기자는 이 이야기에 흥미를 가진다.<br>아코디언의 배송이 무사히 이뤄질 것인가가 줄거리의 중심을 잡고 있지만 주제는 흔하지 않은 악기를 대하는 소중한 마음들이다. 아코디언에 관한 이야기는 처음이라 재밌게 읽었다. 어떤 취미에나 마니아는 있기 마련이지만 이 이야기는 왠지 더 순수하게 읽혔다. 아마 돈 얘기가 없어서인 듯. 악기를 단순히 수집하고 수선해서 연주하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희귀한 악기를 통해 경제적인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현실에는 널렸으니까. 이 이야기 속 사람들은 모두 어설프지만 아코디언 자체에 집중하고, 과하게 지식을 자랑하거나 맹렬하게 희귀한 제품을 수집하지도 않는다. 편안하고 차분하게 읽을 수 있었던 이야기.&nbsp;<br><br>28. 나의 마지막은, 여름(안 베르, 이세진 역. 위즈덤하우스. 2019. 156쪽): 루게릭 병을 진단받고 59세에 벨기에에서 존엄사한 저자의 마지막 여름. 병을 처음 알게 된 날과 병의 경과에 따른 신체 변화에 대해 언급하지만 투병기는 아니다. 존엄사를 신청했다는 게 언급되기는 하지만 절차에 대한 안내서도 아니다. 저자의 청원으로 프랑스에 존엄사 합법화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다지만 이에 대한 언급도 잠깐만 나온다. 저자는 그저 자신의 마지막 여름에 관해 이야기한다. 더는 혼자서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오징어를 잔뜩 사서 얼려 두었다가 손자들이 오면 요리해 줄 수도 없고 내년에 이 정원에 또다시 필 라일락을 볼 수도 없지만 저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죽음도 삶의 한 단계일 뿐. 내가 없어도 라일락은 아름답겠지만, 그게 다다. 모든 생은 아름답기에 내가 나로 죽을 수 있다면 그건 슬픈 일이 아니다.&nbsp;<br>읽는 내내 마음이 아릿한 건 어찌할 수 없었지만, 저자를 위해 난 기뻤다. 저자의 마지막 여름이 다른 여름처럼 아름다워서. 저자가 비록 이 세상에는 없지만 그 후의 여름도 아름다워서. 내 삶이 끝나더라도 다른 이들의 삶은 계속되고, 또 어디선가는 죽음이 일어나겠지만 생을 충분히 사랑했다면,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죽음은 슬프지 않다. 그래서 난 지금은 평온할 저자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계속 기뻐하기로 했다.&nbsp;<br><br>29. 10초는 영원히(황모과. 위즈덤하우스. 2023. 92쪽): '나'는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늘 책상 위에 엎드려 잔다. 잠에 빠지는 바람에 알바하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변명도 못할 지경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개성이 강하다. 그래서 16시간을 자는 나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어느날 류비라는 친구가 전학을 오는데, 류비는 10초 이상 움직이지 않는 사물/사람만 인식할 수 있다. 류비는 내 옆자리에 앉게 되고 난 류비를 위해 10초를 가만히 있어주고, 류비와 사랑에 빠진다.<br>(약스포)<br>피부에 부스럼이 잔뜩 난 아이, 한없이 느린 아이, 또 엄청나게 빠른 아이, 늘 TV만 보며 다른 사람의 말은 무시하는 아이, 온 몸에 털이 뒤덮힌 아이, 항상 마스크를 쓰고 기침을 하는 아이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 개성이 뚜렷한 아이들을 보며 난 이 책이 그저 SF라서 특이한 아이들이 나오고, 이 아이들이 곧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겠구나 했는데 아니었다. 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구속된 아이들의 은유였다. 아이들이 한 명씩 사라지고 류비마저 끌려가려 할 때 어른들은 단지 작별 인사를 위한 10초의 시간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게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 조금의 다름도 인정하지 않고 조금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 그래서 이들의 마지막이 더 슬펐다. 작가의 말처럼, 희망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걸까.&nbsp;<br><br>30. 현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죽음들(정지돈. 위즈덤하우스. 2023. 60쪽): 지미는 자신을 알아봐 준 약혼자와 그 가족이 강도들에 의해 살해당하자 그들을 쫓아가 죽여버린다. 이런 그녀를 이웃에서 목격하지만 경찰이 출동했을 때 모두가 그녀의 알리바이가 되어준다. D시는 이처럼 잔혹한 범죄와 사적 복수가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는 곳. 어느날 오래된 연못에서 수십 구의 유해가 발견되고, 오래전 실종된 어머니의 유해를 확인하러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작가 융은 이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로 한다. 융은 검시관 K에게 도움을 청한다.<br>좀더 길게 읽고 싶었던 누아르. 한편으론 더 할 이야기가 없을 거 같기도 했다. 융이 쓴 글이나 융의 어머니의 억울함이 어떻게 풀릴지, 앞으로 이어질 K의 나날들은 조금이나마 달라질 지, ''네이버후드 워치'는 또 앞으로 어떻게 될 지... 하지만 뭐, 그게 짐작이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사건들과 익숙하지 않은 인물들이 흥미로웠던 이야기.&nbsp;<br><br>31. 그냥 두세요(권혜영. 위즈덤하우스. 2025. 104쪽): 동생 윤서가 뜬금없이 드라이브를 가자고 한다, 대구로. 왜 대구에 가냐는 물음에 '중앙병역판정검사소'에 가야 한다는 동생의 말. 여성호르몬을 정기적으로 주사맞으며 목젖 제거, 가슴 확대 등 차근차근 수술을 받고 있는 동생이 당연히 군 면제를 받을 줄 알았는데, 자기들은 판단이 힘드니 중앙 어쩌구에 가서 재검을 받으라는 신병 검사소의 말에 '나'는 한숨을 쉬며 동생과 동생 애인 수아까지 태우고 대구로 향한다. 사실 나는 남들보다 체지방이 많은 몸으로, 남들의 시선이 부담스럽지만 늘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는 윤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휴게소에서 음식을 잔뜩 시키는 것도 모자라 검사소 대기실에서 냄새 나는 오징어까지 꺼내든다.&nbsp;<br>애증의 가족 관계. '쿨한' 부모이길 원하는 이기적인 부모와 역시나 내게는 짐이 되는 동생과의 갈등, 나 자신의 컴플렉스와 또 동생의 젠더 이슈. 내 몸이지만 내 맘대로 안 되고, 이 몸을 바꾸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그냥 두는 게 사실은 가장 맞는 길인데. 사실 몸이 어떻든 나는 나다. 윤서는 윤서고 수아는 수아고. 알면서도 그냥 놔두기 힘든 게 내 몸.&nbsp;<br><br>32. 문자 살해 클럽(시기즈문트 크르지자놉스키, 서정. 난다. 2024 .232쪽): 화자는 지인의 집에 방문했다가 텅 빈 서가만 있는 방을 보게 된다. 집주인 제즈는 자신이 어느날 깨달은 '문자의 무용성'을 이야기하며 순수한 구상을 문자화하는 건 오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과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매주 토요일마다 문자 살해 클럽을 열어 돌아가며 문자화되지 않은 구상을 얘기하고, 화자 또한 초청받는다.<br>사변적일거라 각오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각 주제별 이야기들이 마치 액자 소설처럼 재밌었다. 그럼에도 뒤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나 싶었는데 문자 살해 클럽에도 작으나마 사건이 일어나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 문자는 구상을 정제하고 구체화한다고 생각한다. 구상이 문자화되지 않고 그 자체로서만 존재한다면 그 구상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삐딱하게 읽어나갔기에 후반부에 라르가 '텍스트 없는 구상은 실이 없는 바늘과 같다'고 말했을 때 역시나, 싶었다. 꽤 오래전 작품인데도 신박했던 재밌는 책.&nbsp;<br><br>33. 글자들의 수프(정상원. 사계절. 2024. 220쪽): 제목과 연결되는 로맹 가리 이야기를 도서관 서가 앞에 서서 읽은 후 맘에 들어서 대출했다. '셰프의 독서일기'라는 부제처럼 저자가 읽은 문학 작품들과 음식을 연결지어 쓴 에세이. 단정하고 차분한 글들이 길지 않게 이어져 부담없이 읽었다. 다만 사어가 되어가는 단어들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어 문장에서 과하게 옛 단어들을 사용하였는데, 죽어가는 단어의 수명을 늘린다는 건 의미가 있으나 단어에 맞춰 만들어낸 문장은 전체 흐름상 편하게 읽히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글자들의 수프'는 궁금했다. 그 맛보다는 모양이.&nbsp;<br><br>34. 세이프 시티(손보미. 창비. 2025. 248쪽): 유능한 경찰이었으나 한번의 실수로 휴직을 해야했던 '그녀'. 남편의 친구인 임윤성, 최진유 부부와 자주 어울린다. 임윤성은 인간의 기억 중 일부분만 삭제할 수 있는 '기억조작술'을 연구하는 회사의 핵심 인물이다. 임윤성은 기억조작술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이나 범죄로 쾌감을 얻는 범죄자들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주장하지만 그녀와 남편은 동의하지 않는다. 한편 개발이 불균형하게 이루어지는 도시에는 노후된 지역과 새로 개발된 지역의 격차가 심해지고, 도시의 구역을 나눠 '안전도'에 따라 여러 등급을 표시해 주는 세이프 시티 앱이 인기를 끄는 가운데 낙후 지역의 건물에 들어가 여성 화장실만 문을 부수는 범죄가 계속 발생한다.&nbsp;<br>굽히지 않는 여주인공을 보면 난 정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조금만 타협하지, 아니 타협하는 척만이라도 좀 하지. 조금만 돌아가면 되잖아. 목적지에 가는 데 꼭 직진만 할 필요는 없어, 가끔은 좀 돌아가도 되. 그래서 마지막 장면의 그녀와의 마주침이 의미심장했다. 어쩌면 여주인공의 미래 같기도 하면서, 그게 꼭 슬픈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건 그녀가 바라는 삶일 수도 있으니까. 가장 중요한 걸 얻기 위해 다른 걸 버리는 건 희생이 아니라 그저 선택일 지도 모른다.&nbsp;<br><br>35. 원래 내 것이었던(앨리스 피니, 권도희 역. RHK. 2018. 420쪽): 라디오 진행자인 앰버는 크리스마스 다음날 병원에서 깨어난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가운데 간호사로 추정되는 두 명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큰 사고가 나서 이곳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에게 자신이 깨어났다는 걸 말하려 했지만 눈도 떠지지 않고 말도 나오지 않는다. 코마 상태였던 것. 드디어 남편이 오는데, 앰버는 남편이 오는 게 마냥 반갑지는 않다. 남편은 더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에. 곧 여동생 클레어도 오는데, 앰버는 클레어도 불편하다. 늘 자신과 비교되는 화려한 미모를 뽐내며 자신의 삶에 개입하려 하고, 남편과 이상하게 친밀하기 때문. 앰버는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고를 기억해 내려 애쓰지만 악몽만이 찾아온다.<br>어린 시절의 일기와 앰버의 현재가 교차된다. 의심스러운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상사, 그리고 그 남자의 등장 등 스릴러적인 요소도 쏠쏠하고 반전도 훌륭하다. 다만 앰버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 부분이 좀 답답하다. 하지만 앰버의 꿈이 조금씩 변하는 걸 따라가면서 어릴 적 일기와 대조해 가면서 읽으면 사건의 전말이 서서히 보인다. 결말도 이 정도면 완벽. 오랜만에 꽤 맘에 드는 범죄 소설이었다.&nbsp;]]></description></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