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펠슈틸츠헨

제목도 살벌한 이 책은 조이스 캐럴 오츠, 셜리 잭슨, 닐 게이먼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다시 쓴 옛 이야기 후속편 모음집이며 앤절라 카터에게 헌정되어 있다. 41편의 단편 중 두 편이 롬펠슈틸츠헨 이야기다. 


"로라 시티"의 작가 케빈 브록마이어가 쓴 "반쪽 룸펠슈틸츠헨의 어느 하루"는 옛 이야기 결말에서 반으로 쪼개진 한 쪽 룸펠슈틸츠헨의 그 이후 이야기다. 


아침에 그는 꿈을 꾸다 깬다. 자신의 지푸라기 몸 오장 육부가 물레를 통과해 금실이 된다. 곧 금실 뭉치만 남고 지푸라기는 없다. 그리고 그 자신 룸펠슈틸츠헨도 없다. 놀라서 깬 그는 그야말로 반쪽, 별을 반 접은 꼴이다. 몸을 굴리거나 한쪽 발로 깡깡이를 하며 움직인다. 어려운 몸 동작으로 세수를 하고 아침을 챙겨 먹고 직장에 가서 창고 정리를 하거나 마네킹 옆에 서있다가 그의 반쪽 몸을 만지는 껄렁한 십대 청소년을 놀라게 만든다. 직장 상사에게 핀잔을 듣고 퇴근 후 먼 곳에 따로 떨어져 사는 다른 반쪽의 롬펠슈틸츠헨이 보낸 편지를 읽는다. 그곳 삶도 녹녹치는 않다. 지역의 여성개발센터에서 강연을 한다. 여성 청중들은 동화의 결말과 그 디테일에 관심이 많지만 정작 그와 숲속의 늑대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들은 왜 그가 개명하지 않는지 묻는다. 그는 자신이 룸펠슈틸츠헨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반쪽일 지언정. 


그는 반쪽이다. 지금 여기 오른쪽 몸만 있으니 다른 곳에 있는 왼쪽 뇌와 연결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그가 가진 오른쪽 뇌가 느끼는 건 저 먼 곳의 왼쪽 몸일테고 그것이야 말로 진짜 그의 정체성인가. 그는 소외되고 길을 잃은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묘기하듯 큰 솥 주변을 구르고 뛰며 음식을 하고 먹고 노래를 부르고 TV를 보고 "영원히 파편적인 인간에 지나지 않"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다 잠에 든다. 


우습고도 슬프게 쓸쓸한 이 반쪽이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순간, 이야기의 그 왕비는 잘 살고 있냐?!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약간의 분노를 "너스 베티"를 감독한 닐 라뷰트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키워서 그 여인과 대면시킨다.


"금실로 자은 머리카락"은 롬펠슈틸츠헨 옛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왔다. 옛이야기의 롬펠슈틸츠헨, 금을 만들어주고도 배신당한 '작은' 남자가 왕비를 찾아왔다. 화자는 바로 그 과거의 남자다. 어때? 놀랐어?라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는 Instant karma라는 존 레논의 노래를 인용한다. 열여섯의 청소년은 고등학교 상담 여교사에게 성적으로 유린당하고 (혹은 눈을 뜨게 되며 사랑에 빠지고) 함께 하는 미래를 믿고 여자가 간절히 원한 '그것'을 주었지만 여자는 떠나버린다. 하지만 이렇게 남자는 여자를 찾아냈고 여자의 남편과 아이가 모르는 비밀을 들이민다. 


"인터넷, 거기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공간이에요. 당신과 나 같은 사람, 이 세상의 거짓말쟁이, 허풍쟁이, 유령 같은 존재들을 위한 공간이죠. 몸을 숨기고 자신을 가장하기에 참 좋은 장소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나도 그렇게 했지요. 나는 금실로 자은 듯한 머리카락이 돋보이는 서맨사라는 이름의 귀여운 10대 소녀로 가장했어요." 


이제 여자가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할 일은 단 하나, 자신의 과거와 거짓말이 탄로나 지금의 행복을 흔들지라도, 이 작은 남자의 이름 롬펠슈틸츠헨을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그의 정체를 알려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존 레논의 노래처럼 업보인데? 그러면 이야기처럼 이 남자도 분에 못이겨 둘로 쪼개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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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09 21: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니까요, 우리 시대의 진정한 고딕의 여왕은 앤절라 카터라니까요. ㅎㅎㅎㅎ

유부만두 2023-12-10 16:54   좋아요 2 | URL
그쵸. 피로 물든 방을 반쯤 읽고 놔뒀었는데 제대로 완독해야겠습니다.
 

스티븐 킹의 페어리 테일에서 제일 많이 언급되는 옛이야기는 "잭과 콩나무/콩줄기"다. 지하세계에 들어가서 금덩어리를 들고 온 보디치씨가 잭이고 그를 쫓다 실패한 거인 해다와 악한 왕이 거인에 해당한다. 어쩌면 음산한 귀신의 집에 금을 쌓아두고 홀로 살다가 (콩나무 대신)사다리에서 떨어진 보디치씨가 거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찰리는 그의 금을 훔치는 대신 도움을 베푼다. 





잭은 어리숙해서 소를 팔러 가다 낯선이의 말에 속는다. 그에게서 소값으로 콩 다섯 알을 받는다. 잭의 엄마는 너무 화가 나서 콩을 집 밖에 던지고 하룻밤 새 콩은 거대한 줄기를 하늘로 뻗었다. 잭은 그 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거인의 집에 닿는다. 거인의 아내는 거인에 대해 경고하며 잭을 숨겨주고 잭은 금화 주머니를 훔쳐 집으로 돌아온다. 그 금화로 생활을 하다 금화가 떨어지자 잭은 다시 거인의 집으로 올라간다. 이번에도 거인의 아내가 숨겨주고 잭은 두번째 도둑질, 금알을 낳는 닭을 훔쳐온다. 닭은 황금알을 낳았고 잭의 욕심은 더 커졌다. 삼세번의 법칙. 세번째 상경/승천해서 거인 집에 이르자 이번에는 거인의 아내도 모르게 혼자서 큰 솥단지에 숨는다. 그리고 틈을 노려 노래하는 하프를 훔쳐 도망친다. 하지만 하프가 소리를 지르자 거인이 쫓아오고 먼저 땅으로 내려온 잭이 콩줄기를 도끼로 내려 찍자 거인은 거꾸로 떨어져 죽고 만다. 잭은 훔쳐온 보물 두 가지로 잘 먹고 잘 산다. 



동화를 프로이트식으로 분석하는 브루노 베텔하임은 이 이야기 역시 성숙을 향한 투쟁으로 본다. 젖이 마른 암소를 내다 파는 것은 구순기가 끝나 유아기 낙원에서 추방되는 것이라 했다. 잭은 암소를 돈으로 바꾸는 대신 마법 콩알로 바꾸었으니 아직 현실을 직시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콩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행동은 잭이 자발적으로 한다. 밤새 뻗어올라간 콩줄기는 남근기를 나타내고 (아 지겹..) 남근적 국면에서 오이디푸스적인 대칭, 즉 거인에 맞선다. 거인의 집에서 두번이나 도움을 주는 거인의 아내는 잭을 구박하는 친엄마의 다른 변형이다. 그가 숨는 솥단지는 ... 그렇다 자궁. 보물을 훔쳐 달아나고(황금알 낳는 닭은 항문기, 마술하프는 예술적 단계;;;) 도끼질(!!)로 거인을 죽이면서 잭 자신이 어른이 된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촌스러운 해석 아님니까. 그냥 어리숙한 아이가 마법을 믿고 싶어서 믿었고, 그 마법이 벌어졌을 때 욕심을 한 번 두 번 세 번 부렸고, 삼세 번 만에 도둑질이 완성되면서 살인범이 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벌을 안 받네? 왜? 죽은자가 이미 어린이들을 습관적으로 납치 살해 식인해온 반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 거인의 아내는 높은 하늘의 그 집에 혼자 살게 되나? 그녀는 거인의 공범이었을까, 방조자, 아니면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을까. 거인의 뒷수발을 들지 않아도 되니 그녀에겐 이득일까. 


찬호께이는 이 콩나무 이야기를 거인 살해 사건이라며 법정으로 가져온다. 

소설의 주인공은 귀족이며 법학자(이지만 본업보다는 유럽 각지의 민담을 수집하는) 호프만 선생이고 화자는 그의 비서 안데르센이다. 그들이 영국의 한 시골 마을을 지나다 9살 소년 잭이 강도살인치사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 법정에 참석해서 지방 판사의 독단적 판결을 저지하며 이는 마법(마법의 콩, 황금알을 낳는 닭, 요술 하프)이 연루되었으니 종교 재판이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교가 오기 전 며칠 동안 호프만 선생은 사건을 재수사한다. 잭의 아버지의 의심스러운 돌연사, 잭에게 콩을 준 비밀스러운 남자, 악명 높은 거인이 사실은 가파른 언덕 위에 살던 대장장이로 키는 2미터를 넘는 사람이었다. 잭의 주장에 따르면 금화는 거인의 부인이 주었으며 닭이나 하프도 부인이 가져가라고 강권했다고 했다. 물론 거인의 부인은 부정하며 남편의 죽음이 잭의 탓이라고 주장했다. 호프만 선생은 콩줄기가 어디에 떨어져 어떤 모양으로 바위벼랑 옆에 뻗었는지 (지금은 타버려 흔적도 없다) 조사한다. 하지만 그날밤 자객이 호프만과 안데르센을 습격하는데.... 설화를 현실로 가져오면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지, 또 납치, 살인, 절도, 강간 등 얼마나 폭력이 많은지 생각하게 된다. 귀족 주인공 호프만 선생이 모든 행위의 시시비비를 가린다. 하지만 거인을 되살릴 수는 없다. 이 단편에서 그는 애도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나마 나은 셈이다. 


옛이야기 엔딩은 대부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이지만 비극에 호러다. 피를 밟고 선 행복과 돈이냐! 이런 걸 아이들에게 꼭 읽혀야 하느냐? 그래도 옛이야기는 구성이 헐겁고 상징적이라 여러 해석을 나름대로 붙여보는 재미가 있다. 구순기 항문기 이런거만 있는 게 아니라니까. 며칠 옛 이야기 관련 책들을 쌓아 놓고 읽자니 내가 지금 뭐하나 싶다. 현실을 살아야해. 우리집 먹깨비들이 몰려오기 전에 솥에 밥을 안쳐야 한다. 쿵쿵쿵, 피 파이 포, 소고기 냄새가 난다아아아. 그래, 얘들아 오늘 불고기했어. 근데 밥은 콩밥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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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2-08 18: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의도적인 오타 있는 거 알아요?

반유행열반인 2023-12-08 2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도 좋은데 잭과 뽕나무 하는 순간 무언가 음탕해짐요... 저도 거인 불쌍해 잭은 강도살인마야 했는데 그걸 생각만 안 하고 법정스릴러(?) 만드는 분들이 역시 작가가 되는 거 군요 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12-09 19:57   좋아요 2 | URL
ㅋㅋㅋ 그러네요. 뽕나무!!! 80년대 에로 영화 포스터도 생각나고요.
어쩌면 뽕나무에서 떨어진 거인은 오디 때문에 더 붉은 몸으로 죽었을 거에요.

찬호께이의 소설은 스릴러라기 보다는 그역시 짧은 옛이야기에요. 유럽판 암행어사 박문수 억울한 누명을 벗기다, 자잔, 그런데 재미가 없다는 게 반전이죠. 하하

psyche 2024-01-05 14: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찬호께이에게 저런 작품이 있었네? 읽어볼까 했는데 재미가 없다는 게 반전이라니 패스 ㅎㅎ

유부만두 2024-01-05 16:27   좋아요 1 | URL
패스. 이건 별로에요.
 

정세랑 작가의 신작. 역사 탐정물. 금성은 행성이 아니라 옛 경주. 


작가의 전작을 생각하고 표지를 보면 가볍고 행복한 이야기이리라 넘겨짚기 쉽다. 하얀 매가 야무진 눈매로 칼 자루 하나와 센터를 차지하고 있다. 불상, 승려, 말탄 (늙은) 군인 등이 소용돌이 있는 물 위에 떠있다. 저 멀리 황룡사 9층탑이 보인다. 


때는 7세기 후반, 나당전쟁 이후 통일 신라시대. 오랫동안 당나라 유학(이지만 혼란한 국제 정세에 고생고생)을 마치고 관리 선단에 끼어 신라의 수도 금성으로 돌아오는 이십대 (나약한 체격의) 설자은. 책의 뒷면에 나와있듯이 자은은 급사한 오빠 대신 남자가 되어 당으로 가 공부를 했고 여전히 오빠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들키면 죽는다, 심정으로 배에 올라 책 상자를 껴안고 있다. 그런 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백제 출신 자칭 장인 목인곤. 그는 자은이 여자인 것을 알아채지만 별 내색없이 그 옆에 머문다. 통일신라 시대의 (여성) 셜록과 왓슨의 탄생. 


책은 네 편의 이야기, 즉 네 건의 사건과 자은과 인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비슷한 남장 여인의 탐정 이야기(로 볼 수도 있는) "사라진 소녀들의 숲"이 생각났는데 허주은 작가가 환이의 남장을 일찍 풀고 비단 치마를 입히며 암행어사에게 의존하게 만든 것과는 달랐다. 자은은 계속 남자로 남는다. 그리고 다른 남자에게 의존하는 대신 목인곤을 수하로 부린다. 하지만 여기 실린 네 편의 사건 중 적어도 셋은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여성의 이야기다. 여성 인물들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각자의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고 있다. 


코난이나 김전일이 가는 곳마다 살인이 벌어지듯 자은 옆에도 사람이 죽어나간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배후에는 이야기가 있다. 배에서 죽은 상인은 정말 사라진 그 여인의 아비였을까? 어떤 여인은 사랑의 시작과 끝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해야 직성이 풀린다. 전설적 장군이 정말 손바닥에 저주 문자가 뜨면서 전쟁의 업을 치르는건가? 여성들의 베짜기 연례축제가 어떻게 여인들에게 탈출구가 되는가? 베틀을 부순 범인은 누군가? 문무왕의 매지기는 어떤 죄를 지었는가? ... 문무왕에게 매란? 자은에게 자유란? 유부만두에게 정세랑이란?


자은은 용감하고 예리하게 그 이야기들의 실마리를 잡아 차근차근 사건을 풀어놓는다. 결코 서둘지 않고 절대로 으스대지도 않는다. 범인들은 의외로 간단하게 드러나는데, 자은은 처벌과 공개보다는 범행 동기와 뒷수습에 더 집중해 배려한다. 셜록과도 조금 다르다.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에선 표지의 매와 자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이 책이 설자은 통일 신라 탐정 시리즈의 대망의 첫 권이라고 선언한다. 자자잔!!!! 1권의 많은 부분이 시리즈의 설정과 밑밥이다. 옛정인, 집안 사정, 정치적 긴장, 밉상 고관대작 다 그려진다. 작가의 섬세함과 대범함이 보인다. 길게 갑시다, 작가님. 한 스무 권? 


표지가 조금만 덜 귀여웠더라면, 책소개 방송 등에서 정세랑 작가가 조금만 더 묵직하게 힌트를 줬더라면 더 일찍 이 책을 읽었으리라. 기대이상이라 깜짝 선물 받는 기분으로 읽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거인 왕 문무왕의 시대가 멀지 않아 끝나고 더 많은 사건들이 나올 걸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뛴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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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12-07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겠어요! 정세랑!!!!!!!!!!!!!!!!!!!!!!!

유부만두 2023-12-07 12:11   좋아요 1 | URL
재밌는 탐정 소설이에요. 피도 나고 서람도 죽어요. (경고 했으니 나중에 무서웠다고 불평 마세요, 너무 겁먹지도 말고요. 스티븐 킹만큼 음산하진 않으니까요)

psyche 2024-01-05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난 금성이 하늘에 있는 저 금성인 줄 알고 SF 라고 생각했지. 역사 탐정물이라니 재미있겠다!!

유부만두 2024-01-05 16:28   좋아요 0 | URL
재밌어요. 표지 보면 청소년 소설 같은데 아니고요. 꽤 공들여서 시리즈 빌드업 하는 거 같아요.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겠다 싶어요. 문장도 인물들도 좋아요. 추천.
 

그림 동화와 페로 동화 등 여러 옛이야기들의 모음집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 중 낯선 "롬펠슈틸츠헨"편을 찾아 읽었다. 


엉뚱한 거짓말로 딸 자랑을 한 아버지 때문에 소녀는 욕심 많은 왕 앞에 끌려간다. 아버지의 장담 대로 "짚을 황금실로 만드는 재주"를 증명해야 한다. 난감한 소녀가 엉엉 울자 그 앞에 키작은 남자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줄테니 뭘 줄래? 하고 묻고 소녀는 목걸이를 약속한다. 그리고 작은 남자가 만들어낸 황금실 뭉치에 목걸이를 내준다. 욕심이 생긴 왕은 더 많은 짚으로 다음 과제를 내고 이번에도 작은 남자가 소녀에게서 반지를 약속 받고 황금실을 만든다. 모든일은 삼세번, 세번째에 고비가 온다. 세번째 더 많은 짚더미를 주며 왕은 이번 일을 성사시키면 왕비가 될 것이라고 소녀에게 말한다. 그러나 소녀에겐 작은 남자와 거래할 보석이 없다. 그러자 작은 남자는 소녀에게 나중에 네가 낳을 첫아이를 달라고 한다. 급한 마음에 소녀는 약속을 하고 황금실 더미와 함께 왕비가 된다. 하지만 약속은 잊어버린다. 



빚은 사라지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왕비 앞에 그 키작고 기분나쁜 남자가 찾아와 아이를 요구한다. 왕비는 울며 호소하지만 작은 남자는 흥정이랍시고 사흘 안에 자신의 이름을 알아내면 거래를 취소하겠노라고 한다. 왕비는 부하들을 온 나라 방방 곡곡에 풀어 그 이름을 알아낸다. 다 이긴 내기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분을 못이기고 자기가 자신의 몸을 찢어(!!!!) 죽고 만다. 그리고 왕과 왕비는 잘 먹고 잘 살았다고. 


애초에 거짓말로 딸 자랑으로 자식을 곤경에 빠뜨린 아버지, 짚으로 황금을 얻을 욕심에 찬 왕, 자신을 도와준 사람과 거래에 대해 쉽게 잊어버리고 도망갈 생각만 한 소녀/왕비. 이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후환도 없이 잘 먹고 잘 산다. 하지만 감히 아름다운 소녀에게 집적댄 키작은 (못생긴) 숲속의 외톨이 남자는 황금을 만드는 기술을 갖고도 어음 회수를 못하자 자기 성질을 다스리지 못하는 바람에 죽고 만다. 만만하고 못생긴 비호감 기술자를 왕과 그 일족이 잘 뽑아먹어도 된다는 의미인가? 매우 찜찜한 옛이야기다. 


그 작은 남자, 숲속에 혼자 살며 콩콩 튀는 이상한 춤을 추고 생명 있는 어린 아이를 가져가겠다는 끔찍한 추물. 그의 이름을 알아내야 한다는 것의 의미는 뭘까. 얼마전 본 김은희 작가의 공포물 "악귀"에서도 주인공 김태리의 몸에 깃든 악귀의 생전 이름을 알아내는 것이 필요했다. 이 악귀 역시 처음에는 원하는 것을 준다. 돈,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이를 해하는 것. 악귀의 이름이 아는 건 그 정체를 아는 것이니 그 자체가 상대를 무찌를 힘이 된다. 이름을 아는 것은 이름을 지어주는 것 만큼이나 강력한 행위이다. 


이 동화집의 작은 남자, 그 서양 도깨비의 이름이 바로 롬펠슈틸츠헨(Rumpelstilzchen)이었고 이는 딸랑이 요괴, 악령, 시끄러운 도깨비 쯤의 뜻으로 poltergeist와 비슷하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온다. 퇴마의식에도 악령의 이름을 부르고 그다음 물러가라고 외친다. 이런 퇴마식이 스티븐 킹의 페어리 테일 후반부에도 벌어진다. 차마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거대 악, 그것에 맞서 그 이름을 부르고 사라지라고 외치려면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리라. 그러니까 왕비가 된 아름다운 소녀는 작은 남자가 나타나 요술을 세 번이나 부리고, 아이를 요구하며 협박할 때도 정신줄 놓지않고 맞선 것이다. 네 이름이 롬펠슈틸츠헨이렸다, 이 놈아! 이렇게 생각하면 왕비의 싸가지 없음 만큼이나 그 당당함에 감탄하게 된다. 익명의 인터넷 세상에서 필요한 용기 (더하기 뻔뻔함)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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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롬펠슈틸츠헨 그 후의 이야기 두 편
    from 책읽기의 즐거움 2023-12-09 20:46 
    제목도 살벌한 이 책은 조이스 캐럴 오츠, 셜리 잭슨, 닐 게이먼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다시 쓴 옛 이야기 후속편 모음집이다. 그리고 앤절라 카터에게 헌정되어 있다. 41편의 단편 중 두 편이 롬펠슈틸츠헨 이야기다. "로라 시티"의 작가 케빈 브록마이어가 쓴 "반쪽 룸펠슈틸츠헨의 어느 하루"는 옛 이야기의 분노의 비극적 결말에 반으로 쪼개진 한 쪽 룸펠슈틸츠헨의 그 이후 이야기다. 아침에 그는 꿈을 꾸다 깬다. 자신의 지푸라기 몸 오장 육부가 물레
 
 
건수하 2023-12-06 09: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림책과 옛이야기 공부(?)하다가 봤었던 기억이 나네요. 어떤 판본에서는 아기를 요구하지 않고 아가씨에게 아내가 되어달라고 하는데 그러면 뉘앙스가 좀 다르더라고요.. ^^;

유부만두 2023-12-06 10:45   좋아요 1 | URL
아이를 달라는 것 보다는 청혼(?)이 나아보이.... 아 이것도 무섭고 싫으네요. 대단한 마법을 부려서 널 도왔으니 니 미래(결혼이나 아이)를 내놓으란 거.

하지만 롬펠슈틸츠헨(이름도 드릅게 어렵..)이 자폭하는 결말은 (이게 스티븐 킹 소설선 두 캐릭터로 더블 출연) 너무나 희화되버리니까 오히려 측은한 맘도 좀 들고 그래요. 그러면 안되는데 말이죠. 저열하고 흉한 놈이잖아요.

그나저나 그림책과 옛이야기 공부하셨다니 그 시절 이야기 좀 나눠주세요. (안그러신다고 잡아먹으지는 않습니다만 ㅋㅋ)

건수하 2023-12-06 13:30   좋아요 1 | URL
아 그냥 지인들과 같이 발제하고 뭐 그런 거였습니다 제가 룸펠슈틸츠헨 부분을 맡았었거든요 ^^;;

레삭매냐 2023-12-06 10: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꼬맹이에게 <룸펠슈틸츠헨> 이야기를
읽어 주면서 이것이 동화인가 사회 풍
자를 빙자한 엽기 소설인가 하는 생각
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서양 동화들 살발합니다 고저.

유부만두 2023-12-06 11:14   좋아요 2 | URL
맞아요. 엄청 살벌해요.

지푸라기를 금실로 만드는 요술로 (이거 어쩐지 코인 같기도 하고요) 사람 목숨을 흥정하고요, 약속 한 번 잘못해서 끔찍한 덫에 걸리고요. 그리고 죽여도 곱게 죽이질 않더라고요. 엽기죠.

서곡 2023-12-06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님 안녕하세요 룸펠슈틸츠헨 반가워서 댓글 남깁니다 저 이 캐릭터 좋아해요(!) 성명마법이란 것도 재미있고요...

유부만두 2023-12-06 18:30   좋아요 1 | URL
그쵸. 성명마법이란 것이 유럽에서 매우 보편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이 이상한 캐릭터는 비호감인데 연민도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캐릭터에요. 전 좋아하긴 어렵지만 흥미롭다 쪽으로 봤어요. ^^
 

1. 쓰러진 보디치씨를 위해 911를 부른 찰리. 독한 약을 갖다랄라는 노인의 말에 찰리가 주저하자 노인은 말한다. 


"그냥 줘. 나를 죽이지 못하는 건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니까. 누가 한 말인지 네가 알 리는 없겠지? 요즘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니체요. <우상의 황혼>. 이번 학기에 세계사 수업을 듣거든요."

"제법이네."


2. 금주 모임에 다니는 아빠와 찰리의 대화.

"아빠가 하는 그 프로그램에서는 그러잖아요. 오늘 당장의 일만 생각하라고." 

아빠는 쿡쿡 웃었다.

"과거는 역사고 미래는 수수께끼라고도 하지."


3. 주인공 찰리의 친구 앤디는 중국계다. 학교 운동 코치는 그를 '황색 폭격기'라 부르고, 아이들은 그가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다며 욕하지만 결국 찰리는 농담으로 그 발언을 반복한다. 친구니까? 그리고 그 중국계 친구가 찰리네 와서 냉장고를 스스럼 없이 열어 꺼내 먹는 음식은 쿵파오 치킨이다. 하하. 


4. 노인의 집에는 묵은 물건들이 오래된 책들이 많다. 새커리 전집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하는 찰리. 


5. 금덩이를 들고 어둠의 거래를 하러 보석상에 간 찰리. 자신이 콩나무를 타고 올라간 잭이 아니라 <보물섬>의 짐 호킨스가 된 기분이 든다. 어딘가에 롱 존 실버가 있을 것만 같다. 난 보물섬을 책이 아니라 애니 시리즈로만 봤는데 아마도 나이가 좀 든 이후였던 것 같다. 왜냐. 주인공이 너무 애송이로 보이고 악당이 멋지더란 기억이 있거든. 


6. 찰리가 정신 없이 읽는다는 댄 J 말로의 <게임의 이름은 죽음The name of the game is death>. 번역본은 없는 옛날 책. 잔인하기 이를 데 없대서 혹하지만 패스.


7. 보디치 씨는 오트밀 아침을 먹으면서 벽돌책 제임스 미치너를 읽고 있다. 찰리가 인사해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한다. 


8. 브래드버리에 대해 뭔가를 아는 게 분명한 보디치 씨. 하지만 말을 아낀다. 스피븐 킹은? 


9. 벤저민 플랭클린의 명언. 세 사람이 비밀을 지킬 수도 있다. 그중에서 둘이 죽으면. 


10. 찰리와 우디(다른 세계에 사는 현명한 노인)의 대화.

"제가 여기서 본 것들이 그 이야기들과 비슷해요."

"자네가 사는 세상의 것들도 그렇겠지. 모든 게 이야기라네. 찰스 왕자."


맞다. 그리고 비슷한 제목의 책이 (내용은 모름) 생각났다.









11. 그 이상한 도시에서 건물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찰리가 고개를 돌리고 곁눈으로 보면 분명 꿈틀 움직인다. 찰리는 하울의 성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12. 스티븐 킹 자신의 소설 <다크 타워>의 구절이 인용되기도 한다. 다크 타워는 시리즈 일부의 표지와 부제 때문에 스즈메의 문단속 생각이 났는데 (내 생각에만) 실은 반지의 제왕에서 영감을 받은 서부 총잡이물 변주곡에 다른 세계로 건너 다니는 루프물이라고 한다. 

2권에선 러브크래프트 작품(크툴루의 부름 시리즈) 만큼이나 왕좌의 게임 언급도 많다. 


13. "마법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는데, 희망은 위험한 것이거든." 

동감. 얼마전 무슨 사은행사라며 복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슈레딩거의 복권으로 일주일 행복했다. 심지어 세금 걱정도 좀 되더라만.  


14. "템푸스 푸지트도 좋은 구절이긴 하지만 시간이 항상 빠르게 흐르지는 않지. 뭘 기다려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겠지만. 템푸스 에스트 움브라 인 멘테가 더 맞지 않을까? 대충 번역하자면 시간은 마음 속의 그림자라는 뜻이야." 


15. 못생기고 다리를 절고 마음이 삐뚤어진 둘째 아들이 형을 죽이고 왕국을 더렵히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을 죽인다는 설명은 세익스피어의 리처드3세와 비슷하다. 황정민이 분한 리처드3세 연극을 봤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연극으로 황정민이 서울의 봄에서 그 배역을 차지했다고 한다. 


16. 다른 세계는 한 겹이 아니고 멀티플이다. 그곳에도 그곳의 어두운 우물이 있다.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에서 처럼.


17. "막판에 정신을 차렸다고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유감스러웠다고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러면 거짓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어둠의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물을 마시면 자기만 손해다. 그 안에는 독이 들었다." 

하지만 그 독이라도 마셔야 하루 이틀이라도 버티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고요. 


18. 어린 등장인물의 평가라고는 하지만 드라큘라가 프랑켄슈타인보다 훨씬 나은 소설이라고 평한다. 후자는 개똥철학과 조잡한 문장이 한데 어우러진 재미없고 개떡 같다고. 하하 


19. "에드거 앨런 포가 악령이 사는 궁전을 주제로 쓴 시에서 끔찍한 무리들이 영원히 돌진하는데, 웃지만 미소는 결코 짓지 않는다고 했던 구절이 생각났다."라는 찰리.

While, like a rapid, ghastly river,/ Through the pale door/ A hideous throng rush out forever,/ And laugh - but smile no more. (The Haunted Palace) 


20. "복수는 잔인해야 제맛이다." 


** 정리하면서 붙여두었던 태그를 다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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