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작가,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다. 첫 십여 쪽은 어렵게 읽었는데, 그만 참지 못하고 띠지에서 이 소설의 '사건'이 어떤건지 읽고 말았다.

책의 광고 띠지 만큼 밉살스러운 물건이 없다. 가장 큰 스포일러이자 손가락 베기 십상인 안티 독서재재.

 

읽고 만 그 사건이 이제 막 벌어질텐데, 조마조마해서 손에서 놓아버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모든 등장인물들은 얼음. 읽다가 차를 흘려서 우글쭈글해진 종이... 그런데 다시 잡아서 그 사건을 헤쳐나가야 할까, 어쩔까, 고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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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5-02-1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67쪽까지 읽음. 조만간 일이 터지겠네. 자동차 접촉 사고 무섭습니다.

라로 2015-02-12 16:51   좋아요 0 | URL
그럼 거의 다 읽으신 거 아냐요????ㅋ

유부만두 2015-02-12 17:26   좋아요 0 | URL
딱 절반 읽었네요

라로 2015-02-12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체실비치에서를 읽고 이언 매큐언이 좋아졌어요. 이 책 어여 고민하지 헤쳐나가시고 글 올려주세요 ~~~ㅎㅎㅎ

유부만두 2015-02-12 17:27   좋아요 0 | URL
전 ˝이런 사랑˝으로 시작했어요
 

80/400. 치숙 (채만식)

전에도 그렇지만, 이번에 새로 읽을 때 역시 이 조카라는 인물은 전혀 낯설게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 소설이 나온 1930년대가 아니라 바로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인물 같다. 그리고 그의 치숙은 지금도 여전히 우울증과 체념에 찌들어 허름한 방에 누워 (어쩌면 인터넷에 현실 한탄의 글을 끄적이고) 있다. '내지'라는 어휘 대신 '미국'을 넣어보면 이런저런 뉴스에 보였던 사람들의 행동, 원정출산, 위장입학, 등이 연상된다. 이미 그런 치졸한 행태가 8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쌓여왔다. 그럼, 치숙이라는 소설은 뼈아픈 시대 풍자소설이 아니라 영험한 예언 소설이 되는 건가. 대를 이어 지속되는 가치를 칭송하고 힘없는 지식(인이라 자칭하는)을 비난했으니까. 갑갑하다.

 

81/400. 헤밍웨이 위조사건 (조 홀드먼)

유명작가의 사라진 원고를 위조한다는 설정은 김연수 작가의 <꾿빠이 이상>에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SF라 시공을 초월하고, 인물의 능력이 한없이 확대되기도 하고, 죽음이 더 비중있게 나온다. 헤밍웨이의 충실한(?) 독자였던 존 베어드가 헤밍웨이의 '존재'와 합일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소설의 첫 문장이 '머지않은 미래'를 향한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존 베어드가 사기꾼 캐슬과 결탁하는 과정이 너무 쉽게(혹은 허술하게) 그려지고 존의 아내의 성격도 작위적으로 오락가락한다. 소설이 이 거대한 플롯을 담기에는 너무 짧아서일까. 그래도 우주가 교차되어 새로 만나는 인물들이 달라져 있는 것은 흥미로웠다. (여기서 1Q84를 떠올린 건 흐뭇한 경험) 그덕에 이 짧은 소설의 중반부가 가장 재미있다. 하지만 클라이막스인 '그가 나고, 내가 그'인 순간과 영혼의 되감기 장면은 투박하기 이를 데 없다. SF 설정을 다 믿고 따라갈 준비가 되있던 독자를 이렇게 못 끌어당기다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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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0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10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 재직중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 사진의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의 주동자로 현진건은 검거 투옥된다. (146)

"과거를 더듬으며 한숨 쉴 일이 아니요 미래를 바라보며 팔만 벌리고 있을 것이 아니다. 손아귀에 단단히 힘을 주어 현재를 움켜쥘 것이다" 라는 그의 말대로 현진건은 리얼리즘을 자신의 작품세계로 규정했다. (146-147)

식민지 사회의 민중은 모두가 노예애 지나지 않음을 우회적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오늘 운수 좋은 누군가는 동포에게 자기의 불운을 전가시키거나 결국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유예시키고 있을 뿐임을 암시하고 있다. (147)

채민식의 대부분의 작품에는 이광수나 김동인에게서 보이는 전근대적인 `치기`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178)

[`치숙`에서] 모든 가치는 거꾸로 반전되어 있고 선악도 뒤바뀌어 있으며, 조카의 부정적 비난은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간다. 아이러니는 희극과 비극의 미묘한 경계에 서기 마련인데,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희극적으로 그려져서 더욱 눈물겨운 비극적 아이러니라면, `치숙`은 가치가 전도된 비극적 현실이 조카의 입을 통해서 희극으로 변하는 아이러니다.

이 작품의 조카와 고모부는 서로를 투영한 타자의 `거울`을 통해서 원주민의 소외를 드러내고 있는데, 프란츠 파농은 이러한 소외와 부재를 식민지 사회의 `심인성 장애`라고 썼다. (17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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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들이 주민등록증 신규 발급 신청을 했다. 오전에 사진관에 가서 사진도 찍고, 여드름 지우는 포샵도 하고, 열 손가락에 잉크 묻히고 지문도 찍었다. 아이는 심드렁하게 이 모든 과정을 하면서 엄마랑 같이 동사무소에 온 것을 귀찮아(혹은 창피해) 했지만, 그 등짝을 바라보면서 아.... 얘가 이만큼 컸구나. 싶어서 혼자 짠 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오늘 눈마저 펑펑 내리니 혼자 센치해 지면서, 큰아들을 위해서 돼지고기 목살을 샀습니다 그려. 이 블로그는 큰아들 모름. 절대 모름. 나는 아이 앞에서는 쿨하게 혼만 내는 엄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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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2-10 0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요~~~ 늘 부모 혼자 짠해요~~~^^;;;
그런데 유부만두님 저와 비슷한 시기에 아이들을 ~~~~~ 우리 혹 나이가 비슷 할까요???^^;;;;

2015-02-10 0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78/400. 요술 손가락 (로알드 달)
동물사랑과 역지사지를 가르치는 동화책이랄까... 주인공 여덟살 여자아이 ˝나˝는 분노의 손가락을 휘두르는데 그후 사태는 당사자만이 (손가락 주인이 아니라) 해결할 수 있다. 조금 잔인한 설정은 마틸다에서도 봤었기 때문에 놀랍지는 않다. 펜틴 블레이크의 그림이 정겹다.

79/400. 바냐 삼촌 (체호프)
...그래도 어쩌겠어요. 살아야지!
마흔 일곱 노총각 바냐 삼촌을 끌어안고 ˝안 예쁜˝ 조카 소냐는 울먹인다. 씁쓸한 인생을 웃프게 그린 희곡.

아스트로프: 여자가 남자와 친구가 되는 데는 딱 한 가지 순서 밖에 없거든 - 처음에는 그냥 아는 사람, 그러다가 애인, 그다음에 가서야 비로소 친구지. (바냐 삼촌, 제2막)

보이니츠키: 우리 늙은 어머니는 아직도 여성 해방에 대해서 혀 짧은 소리로 열변을 토하시지. 한쪽 눈은 무덤을 보고 있는데, 다른 한 눈은 자신의 심오한 책들 속에서 새로운 세상의 여명을 찾고 있다네. (바냐 삼촌, 제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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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2-09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희곡은 읽기 안 쉬울 것 겉은데 다 읽으셨어요??^^

유부만두 2015-02-09 07:04   좋아요 0 | URL
연극장면을 상상하면서 읽으면 재밌어요.
그런데 러시아 이름 부르는 방법이 여러가지라 계속 이게 누구더라, 하면서 읽어요;;; 전체 실린 네 편 중 이제 두 편 읽었는데 다 좋아요. 줄거리는 통속적인데 전개 방법과 대사가 세련되었어요.

유부만두 2015-02-10 07:32   좋아요 0 | URL
인형의 집이 소설이라고 여지껏 생각했어요;;; 저도 희곡 독서 경험이 없어서 아직 어색하죠.